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에 대한 잘못된 이해
왕국
Hannah , 2009-03-13 , 조회수 (4208) , 추천 (0) , 스크랩 (0)

 

'천당’에 대한 잘못된 이해 

 

 

누가복음 23장 42절에서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는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죽으신 날, 그 강도가 주님과 함께 낙원에 간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렇다면 그 낙원은 천당인가 아닌가? 어떤 사람은 그 낙원이 음부가 아니라 ‘천당’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죽으신 날 그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천당’에 갔다고 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12장 40절은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땅속’은 헬라어로 ‘지구의 중심’이다. 주님은 죽으시고 사흘 밤낮을 땅속에 계셨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을 때, 그분의 영혼은 몸을 떠나 ‘천당’에 간 것이 아니라 땅속에 사흘 밤낮을 계셨다.


사도행전 2장 31절은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 12장을 읽고 주님께서 땅속에 계신다는 말은 그분의 몸이 땅속에 매장된 것을 말하는 것이며, 영혼이 음부에 가신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하면서 그분의 영혼이 음부에 버려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죽으신 후에 그분의 영혼이 음부에 가셨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주 예수님은 그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말하는 낙원은 음부의 일부분이다. 창세기에서 사도행전까지 역대로 구원받은 이들이 죽은 후에 영혼이 안식하는 곳인 음부의 낙원에 간다고 말한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은 ‘천당’에 간다는 말이 아님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은 ‘천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분명 ‘천당’에 계시므로 바울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은 틀림없이 ‘천당’으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들은 바울이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한 것을 볼 때, ‘천당’보다 더 좋은 것은 없기 때문에 틀림없이 ‘천당’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천당’에 가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마태복음 28장 20절은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바울의 사상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오늘 ‘천당’에 있는 것인가?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천당’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만 묘사하는 말일 뿐, 죽은 후에 ‘천당’에 간다는 뜻이 아니다. 주님의 임재는 언제 어디에나 있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함’은 ‘천당’에 올라감이 아님

고린도후서 5장 8절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함을 의미한다. 6절은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몸에 거할 때는 주님과 따로 거하고, 몸을 떠나면 주님과 함께 거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천당에 올라감을 의미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추론이지 성경적인 사상은 아니다. 고린도후서 5장과 빌립보서 1장에서 말하는 것을 정확하게 해석하면, 우리가 육체로 살 때 우리는 물질적인 세계에서 살지만,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셔서 영적인 세계에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세계에 있고, 주님은 영적인 세계에 계시기 때문에 물질적인 간격이 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의 몸과 영과 혼이 나누어져서 영과 혼은 물질적인 세계에서 나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간다.


그것은 우리가 죽은 후에 주님과 더욱 가까워짐을 의미한다. 우리는 물질적인 세계에 있지 않고 주님과 같은 세계, 즉 영적인 세계에 있게 된다. 주님과 같은 세계에 있다면 당연히 주님과 더욱 가깝게 있으며 주님과 한 곳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 안에는 단지 삼층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곳이 있으며,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2년 전 많은 성도들이 타이베이에 가서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형제님께서 그곳에 계셨기 때문에 훈련생들이 이 형제님과 함께 타이베이에 있다”라고 했다. 행정 구역으로 말하면 그들은 이 형제와 함께 타이베이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사는 곳에 있었고, 이 형제는 형제가 사는 곳에서 살았다. 비록 그들이 모두 타이베이에 있었지만 이 형제와 한 집에 산 것은 아니다. 이 형제는 이 형제의 집에 살았고 그들은 ‘동역자의 집’에 살았다. 비록 그들 모두는 타이베이라는 같은 행정 구역 안에 살았지만 동일한 장소에서 살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죽으면 몸은 물질적인 세계를 떠나고, 그들은 주님이 계시는 영적인 세계로 가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 그러나 주님이 계시는 영적인 세계는 삼층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음부의 낙원이라는 곳도 있다. 이것은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은 결코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증명한다.

삼층천과 낙원은 서로 다른 곳임

어떤 사람은 고린도후서 12장이 어떤 의미인가를 묻는다. 바울은 12장 1절부터 4절까지에서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여기서 삼층천과 낙원을 말하는데, 그 낙원이 삼층천이 아니냐고 묻는다. 중국어 성경에서 볼 때, 이 구절은 낙원이 곧 삼층천이고, 삼층천이 곧 낙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영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 번역에서 이 구절은 두 가지 난해한 점이 있다. 첫째는 3절의 시작인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앞에 접속사 ‘또한’이 빠진 것이다. ‘또한’이 들어가면 앞에서 삼층천에 이끌려 간 것이 한 가지 일이며, 후에 낙원으로 이끌려 간 것이 또 한 가지 일임이 증명된다.


간단히 말해서 그 사람은 삼층천에 이끌려졌으며, 또한 낙원으로 이끌려졌다. 낙원과 삼층천은 서로 다른 곳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낙원이 삼층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오히려 음부의 낙원과 하늘의 삼층천은 서로 다른 두 곳임을 증명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장 큰 계시를 주셔서 각양각색의 비밀을 알게 하셨다고 한다. 그는 땅에 사는 사람이지만 땅의 일을 거의 모두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삼층천에 이끌어 삼층천을 보게 하셨다. 그러나 우주 가운데는 하늘과 땅이 있을 뿐 아니라, 땅 아래의 음부가 있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고 한다(9-11).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울을 이끌고 땅 아래의 낙원에 가셨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의 계시는 완전하다. 그는 땅에 사는 사람이었지만 하늘의 삼층천에 가보았고 땅 아래의 낙원에 가보았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을 바울은 모두 보았다.

‘온전케 된 의인의 영혼’은 천당에 올라가지 않음

어떤 사람은 또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히 12:18)의 말씀을 찾아서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산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은 시내 산임을 안다. 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시내 산이 율법을 대표하는 유대교임을 인정한다. 주님을 믿은 히브리인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시내 산 아래인 구약의 유대교 안에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주님을 믿고 구약에서 나와 유대교를 떠났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이 시내 산이 아닌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22절)으로 왔다고 말한다.


시온 산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거처, 즉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중심이다. 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시내 산은 율법과 유대교를 대표하며, 여기에서 말하는 시온 산은 영적인 의미로서 신약과 은혜를 대표함을 인정한다. 믿음을 가진 모든 유대인들은 신약의 은혜 안에 있다. 시온 산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히브리서 12장 22절 하반절부터 24절까지는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총회’는 곧 교회이다. 원문에서는 22절부터 24절까지에서 여덟 가지 항목이 일곱 번의 접속사 ‘-와’로 연결된다. 시온 산이 한 가지 항목이다. 시온 산 뒤에 ‘와’라는 말이 나오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 언급되는데, 그것이 둘째 항목이다. 천만 천사가 셋째 항목이고,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 즉 교회가 넷째 항목이다. 그러나 교회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는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며, 교회가 하늘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다섯째 항목이다.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이 여섯째 항목이며,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일곱째 항목이다. 그리고 뿌린 피가 여덟째 항목이다.


첫째로 시온 산이 있고, 둘째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 있으며, 셋째로 천사가 있고, 넷째로 장자들의 모임이 있으며, 다섯째로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있고, 여섯 번째에 온전케 된 의인의 영이 있으며, 일곱째로 새 언약의 중보자가 있고, 여덟째에 뿌린 피가 있다. 이 여덟 가지 항목 안에 접속사 ‘-와’가 일곱 번 나온다. 그중에 구약의 구원받은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이 있다. 어떤 사람은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은 시온 산, 즉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교회가 여덟 가지 항목 중에 열거되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볼 때 이것은 옳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틀린 것이다. 만약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이 하늘에 올라가 ‘천당’에 갔다면, 교회도 ‘천당’에 올라갔다는 말인가?


히브리서는 주님을 믿은 모든 히브리인들이 원래 구약의 율법 아래 있었는데, 지금은 신약의 은혜 아래 있음을 보여 준다. 은혜 안에 여덟 가지 항목이 있지만 여덟 가지 항목이 하늘에 있다는 말은 아니다. 바울은 은혜 안에 시온 산이 있고, 하늘의 예루살렘이 있으며, 천만 천사가 있으며, 교회가 있음을 열거했다. 우리는 교회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며 하늘에 올라간 것이 아님을 안다. 바울이 히브리서를 쓸 때, 교회는 하늘에 올라가 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의 뿌린 피는 물질적인 면으로는 하늘에 오르지 않았지만, 그 효능은 하늘에 닿았다. 결국 의미상으로 여덟 가지 항목이 모두 하늘에 속했지만 물질적으로는 하늘에 있지 않다. 따라서 어떻게 구약의 구원받은 사람의 영이 하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스데반의 영혼은 땅 아래의 낙원에 있음

사도행전 7장 마지막에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주 예수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59절, 원문 참조)라고 외쳤다. 어떤 사람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스데반의 영을 받으셨기 때문에 스데반의 영은 틀림없이 ‘천당’에 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또 하나의 추론이지 진리가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고 그가 그것을 받았다고 하자. 그는 그것을 반드시 자신의 옆에 두지 않을 수 있으며, 더욱이 자신의 방에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는 그 물건을 다른 곳에 둘 수도 있다. 주님께서 스데반의 영을 받으셨으나 우리는 반드시 주님께서 스데반의 영을 그분이 계시는 삼층천에 받아 두셨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전도서 3장 21절은 “인생들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중국어 화합본)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이 구원받은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땅 아래로 내려간다는 말이 아니냐고 주장한다. 여기에도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과 혼은 히브리어로는 ‘영’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호흡’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즉 사람의 호흡과 짐승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다. 전도서에서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는데, 이 점에서 사람과 짐승은 별 차이가 없다. 이것이 전도서가 의미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21절은 “누가 사람의 호흡에 대해서 아는가?”라고 말한다. 여기에 물음표가 있어야 한다. “위로 가는 줄을 누가 알랴?” 여기에 또 하나의 물음표가 있다. 또한 “짐승의 혼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가?”라고 다시 물음표가 있다. 여기서는 사람의 영은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내려간다고 단정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사람의 영이 올라가는지, 어떻게 되는지 누가 알겠는가? 모든 것이 공허하니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다시 전도서 12장 7절의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흙이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몸이 죽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은 그것을 주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돌아가기 때문에 ‘천당’에 간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추론이다.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주 예수님은 믿는 이의 영과 혼을 받으시지만, 그것을 ‘천당’에 둔다고 확언할 수 없다. 내가 당신에게 돈을 빌렸다가 돌려주면 당신은 그것을 받아서 호주머니에만 두지 않을 것이다. 은행에 저금해 둘 수도 있다. 전도서에서 몸은 땅에서 나왔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영과 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죽을 때 물질적인 세계에 남아있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에 속한 세계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가기는 하지만, 그분께서 어떻게 안배하시고 어떻게 두시는지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상은 구약의 성경 구절의 인용이다. 우리는 구약의 인물들을 예로 들어 죽은 믿는 이의 영과 혼이 음부에 가는 것을 설명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은 후에 그들의 영과 혼이 하나님께 돌아갔다. 그러나 창세기는 그들의 영과 혼이 음부에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 준다.

부활하여 영광의 몸을 입음

사람의 영과 혼은 사람의 본체이며 사람의 몸은 옷과 같다. 고린도후서 5장은 사람의 영과 혼은 몸을 입고 있어, 몸이 없으면 벗은 몸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오늘 어떤 사람이 옷을 입지 않고 우리에게 달려오면 우리는 감히 담대하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그가 정신병에 걸렸거나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바울을 좋아하지만 바울의 영과 혼이 이곳에 오면 감히 그와 악수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우리는 다 놀라서 도망갈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믿는 이가 죽으면 영과 혼과 몸은 나누어지며 죽음이 있다. 이 죽음은 죄보다 더욱 더럽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어떤 사망의 상태도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없다. 죽은 사람들은 부활하기를 기다렸다가 영과 혼이 몸을 입고 의복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


구약은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단정하게 옷을 입어야 하며 벗은 몸이나 사망의 상태로는 섬길 수 없다고 말한다(출 28:40-43). 무릇 구원받고 죽은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갈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영과 혼을 음부의 낙원에 두시고 안식하며 기다리게 하신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부활을 기다린다. 일단 부활하면 그들의 영과 혼은 몸을 입게 되며, 사망을 삼키고, 그들의 벗은 몸의 상태는 없어지게 된다. 그때 우리는 반듯하게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거처, 즉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성숙하는 길, 제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