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시몬의 이름은 바꾸고 안드레 이름은 바꾸지 않으셨는가?
믿는이들
Hannah , 2009-03-13 , 조회수 (3683) , 추천 (0) , 스크랩 (0)

 

 

왜 시몬의 이름은 바꾸고 안드레 이름은 바꾸지 않으셨는가?
 

 

세례요한이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했을 때 그의 두 제자가 그분께 이끌렸고, 이에 대해 요한은 매우 기뻐했다. 이 두 제자들은 누구였겠는가? 첫 번째는 안드레요, 두 번째는 비록 그가 겸손하여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 복음서의 저자인 요한임에 틀림없다. 안드레가 이끌린 다음 그는 그의 형제 시몬을 찾아서 그를 예수께 데리고 갔다(요 1:41-42). 주님이 시몬을 보시고 그의 이름을 게바, 즉 베드로로 고쳐 주셨는데, 그것은 돌을 의미한다... 비록 안드레가 베드로보다 먼저 주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은 안드레의 이름을 바꾸지 않으셨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만약에 여러분과 내가 주 예수님이었다면 우리는 아마 안드레의 이름은 돌로 바꾸고 요한의 이름은 다이아몬드로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서두르시지 않고 서서히 나아가셨으며 안드레의 이름이 아니라 시몬의 이름을 바꾸셨다. 만약에 내가 안드레였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주님, 당신은 왜 내 이름은 바꿔 주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불공평합니다. 내가 먼저 당신께 왔습니다.

 

왜 시몬에게는 새 이름을 주고 나에게는 주지 않습니까? 주님, 당신은 나에게도 역시 새 이름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안드레의 이름을 바꾸시지 않았다. 이것은 모든 것이 그분께 달려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주님은 결코 급하게 서둘러 행동하지 않으신다....빌립은 주 예수께 이끌렸던 바로 다음 사람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빌립과 어떤 것도 하지 않으셨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서 말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주님은 빌립과 어떤 것도 하지 않으셨지만 나다나엘과는 무엇인가를 하셨다. 즉 그에게 야곱의 꿈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요 1:51). 왜 주님은 시몬과 나다나엘에게는 무엇인가를 하셨으면서 안드레와 빌립에게는 하지 않으셨는가? 여기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은 곧 주님은 첫 번째가 아니라 항상 두 번째를 다루신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옛 창조에 속한 것이다. 애굽에서 유월절에 모든 처음 난 것이 죽임을 당했다. 첫째가 되지 말라. 만약에 여러분이 첫째가 되길 갈망한다면 여러분은 주님과는 끝난 것이다. 비록 학교에서는 첫째가 되는 것이 좋을지 모르지만 교회에서는 좋지 않다. 주 예수님과 함께할 때 첫째가 되려고 노력하지 말라. 만약 여러분이 첫째가 되기를 시도한다면 여러분은 표적을 놓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첫째가 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둘째가 되고자 한다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하실 것이다. 시몬은 둘째였고, 주님은 그에게 돌이 되는 문제를 계시하셨다. 나다나엘도 또한 둘째였고, 주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집을 열어 보이셨다.(요한복음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4)

“두번째”의 원칙

성경 : 고린도 전서15:45-47, 창세기 17:18-19, 창세기 25:23, 로마서 9:12-13, 창세기 48:18-19, 사무엘 상 8:5, 16:1, 사무엘 하 12:14, 24, 25, 창세기 2:9, 16-17, 3:4-8

오늘 오후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는 이 몇 성경 구절 가운데 있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들에는 하나님께서 성경 가운데서 계시하시는 원칙이 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제목을 「두번째의 원칙」, 혹은 「두번째의 율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들 성경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이 모두 두번째요 첫번째가 아님을 볼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5장의 기록은, 첫째 것은 땅에 속했고 둘째 것은 하늘에 속했음을 말한다. 첫째 것은 혈육에 속한 것이고 두번째 것은 영에 속한 것이다. 나는 늘 이것은 성경 가운데서 가장 희귀한 것-성경 가운데서 하나님은 항상 두번째 사람을 택하신 것-이라고 느낀다. 이스마엘은 큰 아들이요 형이다. 이삭은 동생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이삭을 선택하셨다. 에서 역시 장자요 형이다. 야곱은 차자요 동생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야곱이요 에서가 아니다. 그 뒤에서 우리는 에브라임은 둘째 아들이요 므낫세는 첫째 아들임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리어 에브라임을 선택하셨다. 밧세바는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첫째 아들을 치심으로 그를 죽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둘째 아들 솔로몬을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사랑하사 심지어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짓게 하셨는데, 그 뜻은 「여호와께 사랑을 입었다」이다. 우리의 주 예수님은 육신에 따라 말한다면 이 계열에서 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두번째를 선택하시고 첫번째를 선택하지 않으셨음을 본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은 첫째 왕 사울을 원치 않으시고 다윗 곧 둘째 왕을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왜 형을 원치 않으시고 동생을 원하시는가? 왜 첫번째는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는가? 왜 두번째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았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고 믿는이들에 대하여 이와 같을 뿐 아니라 죄인에 대해서도 이와 같으시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의 장자들을 위하여 문지방과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고 하셨는가? 왜 첫번째 아들은 위험이 있게 되는가? 왜 두번째 아들은 위험이 없는가? 왜 성경에서는 처음 난 소와 양은 대속해야 하고 대속하지 않은 것은 그것들의 목을 꺾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목을 꺾는다는 것은 곧 그들의 중추 신경을 꺾는 것이요, 그것은 곧 사망을 뜻한다. 왜 처음 난 소와 양은 대속해야 하는가? 왜 두번째 난 소와 양은 대속할 필요가 없는가? 처음 난 소와 양을 대속해야 할 뿐 아니라 처음 난 아들일지라도 대속해야 한다. 두번째 아들은 대속할 필요가 없다. 첫번째 아들을 대속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제함을 당하게 된다. 왜 장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미워하시고 특별히 좋아하지 않으셨는가? 왜 차자는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그에 대한 특별한 은혜가 있으며 특별한 총애가 있는가? 왜 모든 레위 족속을 이스라엘 사람을 속하는 장자의 대속으로 삼으셨으며, 부족할 때에는 은으로 채워야 했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특별히 첫번째 아들을 거절하시고 두번째 아들을 선택하셨는가?

우리는 성경의 기록이 임의대로가 아님을 안다. 성경이 이와같이 기록된 까닭은, 비록 이 원칙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는 않지만 극히 중요한 원칙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행하심은 임의대로 하시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분이 한 번, 두 번, 여러 차례 이같이 하시는 것은, 그분의 「길」이 원래 이와 같고, 그분의 모든 「행하심」은 다 그분의 「길」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원칙과 길을 배우려면, 하나님과 영적인 일을 인식함에 있어서 반드시 무수한 진보를 가져야 한다.

도대체 하나님이 첫번째 것을 원치 않으시고 두번째 것을 원하시는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제 우리는 고린도 전서 15장 46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자.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이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우리는 고린도 전서 15장이 몸의 부활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단락의 성경을 읽는 목적은 몸의 부활 문제를 보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시하는 것은 영적 원칙이다. 이 성경 구절에 따르면, 먼저는 혈육에 속한 몸이 있고 다음에 영적인 몸이 있다. 여기서의 영적인 원칙은, 무릇 영적인 것은 후에 있고 혈육에 속한 것은 앞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뒤에 있는 것을 택하시고 앞에 있는 것을 거절하신 이유이다.

무엇이 첫번째 것인가? 요한복음 3장 3절을 보기 바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또 3장 6절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한다. 주 예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것은 거듭남이다. 주 예수님은 한 번 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주 예수님은 다만 한 번 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소용 없는 것이며, 거듭남이 있어야만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주 예수님은 곧이어 첫번째 난 것은 육체로부터 난 것이고 두번째 난 것은 영으로부터 난 것임을 설명하신다. 그러므로 여기에 차이가 있는데, 육신으로부터 난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첫번째에 속한 것이다. 두번째 것은 본래 육신에는 없던 것, 즉 성령으로부터 난 것이며, 성령으로 남으로써 생긴 것이다.

육신으로부터 난 것에 포함되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보자. 이러한 것들은 부모에게서 날 때 가지고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감정, 천부적인 재능, 총명, 온유, 겸비, 인애, 화평, 과단, 인내 등과 같은 것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성령의 거듭남을 얻기 전에 있는 특징들이며, 사람들이 볼 때 매우 사랑스러운 것들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한 범주 안에 포함시켜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마땅히 우리가 거듭난 후 소유한 모든 것이 도대체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인지 아닌지를 자문해야 한다. 여전히 육신으로부터 난 것이 안에 있는가? 우리는 죄와 더러움은 육신으로부터 난 것이므로 마땅히 없애야 하지만, 온유, 인내, 사랑, 총명, 천부적인 재능 등은 남겨둘 수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주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도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첫번째로부터 얻어지고 육신으로부터 얻어지며 부모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이런 것은 거절해야 하고 내려놓아야 한다. 무릇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 두 생명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 두 성정(性情)을 가진 이는 복이 있다! 어떤 사람이 입으로는 주 예수를 믿는다 하고 예배도 보지만, 그가 가진 것이 부모에게서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가 가진 것들이 이러한 것들뿐이라면 그는 여전히 멸망할 죄인일 것이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배운 것, 얻은 것, 됨됨이가 다 나면서부터 있는 것이라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소망이 없고 쓸모가없다. 당신이 만약 주를 믿고 두번째 것을 얻었다면, 바로 거듭남을 얻은 것이요, 구원을 얻은 것이요, 영생을 얻은 것이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주의해야 할 한 가지 일은 무엇이 첫번째 것이고 무엇이 두번째 것이며, 무엇이 부모가 우리에게 준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이다. 허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분명치 않은 안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무엇이 첫번째 것이고 무엇이 두번째 것인지, 어떤 것이 첫번째 것으로부터 온 것이고 어떤 것이 두번째 것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구별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아주 열심이 있고, 내가 아주 인내하며, 내가 말도 아주 잘 하고 기도도 잘 하며, 열심히 사람을 구원하기만 한다면, 나의 생활, 생명, 성정, 일이 다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한 가지를 주의하기 바란다. 나는 결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사람이 선행하는 것을 주의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당신의 선의가 어디에서 나왔으며, 어디에서 얻어진 것인가를 주의하신다. 당신의 그 근원은 무엇인가? 당신이 잘하였지만, 어디로부터 잘한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온유함을 원치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온유함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물으시는 것이다. 자신을 의지하여 얻은 것인가 아니면 성령을 의지하여 얻은 것인가? 당신의 열심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이가? 자신을 의지하여 얻은 것인가 아니면 성령을 의지하여 얻은 것인가? 이 모든 것의 원칙은 무엇인가? 바로 범사에 이 일이 첫번째로부터 나온 것인가 아니면 두번째로부터 나온 것인가를 물어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첫번째 것을 거절하셨고 두번째 것을 인정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의 열심이 첫번째 것에서 나온 것인가 두번째 것에서 나온 것인가를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 성질은 아주 급한데 다른 사람이 상당히 인내하는 것을 보면, 나는 곧 그를 부러워하고 그가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마디 더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어떤 힘을 통하여 인내케 되었는가를 물으실 것이다. 우리는 첫번째에 속한 좋은 것을 보면 곧 좋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으로부터 나온 좋은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좋아야 참으로 좋은 것이다. 우리는 전도인의 목소리가 크고 목청이 울리며 그가 활발하게 일을 처리하고 열심히 사람을 구원하면, 그를 영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이 첫번째로부터 나온 것인가 두번째로부터 나온 것인가를 보신다. 우리 가운데 한 형제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은 분별할 줄을 모르고 단지 전도인이 주먹으로 탁자 두드리는 것만 보면 그의 능력이 크다고 말한다고 했다. 우리는 능력이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천부적인 재능이나 능력이나 성정은 첫번째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들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거듭난 이후로 가진 것, 즉 두번째로부터 나온 것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전도인이 이와 같아야 할 뿐 아니라, 각각의 믿는이들도 다 첫번째 것을 거절해야 한다. 무릇 천성적으로 좋은 것이나, 천연적인 인내는, 마치 고무줄을 신축력이 없어질 때까지 잡아당기면 멈추는 것처럼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사람들이 그것을 얼마나 길게 잡아당기든 그것은 거기까지 당겨질 수 있다. 육체를 근원으로 하는 것은 영적인 필요를 공급할 수 없다. 이는 정해진 것이다. 아담은 그리스도를 도울 수 없으며, 아담에 속한 것도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도울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된다」 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된다」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어떤 형제가 오직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야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늘 하늘이 우리의 집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집에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모든 것이 땅에 속한 것이라면, 하늘은 우리의 여인숙이요 우리의 집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거두어가실 수 없다. 이는 정해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을 때부터 지금까지 도대체 어떤 분별이 있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믿지 않았을 때의 죄, 실패, 연약함, 더러움 그리고 모든 좋지 않은 것을 없애는 데 불과한 것인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모든 좋지 않은 것을 없애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좋지 않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좋지 않은 것을 좋지 않다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또한 많은 좋은 것들 역시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모든 좋지 않은 것을 없애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첫번째 것을 다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죄를 원치 않으실 뿐 아니라 육체의 총명함일지라도 원치 않으신다. 육체의 더러움을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실 뿐 아니라 육체의 선의(善義)일지라도 그분은 원치 않으신다. 첫번째 생명으로부터 나온 것, 육체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것, 천연적인 생명으로부터 나온 것은 하나님께서 모두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도 새로운 것과 조화될 수 없다.

우리는 사복음서에서 주 예수님이, 『그의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나 자기의 생명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이는 나의 제자가 되기에 합당치 않다』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본다. 주님은 또 한 지방에서 『사람이 자신의 부모나 처자나 자식을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되기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 서신 가운데서 주님이, 자녀는 마땅히 부모에게 순복해야 하며 또한 부모 된 이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본다. 또 우리는 부부의 도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며, 남편은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게 된다. 복음서는 계속해서 미워하라고 말하고 서신서는 계속 사랑을 말한다. 당신이 만약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을 분별할 수 없고, 육체의 것과 성령의 것을 분별할 수 없다면, 당신은 그러한 까닭을 알 수 없다. 당신이 만약 첫번째의 것과 두번째의 것, 천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별할 수 없다면, 주께서 그의 부모나 처자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이는 나의 제자가 되기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실 때, 당신은 임의대로 가족을 대해도 된다고 여길 것이다. 바울이 부모나 자식이나 부부는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할 때, 당신은 당신의 가족을 사랑하는 모든 일들은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려 할 것이다. 어찌 주 예수께서 금지한 것이 천연적인 사랑이고 바울이 명령한 것이 영적인 사랑인지를 알지 못하는가? 당신의 사랑이 천연적인 것이라면,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들로 인해 주님과 멀어지고, 교통이 줄어들며, 사랑하는 마음이 나뉘고, 친밀함을 잃을 것이다. 당신이 만일 당신의 부모나 처자나 자녀 등을 하나님의 손에 놓기를 원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그들을 미워하게 하시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즉시 하나님의 두번째 명령이 바로 당신의 부모, 처자, 자식을 사랑하라는 것임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미 그 첫번째 것에서 벗어났고 그 두번째 것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단지 복음서의 절반만을 받아들이고, 또 많은 사람들은 다만 바울 서신의 절반만을 받아들인다. 사실 모두가 틀린 것이다.

형제들이여, 우리의 생활은 반드시 첫번째로부터 나온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육체에 속한 것과 영에 속한 것이라는 이 두 말은 글자로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생활 가운데서는 우리가 매우 분별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선의가 첫번째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어떤 선의가 두번째 것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아는가? 도대체 우리로 하여금 분명히 분별할 수 있게 하는 표시가 있는가, 없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제 하나의 정해진 법칙, 곧 영적인 것은 모두가 분명히 죽음을 거친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바꾸어 말하면, 영적인 것은 모두 부활한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있는 것, 하나님께서 힘을 쓰실 필요 없이 있게 된 것이 첫번째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주님을 믿을 때까지의 모든 총명, 사랑스런 성정, 선량함, 재능 등은 하나님께서 모두 육체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신다. 이 가운데 있는 것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거듭남으로써 하나님께서 더하신 것, 곧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성령을 통해 더하신 것이라야 두번째 것으로 간주된다. 천연적인 장점에 대하여서는 당연히거절하고 그들을 의뢰하지 않고 그것들을 의탁할 만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성령을 통하여 그분이 오셔서 인도하고 능력 주시고 승리하시며 그리스도를 살아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든 두번째 것 곧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지혜, 자신의 능력, 자신의 천연적인 자질들을 내려놓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거절 후에 얻은 것이라야 부활한 것이요, 영적인 것이요, 두번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두번째 것을 우리가 얻은 것이 너무나 적다! 우리가 두번째 것을 통하여 사는 것 역시 너무나 적다! 우리는 항상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첫번째 것 중에서 나쁜 것은 없애고 첫번째 것 중에서 좋은 것이면 빌어 쓴다. 하나님께서는 나쁜 것, 더러운 것, 죄악된 것을 마땅히 없애야 한다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원래의 총명함, 재능, 온유함, 사랑스러운 것 등도 모두 죽음을 거쳐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본래의 총명함이 소용 없다면 우리는 바보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 원래의 온유함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대단히 강팍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이 죽음을 거치기를 원하신다. 예를 들어, 내가 매우 총명하며, 나의 총명함을 사용하여 성경 가운데서 많은 새로운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나는 자신의 총명함을 의지하지 않고 전일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한다. 성경을 읽든 기도를 하든 다 하나님을 의지한다. 만약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마치 성경에서 말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와 같다. 당신은 곧 자신이 이미 죽음을 거쳤고 당신 자신은 이미 내려놓아졌음을 보게 된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더욱 새로와진 총명함을 쓰시려 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당신은 죽음을 거치고 십자가를 거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또한 모두 쓰심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대단히 고달픈 생활이다! 이것이 얼마나 괴로운 생활인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고 빨리 행동 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많이 기다려야 하고, 많이 기도해야 하며, 먼저 우리 자신이 쓸모없음을 인식해야 하고, 우리 자신이 부패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오직 이러한 생활만이 열매를 맺는 생활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생을 첫번째 안에서 살며, 두번째 안에서 살 수 없다. 그들의 천연적인 것이 죽음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외관(外觀)이 비록 좋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진실한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내가 다시 한 예를 들겠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모르시는 분이다. 주 예수께서 그분 자신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셨다면 이제까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분 자신을 통해서 무엇을 하셨다면 또한 반드시 아주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죄가 없으시고 깨끗하고 흠이 없으신 분이며, 그분의 성품과 생명은 모두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아들 스스로는 무엇을 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아들은 아버지께로서 듣는 것을 말해낸다고 말씀하신다. 왜 그분은 자기 임의대로 일하실 수 없는가? 그분은 이것이 천연적이고 하나님을 통하여 한 것이 아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처럼 천연적인 면에서 그렇게 완전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분도 그것을 거절하셨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주님은 하늘에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완전한 육체를 의지하지 않고 성령을 의지하셨는데, 우리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분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한 것은 우리에게 죄만 없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우리의 생활은 죄악적인 것을 이겨야 할 뿐 아니라 또한 혈육에 속한 것을 이겨야 하며, 더러운 것을 이겨야 할 뿐 아니라 천연적인 것도 이겨야 한다.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 안에서 너무나 우리의 천연적인 것에 의해 눌림을 받는다. 우리의 생활과 일은 너무 자신의 뜻을 따라서 행하고, 너무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여 활동하며, 너무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긴다. 오늘날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전적으로 그분 앞에서 천연적인 것에서 나온 모든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가를 보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비우며,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도 이 길을 가는 것이 힘든 일임을 인정한다. 이런 생활은 곧 의지하는 생활, 낮추는 생활, 묶이는 생활, 죄수의 생활, 노예의 생활이다. 이러한 생활은 고난의 생활이다. 당신이 두번째의 생명을 의지하여 산다면, 당신은 자신이 매일매일 낮아지고 묶임받는 자이며, 죄수와 노예 같은 자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이러한 생활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요, 오직 이러한 일만이 영적인 효력이 있는 것이다. 혈기에서 나온 모든 것은 혈기의 성질, 혈기의 열정, 자신으로 말미암은 자질, 자신의 감정으로 말미암은 충동이며,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들의 효력은 없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일은, 바로 많이 기도하지 않고 완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성령의 능력이 필요 없이 자신이 할 줄 안다 하고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며, 분명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이며, 분명 육체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반드시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함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라야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생명을 의지하여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천연적인 생명을 죽음으로 다스리기 바란다. 또한 하나님의 새 창조가 우리의 옛창조를 삼키기 원한다.(워치만니 전집 1집 제9권, 제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