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인한 칭의와 부활로 인한 칭의의 차이점은?
그리스도
Hannah , 2009-03-10 , 조회수 (4181) , 추천 (0) , 스크랩 (0)

 

피로 인한 칭의와 부활로 인한 칭의의 차이점은?

 

 

> 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는다(롬 5:9)는 것은 무슨 뜻인가? 또한 부활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는다(롬 4:25)는 것은 무슨 뜻인가?

로마서 5장 9절과 4장 25절은 각각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두 구절의 말씀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가? 우리는 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또한 부활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피로 인한 칭의의 범위가 얼마나 넓고 부활로 인한 칭의의 범위 또한 얼마나 넓은지를 상고해 보자.
칭의는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당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당신을 의롭고 완전한 존재로 보신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지 않았을 때에도 결코 하나님의 칭의를 얻지 못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시며 가장 완전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분에게 나아오는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너희는 구원받은 죄인일 뿐만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면 죄의 더러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의의 옷을 입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온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열납하시는 것과같이 그를 열납하신다.

피로 인한 칭의와 부활로 인한 칭의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우리의 범죄 문제가 해결되려면 주 예수의 피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분이 피를 흘려 범죄들을 소멸하셨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열납을 받으려면 주 예수의 부활에 의지하여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범하고 있는 가장 큰 잘못은 죄에 대한 용서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아 기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단지 죄의 용서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용서가 구원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단지 천당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단지 천당의 문입구에 서 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가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장 영광스러운 진리, 즉 우리가 하나님의 앞으로 들림 받을 것이며 또한 그분의 눈에 우리가 열납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1장 6절은,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열납받게 되었다.

죽음에 임박하여 구원받은 강도는 사도 요한,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과같이 하나님께 열납받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무랄 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흠도 없다. 무엇을 흠이라고 하는가? 예를 들어 나의 손이 칼에 베였다면 나중에 비록 상처가 아물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국은 남아 있다. 현재 아무런 위험은 없지만 그 자국은 여전히 과거에 어떤 사고가 있었음을 증명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국이 없는 단계까지 구원하실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전에 당신이 어떤 죄인이었던가를 회상하며 불안감을 느끼지 않게 하시기 까지 당신을 구원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완전하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구원하여 의가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

피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속량하는 것으로 객관적인 것이다. 피 또한 사람의 양심을 깨끗이 씻는다(히 9:14). 당신이 당신의 죄를 생각할 때마다 피가 이미 당신의 죄를 깨끗케 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신의 마음은 평안할 것이며 이것이 피의 주관적인 효능이다. 주 예수의 피흘리심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죄를 속량하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으며, 동시에 우리의 양심 또한 깨끗케 하셨다. 무엇을 양심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당신이 범죄하였을 때 항상 당신 안에서 죄를 지적하는 말을 하며 당신으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주님의 피는 당신의 양심을 깨끗케 할 수 있으며, 당신으로 하여금 다시금 죄를 느끼게 하는 양심을 갖지 않도록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항상 양심 안에서 고소를 받는다면, 이것은 결코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경홀히 여기는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의 양심은 다시는 과거의 죄로 하여금 고소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주님의 피가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였음을 믿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의 구주를 보지 않고 날마다의 죄를 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않고 매일매일의 죄를 보며, 그리스도의 역사를 보지 않고 날마다 자신의 죄를 본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더 죄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만약 당신이 주 예수를 앙망하고 그분이 행하신 역사를 믿는다면 당신은 그 죄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을 앙망하는 데 있지 결코 자신을 돌아보는 데 있지 않다. 만약 당신이 어떤 죄를 주의한다면 그 죄는 더욱 더 제거될 수 없으며 만약 당신이 주님을 앙망한다면 영광에 영광이 더하여져 주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다.


이전에 나이가 오십여 세 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20년전에 극히 불명예스런 죄를 범했으며 몇 개월 동안 계속했다. 비록 그녀는 회개 했었지만 하나의 참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사함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로인하여 줄곧 평안을 얻지 못했다. 어느날 그녀는 어떤 전도인을 만나서 그에게 그녀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늘 그 죄로 인하여 슬프고 평안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에게 요한일서 1장 7절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읽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이 구절의 마지막 문장―「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를 읽으 봅시다. 당신은 그 죄를 범하고 나서 다른 죄를 범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녀는 『다른 죄도 지었지만 다른 죄는 이미 보혈로 씻음 받았습니다. 오직 이 죄만 씻음받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의 성경에서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하고 있지 다른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 그녀와 함께 9절을 읽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읽고 나서 그녀에게 물었다. 『한분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하면 당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녀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자백했습니까?』 그녀는 『수십 번 수백 번 자백했지요』라고 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 깨끗케 하신다고 하셨고 당신은 이미 자백했으므로 당신의 죄는 깨끗케 되었습니다. 』그녀는 『나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만일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미 당신을 사하시고 깨끗케 하셨다면 당신이 여기서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자 그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함게 기도하고 나서 그는 그녀에게, 『성경에서 말한 것을 믿고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효과가 있지만 믿지 않고서 기도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간단한 말로써 그녀를 하나님께 의탁하며 하나님께서 그녀로 하여금 그녀의죄가 이미 사함을 얻고 깨끗케 되었음을 믿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녀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의 이전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믿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믿으며 당신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나의 죄는 이미 사해졌고 이미 깨끗케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후에 어떤 사람이 그녀를 보고서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는 『좋아요, 아주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점을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날마다 죄는 보지만 죄인의 구주는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역사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 죄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만일 당신이 주 예수를 앙망하고 그분이 이루신 역사를 믿는다면 당신은 그 죄를 잊어버릴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을 앙망하는 데 있지 자기를 회상하는 데 있지 않다. 만일 당신이 당신이 당신의 죄를 주목하면 할 수록 그 죄는 제거할 수 없으며 당신이 주님을 앙망한다면 영광에서 영광으로 화하여 주님의 형상으로 화할 것이다.

우리가 부활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적극적인 방면이다. 그분은 죽음으로부터 새 생명을 우리에게 분배하셨다. 이 생명은 의로우며 주님과 같은 의로운 생명이다. 이 생명은 죄를 범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보셨을 때 우리를 의롭다고 보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생명을 우리에게 분배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게 하였다(골 3:3). 주관적인 방면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가 거듭났을 때 얻은 것이며 이 생명은 바로 부활의 생명이다. 객관적인 방면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는 것과같이 바라보시는―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시면 또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와서 떨 필요가 없으며 「할렐루야!」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평안하고 거리낌 없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충만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당신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다음과 같은 찬송가가 있다. 『나는 하나님 가까이 있네. 하나님 바로 곁에 있네. 그보다 더 가까울 수 없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네. 그보다 더 큰 사랑은 나에게 있을 수 없네. 하나님이 아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나를 그렇게 사랑하여 주시네.』(한국복음서원 찬송 240장, C. Paget).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지위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양심이 고소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양심이 구멍나면 믿음은 새어나간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양심이 고소받으면 믿음은 약해진다.


우리가 예수의 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죄없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가 부활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있는 그리스도와같이 새로운 지위를 하나님 앞에서 얻게 하는 것이다.(워치만 니 전집 1집 제20권, 질문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