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일곱 마디의 뜻은?
그리스도
Hannah , 2009-03-10 , 조회수 (4494) , 추천 (0) , 스크랩 (0)

 

 

주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일곱 마디의 뜻은?

 

 

그리스도의 못 박혀 죽으심은 사람에 의해 못 박히심과 하나님에 의해 못 박히심의 두 방면이 있다. 사도행전 2장 23절, 36절, 3장 15절은 사람이 그분을 못 박았음을 말하며 이사야 53장 6절, 10절은 하나님이 그분을 못 박았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 가운데 어느 부분이 사람에 의해 행해진 것이고 또한 어느 부분이 하나님에 의해 행해진 것인가?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사람의 못 박음』과 『하나님의 못 박음』이라는 두 가지의 측면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일곱 가지의 말씀으로부터 볼 때, 어느 부분이 사람에 의해 행해진 것이고 어느 부분이 하나님에 의해 행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시간을 우리 사람들의 시간으로 계산하여 보면 총 여섯 시간이었다. 주님은 처음 세 시간 동안에 세 마디를 하셨고, 나중 세 시간 동안에는 네 마디를 하셨다. 주님은 왜 처음 세시간 동안 그 이상의 말씀을 하시지 않으시고 그 이하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까? 우리가 자세히 읽어본다면 처음 세 시간은 사람에 의한 것이고 나중 세 시간은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세 시간은 오전 아홉시부터 정오까지로(마 15:25), 사람들은 주님을 놀리고 채찍질하고 조소하고 모욕을 주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것들은 모두 사람이 그분에게 가한 것이다.
나중 세 시간은 정오부터 오후 세시까지로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정오부터 오후 세시까지 온 땅이 어두워졌는데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둘로 찢어졌는데 이것 또한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다. 땅이 진동하였고 반석이 붕괴되었으며 무덤 또한 열렸는데 이 모든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다(마 27:45, 51-52).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다.

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전반부 시간에 사람들은 그분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였고, 나중 시간에서는 하나님이 그분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셨다. 전반부 시간 동안 사람은 하나님을 증오하는 마음을 그분에게 다 쏟아 부으며 십자가에서 그것을 나타냈고, 나중 시간 동안 하나님은 그분이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모두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십자가가 사랑과 증오의 접촉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먼저 주님이 처음 세 시간 동안 말씀하신 세 마디를 보기로 하자.
첫번째 말씀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하나님이 무죄한 사람을 살해한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하실 수 있는가? 주 예수는 어떻게 이와같은 기도를 할 수 있었는가? 만약 하나님이 이 기도에 응답하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주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공의로운 하나님은 단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데, 왜냐하면,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고 말하며, 또한 오직 십자가의 위치에서 주 예수만이 이러한 기도를 하실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주 예수의 기도는 불의한 것이며 하나님의 용서 또한 불의한 것이다.

두번째 말씀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이다. 한 강도가 어떻게 낙원에 들어갈 수 있는가? 만약 강도가 모두 낙원에 들어간다면 그 낙원은 무슨 낙원이 되겠는가?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강도는 낙원 안에 들어갈 수 없으며 사람들이 『선한 사람』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조차도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롬 5:12). 주 예수가 회개한 강도에게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고(딤전 2:5), 그분이 하나님의 어린양이기 때문이다(요 1:29). 그분은 영원한 영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께 흠 없고 티 없는 분으로 드렸기 때문에 그분의 피는 사람의 양심을 정결케 할 수 있으며, 사람의 죽은 행위를 제거할 수 있다(히 9:14). 그 강도는 낙원 안에서 더이상 강도가 아니라, 양심이 깨끗케 되었고 죽은 행위가 제거된 사람이다. 오늘날 무릇 그분을 받아들인다면, 다시 말해서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 또한 이와 같다.

세번째 말씀은 다음 말씀이다. 『그 모친께 말씀하사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간에는 새로운 관계가 발생되었는데, 즉 성도들과 함께 동일한 나라요 하나님의 권속이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피차 교통할 수 있게 하였다. 당시의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인하여 마리아를 그의 어머니로 모실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바울과(롬 16:13) 역대의 모든 성도들로 그와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 동일한 생명은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새로운 관계를 갖게 했다.
주 예수께서 이 세 마디를 끝마친 후 온 땅이 흑암으로 덮였다. 하나님은 주님의 기도를 들으셨다. 하나님은 온세상의 사람들의 모든 죄를 주 예수님에게 돌리셨다. 하나님은 죄없는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이 이와같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은 그분의 은혜로 인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의로 인한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여 한 푼도 남김없이 우리를 대신하여 빚을 다 갚으셨다.
대략 오후 세시 경에 주님은 또다시 아래의 네 가지 말씀을 하셨다.

네번째 말씀은 다음과 같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많은 순교자들이 사람의 핍박을 받거나 극형을 받을 때에 그들은 조금도 가련하고 불쌍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장 가까이 계심을 느꼈다. 우리의 주님은 일생 동안 하나님께 순종하셨는데, 만약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사람의 핍박을 받은 것에 불과하다면 하나님이 그분에게 더 가까이 계시지 않았겠는가? 사람이 그분을 버릴 때에 어떻게 하나님도 그분을 버릴 수 있었는가?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우리의 주님은 십자가에서 결코 일종의 순교의 죽음을 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며, 하나님이 죄를 그분의 몸에 지우신 것이고, 하나님이 주님을 못 박아 죽이신 것이다. 주님이 세 마디를 하신 후에 하나님은 주 예수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사람의 죄를 그에게 짊어지게 하셨으며, 주님은 하나님이 그분을 버리셨음을 알았다.

다섯째 말씀은, 『내가 목마르다』(요 19:28)이다. 목마르다는 것은 지옥에서의 광경이다. 목마름은 지옥의 고통스러운 특징이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말하고 있는 부자는 음부의 불꽃에서 한 방울의 물조차 얻기 힘들었다. 지옥보다 더 목마른 곳은 없다. 주님은 그 당시 죄를 담당한 연고로 인해 사람을 대신하여 지옥의 형벌을 받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다(히 2:9).

여섯째 말씀은 다음 말씀이다. 『다 이루었다』(요 19:30). 이 말씀은 속죄의 사업을 다 이루셨음을 말한다. 주님은 이미 사람을 위해 죄를 담당하셨고 사람의 죄를 위해 형벌을 받으셨다.

일곱째 말씀은 다음 말씀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주님께서 먼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죄를 담당하는 위치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버지여!』라고 말한 것은 속죄의 사업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교통이 즉시 회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버렸고,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다. 주님은,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 10:18)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백 개의 십자가가 있을지라도 주님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우리의 죄는 가장 공의롭게 주님에 의해 제거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공의에 따라 우리를 용서하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이미 죽었고, 이미 속죄제가 되셨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를 용서하셔야 한다. 혹은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질문할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하여 구속의 역사을 이루셨다면 어떻게 주님이 죽기 이전에도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었는가요?』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비록 아직 죽지 않으셨어도 하나님은 이미 십자가를 성취된 사실로 간주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15절과 6장 54절은 각각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이 말씀들은 모두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사람들이 그분을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계시록 13장 8절은 주님이,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 …』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창세 이후로 죽임당한 어린양이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공간의 제한이 없으며(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시간의 제한이 없다(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사람을 용서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뜻하지 않게 살인을 범했을 경우 그가 도피성으로 도망하였다면 아무도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었고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민 35:25-28). 이것은 그리스도가 죽기 이전에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숨어 있다면 안전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가 죽은 후에 자유를 얻게 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워치만 니 전집 제1집, 제20권, 질문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