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어떻게 율법과 선지자를 온전케 하셨나?
> 그리스도는 어떻게 율법과 선지자를 온전케 하셨나(마 5:17)?
우리가 이 문제에 답하려면 마태복음 5장 17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생각지 말라』(17절)를 읽어야 한다. 주님은 왜 생각지 말라고 말씀하셨나? 왜냐하면 생각할 가능성이 있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인데, 주님이 산 위에서 아홉 가지의 복을 말씀하신 후에 또한 두 가지 사항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들은 후에 아마도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을 것이다. 『주님이 오늘 말씀하신 복은 구약과는 완전히 다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창대케 하셨고, 좋은 것을 먹이셨고, 대적을 멸하셨다. 오늘 주님은 사람은 겸손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며 핍박받아야 한다는 등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구약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주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이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 땅에서 그분의 간증으로 두셨다. 오늘 당신들이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분의 간증을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가져와서 몇몇 사람에게 주셨으므로 주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는 소금이요 빛이란 말을 한 후에 곧 이어서 『생각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분의 오심이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케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폐한다」의 원문에서의 뜻은 벽을 부수는 것과 같이 허물어 나간다는 뜻이며, 「온전케 한다」는 원문에서 「충분하여 가득하다」라는 뜻이다.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를 논함에 있어서 옛날에는 두 가지 주장이 있었다. 한 파의 주장은 매우 좋지 못하다. 그들은 주 예수가 율법을 온전케 한다는 것은 바로 율법을 폐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주님이 여기에서 말한 것은 모세가 말한 것과 매우 많이 다르다고 주장한다-모세는 남자가 만약 아내와 이혼하려면, 단지 한 장의 이혼증서만을 써주면 된다고 말했으나, 주님은 무릇 이혼하려는 것이 음행한 연고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이들의 견해는 바로 주님이 모세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또다른 하나의 견해는 모세의 율법이 천 오백년동안 전해오면서 알게 모르게 유대인에 의하여 많은 것들이 추가되었는데, 주님의 오심은 실상을 보전하고 사람이 추가한 것을 없애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말한 「온전케 함」이 「충만하여 가득하다」는 뜻이며 보충한다는 뜻이지, 결코 위에서 말하고 있는 견해들이 아님을 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율법에 대한 주님의 태도를 보기로 하자.
첫째, 주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셨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 12절에서,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주님이 선지자를 인정하셨음을 알 수 있다. 5장 23절은 주님이 제단에서 예물을 드림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주님이 제단을 결코 반대하지 않으셨음을 볼 수 있다. 산 위에서 교훈을 마치고 주님이 하산하셨을 때, 주님은 어떤 중풍병자를 만나서 그를 치료하셨으며 곧 그에게 분부하길, 그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는데(마 8:1-4), 여기에서 주님은 모세가 분부한 것이 마땅히 지켜져야 함을 인정하고 계신다.
둘째, 주님이 비록 율법과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인정하셨으나 동시에 또한 율법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셨다. 마태복음 5장에서 우리는 『…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의미하시는 것은 모세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 틀린 것이 아니지만 결코 이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며, 화조차도 내서는 안 되며, 음욕조차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완전한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2 더하기 2가 4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가 배운 것은 불완전한 것이나 그가 배운 2 더하기 2가 4라는 사실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주님의 오심은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온전케 한다』라는 의미는 주님이 교사로서 온전케 한다는 것이지 주님이 구주로서 온전케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서 보충하고 만족시키신다는 뜻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 것을 가르치는데 이것은 공평한 원칙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이것은 은혜의 원칙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법이 공평하게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은혜와 긍휼은 하나님 자신의 본성을 나타낸다. 주님의 은혜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도록 하신다. 요한복음 1장 17절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절차를 사람에게 알렸으나, 주님은 하나님 자신의 본성을 사람에게 알리셨다.
주님이 이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역사를 받아들여 생명을 얻었다고 말하므로,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활 또한 주님이 산에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것에 따라서 행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은 주님이 산에서의 교훈이 은혜가 아니라 율법이기 때문에 산상의 가르침은 유대인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증명할 수 있는 두 가지 증거가 있다. 첫째, 우리가 올바른 이론에 따른다면, 우리는 어려운 것은 모두 유대인에게 미루고 쉬운 것은 우리 자신에게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자.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적은 능력과 은혜를 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며, 우리에게는 큰 능력과 은혜를 주시고 오히려 적은 것을 요구하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둘째, 마태복음 5장 1절부터 2절까지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기에 있는 제자들은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말하였다고 하자. 성경에서 적어도 한 구절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인(행 1:26)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제자들이 유대인이다』라거나 또는 『유대 제자들』이라는 구절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제자가 되는 즉시 거기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다. 셋째,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20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동시에 또한 사람이 주님의 교훈-산상수훈을 포함-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한다. 산상수훈은 어려우나 우리는 어려운 것을 모두 유대인에게 미룰 수는 없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마지막 구절을 주의해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말은 주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주님의 명령도 포함되어 있다. 성령이 행하시는 역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이 분부한 것을 지키게 한다. 사도는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교훈을 지킬 것을 사람들에게 분부하라는 명령도 받았다.
마태복음 5장 18절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한다. 일점은 히브리어 자모 중 가장 작은 자모를 가리키며, 일획은 히브리어 자모의 분음 부호를 가리킨다. 일점 일획은 문자의 가장 작은 것을 의미한다. 일점일획이 모두 이루어진다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천지는 율법의 일점일획이 다 이루어진 후에야만 비로소 없어질 수 있다.
17절은 율법과 선지자를 말하고 18절은 단지 율법만을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율법은 단지 천년 왕국까지를 말하나, 선지자는 영원(이사야가 일찌기 새하늘과 새땅을 말하였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선지자가 말한 것이 모두 온전케 되면 천지는 없어질 것인데, 그렇다면 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뒤집어 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주님의 말씀은 매우 타당하여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율법이 얼마나 존엄한 것인지를 볼 수 있다.
19절의 「그러므로」는 윗 문장을 잇는 것이다. 19절의 「계명」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에서의 계명은 윗 구절에서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지 산에서의 교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의 「이」라는 글자는 윗 구절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율법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한 종류는 의례(儀禮)적인 율법이며 다른 하나는 도덕적인 율법이다. 예를 들어 응당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의례적인 것에 속하며, 마땅히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은 도덕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다. 도덕적인 율법은 의례적인 율법보다 더 중요하다. 주님은 세상에서 이 두 종류의 율법에 대하여 그분의 방법을 갖고 계셨다.
마태복음 22장 37절부터 40절까지와 9장 13절은 각각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주님은 우리에게 도덕적인 율법이 어떠한 율법보다 중요한 것임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한다. 주님은 율법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과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의 차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의례적인 방면에 있어서 매우 완전하나 주님은 여전히 그를 책망하신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짜서는 안되는 것, 어린양 고기와 그 젖을 섞어서 음식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들은 모두 계명 가운데에서 이차적인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9절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매우 큰 책임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어떠한 사람을 막론하고 그 자신이 행위 면에서 이 계명 중 가장 작은 하나를 없애고,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가르치지 않으면 그는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로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수많은 잘못된 교훈이 항상 잘못된 행위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침례는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반드시 받을 필요가 없다며 그 자신은 침례받지 않겠다고 결정한다면, 나중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침례에 관하여 물어 본다면 그는 침례받지 않아도 된다는 체계적인 교리를 말하게 될 것이다. 그가 이러한 잘못된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또한 이러한 잘못된 교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로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롬 6:14). 사도 시대때, 어떤 몇몇 사람들은, 만약 모세의 규례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형제들에게 가르쳤다. 베드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중에 형제들에게, 우상의 더러움과 음행 그리고 교살된 가축과 피를 끊어버릴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할례받지 않아도 된다고 편지하였다(행 15:1-29).
또다른 한면에서 주님이 아직 죽지 않으시고 부활하시기 전 지상에 계실 때, 주님은 모든 의례적인 율법의 나타남이었기에 당시에 제자들은 여전히 율법을 따라 행하였는데, 그 예를 들면 주님과 베드로가 그 당시에 모두 인두세를 내셨다는 것이다(마 17:17). 주님이 죽으시자 율법이 비로소 정지되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모든 의레적인 율법은 다 성취되었고 종결되었다. 여기에는 시대적인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성령이 이미 강림하고 교회가 산출되었는데도 베드로는 여전히 의례적인 율법을 지키며 레위기 11장에 언급된 부정한 식물을 먹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가르치셨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9-16). 신약에는 변화가 있다. 갈라디아서는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율법이 할례이지만, 바울은 매우 엄격하게 그들에게 말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갈 5:2-3). 바울은 여기에서 당신이 단지 한 번 할례를 받았다면 당신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한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당신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두 가지 중 어느 하나 안에 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거절하는 그러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마태복음 5장 19절의 「천국」은 교회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천년왕국 안에서 왕 노릇 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의례적인 율법을 지킬 필요는 없으나 아마도 도덕적인 율법은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고나서, 행위와 율법에 의하여 거룩케 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행하는 것이 구원받는 조건이 아니며 또한 우리 일생의 생활의 원칙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5장 20절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어떤 바리새인에게 의가 있다는 것은 바로 그 바리새인이 도덕적인 율법을 지켰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바리새인의 의를 가졌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주님은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구절들 안에서(17-20) 두 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는데, 18절은 제자들에게 율법은 폐할 수 없으나 온전케 될 것이라고 이르셨고, 20절은 제자들에게 그분의 오심이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17절에서 율법은 소극적인 방면으로는 폐하여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적극적인 방면으로는 온전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8절부터 19절까지는 율법에 대한 주님의 태도가 소극적인 방면으로는 폐하지 않을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20절은 율법에 대한 주님의 태도가 적극적인 방면에서 온전케(충만하여 가득하다)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두 방면이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두 차례에 걸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0절의 『너희의 의』는 율법의 칭의와 구별된다. 하나님의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믿음으로 얻은 것이다. 너희의 의는 자신의 행위이며,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 만약 칭의를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죄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제자들에 대하여 말한 것이므로 여기에서의 의는 결코 하나님이 주신 의가 아니라 믿는이들 스스로 행한 의를 말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장 선한 행실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율법의 의를 행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러분(제자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므로 응당 율법의 의를 초월하여야 하며, 여러분의 표준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표준보다 높아야 한다. 율법을 지키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교훈을 가지고 있다. 만약 당신이 지키지 않는다면, 당신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한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영생은 모든 믿는이들이 다 얻은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모든 믿는이들이 다 들어갈 수 없다. 영생을 얻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의로 인한 것이며,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이 행한 의로 인한 것이다. 영생은 일단 믿기만 하면 얻는 것이며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으나, 천국은 이긴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 영생은 현세에서 얻을 수 있으나 천국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세워진다. 요한복음에서는 아홉 번에 걸쳐서, 믿으면 영생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마태복음 11장 12절에서는,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말한다. 영생을 얻는 것은 믿자마자 소유하게 되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날마다 추구해야 한다.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 가운데에서 선택하신 것이며,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영생을 얻은 사람 가운데에서 선택되는 것이다. 영생을 얻는 것에는 크고 작음의 차이가 없으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는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구원 받았기에, 만약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왕 노릇 하기를 원한다면 성령에 따라 행한 의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 자신이 하신 말씀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워치만 니 전집 1집 2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