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관유가 상징하는 바는?
성령
Hannah , 2009-03-10 , 조회수 (14421) , 추천 (0) , 스크랩 (0)

 

 

거룩한 관유가 상징하는 바는?

 

 

 

출애굽기 30장 22절부터 25절까지에서 모세는 네 가지 상등 향품-몰약, 육계, 창포, 계피-을 취하고 거기에 감람기름 한 힌을 더하여 거룩한 관유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다. 25절과 26절에서는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 너는 그것으로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라고 말한다. 회막 안에 있는 모든 기구와 용기는 이 거룩한 관유로 발라졌다(26-29절). 이 기름이 발라진 기구와 용기를 접촉하는 사람은 누구나 거룩하게 된다(29절). 더욱이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제사장으로서 주님을 섬기게 하라고 명령받았다(30절). 이 장(章)에 요한에 의해 사용된 “기름부음”이라는 단어의 근원이 있다.

감람기름


이 관유는 다섯 가지 요소의 복합물이다. 기본 요소는 감람기름이다. 모든 성경학자들은, 감감기름이 예표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본래 감람 기름에는 향품이 없다. 그것은 아무 것도 복합되지 않은 순수한 기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오직 순수하고 단순한 하나님의 영일 뿐 아직 아무 것도 더해지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모세는 감람기름에 네 가지 향품을 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에 어떤 것들이 더해졌음을 가리킨다. 그렇게 복합된 후의 하나님의 영은 더 이상 단순한 하나님의 영이 아니었다. 네 가지 향품으로 제시되는 네 가지 요소가 유일한 하나님의 영에 더해졌다. 이것은 넷이라는 숫자에 의해 상징된 하나님의 피조물의 어떤 것이 하나님의 영에 더해졌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의 어떤 것이 하나님의 영에 복합되었다.

네 가지 요소


네 가지 항목들이 한 감람기름에 복합되었다. 하나라는 숫자는 유일한 하나님을 나타내며, 넷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복합된 기름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성이 하나님 안으로 복합되어 다섯이라는 숫자를 만든 것을 상징한다. 다섯이라는 숫자는 책임을 상징한다. 여러분의 손의 네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을 생각해 보라. 왜 네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을 가지고 있는가? 여러분은 책임을 지기 위하여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 네 손가락은 인성을 상징하고 엄지 손가락은 유일한 하나님을 상징한다. 네 손가락에게는 엄지 손가락이 필요하고 엄지 손가락에게는 네 손가락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고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주님께 말할 수 있다. “오 주 하나님, 우리가 없으면 당신에게는 무엇인가가 결핍됩니다.” 또한 주님이 없으면 물론 우리도 결핍된다. 우리 피조물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지! 우리에게 그가 있을 때 우리는 넷에 하나를 더한 것이 된다.

오백의 세 단위


몰약의 양은 오백 세겔이었다(출 30:23). 오백이라는 숫자는 5가 백 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육계와 창포는 둘 다 그 양(量)이 이백 오십 세겔이며 계피는 몰약처럼 오백 세겔이었다. 각각 절반 단위인 육계와 창포는 합쳐서 완전한 단위를 이룬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향품은 실제적으로는 세 단위이다. 성경의 숫자에서 셋은 삼일 하나님을 상징한다. 삼일 하나님 가운데 두 번째가 십자가 위에서 쪼개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5에 백이 곱해진 것을 세 번 갖게 된다. 이것은 강화된 책임을 가리킨다.



몰약, 육계, 창포, 계피(자세한 설명은 “연구자료-성경의 광식물 참고)

성경에서 몰약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향기를 상징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귀하고 사랑스러운 죽음의 상징이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과 달리 주 예수의 죽음은 사랑스럽고 달콤하다. 그러나 몰약이 상징하는 바처럼 그의 죽음의 향기는 그의 고난으로부터 온 것이다.

육계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육계는 요리된 음식에 달콤한 향기를 주는 향품이다. 그러므로
육계는 주님의 죽음의 효능의 달콤한 향기이다. 몰약은 향기로운 죽음이고 육계는 향품으로 사용된 죽음이다. 육계는 우리의 “요리”에 더해진 것, 즉 우리 인생에 더해진 것이다. 주님의 죽음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우리 일상생활과 행함은 쓰디 쓸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향기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생활에 주님의 죽음의 향기가 더해지지 않으면 우리가 아내와 혹은 형제자매들과 하는 대화는 쓸 것이다. 우리에게는 육계인 주님의 죽음의 향기가 필요하다.

창포는 진흙으로부터 하늘로 솟아오르는 갈대이다.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은 주님의 부활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주님의 죽음의 향기와 그의 부활의 향기가 있다. 우리 생활 가운데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든지 우리에게는 주님의 향기와 그에 더해진 그의 부활의 향기가 있어야 한다.

계피는 주님의 부활의 능력의 향기를 상징한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또한 성령 안에 더해졌다. 네 가지 이 모든 요소가 성령과 복합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은 다만 단순한 영이 아니라 이제 신성과 다른 요소들이 한 단위로 함께 섞인 복합체이다.

복합적인 영


오늘날 성령은 복합적인 영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요한복음 7장 37절부터 39절까지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 “이제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그 영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심이더라”(회복역 참조). 이 구절에 언급된 그 영은 복합적인 영이다. 하나님의 영은 태초부터 있었다(창 1:1-2). 그러나 복합적인 영은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계시지 않았다. 이것은 그때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고 부활하지 않았고 하늘로 승천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분은 아직 영광을 얻지 못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관유의 복합이 완성되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관유의 복합이 완성되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래로 성령은 복합적인 영이 되었다.

이 복합적인 영 안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 모든 것이 있다. 복합적인 영은 삼일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포함하고 있다. 복합적인 영 안에는 하나라는 숫자의 창조주와 넷이라는 숫자의 피조물이 있다. 이 영은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능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담고 있다. 육계와 창포의 양은 십자가에서 삼일 하나님의 두 번째가 쪼개진 것을 나타냄을 상기하라. 얼마나 많은 것이 복합적인 영 안에 포함되어 있는지! 신성과 인성과 창조주와 피조물과 삼일 하나님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영광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현명하시다. 그분이 단순히 이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면 그것을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천 마디 말보다 그림 한 장이 더 낫다. 예를 들어, 글로 내 머리에 대하여 묘사하는 것보다 내 머리를 보는 것이 얼마나 더 쉬운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합적인 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 어렵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의 지혜로 출애굽기 30장에서 관유의 그림을 상징으로 사용하셨다. 복합적인 영을 알려면 이 장에서 복합적인 관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체험에 의해 확증될 수 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이 거룩한 관유는 하나님 자신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포함한다. 그것은 우리를 없애는 죽이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고 또한 우리를 살게 하는 부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책임을 지는 강화된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이 영 안에 있다. 이 복합적인 영을 가질 때 우리의 일상생활인 우리의 매일의 “요리”는 달콤한 향품으로 채워질 것이다.(신약의 결론-성령,56-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