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영원성
그리스도
Hannah , 2009-03-10 , 조회수 (4258) , 추천 (0) , 스크랩 (0)

 

 

십자가의 영원성

 

 

> 구약의 사사들이나 선지자들은 다 낙원에 갔나요?
> 제가알고있기로는 메시야를 바라는 믿음에서 구원을 얻는것으로 
> 알고있는데요


> (행4:12)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 이말씀이 구약에도 적용되는것인가요
> 그렇다면 구약에는 예수님을 몰랐으니 구원을 받지않았다는건데
> 성경말씀으로 풀이해주시면 더감사하겠습니다^^;
> 어디서 어느 형제님께서 
> 동물이 대속하는걸로 구약엔 구원을 얻는다는걸로 얘기하시던데 

> 그럼 삼손은 구원받았나요;? 
> 궁금합니다... 자세히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답변 :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약의 믿는 이들과 신약의 믿는 이들의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사람과 왕래하는 조건을 뜻하는 것으로서, 구약의 믿는 이들은 옛 언약에 따라, 신약의 믿는 이들은 새 언약에 따라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이 죽으면 가게 되는 낙원은 "아브라함의 품"(눅 16:23)이라고 불러지는 것으로 보아 구약의 믿는 이들도 신약의 믿는 이들과 동일한 장소의 낙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에 참고할 만한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의 영원성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 속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실로 한 면으로 슬프지만 한 면으로 기쁘다. 우리에게 있어 주님의 십자가는 단지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아니라 주님의 완전한 구속의 역사와 구속의 역사를 통해 이룬 완전한 구원을 대표한다.
갓 주님을 믿고 나서 나는 종종 구약 시대에는 주 예수님이 아직 죽으시지 않으셨는데 그때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를 생각했었다. 그때 나는 주님 안에서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이 문제는 나에게 있어서 실로 난해한 것이었다.


근래 나는 많은 믿는 이들에게서 십자가의 신선한 능력을 그다지 많이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주 예수님의 죽으심은 마치 아주 오랜 옛날의 일―천구백 년 전― 이어서 어떤 능력도 없는 것 같다.
내가 진심으로 나의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최근 그분이 나에게 특별히 십자가의 영원성에 대하여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사상으로 인하여 나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마땅히 십자가의 "영원성"에 대한 교훈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를 신선하게 안다면 더 많은 감동을 받지 않겠는가?

주 예수님의 죽으심과 옛 언약과 새 언약과의 관계
우리는 먼저 히브리서 9장 15절부터 17절까지를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유언(원문에서 언약과 동일한 단어임)은 유언(언약)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언약)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언약)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앞의 몇 구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옛 언약과 새 언약과의 관계를 말해 준다. 옛 언약에 속한 사람들도 오늘날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범했다. 죄로 인해 그들에게 구주가 필요했다. 범죄하고 하나님의 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죄의 형벌을 담당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분의 긍휼로 인하여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없으신데,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 자신을 불의 가운데 두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대속의 방법을 세우셨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의 죄를 대신 속량하는 여러 가지 희생제물이 많았다. 생축의 대신 죽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용서를 받을 수가 있었다. "속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가리다"라는 의미가 있다. 구약에서 모든 속죄는 단지 생축의 피로 사람의 죄를 가린 것에 불과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함이라"(히 10:4)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대신하여 죽게 하시려고 그분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분은 한 번 자신을 드림으로 영원한 속죄의 구원을 이루셨다.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었기 때문에, 구약에서 황소와 염소의 피로 없이하지 못한 죄를 그의 죽으심으로 제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역사의 큰 전환점으로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시기를 나누었다. 그분이 죽지 않으셨을 때는 구약이었고 그분이 죽으시고 나자 신약이 되었다. 우리에게 있는 성경은 바로 이것을 말한 책이다.


이 세 구절의 성경 말씀은 주 예수님의 죽으심과 새 언약과 옛 언약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15절은 그분이 어떻게 중보가 되셨는지를 표명하고 있으며 16절, 17절은 그분이 어떻게 유언을 남긴 사람인지를 표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옛 언약에 속한 사람들이 다 죄인인 것과 그들이 자기를 속량하기 위해 하나님께 생축을 드렸지만 그것들이 그들의 죄를 지적할 뿐 그들의 죄를 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시에도 그들의 죄를 사해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수많은 생축들의 피 안에서 멀리 그분의 아들의 피와 그 피의 효력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셨다면 옛 언약의 죄의 문제도 해결되지 못한다. 죄는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했다. 그분의 죽음은 옛 언약의 죄까지도 다 제거하셨다. 다른 각도에서 우리는 또한 주님의 죽음이 옛 언약과 갖는 관계를 볼 수 있다. 모든 언약은 그 자체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옛 언약에도 그 요구가 있었다. 이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옛 언약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셔야 했다.


옛 언약의 모든 조건들을 다 이행함으로 옛 언약의 시대를 끝내고 새 언약을 시작하셔야 했다.
죽으심을 통해 옛 언약의 때에 사람들이 범한 모든 죄들을 속량하심으로 그분은 새 언약의 중보가 되셨다. 그분이 새 언약의 중보가 되신 것은 그분이 옛 언약에 속한 사람들의 죄를 속량하신 것에 근거한다. 본래 사람에게는 영원한 기업의 약속이 있었지만 죄로 인하여 그것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의 죽음으로 죄를 사하셨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영원한 기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중보가 되신 주 예수님께서는 한 방면에서 옛 언약의 죄를 끝내셨고 다른 방면에서는 새 언약의 축복을 가져다주는 일을 시작하셨다.


이제까지 우리는 그분이 중보가 되심에 대해 말했고, 이제부터는 그분이 남긴 유언에 대해 살펴보자. 유언은 원문으로 언약이라는 뜻이다. 앞에서 말한 언약의 율법에 관하여, 범법한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죽임을 당하셨다. 언약의 유언에 대해 말해 보자.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은 후에 그가 유언을 받을 사람에게 모든 재산을 줄 것을 정한다는 뜻이다. 주 예수님은 유언을 남기신 분이시다. 금생과 내생의 모든 축복은 다 그분께 속한 것이다. 옛 언약 때에 사람들이 범한 죄를 담당하기 원하셨던 그분이 또한 이 언약(유언) 안에 약속하신 것을 그들에게 주기를 원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의 죄과를 속량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사람들이 유언을 받게 하기 위해서도 죽으셔야 했다(유언은 말한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는 효력이 없고 유언한 사람이 죽을 때 비로소 효력이 생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옛 언약과 새 언약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본다. 그분이 죽지 않으시면 옛 언약도 새 언약도 없다. 그분이 죽지 않으시면 새 언약은 완전하지 않은데 그것은 옛 언약의 율법의 요구가 만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죽지 않으셨다면 그분이 유언한 축복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전해질 수 없기 때문에 새 언약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옛 언약을 종결시키고 새 언약을 세우셨다. 실로 새 언약은 그분의 피로써 세운 것이다.

구약(옛 언약)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앞에서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제거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옛 언약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 사람이 범한 죄는 오직 사람만이 속량할 수 있다. 생축이 비록 순전하고 조금도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위해 죄를 속량할 수 없다. 그렇다면 레위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왜 생축의 피로 속죄할 것을 약속하셨는가?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다. 율법의 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7).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제사나 희생은 다 그리스도를 가리켰고 하나님도 모든 제사들을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여기셨다. 많은 희생들의 피 안에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피를 보셨고 많은 소와 양들 안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셨으며 많은 희생제물 안에서 그분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보셨다. 그분이 그 제사들을 받으셨을 때 그분은 그것들을 그분의 아들의 죽음의 효능으로 여기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죄가 사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흠없는 소와 양들을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로 보셨기 때문에 그분은 그들의 바치는 제사로 인하여 그들을 사해 주실 수 있었다. 매번 희생제물이 죽임을 당할 때마다 그것은 장래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골고다에서 단번에 속죄제로 드려져 영원한 구속을 이루실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주님이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대신하여 죄를 속량할 수 있으시다. 주님은 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량할 수 있으시다.


구약에서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장래 십자가에 못 박히실 그리스도를 믿었던 것이다. 그들의 모든 제물은 장래 오실 분인 구주를 앙망한 것이었다. 비록 그때 주 예수님은 아직 태어나시지 않으셨지만 믿음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믿음은 멀리서 대속하시는 구주를 봄으로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때가 차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그들이 전에 믿은 것들이 이제는 실제가 되었다.

새 언약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우리는 새 언약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죽으셨고 구원은 이미 성취되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믿음으로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는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를 대신하여 죽은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실로 육신의 눈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볼 때 이것은 영광스러운 진리이다.
우리는 시간이 하나님을 속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드시 죽게 될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몇십 년은 적은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 수천 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비록 우리는 시간의 제한을 받지만 하나님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성경은 주 예수님이 단번에 자기를 드려 속죄를 이루셨다(히 7:27)고 말한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수천 년 이전의 사람들의 죄와 수천 년 이후의 사람들의 죄를 다 속량하실 수 있다. 수천 년이라고 말했지만 설령 이 세상이 몇천만 년 동안 지속된다 하더라도 그분의 속죄는 여전히 효력이 있을 것이다. 그분은 영 단번에 이 일을 이루셨다. 이제 죄인이 구원받으려면 다시 그분이 그를 대신하여 죽을 필요가 없고 주님의 죽으심의 효능만 받아들이면 된다. 이뿐 아니라 우리의 믿음도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믿음은 사람을 영세(永世)의 참된 사실 안으로 이끌 수 있다. 구약에 있는 사람들이 장래의 구주를 앙망함으로 구원을 받은 것 같이 우리도 과거의 구주를 앙망함으로 구원을 받는다. "과거"는 어떤 일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구약의 사람들은 앞을 보았고 우리는 뒤돌아본다. 구약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미래의 구주를 영접했는데 우리가 어찌 믿음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구주를 영접하지 못하겠는가?


우리가 히브리서 9장 12절부터 15절까지의 세 "영원"을 연결하여 읽어 본다면 그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주님은 영원한 구속을 이루기 위해 영원한 영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하나님께 드려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셨다. 주 예수님이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분을 믿으면 이 구속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십자가의 가치가 사람의 관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구속을 영원한 것으로 보시기 때문에 우리같이 불의한 사람들도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실 그대로 믿어야 한다. 그분의 말씀에 따라 그분의 아들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구원받게 된다. "하나님과 화목하라"(워치만니 저, 한국복음서원)의 책 중에서 제8장의 "십자가의 영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