주 예수님의 부활은 나사로의 부활과 어떻게 다른가?
그리스도
Hannah , 2009-03-13 , 조회수 (6742) , 추천 (0) , 스크랩 (0)

 

주 예수님의 부활은 나사로의 부활과 어떻게 다른가? 
 

 

 

무엇을 부활이라고 하는가? 부활은 하나님이 한 사람을 얻는 것이며, 그분이 얻기를 갈망하던 한 사람을 얻는 것이다. 우리의 주 예수님이 땅에 있을 때는 한 명의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완전한 사람은 여전히 제한이 있었다. 하나님이 창세 이래 바라던 사람은 다만 이러한 모양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바라신 것은 부활이었다. 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그분은 모든 제한을 다 초월하셨다. 어떠한 것도 그분을 제한할 수 없었다. 우리의 주님이 땅 위에 사실 때 여전히 죽으실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부활 이후에 죽음은 더 이상 그분을 만질 수 없었다. 사망은 그분에 의하여 파괴되었고 사망의 가능성도 역시 파괴되었다. 그분은 부활 후 사도 요한에게,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계 1:18)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분은 다시 죽으실 수가 없고 그 죽음의 가능성은 이미 파괴되었다.

 

이제 사람은 다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고 죽음의 가능성은 없다. 이것을 가리켜 부활이라 하는 것이다. 부활은 하나님이 영원 안에서 바라던 사람이며 이제 우리의 주님에게서 얻게 되었다! 하나님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베들레헴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부활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이 베들레헴에 강림하셨을때 하나님은 아직 이렇게 말씀하실 수 없었다.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하나님은 비로소 이렇게 말씀하셨다(행 13:33).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 예수님 같으신 분은 성정에 있어서, 품격에 있어서, 행위에 있어서 다 완전하지만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제한을 받으셨으며 부활이 더해져야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래야만 모든 제한들이 다 해결될 수 있었다. 부활은 바로 여기에 한 사람이 사람의 모든 제한을 돌파한 것이다. 하나님이 얻기를 바라셨던 그 한 사람은 주님이 부활한 그날에야 비로소 얻게 되었다.



주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 가운데 다른 사람의 부활과는 다르다. 예를 들면, 주 예수님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는데 나사로는 다만 이전에 세상에서 살던 모습 그대로였을 뿐이다. 이것은 하나의 방언을 사용하여 말한다면 나사로는 여전히 혼이다. 그는 여전히 베로 동여져 있었으며 풀어주지 않으면 다닐 수가 없었다(요 11:44). 그는 다만 육체의 생명이 회복되었을 뿐이며 ‘기사회생’ 했을 따름이었고 주 예수님과 같은 그런 부활이 아니었다. 주 예수님의 부활과 나사로의 부활은 다른 것이다. 베드로, 요한은 왜 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가 있었는가? 그것은 7일의 첫째 날, 그들이 막달라 마라아의 말을 듣고 가서 무덤으로 갔을 때 예수를 쌌던 세마포가 옆에 놓여져 있고 또 예수님의 머리를 덮었던 수건도 다른 곳에 개켜 있는 것을 보았지만 안에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게 되었다(요 20:6-8). 나사로의 머리는 여전히 수건에 싸였으며 그의 몸은 베로 동여져 있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그를 제한할 아무것도 없었다. 주님도 부활하기 전에는 육신의 제한을 받았고 또한 물질의 제한을 받았지만 그분이 부활하신 이후에는 제한을 받지 않았으며 심지어 죽음의 제한도 다 뚫고 나오시고 모든 제한은 더 이상 그분을 제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어떤 형제는 “부활 이후의 주님은 그분이 오셔야 볼 수 있고 가시면 볼 수 없는 분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그분이 오시거나 가셔야 했지만 지금은 오실 필요도 가실 필요도 없다. 사람이 계시를 얻으면 볼 것이요 계시를 얻지 못하면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에게 계시가 있으면 만질 수 있지만 계시가 없다면 만질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 보지 못하고의 문제이지 주님이 오시거나 가시는 문제가 아니다. 오고 가고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데 이는 제한이 없어졌기 때문이며 우리의 주님이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도마의 마음에 의혹이 생겨서 그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고 또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4-29)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은 손으로 만지는 문제가 아니다. 믿음으로 만지는 사람이 만질 수 있다. 주님은 오늘날 부활의 주님이시며 이전의 제한을 받으시던 상황은 이미 지나갔다. 한분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는 믿음으로 만져야 한다. 우리의 믿음이 충분하다면 주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주님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주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공간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시간도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받는 가장 큰 제한은 바로 공간과 시간이지만 오늘날 이러한 것들은 다 우리의 주님을 저지할 수 없다. 오늘날의 문제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언제든지 우리가 믿음을 사용하여 주님을 본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보여질 것이다.



주님이 나사로를 부활하게 하신 일은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마르다는 주님을 보자마자 말하기를,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했다. 주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마르다가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그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유대인이었으며 유대인들은 마지막의 부활을 믿고 있었다. 그러자 주님은 또 그녀에게 “내가 곧 부활이요 내가 곧 생명이다”(요 11:25, 원문 참조)라고 말씀하셨다. 마르다의 생각 속에서는 부활과 마지막 날을 같이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이 여기 계시면 마지막 날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 주신다. 왜냐하면 주님이 부활이며 주님이 여기 계시면 시간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다. 부활은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고 공간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어떤 제한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주님은 부활하셨다. 제자들이 문을 닫고서 집회를 할 때 주님은 그들 가운데 오셨고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그분은 문을 여실 필요가 없이 들어오실 수 있었다(요 20:19, 26). 그분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며 그들이 그분을 알았을 때 그분은 홀연히 사라지셨다(눅 24:31). 이것이 바로 부활의 기묘함이다.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셨으며 공간을 초월하셨다. 그분은 일 초 만에 여기서 땅의 끝까지 이르실 수 있으시다. 그분은 무엇을 이루시기 위하여 3년, 5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으시며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8년, 10년을 기도할 필요가 없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 계시는 데 바로 이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30여년 동안 땅 위에서, 사람으로 말한다면 그분의 지혜와 신장은 다같이 성장했다(눅 2:52). 그러나 그분의 부활 이후에 그분은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을 나타내셨으며 이 능력은 이미 가장 큰 제한을 돌파하셨는데, 바로 사망이다. 그분의 생명은 시간, 공간을 초월하셨고 그분의 생명은 사망을 돌파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다. 사람은 사망의 제한을 받지만, 우리의 주님은 이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다.



우리는 다 사망이 하나의 큰 제한이며 아주 큰 제한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생물은 죽음에 이르면 끝난다. 한 포기의 풀도 마찬가지이며 한 그루의 나무도 그러하다. 그들의 가장 큰 제한은 바로 그들의 죽음이다. 한 마리의 개, 고양이가 우리와 함께 삼 년, 오 년 살았다면 아주 총명하며 또한 아주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하여 살 수 없으며 그들의 생명은 제한이 있는데 한 번 죽으면 끝나는 것이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치 그 어리석은 부자가 얼마든지 궁리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고 하셨다. 죽음이 일단 그에게 임하면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몸이 있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으며, 많은 용도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용도는 죽음에 이르면 정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몸은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우리 주님에 의해 돌파됨으로 지나갔다. 사망은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다―붙잡는 것은 하나의 제한이다. 부활은 가장 큰 제한을 완전히 돌파했다. 어떠한 문, 성, 큰 산도 부활을 가로막을 수 없으며 또한 어제, 오늘, 내일의 문제도 역시 더 이상 그분을 가로막을 수 없다. 그분은 살았을 뿐 아니라 다시 죽지 않으신다. 그분은 죽음이 없으실 뿐 아니라 죽음의 가능성도 없으시다. 그분은 그 살아 있고 죽은 적이 있으며 지금은 또한 살았고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다(계 1:18). 그분의 몸에서 모든 제한은 지나갔다.



부활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에베소서 1장 20절에서 21절은,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우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 나게 하시고”라고 말한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곧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시고 모든 것들보다 뛰어나게 되셨다. 어떠한 것을 막론하고 모든 말할 수 있는 이름 위에 뛰어나게 되셨다. 이 세상뿐 아니라 심지어 오는 세상에의 모든 것보다도 뛰어나게 되셨다. 창세 이래 하나님께서는 얻기를 바라셨던 사람을 얻지 못하셨지만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은 얻게 되셨다. 하나님이 얻기를 바라셨던 사람은 한 명의 피조된 사람이 그분과 같아지는 것이었다. 만약 피조된 사람 중에 그분과 같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하나님이 얻기를 바랐던 사람은 아직 얻지 못하신 것이다. 오직 스스로 영원히 계신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초월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영원하고 스스로 있지 않지만 그로 모든 것을 초월하게 하신다. 피조된 사람 중에 모든 것을 초월하는 자가 있어야만이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아버지에 의해 그분의 우편으로 영접되어진 후에 죽음의 제한이 소멸되었으며 모든 제한이 다 소멸되고서 하나님은 얻기를 바라셨던 그 사람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반드시 주 예수님이 출생하신 것이 하나의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분이 이 땅에 30여 년 동안 사신 것은 대표였으며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도 역시 대표이셨다. 그분이 삼십여 년간 대표하신 것은 사람의 도덕의 표준이 마땅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의 도덕에 대한 요구가 어떠해야 함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이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 표명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능력의 어떠함이다. 한 면으로 주 예수님이 대표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표준의 사람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도덕, 행위와 영적인 상황이 바로 이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이 만일 우리를 대신하여 죽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속량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우리를 정죄하실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킨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얻고 하나님의 영광을 만족시킨 사람으로서의 표준이셨다.

 

 

우리와 그분을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며 다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 안에서 나타나셨을 때 그분의 도덕상의 표준은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 면으로 우리가 또 보아야 하는 것은 주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는 더욱 하나님의 원하시는 표준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신 것이, 베들레헴에서의 탄생을 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활을 가리켜 말한 것임을 보았다. 또한 바로 그날에 주 예수님이 막달라의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또한 부활로부터 시작됨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도덕적인 사람이 필요하실 뿐 아니라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시다. 사람에게 있었던 모든 도덕적인 표준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으며 또한 지극히 큰 능력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다. 주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셨을 때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힘이 없었다. 이것이 도덕적인 표준의 사람이다. 주 예수님의 부활 이후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고 말씀하신 때부터 시작하여 주 예수님은 또 다른 한 방면을 표현한 사람이었다―능력있는 사람. 그날이 되자 더 이상 시간의 문제가 없었으며 공간의 문제가 없었으며 아무런 문제가 없어졌고 다만 사람이 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었다. 부활은 너무나 깊은 일이어서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여기서 다만 아주 조금만을 만질 수 있을 뿐이다.
(워치만 니 전집 1집 19권, 제 11 장, 부활의 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