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형벌과 부끄러움의 세 장소ㅍ
왕국
Hannah , 2009-03-13 , 조회수 (4153) , 추천 (0) , 스크랩 (0)

 

 

구원과 형벌과 부끄러움의 세 장소

 

 

 

1. 롯의 처


우리가 지적했듯이 롯의 처가 멸망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의심할바가 없다. 이것은 확실하고 분명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아무도 논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본 대로 그녀는 남편의 등 뒤에서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되었다. 그녀가 남편의 뒤에서 걸었다는 것은, 소돔을 떠나려는 갈망이 남편보다 적었고 남편을 따라 성에서 나오는 것이 기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만일 소돔을 탈출하는 것이 기뻤다면 그녀는 남편 옆에서 걸었을 것이다. 뒤를 돌아보고 소금 기둥이 되기 전에도 그녀는 이미 남편 뒤에 있었다. 여기에서 나는 아내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아내가 죄를 지으려면 남편 뒤에서 머뭇거리는 것이 좋지만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남편을 느리게 따르는 것은 좋지 않다. 하나님의 일에 관해서 아내에게 가장 좋은 것은 남편과 함께 걷고 함께 행하는 것이다. 아내들이여,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남편의 뒤에서 걷지 말라. 만일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롯의 아내처럼 고난을 당하고 소금 기둥이 될지 모른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경고이다.



롯의 처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것은 그녀가 기능을 잃고 부끄러움의 상징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소금이 가루의 형태일 때에는 매우 유용하다. 소금이 더 고운 가루로 갈아질 때 그 기능은 더 좋아진다. 그러나 아무도 기둥 모양인 소금을 사용하지 않는다. 주 예수님은 구원받고 거듭난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3). 우리의 기능은 이 부패한 세상의 세균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맛을 잃으면(눅 14:34), 그것은 우리가 롯의 아내처럼 기능을 잃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백성 중 하나인 롯의 처는 짠 맛으로 가득해야 했으며 주변에 있는 부패의 세균을 죽일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맛을 잃고 기능을 잃었다. 그녀는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다.



창세기를 쓸 때 하나님의 영은 롯의 처의 이름을 언급하기를 원치 않았다.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이름은 여러 번 언급되었지만 롯의 아내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급할 가치가 없었다. 그 가련한 성도는 남편의 뒤에서 걸으며 소돔 성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마 자기의 자녀와 집과 다른 소유들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녀의 모든 소유는 소돔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몸은 그 성에서 이끌려 나왔지만 그녀의 관심과 마음과 갈망과 혼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따라서 뒤를 돌아볼 때 주님은 그녀를 소금 기둥이 되게 하심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경고의 본을 삼으셨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주님은 제자들에 대한 경고의 본으로서 롯의 처를 사용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이 경고 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다. 우리는 참되고 구원받은 사람도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부끄러움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를 주의해야 한다. 진정으로 나는 소금 기둥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당신은 원하는가? 소금 기둥이 되는 것은 영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믿는이가 노천(露天)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며 서 있는, 생명 없는 소금 기둥이 되는 것은 어떠한 부끄러움인가!



2.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


누가복음 14장 25절부터 33절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것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주님을 따라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주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거룩한 말씀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14:26)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 절대적이지 않고 합당하게 주님을 따르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부모, 처자, 자녀들, 형제, 자매, 우리 자신의 혼 생명(개역 성경에는 「목숨」이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은 둘째가 되어야 한다. 오직 주님 자신이 첫째가 되어야 하며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분을 따라야 한다. 주님을 위해 우리의 친척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실지로 미워함이 아니라 사랑의 미워함을 의미하신 것이다.


주님의 입에서 나온 이 부분의 말씀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방법으로 그분을 따라야 함을 본다. 이것은 주일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문제도 아니고 우리의 즐거움에 따라 가정 성경 공부를 하는 문제도 아니다. 그러한 가정 성경 공부는 또 다른 형태의 취미와 오락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눈에서 당신의 가정 성경 공부는 농구 시합과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자신의 거실을 운동장 삼아 성경 공부할 때 자신의 성경­공으로 경기를 한다. 당신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지 않다. 나는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뿐 아니라 내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이 메시지를 준비할 때 주님은 내게, 『너는 어떠냐? 내가 이 메시지를 전하도록 너를 강권했지만 너는 나를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냐?』고 물으셨다. 주님이 나를 위해 이것을 간증하실 수 있다. 부디 주님께서 내게 긍휼을 베푸시어 남에게 전파한 후 버린바 되지 않게 하시기를! 부디 그분의 사랑스런 모든 성도들에게도 긍휼이 있기를! 우리를 더 이상 혼미하지 않게 하는 엄중한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만일 우리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믿는다면 누가복음 14장 26절부터 35절도 믿어야 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한 많은 메시지가 전해졌고 소책자들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누가복음 14장 26절부터 35절까지에 관한 메시지와 소책자는 어디에 있는가?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어떤 진리도 숨겨서는 안 된다.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은 쓸모 없게 된다. 오늘날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주님의 손 안에서 진정으로 유용한 그리스도인이 몇이나 되는가? 내게 말해 달라.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쓸모없게 되었다.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눅 14:34).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맛을 잃었을 뿐 아니라 누가복음 14장 35절에 의하면 「땅에도 거름더미에도 쓸 데 없어 내어버려진다」. 여기의 땅은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위한 것들이 자라나는 밭이다. 우주 안의 거름더미는 불못이며 거기에 더러운 모든 것이 쌓이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14장 35절은 주로 오는 왕국 시대를 가리킨다. 왕국 시대에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땅이 있을 것이며 또한 거름더미인 불못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항상 사람들에게 두 장소, 곧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주 예수님은 맛을 잃은 소금이 땅에도, 거름더미에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진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삼의 장소를 언급하신다. 롯의 처가 변한 소금 기둥은 어디에 있었는가? 천당에 있었는가, 소돔에 있었는가? 그것은 두 장소에 있지 않았고 제삼의 장소에 있었다. 누가복음 전체를 읽을 때 당신은 세 장소가 있다고 말한 장(章)을 본적이 있는가?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땅인가, 거름인가, 아니면 제삼의 장소에 버려질 것인가?



마태복음 25장 30절에서 주님은, 무익한 종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깥 어두운 데는 제삼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무엇인지, 어느 곳인지를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게으른 종이라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당신은 무익하므로 땅에도 쓸 데 없고, 구원받았으므로 거름더미에도 쓸 데 없을 것임을 성경은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당신은 영광스런 왕국도 아니고 불못도 아닌 제삼의 장소에 있게 될 것이다. 성경에 구원받고 패배한 자들을 위한 제삼의 장소가 준비되어 있음을 본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이것은 엄중한 말씀이다.


우리는, 사람에 관한 신성한 말씀의 온전한 계시 안에서 볼 때 세 장소-구원의 장소와 형벌의 장소와 부끄러움의 장소-가 있다는 사실로 인해 깊은 인상을 받을 필요가 있다. 롯의 처는 어디에 있었는가? 구원을 받았지만 그녀는 제삼의 장소, 곧 부끄러움의 장소에 있었다. 이것이 누가복음에 있는 주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이에 대해 논쟁하려고 하지 말라.



3.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에 살면서 혼을 구원코자 하는 믿는이들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에 살면서 그들의 혼, 곧 그들의 혼 생명을 구원코자 하는 믿늘이들은 롯의 처와같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들의 혼을 잃을 것이다(눅 17:28-33).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다. 그들은 믿는이들이지만 세상 사람들처럼 살며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쇼핑하고 옷을 입는다. 그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행하기 때문에 그들과 세상 사람 사이에 차이가 없다.



혼을 구원하는 것은 주님을 위한 고난을 거절하는 것이다. 혼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즐거움을 좋아한다. 그들은, 『운동경기를 관람하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그것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이 죄는 아니지만 세상적인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건강을 위해서 육체적인 운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확실히 그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운동이 일단 스포츠나 오락이 되면 그것은 세상적인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것을 즐기고 거기에서 어떤 즐거움을 구한다면 당신은 자기의 혼을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적이고 세상적인 누림을 갖는 것은 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심리적이고 세상적인 어떤 즐거움이나 누림을 가질 때가 아니다. 지금은 우리의 혼, 곧 정신이 고난을 당할 때이다. 우리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한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심리적이고 세상적인 즐거움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차 대전이후에 누가 그런 엄중한 말을 했는가? 지난 삼십 일 년 동안 바라보고 관찰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심리적이고 세상적인 누림을 위해 있지 않다는 엄중한 말이나 경고를 나는 듣지 못했고 우리는 모든 종류의 위안이나 오락을 잃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당신이 집에서 어떤 음악을 누리는 것은 당신의 혼을 구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텔리비젼을 이기지 못한다. 텔리비젼을 보는 것은 그들이 혼을 구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종교적이거나 율법적이지 않지만 오늘날은 우리가 심리적이고 세상적인 오락을 가질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날은 우리의 혼이 고난을 받을 때이다. 이 혼의 고난은 우리의 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당신의 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롯의 처와 같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당신의 혼을 잃을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일순간에 휴거되리라는 가르침은 틀린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주님의 백성의 영적 감각을 혼미케 한다. 누가복음 17장 34절과 35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이렇게 말하며 논쟁할지 모른다. 『데려감을 당한 사람은 신자이고 버려둠을 당한 사람은 불신자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해석이다.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지만 누가 참으로 주님을 위한 사람인지 주님만이 아신다. 누가복음 17장 22절부터 37절까지의 문맥을 살펴보면 당신은 이 말씀이 불신자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볼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에 관해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34절과 35절에 있는 「둘(2)」은 주님의 제자들 중의 두 사람을 가리키며 한 명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명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데려감을 당한 그 사람은 분명 롯의 아내와 같지 않을 것이다. 버려둠을 당한 제자는 롯의 아내와 같을 것이다. 이것은 엄중한 말씀이다.(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