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 나물이 나무가 됨이 교회의 외적인 번성인가?
교회
Hannah , 2009-03-10 , 조회수 (4220) , 추천 (0) , 스크랩 (0)

 

 

겨자 나물이 나무가 됨이 교회의 외적인 번성인가?

 

 

마태복음 13장
4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5절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31절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겨자 씨의 비유
겨자 씨는 첫번째와 두번째 비유에서 언급된 그 씨앗이 아니다. 여기서의 그 강조점은 겨자 씨가 가장 작은 씨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겨자 씨를 종종 가장 작은 것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마 17:20). 마치 오늘날 「티끌」을 그러한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

겨자 씨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원칙을 상징한다. 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밭은 세상을 상징한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심으셨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가장 작은 겨자 식물은 10피트 정도 높이이며 가장 키가 큰 것은 15피트 정도의 높이이다. 주님은 이 가장 작은 겨자 씨가 가장 큰 것이 된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하여 사용하셨다.) 1828년 이전에 대다수의 성경 해석가들은 겨자 씨가 교회의 외적인 번성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빠른 시간 안에 교회가 아시아 전역에 퍼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누룩이 교회의 내적인 번영을 상징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가루 서 말이 온 세상을 상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828년 이후 다비(J.N.Darby)와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해석의 오류를 비난하고 나왔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은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며 다만 인간적인 상상력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온 세상이 개선될 수 있다면 앞 구절에서 가라지를 언급하거나 땅의 사분의 삼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뒤에 나오는 각종 물고기의 비유도 필요 없을 것이다. 더우기 성경 어디에서 하나님이 3이라는 숫자를 세상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셨는가?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둘(이방인과 유대인)과 넷(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계 7:9)이라는 숫자가 온 세상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앞에 있는 비유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이 개선 되 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겨자 씨의 비유를 설명해야 하는가? 창세기 1장 11절부터 12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모든 것이 각기 종류대로 지어졌음을 볼 수 있다. 채소는 항상 채소이며 새는 항상 새이다. 원숭이는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겨자 씨는 나무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다. 원래 교회는 가장 작고 가장 연약하며 거의 주목받지 않는 그러한 존재가 되도록 정해졌다. 그러나 교회는 나무로 상징되는 기독교가 되어버렸다. 오늘날 기독교의 구성은 매우 복잡하다. 그것은 두번째 비유에서 예시된 것처럼 2, 3세기 경에 영지주의가 교회에 침입했기 때문이다. 그 때로부터 로마 천주교의 손 아래서 교회는 많은 부끄러운 것들을 산출했다. 한 번의 명령에 따라서 하루 사이에 수만 명의 군사들이 침례를 받았다.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사람들은 4온스의 은과 두 벌의 흰 옷을 받을 권리를 얻었다. 아, 교회는 나무가 되어 버렸다. 하늘의 새는 악한 자 사단을 상징한다(마 13:4). 그는 매우 영리해서 그가 어디에 거할 수 있는 지를 알고 있다. 그로 인해 어찌 그가 이러한 기회를 그냥 지나치겠는가? 로마 천주교는 실로 터무니 없고 그러므로 사단의 본부가 되어 버렸다. 개신교도 역시 크리스마스와 같은 일들에 있어서 천주교의 전철를 밟았는데 그것은 그 새가 로마 천주교로부터 개신교에 날아 들어간 것과 같다.

그 새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그 나무는 무엇을 언급하는가? 다니엘서 4장 20절부터 22절까지는 바벨론의 능력과 권세에 관하여 말한다. 에스겔서 31장 3절부터 6절까지는 앗수르 왕의 능력과 권세에 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의 나무는 이 세상의 능력과 권세를 가리키는데 특별히 정치적인 방면에 있어서 그러하다. 새들은 사단으로부터 온 죄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 안에 있는 죄들은 사실상 온 세상의 죄들을 포함한다. 교회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 죄가 무엇인가? 교회는 완전한 혼돈이라고 할 수 있는 바벨론이 되어 버렸다. 교회는 또한 커다란 백화점과 같다. 사단은 가장 영리함으로 씨를 삼켜 버렸다(마 13:4). 그러나 그는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그는 전략을 바꾸어서 그 나무로 하여금 더 크게 자라게 하여 모든 새들이 거기에 깃들이게 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기독교의 간판을 걸고서 사단의 약을 파는 것과 같다.

주님은 교회에게 무엇을 정하셨는가? 요한 일서 3장 1절은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갈라디아서 6장 14절은 세상이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하며 베드로 전서 2장 11절은 우리가 이방인이요 나그네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정하신 것은 너무나 작아서 심지어 세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은 살아 있는 동안은 하나의 길이요 죽어 있을 때는 무덤에 불과하다. 언젠가 팬톤 씨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은 길이며 내가 죽었을 때 세상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의 관 뿐이다. 만일 세상이 내게 그것을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실제로 교회는 어떻게 거대하게 되었는가(즉 겨자 씨가 어떻게 나무가 되었는가?) 그것은 그 뿌리가 매우 길고 땅 속에 깊이 박혀서 자양분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이 교회가 자라는 것을 도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영광을 취해서는 안 된다. 예를들어 영국 성공회의 대주교는 상원 의원이다. 이러한 일이 있을 때 겨자 씨는 거대하게 되는 것이다. 채소와 나무는 서로 다르다.

첫째로 채소는 일년생 혹은 이년생 풀인 반면에 나무는 다년생 식물이다. 오늘날 교회는 그 나그네와 같은 본성을 상실했다. 둘째로 식물은 잎이 있지만 나무는 가지가 있다. 교회의 사업이 매우 널리 알려져서 교회가 분파로 분열 되었다.

세째로 채소의 뿌리는 이삼 촌(寸) 정도의 깊이 이지만 나무의 뿌리는 줄기보다 몇 배나 길어서 땅 속 깊숙히 파고 들어간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적이 되어서 세상에 뿌리를 내렸음을 가리킨다. 채소는 이삼 개월 내에 죽지만 나무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을 앙망하는 원래의 태도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교회가 창세기에 있는 원칙으로 되 돌아가 채소가 되기를 갈망하신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나무가 되기를 원한다. 나무가 된 교회는 밖의 외양은 있으나 실제는 없다. 더욱이 그 교회는 순결함을 상실했고 세상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이끌 수 없다. 이 때 가장 유익을 얻은 것은 사단인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의 위대함을 흠모하지 말고 우리의 작음을 보존해야 한다. 역경을 견디는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지나가게 하고 안락함을 누리는 데 있어 다른 사람들로 그것을 갖게 하라. 우리는 고통 받고자 하는 생각과 그러한 결심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실제로 고통을 통과하는 것 보다도 더 가치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이 가난해지지 않는 한 여전히 우리의 호주머니가 가난할지도 그것을 모른다. 이기는 비결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사울은 자신을 작다고 여겼으며 그 때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다(삼상 9:21). 후에 그가 거대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로 돌이키셨다(삼상 15:30, 16:1). 하나님은 큰 그릇이 아닌 작은 그릇들을 찾고 계신다(삼상 10:21, 행 9:15).(워치만니 전집 1집, 제1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