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 분인가?
하나님
Hannah , 2009-03-10 , 조회수 (4575) , 추천 (0) , 스크랩 (0)

 

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 분인가?


우리는 분열적이고 변절한 입장 및 그것이 삼일(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에 관한 진리에서 벗어남으로부터 회복될 필요가 있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삼일성에 관한 세 가지 주요 학파가 등장했는데, 양태론(樣態論;modalism), 삼신론(三神論;tritheism), 그리고 성경에 따른 순수한 계시가 바로 그것이다. 양태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모두 영원하지 않으며, 모두 동시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한 하나님이 잠시 나타난 것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삼신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세 하나님들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양태론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삼일성에 대한 그런 극단적인 견해는 이단이기 때문이다. 삼신론도 역시 세 하나님이 있다고 가르치는 큰 이단이다.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는 자연 법칙에 의하면 균형의 법칙이 있다. 어떤 것도 양면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성경 안에 있는 진리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원칙은 같다. 성경 말씀 안의 모든 진리들은 양면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진리를 합당하게 붙들려면 반드시 그 진리의 두 면을 붙들어야 한다.


성경에서 삼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진리는 양태론과 삼신론 두 극단 사이의 가운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성경 안의 진리들이 양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삼일성에 대해서도 두 면이 있다. 즉 셋 안의 하나인 면과 하나 안의 셋인 면이다. 양태론은 하나 안의 셋인 면에 대한 극단이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 안의 셋인 면을 위한 근거가 있지만, 성경의 제한을 훨씬 넘어서서 극단에 치우친 양태론은 셋 안의 하나인 면을 무시하며 심지어 폐하기까지 한다. 양태론은 셋인 면에 관한 성경의 제한을 넘어섰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극단에 속한 이단이다. 삼신론은 정반대의 이단이다. 삼신론은 셋의 면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인 면을 무시한다. 그것도 역시 성경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확실히 셋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신론도 역시 양태론처럼 성경의 제한을 넘어서서 이단이 되었다. 그러므로 양극단인 양태론과 삼신론은 둘 다 이단이다. 다음의 그림은 이것을 눈으로 생생하게 보도록 도움을 준다.


<그림 생략>


성경은 이 극단들 중 어느 쪽도 아니다. 성경은 그 중앙에 서 있으며, 삼일성에 대한 진리의 이중면을 증거하고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성경은 균형 잡혀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는 균형의 원칙에 타당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중앙에 있다. 성경은 한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


우리는 양태론의 오류에 관해 매우 분명할 필요가 있다. 양태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모두 영원하지 않으며 모두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대신 양태론은 아들의 계시가 승천으로 끝났으며, 승천 후에 아들은 존재하기를 그치셨다고 주장한다. 양태론은 너무 멀리 나갔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상호내재(coinherence)와 동시존재(coexistence)를 믿지 않는다. 양태론자들과는 달리 우리는 신격의 셋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믿는다. 즉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모두 동시에 같은 조건하에서 존재하신다고 믿는다. 또 우리는 셋이 모두 영원하심을 믿는다. 이사야 9장 6절은 아버지가 영원하시다고 말하며, 히브리서 1장 12절과 7장 3절은 아들이 영원하시다고 말하고,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하신 영에 대해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시다.


삼일 하나님의 인격에 관한 진리는 이중적이다. 이것은 그 진리가 두 면 혹은 두 방면―하나의 면과 셋의 면―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삼일성에 관한 진리의 이중성은 ‘’삼일(triune)“이라는 단어에 구체화되어 있다. 이 형용사는 사실상 두 부분으로 구성된 라틴어이다. 트라이(tri―)는 셋을 뜻하고, 윤(―une)은 하나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삼일(triune)이라는 단어는 셋―하나를 의미한다. 한편으로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게 하나이시다.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셋이시다. 하나님이 하나이신 면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 사이에는 전혀 분리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셋이신 면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 사이에 구분이 있다. 주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셨다(요 14:10).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분들은 분리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여전히 구분이 있다.


삼일성에 관해서 우리는 두 극단, 즉 셋을 강조하는 삼신론의 극단이나 하나를 강조하는 양태론의 극단 중 어느 쪽으로도 흘러 떠내려가지 말아야 한다.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삼일성의 두 방면―셋의 방면과 하나의 방면―모두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비록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시지만 그분들 사이에는 뚜렷한 구분이 있다. 구분의 의미에서는, 아버지는 아버지이시고, 아들은 아들이시며, 영은 영이시다. 비록 신격의 셋 사이에 구분이 있다 해도, 여전히 셋이 하나이다.


그리피스 토마스(W.H.Griffith Thomas)는 ‘’신학 원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때로는 ‘’인격‘’이란 용어에 대해서도 역시 이의가 제기된다. 모든 인간 언어처럼 그것도 부적절함과 심지어 적극적인 오류로 인해 비난받는다. 그것은 확실히 지나치게 강조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의 오류에 빠진다. 우리가 신격 안에서의 구분들을 나타내기 위해 그 용어를 쓰는 동안, 우리는 분리되는 정도로 까지의 구분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고, 본질적인 상호 공동내재 혹은 상호 포함성과 관련이 있는 구분들이다…그러므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본체‘’나 ‘’인격‘’과 같은 용어를 쓰는 동안에 우리는 그것들을 사람의 본체나 개성으로 이해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 용어들은 설명적인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본성을 정의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반드시 그러한 경우처럼 단지 대체로 정확한 것일 뿐이다.


나는 특히 ‘’인격(Person)‘’이라는 용어를 너무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즉 세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빠진다‘’는 그리피스 토마스의 말을 귀하게 여긴다. 같은 원칙으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하나라고 말할 때, 이것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른 오류에 빠진다. 혹자는 햇빛을 하나의 예로 삼는다. 즉 해는 아버지요, 광선은 아들이며, 빛남은 영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얼음과 물과 수증기인데, 이 세 가지가 각각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런 예들은 잠시적인 도움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너무 강조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오류로 이끌 것이다. (신약의 결론- 교회, 제4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