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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7장 15절에서 우리는 사라의 이름도 바뀐 것을 본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라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사래는 「나의 왕녀」라는 뜻이고 사라는 「왕녀」라는 뜻이다. 왕녀 앞에 있는 「나의」는 좁음을 나타내고 왕녀는 넓음을 나타낸다. 사래는 열국의 어미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녀의 이름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이름인 사라로 바뀌었다. 창세기 17장 16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더해질 때 우리는 길어지고 넓어진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더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불완전할 뿐 아니라 좁아진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 안에 더해지지 않는다면 당신이 형제 자매이더라도 좁은 형제 자매가 된다. 만일 당신이 안에 하나님이 더해지지 않은 남편이라면 좁은 남편이다. 만일 당신이 안에 하나님이 더해지지 않은 아내라면 당신은 좁은 아내이다. 무엇이 우리를 넓힐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 자신뿐이다. 만일 당신이 넓은 관점과 생각, 넓은 마음, 넓은 영을 가진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당신에게는 당신을 넓히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우리가 누구이든지 우리 안에 하나님이 더해지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내 관심」, 「내 유익」, 「내 장래」, 「내 생명 성장」, 「내 주님 추구」, 「교회 집회에서의 내 기능」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넓히시지 않으면 우리는 남을 관심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왕녀」라는 나의 이름은 「왕녀」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은 나의 날 , 이것은 나의 집, 나의 시간, 나의 이것, 나의 저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이 우리 안에 더해지면 우리는 즉시 넓어진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더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많은 무리의 아비가 될 뿐 아니라 열국의 왕녀들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좁은 인격을 넓히기 위해 우리 안에 더해지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나의 왕녀」에서 「왕녀」로 바뀔 필요가 있다. 즉 영성의 좁은 관념에서 넓고 일반적인 영성으로, 곧 더 이상 「나의」 왕녀가 아니라 남을 관심하며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씨를 산출하는 「열국의 어미」가 되는 영성으로 변화될 필요가 있다. 이것 또한 우리가 씨를 산출하고 다른 사람들을 관심하고 많은 무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새 사람 안으로 변화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옛 사람과 천연적인 사람이 끝남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많은 무리의 아비」와 「열국의 어미」가 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확장된 사람과 확장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필요가 있으며 넓고 일반적인 사람으로 변화될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사라의 이름도 바뀌었다.「나의 왕녀」라는 의미의 사래라는 이름은 「왕녀」라는 의미의 사라로 바뀌어야 했다. 「나의 왕녀」는 「왕녀」, 곧 「열국의 어미」로 바뀌어야 했다. 당신이 열국의 어미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돌볼 수 있도록 당신의 특별한 성품이 일반적인 성품으로 바뀌어야 한다.
모든 형제들은 높여진 아비가 되기를 좋아하는 반면에 모든 자매들은 「나의 왕녀」가 되기를 좋아한다. 우리의 이름이 사래일 때는, 『나의 남편, 나의 집, 나의 날, 나의 자녀, 나의 지위, 집회에서 나의 기능, 나의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자매들은 「나의 왕녀」라고 말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나의」가 없이 다만 「왕녀」가 되기를 원하며 특별하지 않고 일반적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높여지면 안 되고 확장되어야 하며, 특별해서는 안 되고 일반적이어야 한다. 특별함은 항상 높임과 함께 나아간다. 그들은 좋은 짝이다.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 중 아무도 높임이나 특별함을 위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확장되고 일반적이어야 하며 「열국의 아비」나 「열국의 어미」가 되어야 한다(창 17:5, 16).
교회 생활은 이름이 바뀜에 많이 좌우된다. 많은 형제들이 높아지기를 계속 주장하고 자매들이 특별해지기를 계속 좋아한다면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오직 주일 오전 예배가 있고 일 주일에 한 번 만나서 서로 인사하고 다음 일요일까지 분리된 개인의 길을 가는 생활이 있을 것이다. 교회 생활이 있으려면 건축되고 함께 짜여진 많은 무리, 곧 공동 생활을 참으로 알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형제들이 더 이상 높여지기를 원치 않고 자매들이 더 이상 특별하기를 원치 않고 일반적이기를 원할 때 우리는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며 합당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무리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날마다 함께 살고 항상 교회 생활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거의 매 시간이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만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높여지기를 원치 않고 확장되기를 원하며 아무도 특별하기를 원치 않고 일반적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만 교리가 아니다. 이름의 바뀜은 단어의 바뀜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우리 인격의 바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메시지의 제목을,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신성한 분 자신을 계시하시고 사람의 인격을 바꾸심」으로 바꿀 수 있다. 신성한 하나님 자신이 계시되더라도 우리가 그대로라면 그분의 계시되심은 우리에게 유익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계시되심은 우리의 바뀜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름이 바뀔 뿐 아니라 인격이 바뀔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계시되신 하나님을 누리고 그분의 풍성한 젖통 안에서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인격의 바뀜을 의미하는 이름의 바뀜은 또한 야곱과 베드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바뀌어야 했다(창 32:27-28). 발뒤꿈치를 잡는 자, 또는 탈취자(야곱)가 하나님의 왕자(이스라엘)로 바뀌었다. 만일 야곱이 탈취자로 남아 있었다면 신성한 목적을 성취함에 있어서 결코 하나님께 사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왕자로 바뀌어야 했다. 교회 건축을 위해서 시몬 베드로는 돌을 의미하는 게바로 바뀌었다(요 1:42). 베드로의 천연적인 존재는 흙덩이였으나 신성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건축에 사용되는 돌로, 보석으로까지 변화되어야 했다(벧전 2:5).(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47,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