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고?
왕국
Hannah , 2009-03-13 , 조회수 (6856) , 추천 (0) , 스크랩 (0)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고?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 왕(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raca)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모레, moreh)라 하는 자는 지옥 불(게헤나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옛 경륜의 율법은 살인 행위를 다루지만 왕국의 새 율법은 노함, 즉 살인의 동기를 다룬다. 그러므로 왕국의 새 율법의 요구는 옛 경륜의 율법의 요구보다 더 깊다. 22절에 있는 「형제」라는 단어는 여기에 있는 왕의 말이 믿는 이들에게 한 것임을 입증한다.


우리가 행하기 가장 어려운 것은 우리의 화를 통제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매우 점잖은 것 같지만 성질을 낼 때 그들의 화는 야생마와 같다. 우리가 화를 낼 때 아무도 우리를 제어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나의 화에 대한 문제 때문에 이 장을 통과할 수 없었다.


또한 우리가 다른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거나 정죄하지 않기란 매우 어렵다. 22절에서 주님은 우리의 형제에게 「라가」 또는 「모레」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라가라는 단어는 멍청이 또는 아무 쓸모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경멸적인 표현이다. 모레는 바보, 즉 반역자를 가리켜(민 20:10) 정죄하는 것에 대한 히브리어 표현이다. 이 표현은 경멸적인 표현인 「라가」보다 더 심한 것이다. 형제를 정죄하지 않거나 업신여기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아마 당신은 심지어 일주일 동안이라도 어떤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거나 정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거의 매일 업신여기거나 정죄하는 것 같다. 남편들과 아내들은 서로 업신여기고 정죄한다. 나는 예외가 없다고 믿는다. 모든 아내는 자기 남편을 업신여기고 정죄하며, 모든 남편은 자기 아내에게 그렇게 한다. 이것은 정말 문제이다. 당신은 이것을 읽고서도 여전히 당신이 이기는 자요 왕국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실망하지 말라. 오히려 용기를 가지라. 우리에게 이기는 생명이 있음을 기억하라. 당신은 당신 안에 왕을 갖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왕국 백성들이요, 우리 안에는 왕이 있다. 이 왕이야말로 왕이요 이기는 생명이다. 당신 자신을 보지 말라.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완전히 실망할 것이다. 당신 자신을 잊어버리고 당신 안에 있는 왕의 생명을 보라. 우리로 왕국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이다. 당신의 천연적인 생명은 잊어버리고 이 왕의 생명을 따르라.


22절에는 세 종류의 심판이 있다. 첫째는 성문에서 하는 심판, 즉 구역에서 하는 심판이다. 둘째는 공회에 의한 심판, 즉 더 높은 심판이다. 공회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율법사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종교회의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대법원이다(눅 22:66, 행 4:5-6, 15, 5:27, 34, 41). 셋째는 게헤나 불로 하는 하나님의 심판, 즉 가장 높은 심판이다. 새 왕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배경에 관한 상징들을 사용함으로써 이 세 종류의 심판을 언급했다. 그러나 신약의 믿는이들인 왕국 백성에 대해 이 심판들은 고린도후서 5장 10절, 로마서 14장 10절, 12절, 고린도전서 4장 4절부터 5절, 3장 13절부터 15절, 마태복음 16장 27절, 계시록 22장 12절과 히브리서 10장 27절, 30절에 계시된 대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하는 주님의 심판을 가리킨다. 이것은 신약의 믿는이들이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사함을 받았지만, 그들이 여기에서 주어진 왕국의 새 율법을 어기고 여전히 범죄한다면 멸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징계를 위해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됨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가 왕국의 새 율법을 어겨 범죄할 때 우리 죄들을 회개하고 자백한다면 우리는 주 예수의 피로 사함을 받고 깨끗케 될 것이다(요일 1:7, 9).


22절에서 새 왕은 게헤나의 불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게헤나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게힌놈, 즉 힌놈 골짜기와 동등한 헬라어이다. 그것은 그 성의 쓰레기장으로 사용되는 깊고 좁은 골짜기로서 그곳에 범죄자들의 시체와 온갖 더러운 것들이 버려졌다. 그것은 또한 도벳으로도 불리웠다(왕하 23:10, 사 30:33, 렘 9:13). 그곳에는 계속 타는 불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한 형벌이 있는 곳, 즉 불 못(계 20:15)의 상징이 되었다. 이 단어는 또한 마태복음 5장 29절, 30절, 10장 28절, 18장 9절, 23장 15절, 33절, 마가복음 9장 43절, 45절, 47절, 누가복음 12장 5절, 야고보서 3장 6절에서 사용된다.(마태복음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17)

마태복음 5장 21-26절 : 이 부분은 우리의 형제와 화목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 21절은 17절과 일치하며 22절은 19절과 일치한다. 이 모두는 위에 설명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22절의 심판은 21절의 심판과 동일하다. 비록 22절의 심판이 유대 공회의 심판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을 예비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에 예비 심판이 성문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산헤드린의 심판은 한 단계 더 높은 것이었다. 그다음 단계는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이다. 비록 이 부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그 당시에 주님 앞에 서 있었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주님은 유대의 배경을 그분의 말씀하심 안에서 사용하셨다.


‘분냄’은 내적인 것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주님이 분내셨다고 말한다(막 3:5). 성경은 모든 분냄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어떤 분냄은 하나님과 형제들을 거스른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 26절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말한다. 이것은 죄를 지을 정도로 분을 내거나 죄에 조정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 분은 시간의 제한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분을 통제해야 한다. 어째서 형제에게 분을 내는 것이 그를 죽이는 것과 동등한 것인가? 그것은 많은 때 우리로 살인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다만 우리의 지위나 우리의 육신적인 몸이나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의 도덕적인 교육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살인하고자 하는 내적인 갈망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심판이 언급되었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심판받으리라는 것이 사실임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심판받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을 믿어서는 안 된다. ‘형제’가 여기에서 언급되었고 여기에서의 요구는 높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장로교인들과 성공회 사람들과 형제회 사람들은 모두가 칼빈주의를 따르는데 그것은 구원이 예정된 것이므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멸망받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감리교인들과 몇몇 오순절주의자들은 알미니아니즘(Arminianism)을 추종하는데 그것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가 있고 그리스도인들도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타락되어져서 멸망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높이는 점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러나 알미니아니즘 역시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 그러므로 내 견해로는 우리는 몇몇 성경 구절에 근거를 둔 어떤 가르침을 다른 많은 성경 구절에 근거를 둔 가르침으로써 뒤집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구절들을 함께 모아서 성경으로 하여금 이 문제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


주님은 영생과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것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영원과 관련된 것들이다. 세상의 창조 이전과 계시록 이후는 모두가 영원이다. 단지 그 사이에 있는 일시적인 부분이 시간이라고 불려지는데 그것은 세상의 창조로부터 계시록까지이다. 이 기간 동안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징벌를 받을 것이며(고후 5:10)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처벌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징벌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누가복음 12장 47절부터48절은 매를 맞는 문제를 언급한다. 이것은 심판대 앞에서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상을 잃을 뿐만 아니라 매를 맞게 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고린도전서 3장 15절은 또한 어떤 이들이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언급한다. 어떤 이들은, 비록 여기서 해를 받는 것을 말하지만 사람이 해를 느끼지 않는 한 그것은 해로서 간주될 수 없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15장 6절은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한때 거했었다는 것을 가리키며, 그리고 계속해서 말하기를 “불에 던지워”라고 하는데 그것은 거기에 분명히 징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계시록 2장 11절은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기지 못한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계시록 20장 6절에 따르면 이기는 자들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천년왕국의 때에 불을 통과하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28절은 “그들이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죄를 짓고도 회개치 않은 믿는 이들이 불신자들이 고통당하는 그러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정식 죄수들이 도착될 때에는 석방될 것이다. 천주교의 연옥은 어떤 사람이 죽으면 시작된다. 더욱이 그들은 소위 혼을 고통에서 구원한다는 가르침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단을 그리스도인들이 징벌받을 것이라는 문제를 대항하기 위하여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지 심판대에서 징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만을 사용해야 한다. 이방인들안에 있는 죄가 죄일 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의 죄 또한 죄이다.


고벳(Mr. Govett)은 ‘라가’를 ‘쓸모없음’이라고 번역했으며 다른 이들은 ‘어리석음’ 혹은 ‘아무 소용없음’이라고도 번역했다. 어떤 사람들은 ‘모레(Moreh)’ 라는 말이 고대 시리아 말로서 합당한 번역은 ‘배역’이라고 한다. 내용에 따르면 형제를 ‘라가’라고 부르는 것이 형제에게 분을 내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화를 내는 것은 다만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을 ‘라가’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의 입을 사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의 형제를 ‘모레’라고 부른 사람에 대한 징벌은 게헨나 불에 던져지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모레’라는 말의 의미가 ‘라가’라는 말의 의미보다 더 강한 것임을 알 수있다. 라가는 ‘어리석음’을 의미하는 반면 모레는 펨버(Mr. Pember)가 말한 것처럼 ‘배역’을 의미한다. ‘게헨나 불’이 여기에서 언급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만일 이것이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 것이라면 그들이 단지 어떤 사람에게 어리석다고 한마디 욕을 했다고 해서 지옥에 가겠는가? (워치만니 마태복음 연구, 제 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