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왜 쓸개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셨는가?
그리스도
Hannah , 2009-03-10 , 조회수 (17999) , 추천 (0) , 스크랩 (0)

 

 

주님은 왜 쓸개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셨는가?

 

 

십자가와 쓸개 탄 포도주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마 27:34).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눅 23:33-34).

예수님이 사람들에 의하여 골고다로 인도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할 때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그 당시에 십자가의 형벌은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었으므로 당시의 율법은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쓸개 탄 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하는 것을 허락했다. 쓸개 탄 포도주는 오늘날의 외과 의사가 사용하는 마취제만큼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에는 쓸개 탄 포도주는 사람이 느끼는 고통을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주 예수님의 특별한 점은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려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모두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려 했지만 오직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마시려 하지 않으셨다. 십자가-사람의 십자가-에 달린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고통을 느꼈으므로 고통을 덜어 주는 쓸개 탄 포도주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쓸개 탄 포도주를 거절했다. 만약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쓸개 탄 포도주를 마셨다면 그 십자가도 사람의 십자가이지 우리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는 쓸개 탄 포도주가 없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안에는 쓸개 탄 포도주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쓸개 탄 포도주를 그분의 입 근처에 갖다 대었기 때문에, 그분도 맛보고 그것이 쓸개 탄 포도주임을 알았고 고통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시려 하지 않으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라는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십자가에는 고통의 느낌이 발생했지만 주님께는 그러한 느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이것은 신체상의 느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체상으로는 그분에게도 고통의 느낌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고통의 느낌이 충만했기 때문에 쓸개 탄 포도주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이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에서 못 박힐 때 영적인 면에서 그러한 고통의 느낌이 없었기 때문에 쓸개 탄 술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누가복음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음을 말해 준다. 이것을 가리켜 쓸개 탄 포도주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이 사람은 굴욕과 학대를 받고 채찍을 맞았고 사람들의 수치와 핍박과 거절을 받았으며 사람들의 심판과 정죄와 극도로 잔해함을 받았다. 그러나 그분은 머리를 들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그분 안에 고통의 느낌과 원망하는 느낌과 핍박받은 느낌이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람에게는 쓸개 탄 포도주가 필요하지 않았다. 속에 고통의 느낌이 없는 사람이므로 그 고통의 느낌을 감소하기 위한 쓸개 탄 포도주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통의 느낌이 있는 사람, 쓸개 탄 포도주가 필요한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이 표면적으로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하나님 외의 안위와 희락을 결코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질 때 그의 이웃들이 모두 알게 된다. 많은 사람이 이층에서 십자가를 질 때 아래층에 있는 사람이 알게 된다. 많은 사람이 그의 얼굴과 표정과 소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보라, 내가 여기에서 십자가를 지고 있다.’라고 전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소문이 나면 그것은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문이 나자마자 십자가는 없는 것이다. 그 소문이 바로 쓸개 탄 포도주이다. 사람은 안위와 사랑을 찾는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고통이 있을 때 남의 동정을 구한다. 이러한 굶주림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만 이것은 결코 십자가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가장 큰 난점은 하나님이 그의 희락이 아닌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밖에서 희락을 구하게 된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밖에서 안위를 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쓸개 탄 포도주라 부른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고통을 받을 때 세 가지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의 느낌이 다른 사람을 향하고, 어떤 사람은 그의 느낌이 안으로 향하고, 어떤 사람은 그의 느낌이 밑으로 향한다. 다른 사람을 향하는 것은 화를 내고 원망하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안으로 향하는 것은 상처를 받아서 자신을 동정하여 자신은 주님을 따르고 있고 주님이 고통받았던 것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밑으로 향하는 것은 억지로 느낌을 밑으로 누르는 것으로서 그 결과는 소극적으로 변한다. 우리는 매우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자신을 동정하고, 쉽게 소극적으로 되어 버린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 어떤 사람들은 소극적인 것을 승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소극적인 사람의 느낌에도 역시 쓸개 탄 포도주를 바라는 원함이 있음을 모르고 있다. 소극적인 것도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사람이 안에서 실망했기 때문에 소극적인 것이고, 사람의 요구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소극적인 것이다. 소극적인 것은 십자가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느낌을 억지로 아래로 억누르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 중에서 고통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진실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그들이 고통을 받을 때에는 몇 가지 다른 표시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므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표면상으로 한 마디 말도 없이 정말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인 같지만 남모르는 곳에서는 원망의 말을 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항상 고통을 받은 후에 많은 원망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아직 모르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안에 고통의 느낌이 충만하기 때문에 쓸개 탄 포도주가 필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받아도 원망을 하지 않는다. 말로나 마음으로나 원망은 없지만 울음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십자가는 피를 흘리고 자신을 버리는 곳이다. 십자가는 눈물을 흘리고 자기를 동정하는 곳이 아니다. 자신을 동정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우는 것은 차마 자신이 고통을 받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만이 울 뿐 십자가에는 눈물이 없다. 약간의 고통을 받으면 곧 상처를 받고, 약간의 손해를 받으면 곧 손해를 느끼는 사람은 아직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고 득의해하는 사람으로, 거짓으로 승리자인 체 하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사람도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그러한 표시도 사람의 주목을 받으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내가 비록 고통을 받지만 나는 아직도 찬송을 부를 수 있고 찬미할 수 있다. 나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사람의 칭송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쓸개 탄 포도주이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의 실제는 없으면서 십자가를 매우 잘 말할 줄 안다. 그는 이것도 십자가의 체험이요 저것도 십자가의 체험이요, 이렇게 당한 일도 십자가이고 저렇게 당한 일도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사람이 바라는 것은 사람의 긍휼이다. 그의 마음이 괴로워하는 것은 다른 것보다도 그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없는 데 있다. 그의 눈이 계속 주변을 향하며 바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와서 그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도 쓸개 탄 포도주를 마셔야 할 사람이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십자가라 하는가? 십자가는 느낌이 다른 사람을 향하는 것도 아니고, 안으로 향하는 것도 아니고, 밑으로 향하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선택한 길이 모두 좋은 길임을 감사드리며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십자가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나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십자가는 능히 용서할 수 있는 것이고, 스스로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니고,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는 오직 한 가지 느낌, 즉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만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마음을 갖는 것이고, 하나님이 어떠한 것을 요구하시든지 모두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큰 분임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이 사랑임을 아는 것이다.

참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하도록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의 긍휼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긍휼을 구하고, 사람의 안위를 구할 때 거기에는 단지 쓸개 탄 포도주가 있을 뿐 십자가는 없다. 우리의 주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고, 십자가는 우리가 주님을 경배하는 곳이 되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해골의 곳에 있었지만, 해골의 곳이 주님에 대한 찬미의 중심지로 변했다. 어떤 형제는 주님을 위하여 거기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그의 손이 되고 발이 되려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십자가의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계속 이것을 원하고 저것을 원한다면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님이 쓸개 탄 포도주를 거절한 것은, 그분이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분은 왜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가? 그분 안에 이미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안에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안위할 수 있다. 바울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라고 말했다. 바울 같은 사람은 능히 다른 사람을 안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의 안에는 그를 만질 수 있는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의 환난 중에서도 능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한 것을 볼 수 있다(행16:25). 이 두 사람은 쓸개 탄 포도주가 필요 없는, 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었다. 또한 스데반이 그러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돌로 맞을 때에도 하나님께 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구할 수 있었다(행 7:59-60). 그에게는 자신을 위한 고통의 느낌이 없었기 때문에 쓸개 탄 포도주가 필요 없었다. 그는 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십자가는 어떠한 고통과 어떠한 어려운 일이 당신에게 떨어진다 해도 그것에 의하여 침해받지 않고 도리어 찬송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거기에서 계속 무겁고 어려운 것을 느낀다면, 이것은 십자가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매일, 무엇이 십자가인지를 알고 쓸개 탄 포도주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도록 하나님께 구하자.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고 찬미할 수 있도록, 쓸개 탄 포도주를 구하는 데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께 구하자. (워치만 니 전집 제 2집 17권,제 18 장)


골리스의 이야기

골리스(Golis)는 중세의 좋은 형제이다. 그는 어느 수도원에서 주방장 노릇을 하였다. 매번 수도원에서 집회가 있으면 다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으므로, 골리스는 십 일간 먹어야 할 쇠고기, 양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야채 등을 준비해야 했다. 수도원은 산 위에 있었으므로 오르락내리락하며 물건을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도 설교를 듣고 싶었으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음식을 장만하는 것 때문에 설교 들을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주님은 그에게 빛을 비추사 그로 하여금 십자가는 주는 것이지 얻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안배임을 알게 하셨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보고 회개했다. 이럴 때 그는 원장의 목소리가 쉰 것을 알고 안타까워하며 따로 죽을 준비하여 원장이 저녁 임무를 마친 뒤 먹게 했다. 이 사람은 십자가를 질 때 왼뺨도 돌려 대어 사람으로 때리게 했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이후로 많은 이들의 축복이 되었다.(워치만 니 전집 2집 24권, 제 122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