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자신을 관제로 드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믿는이들
Hannah , 2009-03-10 , 조회수 (12361) , 추천 (0) , 스크랩 (0)

 

 

바울이 자신을 관제로 드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관제로 조성됨

관제는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에 계시된 기본적인 제물에 추가된 것이었다(민 15:1-10, 28:7-10). 기본적인 제물은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면의 예표였다. 관제는 제물을 바치는 자가 누리는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하늘에 속한 포도주이신 그리스도로 그를 채워주는 제물이고, 그로 하여금 드리는 포도주가 되게까지 한다. 사도 바울은 믿는이들의 믿음 위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그의 피를 뿌림으로써 그가 부은 바 될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를 누림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관제가 되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는 기본적인 제물이지만 관제는 그렇지 않다.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에 걸쳐 다루어진 다섯 가지 기본적인 제물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그리스도의 어떠함의 여러 가지 면의 예표들이다. 민수기 15장 1절부터 10절까지와 28장 7절부터 10절까지를 읽어보면, 관제는 추가하는 것임을 알게될 것이다. 기본적인 제물 중의 하나가 관제 없이 드려진다면 이것은 기본적인 제물을 드림에 있어 뭔가 부족한 것이 있음을 가리킨다. 기본적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다소 가난한 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실제로 관제는 드리는 자 자신이 관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드리는 자가 자기 자신의 천성적인 기질에 따라 그러한 관제가 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가 그를 채우고 적시고 침투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누림을 위한, 하늘에 속한 포도주이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여 누릴 때, 그분으로 채워지고 철저하게 그분으로 적셔질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위에 관제로 부어질 포도주가 될 것이다.

구약에 있는 예표를 기초로 하여 바울은 자신을 믿는이들의 믿음의 제물과 제사장 봉사 위에 부어질 관제로 여기게 되었다. 수년 동안 바울은 그리스도로 채워지고 적셔질 정도로 그리스도를 마시고 누려왔다. 결국 하늘에 속한 포도주인 그리스도로 인해 바울의 존재는 포도주의 성분으로 조성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을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드린 제물 위에 관제로 부어진 포도주라고 여길 수 있었다.(빌립보서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14)


관제로서 부어짐

빌립보서 2장 17, 18절은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다. “너희 빌립보인들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을 관제로 너희 제물 위에 붓기를 원한다.” 여기에 나타난 사상은 매우 심오하다. 레위기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자신에게 매일 다섯 가지의 주요 제물을 그분께 드리라고 명하셨다. 즉,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이다. 그러나 레위기 여섯 장에서는 관제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이는 그 당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합당한 체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그 당시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포도주로서 계시지 않았다. 당신이 자신을 관제로 부을 때 당신 안에는 아주 많은 포도주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속한 많은 것이 당신 안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

관제는 하나님께 번제와 소제로 드려진 그리스도와 같이 단지 객관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 안으로 취해진 주관적인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체험한 그리스도를 쏟아 붓는다는 것은 관제의 포도주를 붓는다는 것이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단지 객관적인 번제가 되실 수는 있었지만 주관적인 관제는 되실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분을 관제로 쏟아 부을 수 있도록 우리가 마실 수 있는 포도주가 되셔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희가 한 가지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누리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이것은 너희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릴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질 수 있게 한다. 나는 내 자신을 너희의 제물 위에 관제로 붓기를 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너희의 체험 위에 내가 체험한 그리스도를 쏟아 붓고 싶다는 뜻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 생활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한 가지를 생각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충만한 누림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면 그들은 함께 모일 때 그리스도를 제물로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풍성히 체험하여 자신을 성도들의 제물 위에 관제로 부을 수 있는 사도와 인도하는 이들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얼마나 풍성한 교회 생활인지!

이스라엘 자손들이 좋은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에게는 마실 수 있는 많은 포도주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관제로 부을 수 있는 포도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체험과 누림이 광야에 있었을 때보다 훨씬 더 높게 되었음을 뜻한다. 교회 생활 안에는 성도들에 의해 체험되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그리스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제물들 위에 인도하는 이들이 체험하고 쏟아 부은 그리스도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 위에 부어짐을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달콤한 향기가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충만한 누림으로 산출되는 교회 생활이다. 빌립보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었고, 사도 바울에게는 그것이 관제였다. 둘 다 그리스도를 누린 결과이다.

성도들의 제물 위에 관제가 부어진 결과는 기쁨이다. 이것이 교회 생활을 위한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다. 인도하는 이들은 성도들과 함께 기뻐하고, 성도들은 인도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한다. 우리는 서로 기뻐하며 함께 기뻐한다. 기쁨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원망이나 시비나 눈물이나 고통이 없게 된다. 우리는 모두 다음과 같이 말할 필요가 있다. “주여, 우리를 그러한 높은 단계로 회복하소서. 우리가 모일 때마다 많은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많은 포도 주가 인도하는 이들에 의해 성도들의 제물 위에 부어질 수 있는 그러한 표준에까지 들어올려 주소서.” 이것은 오직 한 가지를 생각하고 혼 안에서 하나 될 때만이 가능하다.(그리스도를 체험함, 제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