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만찬과 주의 상의 다른점은?
그리스도
Hannah , 2009-03-10 , 조회수 (4623) , 추천 (0) , 스크랩 (0)

 

주의 만찬과 주의 상의 다른점은?

 

 

주님의 만찬의 의미

A. 주님을 기념함

주님은 왜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셨는가? 주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만찬의 첫번째 의미는 주님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잊어버릴 것을 아신다. 우리가 얻은 은혜가 크고 얻은 구속이 놀랍지만 경험은 우리에게 우리가 그분을 잊어버린다는 것을 알려 준다. 새로 믿은 형제자매들은 갓 구원을 받았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주님의 구원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은 특별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분을 기념하라고 요구하신 것은 단지 우리가 잊어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의 기념이 필요하시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잊어버리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보다 얼마나 더 뛰어나신 분인지 모른다. 그분은 위대하신 주이시므로 우리가 기념을 하든 안 하든 그것에 개의치 않으실 수 있겠지만 그분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님이 그분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의 기념을 얻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자신을 낮추시어 구주로 오셨고 또한 그분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의 마음을 얻고자 하신다. 이뿐 아니라 그분은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의 기념을 얻고자 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그분을 잊어버리지 않고 한 주가 거듭될수록 그분 앞에 살면서 그분을 계속 기념하기를 원하신다. 그 목적은 우리가 이를 통하여 영적인 유익을 얻게 하려 함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분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은 그분의 사랑의 요구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자주 기념하지 않고 주님의 구속을 우리 앞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우 쉽게 세상의 죄악과 섞여지고 또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에서 다툼이 유발됨으로써 큰 손실을 입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기념하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기념한다면 우리는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은혜받는 방법 중에 하나로서 그것을 통해 우리는 주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당신이 주님을 기념할 때에 얻는 가장 큰 유익은 세상의 죄의 능력이 당신 몸에서 세력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며칠 간격으로 당신이 어떻게 주님을 영접한 것과 주님이 어떻게 당신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기억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세상의 죄악과 섞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떡을 떼어 주님을 기념함으로써 얻는 유익 중에 하나이다.



떡을 떼어 주님을 기념하는 것의 또 하나의 영적인 의도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다툼과 분쟁이 없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자신이 은혜를 받고 구원 얻었는가를 생각할 때에, 다른 형제도 그가 어떻게 은혜를 입고 구원 얻었는가를 생각할 터인데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 예수께서 당신의 천만 가지 죄를 사해 주신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 피의 구속함을 받은 다른 자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녀를 용서하지 않거나 그녀의 틀린 것을 기억하고 분파를 일으키겠는가? 이천 년 이래 교회 안의 많은 하나님의 자녀의 다툼은 주님의 만찬의 상 앞에 옴으로써 다 지나갔다. 심지어 많은 원수 되었던 것이 주의 상 앞에 나옴으로써 다 지나갔다. 이것은 주님을 기념함은 당신이 어떻게 구원을 얻고 사함 받았는가를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당신의 일만 달란트의 빛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당신은 당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만날 때 그를 붙들고 그의 목을 잡아서는(마 18:21-35) 안 된다. 모든 형제 자매들은 주님을 기념할 때에 자연히 자신의 마음을 넓히게 되고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수용하게 되며 또한 주님이 구속하신 모든 사람이 주님의 사랑하는 자일 뿐 아니라 그들의 사랑하는 자임을 보게 된다 주 안에서는 시기와 분쟁과 정죄함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은 당신의 많은 죄가 사함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형제 자매들과 다툴 수 있겠는가? 이는 합당치 않다 당신이 다투고 시기하며 정지한다면 결코 주님을 기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여 주님을 기념할 때마다 주님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과 십자가의 역사와 은혜 입은 모든 사람은 다 주의 사랑하는 자임을 복습시켜 주신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 주님은 당신뿐만 아니라 그분께 속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분의 사랑하시는 자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도 당신의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당신이 그분이 사랑하는 자를 미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우리는 결코 우리가 알지 못하고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기념할 수 없다. 여기서 주님이 우리에게 그분을 기념하라고 하신 뜻은 기념할 수 없다. 여기서 주님이 우리에게 그분을 기념하라고 하신 뜻은 우리가 골고다에서 그분을 만난 적이 있고 우리기 이미 그분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여기서 그분이 이루신 일들을 기념하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돌아가 유월절을 지켰듯이 우리는 돌아가 주님을 기념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왜 게으르고 열매를 맺치 않는가? 이는 그들의 과거의 죄가 씻어진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벧후 1:8-9).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기념하고 사랑하며 그분을 자주 기념하기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이 잔, 곧 새 언약을 세우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그분의 피를 기념하고 우리를 위하여 버리신 그분의 몸인 이 떡을 기념해야 한다. 이것이 떡을 뗄 때에 우리가 주의해야 할 첫째 항목이다.



B 주의 죽으심을 표명함

주의 만찬에는 또한 두번째 의미가 있다. 고린도전서 11장 26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표명하는 것)이니라』(원문 참조). 당신이 이렇게 주의 떡을 먹고 주의 잔을 마시는 것은 주의 죽으심을 표명하는 것이다. 「표명」이라는 말은 「선포」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데 그 뜻은 사람들이 알도록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분의 만찬을 먹으라고 하신 것은 다만 그분을 기념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그분의 죽으심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다.

이 떡과 잔이 왜 주의 죽으심을 표명하는 것인가? 본래 피는 육신 속에 있다. 피와 살이 갈라졌다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당신이 이 잔 속에 있는 포도주를 볼 때에는 피를 보게 되고 이 떡을 볼 때에는 살을 보게된다. 주님의 피가 한 쪽에 있고 주님의 살이 다른 쪽에 있으며, 피와 살이 나누어졌다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표명한다. 이 집회에서 당신은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이 당신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피가 살 속에 없는 것을 보고서 이것이 죽음임을 알게 된다.

이 떡은 무엇인가? 떡은 가루가 된 곡물이다. 이 잔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짓눌려 즙이 된 포도가 있다. 이 떡을 볼 때에 당신은 여기에 이미 가루가 된 곡물을 볼 수 있고, 이 잔을 볼 때에는 여기에 이미 짓눌려 짜진 포도가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여기에 죽음이 있음을 보여 준다 가루가 되지 않은 한 알의 밀은 떡이 될 수 없고 여전히 한 알의 밀이다. 짓눌려 짜지지 않은 포도송인는 포도주가 될 수 없다. 만일곡물이 자신을 보류한다면 떡이 안 나오고 포도가 자신을 보류한다면 포도주가 안 나온다. 여기에서 주님은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의 죽음을 표명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이미 가룬 된 곡물을 먹고 짓눌려 짜진 포도주를 마심은 바로 주의 죽으심을 표명하는 것이다.

주님을 아직 모르는 당신의 부모나 자녀나 친척을 만찬집회에 인도한다면 그들은 떡을 떼는 것을 보고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떡을 뗀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잔을 마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일 당신이 『이 잔 속에는 피가 있고 이 떡은 살이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이것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대답할 것이다. 한 쪽에 피가 있고 다른 쪽에 살이 있으며 피와 살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죽음이다. 우리는 여기 놓여져 있는 것이 주의 죽으심임을 사람들로 와서 보게 하거나 그들에게 지적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으로 복음을 전하고 집회소에서 복음을 전하고 은사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주와 만찬으로도 복음을 전한다. 우리가 주의 만찬을 진열할 때에 사람들이 그것을 형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그들 앞에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임을 안다는 것은 우주 가운데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사렛 사람 예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죽으신 것이 여기에 놓여져 있다.

사람들은 주 예수님이 이미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십자가의 표시―떡과 잔―는 여전히 여기 남아 있다. 떡과 잔을 볼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죽으심을 본다. 이 십자가의 표시는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알려 준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표명하는 것이니라』. 주 예수님이 다신 오신다는 이 말씀은 실로 우리의 위로이다. 이 말씀이 만찬과 연결되어 언급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당신은 만찬의 유익을 느꼈는가? 만찬은 하루의 마지막식사이다 우리는 매주에 한 번 만찬을 먹는다. 교회는 한 주 한 주를 거듭하면서 똑같은 만찬을 이천 년 간 먹어 왔지만, 이 만찬은 아직도 마쳐지지 않았다. 우리는 현재까지도 만찬을 계속 먹고 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는 더 이상 이 만찬을 먹지 않는다. 현재 우리는 그 날을 고대하고 있다.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주님을 보게 될 때에 만찬은 지나가게 된다. 우리가 주님을 본 후에는 더 이상 주님을 기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만찬의 첫번째 의미는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고, 두번째 의미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으심을 표명하는 것이다. 주님의 만찬은 우리가 그분 자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 처음부터 그분 자신을 보기 원한다. 사람이 주님 자신을 기념한다면 자연스럽게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게 된다. 사람이 주의 죽으심을 기념할 때에 사람의 눈은 자연히 왕국을 바라보게 된다. 곧 어느 날 주님이 오셔서 그분에게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다.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를 재림과 영광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주님을 기념할 때에는 언제나 머리를 들고서 『주여, 당신의 얼굴 뵙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얼굴을 뵐 때에 이 모든 것이 지나갈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기념하고 그분의 죽으심을 표명하며 그분이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으심을 선포하기를 원하신다.


2. 주님의 상의 의미

고린도전서 10장은 떡 떼는 것을 다른 용어로 말한다. 거기에서는 만찬이라고 하지 않고 상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마지막 저녁에 세우신 만찬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그분을 기념하고 그의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선포하라고 말한 것은 한 방면에 불과하다 교회의 떡을 뗌은 또 한 방면의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곧 고린도전서 10장 21절에서 말한 주님의 상이다. 주님의 상의 의미는 10장 16절 17절에서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여기에 두 가지 의미 곧 교통과 하나가 있다.

A. 교통

주님의 상의 첫번째 의미는 교통이다. 고린도전서 11장은 믿는이와 주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10장은 믿는이들 간의 관계를 말한다. 만찬은 우리가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고 상은 우리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다. 상은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며』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강요점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라 「함께」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다. 이 「함께 참여함」이 교통이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에서의 「잔」은 단수로 되어 있다. 마태복음 26장 27절에서 말한 「잔」도 단수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잔을 복수로 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수로 바꿀 때 그 의미가 변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 우리가 한 잔에 함께 참예하기 때문에 여기서의 의미는 교통이다. 만일 우리가 서로 친밀하지 않다면 결코 한 잔 안에서 당신도 한 모금, 나도 한 모금 마실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한 잔을 함께 마시고 한 잔 안에서 당신도 한 모금, 나도 한 모금 마시며, 이 많은 사람들이 한 잔을 마신다는 그 의미는 바로 교통이다.

B. 하나

두번째 의미는 하나이다.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임을 볼 수 있다. 10장과 11장에서 말한 떡은 의미가 서로 다르다. 11장의 떡에 대하여 주님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주 예수의 육신의 몸을 말한다 10장의 떡은 교회를 가리킨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우리는 이 떡이요 이 떡은 곧 교회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기념함과 표명과 교통 그리고 하나를 보도록 배워야 한다. 떡이 하나이듯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이다. 우리의 떡은 오직 하나이다. 당신이 한 조각 떼서 먹고 그가 한 조각 떼서 먹으며 우리 각 사람이 메서 먹은 모든 조각들을 거두어 들인다면 하나가 되지 않겠는가? 이 한 떡이 각 사람 속에 분산되었지만 성령 안에서는 여전히 한 떡이다. 물질적인 떡은 다 먹었으므로 되찾을 길이 없지만 영적으로 이 떡은 여전히 하나이고 성령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떡과 같이 본래부터 하나이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당신에게 한 부분 주셨고 또 그에게도 한 부분을 주셨으므로 이제 한 분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 속에 흩어져 거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나누어졌어도 나누어진 분이 아니라 여전히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리스도를 나누어 주셨고 그에게도 나누어 주셨지만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는 여전히 한 분이시다 떼어진 떡은 성령 안에서 나누어지지 않고 여전히 하나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떡을 떼는 것은 주님을 기념하고 주의 죽으심을 표명하며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통을 가지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하나인 것을 시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 한 떡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임을 표명한다.

주님의 상은 기본적으로 떡의 문제이다. 이 떡은 매우 중요하다. 이 떡을 광의로 말한다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표하고 협의로 말한다면 한 지방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표한다. 만일 몇몇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모였는데 그들이 몇몇 사람만 보았다면 그들의 떡은 다만 그들 몇 사람만 포함했으므로 그 떡은 너무 작고 부족하다. 그 떡은 반드시 한 지방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 곧 그 지방의 교회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뿐 아니라 이 한 떡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이 떡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하나를 표명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단독적인 교회를 세운다면 우리의 떡은 너무 작은 것이므로 교회를 대표할 수 없다. 만일 주님의 상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주님의 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떡을 뗄 수 없다.

떡을 빌 때마다 우리는 주님을 기념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형제 자매들에게 향해야 한다. 무릇 보혈로 구속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이 떡 안에 있다. 떡이 포함된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은 주님에 의해 넓혀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많으나 여전히 한 떡이다 우리와 함께 떡을 떼지 않는 형제 자매일지라도 그들은 이 안에 포함되었다. 만일 떡을 뗄 때에 그들을 완전히 잊어버린다면 우리의 떡은 충분히 크지 않고 우리의 마음도 충분히 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우리는 결코 어느 형제 자매가 그 안에 포함되지 않기를 바라거나 어느 신자가 제외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한다. 이 떡은 우리를 협착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한다.

우리와 함께 떡을 뗀 적이 없는 한 형제가 주님의 상 앞에 나올 때에, 그가 주님과 연합되었고 한 떡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를 영접할 것인가? 기껏해야 우리는 안내자에 불과할 뿐 주인이 아님을 기억하라. 상(잔치)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처음에 주님의 상이 그 다락방에서 세워졌듯이 주님의 상은 어느 장소에 세워진다. 그 다락방이 빌린 것이듯이 오늘날 주님도 어떤 장소를 사용하여 그분의 상을 진열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에게 떡을 떼지 말라고 말할 권한이 없다. 이 상은 주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를 받고 안 받는 권한은 주님에게 달렸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는 주님이 받으신 사람을 거절할 수 없고 또한 주님에게 속한 어떤 사람도 거절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주님이 거절하고 주님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만을 거절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에게 속하였으나 죄에 빠져 나올 수 없는 사람은 거절하고 그들과 교통할 수 없는데, 이는 그의 주님과의 교통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이 받은 사람을 거절할 수 없고 주님이 받지 않는 사람을 받을 수도 없으며 주님과의 교통을 이미 잃은 사람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떡을 떼도록 받아야 하는가 받지 말아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그 사람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 떡을 떼도록 누구를 받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함부로 다룰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

출처: 워치만니 전집 제3집 제2권 48과 제 17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