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보라가 모세를 피남편이라 지칭한 뜻은?
믿는이들
Hannah , 2009-03-13 , 조회수 (21183) , 추천 (0) , 스크랩 (0)

십보라가 모세를 피남편이라 지칭한 뜻은?
 

십보라의 잘라 냄

A. 모세 가족들의 할례를 온전케 하려고

이제 우리는 모세와 십보라에 관한 기록에 이르렀다(출 4:24-26). 24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23절에 즈음해서는 모세의 부르심이 온전한 것 같았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의 아내와 두 아들들을 데리고 미디안 땅에서 애굽을 향해 그의 여정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숙소에 머무를 즈음 주님은 모세를 만나 그를 죽이려 하셨다. 모세는 분명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십보라는 두려웠을 것이다. 십보라는 모세에게, 왜 당신을 불러 보내신 하나님이 당신을 죽이려 하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녀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의아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모세가 즉시 문제를 감지했으리라 믿는다. 그의 작은 아들이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다. 이방 여인인 십보라는 모세가 그의 첫 번째 아들을 할례받게 했을 때 불쾌했을지도 모르며,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둘째 아들의 할례를 반대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모세의 약함과 소홀함에 십보라의 반대가 더하여 주님의 요구는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모세를 죽이려 하셨던 것이다. 이방 여인인 십보라는 이 요구를 시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B. 날카로운 돌로

25절은 이렇게 말한다. 『십보라가 날카로운 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로다 하니』. 아들의 양피를 벨 때에 십보라는 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색다른 절단 도구인 날카로운 돌, 부싯돌을 사용했다. 아마도 그녀는 위급한 상황하에서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 그러한 도구를 사용했던 것 같다. 날카로운 돌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또한 할례가 불쾌한 분위기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십보라가 모세의 발 앞에 양피를 던지면서 이렇게 말한 사실도 이를 가리킨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라』. 비록 분위기가 불쾌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할례가 온전케 된 후에야 모세를 가게 하셨다. 즐거운 분위기였다면 틀림없이 십보라는 그녀의 회개를 표했을 것이며, 모세와 교통을 가졌을 것이다. 그녀는 모세에게 청하여 합당하게 자르기 위한 합당한 칼로 할례를 행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자를 때 큰 고통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의 체험에서 볼 때 합당한 칼을 사용하여 자르는 일을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다. 여기에서의 자르는 일은 여성의 생명에 의해 묘사되었다. 이는 자르는 일이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나이가 많든 적든, 형제들이든 자매들이든 자르는 일을 하는 자들이다.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자르거나 잘려지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서 이러한 자르는 일은 가공되지 않은, 미개한 도구들로 이루어진다.



C. 모세를 피남편으로 만듦

수 년 전에 나는 이 부분의 말씀 때문에 고심을 했었다. 어느 정도의 체험을 한 후에야 나는 이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체험을 통하여나는 부르심 받은 자들에게는 남성의 도움, 즉 아론의 도움 뿐 아니라 여성의 도움, 즉 십보라의 도움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마다 남성의 도움과 여성의 도움, 즉 조화와 자름이 다 필요하다.


결혼한 모든 형제들은 아내들이 자르는 일에는 숙련공이라는 것을 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아내들조차도 남편들에게 「이방인들」이 될 때가 가끔 있다. 남편이 주님을 사랑치 않거나 주님과 함께 하려는 갈망이 없다면 아내는 「이방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길을 가려고 하며 주님을 살려고 하자마자 아내는 「이방인」이나 「이교도」로 부각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지 수 년이 지난 아내가 갑자기 하나님께 분별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같이 처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그들의 일상 생활에서 이교도들이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주님께 분별되지 않으며, 주님의 길을 취하지 않는다. 거듭난 것과 신성한 생명을 받은 것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이나, 그들의 일상적인 행함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다.


어떤 형제가 세상에 있으며 주님의 관심에 관여하지 않을 때 그의 아내는 주님에 관한 한 그에게 어떠한 어려움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위해 살기 시작하자마자 그의 아내는 이방인 십보라, 즉 주님께 전혀 분별되지 않은 여인처럼 처신한다. 십보라가 모세와 함께 갔던 것처럼 그의 아내도 얼마만큼은 그와 더불어 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상황 안에는 할례받지 않은 것, 즉 평범하고 통속적이며 주님께 분별되지 않고 성별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주님이 이 상황 안으로 오시지 않는다면 아내의 이방인 본성은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이 개입하자마자, 아마도 형제가 하나님의 위임을 이루려고 할 때쯤, 육체의 할례에 대한 아내의 태도가 드러난다. 양피를 베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아내는 실상 그것을 수행할지는 모르나, 적극적이거나 유쾌한 자세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남편이 주님께로 분별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그를 「피남편」으로 쳐다본다.
「피남편」이 되는 것은 사망 아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십보라의 눈에 할례는 그녀의 남편 모세가 사형 선고 아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 형제들이 주님께 절대적이라면 우리 역시 아내들 보기에 「피남편」이 될 것이다.


출애굽기 4장에 있는 모세와 십보라에 대한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들이 하나님의 위임을 이루기 위해 가는 노정에 있었을 때 십보라는 모세가 하려는 것에 동조적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십보라보다 주님을 더 위했다. 그는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십보라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모세와 십보라가 할례의 문제로 서로 다투었음을 암시하는 것은 없다 할지라도 그들 간에는 무언가 매끄럽지 않은 것이 있었다. 할례를 받아야 했으나 십보라는 그것을 반대했다. 그녀는 하나님께로 분별된 것의 표시인 육체를 베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육신 안에 살고 있거나 천연적인 생명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한다는 것은 신성한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육과 천연적인 생명은 잘려져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오로지 그분께 분별된 자들만을 사용하실 수 있다.


할례의 문제는 하나님의 경륜에서 중요한 원칙에 포함된다. 할례없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우신 좋은 땅을 상속받는 것에 관한 약속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아무런 직분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러 오셨다는 것은 할례받지 않은 상황이 하나님의 사역 안에서 모세를 끝장나게 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할례는 그분의 사역 안으로 인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임을 수행하러 가는 노정에서 할례의 문제를 소홀히 여긴 모세를 참으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모세를 처리하려고 들어오셨다. 의심할 바 없이 모세는 최소한 어떤 것에 대해, 즉 할례에 대해 반대를 하는 아내에 대해 양보하는 데 있어서 약했다. 그의 약함이 주님께 걸림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은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 주님이 모세를 만나셨을 때 전체 상황이 빛 가운데로 인도되었다. 모세는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십보라는 자신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책임이 주로 할례를 반대한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색다른 도구, 즉 날카로운 돌로 양피를 베었다. 그러나 우리는 십보라가 사랑 안에서 잘랐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모세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생명이 구원받기를 원했다.


이 사건을 영적으로 적용시킬 때에, 우리는 종종 아내들이 색다른 방법으로 그들의 남편을 자른다는 것을 본다. 만일 자매들이 이 문제를 기도로 주님께 가져간다면 그분은 아내들에게 남편을 잘랐던 색다른 방법들을 보여주실 것이다. 그러나 아내들만이 항상 자르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한 적이 없었으나 분명히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잘려졌다.


아론의 도움 즉 조화는 객관적인 반면, 십보라의 도움 즉 자르는 것은 주관적이다. 때때로 주님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주 안의 사랑스러운 형제들에 의해 잘려지는 환경 안에 두신다. 그럴 때 이러한 형제들은 우리와 조화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를 자른다. 그들은 우리와 대항해 싸우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외적으로 우리와 동의할 때조차도 그들은 칼날의 기능을 한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자르는 것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아론을 예비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십보라를 예비하셨다.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는 대기하고 기다리고 있는 아론과 십보라가 있다. 특별히 오늘날 교회 생활 안에는 조화되는 자들과 자르는 자들이 다 있다. 조화되는 자들을 손대는 것도 어렵지만 자르는 자들을 다루기는 더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피남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아론과 조화되고 십보라에 의해 잘려진 후에 모세의 부르심은 온전케 되었다. 그는 애굽으로 가서 하나님의 위임을 수행할 준비가 되었다. 그분의 부르심 받은 자들에 관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완전한 그림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 말씀을 주님께로 가져간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실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주여, 나에게 몇몇 아론들과 몇몇 십보라들이 있음으로 인해 당신께 얼마나 감사한지요! 주여, 조화와 자름으로 인해 당신을 찬양합니다.』(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9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