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다섯처녀들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인가?
왕국
Hannah , 2009-03-10 , 조회수 (6391) , 추천 (0) , 스크랩 (0)

 

 

미련한 다섯처녀들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인가? 

 

 

 

마태복음 25장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쌔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5장 2절부터 4절에는 두 종류의 처녀들이 있다. 많은 성경 해설가들은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가정(假定)을 반박하는 이삼십 개의 확실한 증거가 있다. 우리는 이들이 구원받은 자들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열 다섯 개의 주요 이유들만을 나열할 것이다.

(1) 그들이 모두 처녀들이었다. 마지막까지 그들은 처녀들이라 불리웠다. 주님은 결코 이 점을 의문시하지 않으셨으며, 이 사실을 인정하셨다.

(2) 그들의 등 안에 빛이 있었다(8절). 이 빛은 한밤중까지 지속되었으며,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선한 일을 산출하는 성령에 속한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8절의 「꺼져 가니」는 아직도 완전히 꺼지지 않은 약간의 빛이 여전히 있었음을 가리킨다.

(3) 그들은 모두가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 구원받지 않은 자들은 틀림없이 신랑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산적들이 군대를 맞기 위해 등불을 밝히겠는가?)

(4) 『밤중에 소리가 나되 … 맞으러 나오라』. 천사장은 열 사람을 부르는 데 어떠한 실수도 하지 않을 것이며 주님도 그들을 틀린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실 것이다.

(5) 그들의 등에는 기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그릇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며, 따라서 미련한 처녀들은 구원받은 자들임에 틀림없다.

(6) 모든 처녀들이 일어났다. 이것은 사실상 부활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않은 자들은 함께 부활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 년의 간격을 두고 부활한다.

(7)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그분과 함께 들어갔다(10절). 그들은 공중으로 끌어올려졌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그 뒤를 따랐으며, 역시 공중으로 함께 끌어올려졌다. 유일한 차이는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8) 열 처녀들은 행동에 있어서 다를 뿐, 본성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없고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미련하다는 것은 구원받지 않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9) 그들의 등이 신랑의 더디 옴으로 인하여 꺼져 가고 있었다. 만일 그분이 더디 오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슬기로운 자들과 함께 끌어올려질 자격이 있었을 것이다.

(10) 그들은 11절에서도 여전히 처녀들이었다. 그들이 왔을 때 그들은 기름을 이미 사서 가져왔다.

(11) 마태복음 25장 9절에 있는 「사라」라는 단어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할 때 사용될 수 없으며, 은혜는 값없는 것이기 때문에 「구하라」라는 단어만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구원받은 자들만 살 수 있으며,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

(12) 미련한 다섯 처녀가 구원받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은 죽은 사람들이 여전히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슬기로운 자들이 그들에게 가서 기름을 사라고 충고했기 때문이다.

(13)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구원받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구원받지 않았다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그들을 위해서 기꺼이 어떠한 대가라도 지불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들이 죽어가고 있는 자들을 어떻게 구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14) 주님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라고 하셨다. 13절에서처럼 깨어있을 수 있는 자들은 생명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만일 미련한 다섯이 구원받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실 수 없으며. 오히려 회개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 뿐이다.

(15) 마태복음 25장을 마태복음 22장에 있는 복음 잔치와 비교하라. 거기에는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한 사람이 있다. 여기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즉 구원받은 자들에게만 하신 것이다. 22장은 구원과 침륜의 문제를 다루지만, 25장은 구원이나 침륜과 관계가 없다. 22장에서 참석치 못한 자는 결박당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반면, 25장에서 그들은 여전히 자유로와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22장은 왕의 손익과 관계있는 반면, 25장은 처녀들의 손익과 관계 있다. 구원은 왕께 영광이나 천국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이익이다. 오늘날 성경을 해석할 때 믿는이들은 구원의 문제만을 말한다. 그들은 구원 받은 후 여전히 왕국의 문제가 있음을 모른다.(워치만니 전집 제1집 제15권, 제25장)

성경난제에서 이 부분을 다룬 이후, 자유게시판을 통하여 추가적인 질문도 있었습니다(345번). 이에 시간이 있고 관심이 있으신 분들을 위하여 열처녀의 비유에 대한 영적의미를 다루었습니다.

1. 열 처녀
마태복음 25장 1절은,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때에」라는 말은 「그 당시에」, 즉 「임재(parousia)의 시기에」를 뜻한다. 24장에 기술된 임재(parousia)가 발생하고 있을 때, 많은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때에 천국은 열 처녀로 비유될 것이다. 처녀는 생활면에 있어서 믿는이들을 상징한다(고후 11:2). 왕국백성인 믿는이들은 순결한 처녀들과 같아서 어두운 시대에 주님의 간증(등)을 지니고 있으며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세상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이를 위해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의 내주하심뿐 아니라 충만함도 역시 필요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첫째로 처녀들이다. 처녀가 되는 것은 일이나 봉사나 활동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문제이다. 더구나 우리는 다만 처녀일 뿐 아니라 정결하고 순결한 처녀이다. 처녀가 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거나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우리 자신이 어떠한가의 문제이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우리는 처녀들이다. 나는 비록 노인(老人)이지만 처녀같이 처신한다. 나는 결코 처녀인 내 신분을 팔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원수의 목전에서도 나는 처녀이다.

a. 등(燈)을 들고 있음
1 절은 처녀들이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밖으로 나갔다고 말한다. 등(燈)이란 믿는이들의 영(靈)을 상징하는데(잠 20:27), 거기에 하나님의 영을 기름으로 담는다(롬 8:16). 믿는이들은 그들의 영 안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의 빛으로 빛을 낸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이 시대의 어둠 안에서 빛을 발하는 등처럼 세상의 빛이 되어(마 5:14-16, 빌 2:15-16)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주님의 간증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처녀들로서 우리는 전쟁을 위한 무기나 놀이를 위한 스포츠 기구들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증거하고 빛을 발하고 비추기 위한 등(燈)을 들고 있다. 우리의 손 안에는 주님의 간증을 위해 빛을 발하는 등이 있다.

b. 나감
처녀들은 나갔다. 이것은 믿는이들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맞으려고 세상에서 나왔음을 상징한다. 처녀들은 어느 곳에서도 머뭇거리거나 정착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팬톤(D. M. Panton)은 그의 저서들 중 하나에서, 세상은 자기에게 다만 하나의 오솔길일 뿐이고 이 오솔길의 끝에는 무덤 하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만일 주님이 더디 오신다면, 세상은 결국 나에게 하나의 안식처 곧 무덤만을 제공해 줄 것인데, 그곳에서 나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누워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착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가고 있다.

c. 신랑을 맞으려고
신랑은 즐겁고 매력적인 사람인 그리스도를 상징한다(요 3:29, 마 9:15). 이 비유에서 주님은 자기 자신을 승전(勝戰)의 장군이나 위대한 사령관으로 비유하지 않고, 가장 즐거운 사람인 신랑으로 비유하셨다. 얼마나 좋은가! 이처럼 우리는 나가고 있는 처녀들이요, 그분은 오시고 있는 신랑이시다.

2. 기름을 가지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들
2 절은,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고 말한다. 다섯은 넷에 하나를 더해서 이루어진 숫자이다. 그것은 하나님(하나로 상징됨)이 더해진 사람(넷으로 상징됨)이 책임을 맡는 것을 상징한다.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롭다는 사실은 믿는이들 절반은 미련하고 나머지 절반은 슬기롭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믿는이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될 책임을 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구약은 다섯이 책임의 수라는 것을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다섯씩으로 된 두 조(組)로 구분된다. 또한 다섯이란 숫자는 성막과 그 기구들과 관련해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다섯은 많은 치수들 가운데 기본 인수(因數)이다. 우리 손에 있는 다섯 손가락은 성경에서 다섯이란 숫자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 준다. 그것은 넷에 하나를 더해서 이뤄진다. 이미 지적했듯이 넷이라는 숫자는 피조물을 상징하고 하나라는 숫자는 창조주를 상징한다. 피조물 더하기 창조주는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만일 엄지 손가락은 없고 네 손가락만 있다면, 그 무엇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넷이라는 숫자인 우리 스스로는 책임을 맡을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해질 때 우리는 책임을 맡을 수 있게 된다. 2 절은, 다섯 처녀는 미련하고 다섯은 지혜롭다고 말한다. 책임을 맡는 데 있어서 슬기로운 자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련한자들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주 예수님은 미련한 자들을 먼저 언급하신다. 미련하다는 것이 이 다섯 처녀들을 가짜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본성에 있어서 그들은 슬기로운 자 다섯과 동일하다. 3 절은 그들이 미련한 이유를 말해 준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사 61:1, 히 1:9). 어리석은 자들은 등만 가졌을 뿐 그릇에 여분의 기름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미련했다. 거듭나게 하시는 그 영에 추가해서 그들은 내적 충만의 그 영 곧 여분의 성령을 갖지 않은 것이다.

3. 그릇에 기름을 가진 슬기 있는 다섯 명
4 절은,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그릇이고(롬 9:21, 23-24), 사람의 인격(개성)은 그 혼 안에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릇이란 믿는이들의 혼을 상징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에 기름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릇에도 기름을 가졌다. 등에 기름을 갖는다는 것은 그들의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음을 상징하고(롬 8:9, 16), 그릇에 기름을 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혼을 흠뻑 적시는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을 갖고 있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등과 그릇에 관해 매우 분명해야 한다. 잠언 20장 27절은-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사람의 영을 여호와의 등이라고 말한다. 등 안에는 기름 곧 성령이 있다. 신약은 우리의 영이야말로 성령이 내주하시는 장소임을 계시한다. 로마서 9장대로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그릇들이다. 우리의 존재, 우리의 인격은 우리의 혼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의 그릇은 우리의 혼을 상징한다.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을 갖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등을 타오르게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우리 혼을 충만케 하는 여분의 성령을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에 있다. 우리의 등 안에 기름이 있더라도 우리에게는 혼 안에 들어있는 여분의 기름이 필요하다. 이것은 그 영께서 반드시 우리 영으로부터 혼의 각 부분에 퍼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면 우리의 혼 안에는 여분의 성령이 있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 여분이 있다면 우리는 지혜로운 것이다. 만일 여분을 갖지 못했다면 우리는 미련한 것이다. 달리 말해서 만일 우리가 성령의 내적 충만에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미련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혜롭다면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주여, 제게 긍휼을 베푸소서. 저는 당신의 영이 제 영 안에만 계실 뿐 아니라, 제 혼 안에도 계시길 원합니다. 주여, 저에게는 그 영의 내적 충만이 필요합니다. 저에게는 저의 전 존재를 채우는 여분의 성령이 필요합니다.』 이 여분의 그 영이 없이는, 우리가 깨어 있을 수도, 예비하고 있을 수도 없다. 깨어 있고 예비하고 있으려면 성령의 내적 충만, 즉 그 영 자신이 우리 영으로부터 내적 존재의 모든 부분에 퍼지는 것이 필요하다.

4. 신랑이 더디 옴
5 절은 신랑이 더디 오신다고 말한다. 실로 주 예수님은 그분의 재림을 지체하셨다. 계시록에서 그분은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지만, 거의 이천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분은 그분의 오심을 지체하고 계신다.

5. 모든 처녀들이 졸다가 잠이 듬
신랑이 더디 왔기 때문에 모든 처녀들은 『다 졸다가 잠이 들었다』. 조는 것은 병드는 것을 상징하고(행 9:37, 고전 11:30), 잠드는 것은 죽는 것을 상징한다(살전 4:13-16, 요 11:11-13). 주님이 그분의 재림을 지체하시는 동안에 믿는이들 대다수가 먼저 병들게 되고 나중에는 죽는다.

6. 한 밤중에 소리가 남
6 절은, 『한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니』라고 말한다. 한 밤중이란 이 어두운 시대(밤)가운데 가장 캄캄한 때를 상징한다. 그것은 이 시대의 끝, 즉 대환난 때일 것이다. 「소리」는 천사장의 음성을 상징한다(살전 4:16).

7. 처녀들이 다 일어남
7 절은,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손질하는데』라고 말한다. 「일어나」라는 말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을 상징한다(살전 4:14).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과 고린도전서 15장 52절에 예언된 부활이다.

8. 그들의 등을 손질함
처녀들은 일어난 후에 『등을 손질했다』. 이것은 그들이 생활 가운데서 그들의 간증을 처리함을 상징한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죽기 전에 온전하지 못하다면 부활 후에도 주님의 간증을 위한 우리의 생활이 여전히 처리 받아야 함을 가리킨다.

9.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서 기름을 빌기 원함
8 절은,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말하되 우리의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심지어 부활 후에도 미련한 믿는이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이 필요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꺼져 가니」라는 말은 미련한 처녀들의 등이 켜져 있고 그 안에 기름이 있지만 충분한 공급을 갖지 못했음을 입증한다. 미련한 처녀들은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에 의해 거듭났지만, 그들의 온 존재를 흠뻑 적실 정도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되지 않은 믿는이들을 대표한다.

10. 슬기로운 처녀들의 대답
9 절은,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말하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아무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성령의 충만을 가질 수 없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다른 많은 것은 빌어올 수 있을지 몰라도 성령의 내적 충만은 빌어올 수 없다. 이것은 먹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도 당신을 위해서 대신 먹어 줄 수 없다. 슬기 있는 처녀들은, 파는 자들에게 가서 쓸 것을 사라고 미련한 처녀들에게 말했다. 기름을 파는 자들은 대환난 중의 두 증인-두 감람나무와 기름의 두 아들들-임에 틀림없다(계 11:3-4, 슥 4:11-14). 대환난 동안에 기름의 두 아들들인 모세와 엘리야가 하나님의 백성을 도우러 올 것이다. 사는 것(買入)은 대가의 지불이 필요함을 가리킨다. 성령의 충만은 세상을 포기하고 자아를 처리하고 모든 것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손해보는 것 등의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얻어진다. 만일 오늘날 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부활 후에 지불해야 한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분의 성령을 갖지 못한다. 결국 미련한 처녀들은 그들의 마음과 혼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해야 함을 깨달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포기하고 자아를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볼 것이다.

11. 신랑이 오시고, 예비했던 이들은 그분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감
10 절은,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닫힌지라』고 말한다. 「오므로(came)」라는 말은 그분의 임재(parousia)의 일부분으로서 주님이 공중으로 오셨음(살전 4:16)을 언급한다. 예비한 자들은 어린 양의 혼인 만찬에 초대된 사람들임이 분명하다(계 19:9). 우리는 항상 우리 그릇에 기름을 가짐으로써, 항상 우리 온 존재 안에 하나님의 영을 가득 채움으로써 예비되어야 한다(24:44). 깨어 있고 예비되는 것은 주님의 임하심(parousia)을 위한 우리의 매일의 훈련이어야 한다. 그분과 같이 들어가는 것은 주님이 임하시는 동안 부활한 믿는이들이 공중으로 휴거되는 것을 언급한다(살전 4:17). 10절에 있는 혼인 잔치는 어린 양의 혼인 만찬(계 19:9)인데, 그것은 그분이 오시는 동안 즉 그분이 임하시는 동안 공중에서 베풀어질 것이다(살전 4:17). 그것은 왕국이 나타나기 전에 예비된 믿는이들, 즉 죽기 전에 성령의 충만으로 준비되었던 믿는이들에게 주는, 주님과 함께 누리는 상으로서 베풀어질 것이다. 예비된 자들이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간 뒤에는 문이 닫힌다. 이것은 구원의 문이 아니라 주님의 혼인 잔치를 누리는 누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12. 미련한 처녀들이 늦게 왔지만 신랑은 그들을 알지 못함
11 절과 12절은, 『그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그가 대답하여 말하되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처녀들이 나중에 왔다는 것은 부활한 믿는이들의 후기의 휴거를 언급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분의 기름을 위해 대가를 지불했지만, 그것을 너무나 늦게서야 얻었다. 여기에서는 시간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왔을 때 문은 이미 닫혔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님께 문을 열어 달라고 청했을 때, 주님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 함은 누가복음 13장 25절과 요한복음 1장 26절, 31절, 8장 19절에서처럼 인정하지 않고 시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에 불을 켰었고, 주님을 맞으려고 나갔고, 죽었고 부활했고 휴거되었지만, 성령의 충만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데 있어서는 늦었다. 이로 인해 주님은 그들이 그분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는 것을 인정하거나 승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시대적으로는 이 상(賞)을 놓쳤지만, 구원은 영원히 잃지 않는다. 그들에게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나는 너희를 좋게 여기지도 않고 너희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땅 위에서 생활했던 방식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또 너희가 너무 늦게 온 것도 인정해 줄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왕국 잔치의 누림에서 거절된다.

13. 깨어 있으라
13 절은,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결론 맺고 있다. 24장 40절부터 44절까지는 오직 이미 예비된 살아 있는 믿는이들의 휴거만을 언급하고 있다. 25장 1절부터 13절은 죽은 자들과 부활한 자들의 휴거를 다루는 데 필요하다. 이 부분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깨어 있어야 하는지를 볼 수 있다. 깨어 있고 예비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다른 어느 책도 마태복음만큼 자주 우리에게 경고를 주지 않는다. 나는 사십여 년 이상을 이 책에 의해 경고를 받아 왔음을 주님 앞에서 간증할 수 있다. 나는 조금 부주의했을 때마다 마태복음에 담긴 그 경고들을 기억하곤 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처녀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련한 처녀들인가, 아니면 슬기로운 처녀들인가? 우리 모두는 이 질문을 자문 자답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지혜로운지 미련한지의 여부는 우리가 우리의 그릇 안에 여분의 성령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마태복음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