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해석된 사마리안인의 비유(누가복음 10:25-37)
성경 : 누가복음 10:25-37
사람-구주께서 그분 자신을 사마리아인으로 묘사하심
우리는 누가복음 9장 51절부터 56절에서 주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셔야 했던 것을 보았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그분을 받지 않았다(9:53). 이제 10장 25절부터 37절에서 주님은 그분 자신을 사마리아인으로 묘사하신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비유는 유대교, 구약, 율법, 제사장, 레위인, 그리스도, 그 영, 신성한 생명, 교회, 사람들을 교회로 이끄는 방법, 주님이 교회에게 주신 축복, 주님의 다시 오심,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상을 언급한다.
사마리아는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유력한 지역이었으며 그 수도가 있던 곳이었다(왕상 16:24, 29). B.C. 700년 전에 앗수르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점령하여 바벨론과 다른 이방 나라 사람들을 옮겨다 사마리아 여러 도시에 두었다(왕하 17:6, 24). 그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 민족이 되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그들이 모세오경을 가졌으며 구약의 그 부분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결코 유대 민족의 일부로 인정되지 않았다.
요한복음 8장 48절에서 어떤 유대인들은 주님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라고 말했다. 여기 누가복음 10장에서 주님은 적극적인 방법으로 그분 자신을 사마리아인으로 언급하신다.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멸시받는 자, 사마리아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 같다.
영생을 상속받음
누가복음 10장 25절은,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라고 말한다. 율법사는 모세의 율법에 전문가였다. 그러한 율법사는 바리새인들 중 서기관이었다. 율법의 지식에 매우 능한 사람인 이 율법사는 역시 교만했다. 자신을 의롭다 여기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는 일어나 사람-구주를 시험하였다.
사람-구주를 시험할 때에 이 율법사는 그분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상속받으리이까』라고 말하였다. 영생을 상속받는 것은 왕국이 나타나는 때에 신성한 생명을 누리고 오는 시대에 보상받는 것이다(눅 18:29-30).
영생을 상속받는 것은 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마 19:17).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마 19:23). 천국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그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구원받는 것과는 다르다.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인 반면,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전자는 구속되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더불어 거듭나는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살며 행하는 것이다. 전자는 출생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생활에 관한 것이다.
신약에 의하면, 영생을 받아들이는 것과 영생을 상속받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영생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 시대에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만 영생을 기업으로 받는 것은 오는 시대, 즉 오는 왕국에서의 보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에 관한 우리의 체험에 관하여 이 문제들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금 현시대에 우리는 영생을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은 구원의 문제이다. 그러나 영생을 상속받는 것은 오는 왕국 시대에 보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일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상속받는 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왕국 보상에 연관된 문제이다.
그 서기관이 사람-구주께, 그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상속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 주님은 그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말씀하셨다(26절). 그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네 혼을 다하며 네 힘을 다하며 네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27절). 이에 대하여 주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답하셨다(28절).
사마리아인의 비유
누가복음 10장 29절은 계속해서, 『그러나 그는 자신을 의롭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말한다. 이 질문을 한 사람은 틀림없이 스스로 옳다 하는 바리새인들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16:14-15, 18:9-10). 교만을 과시하면서 그는 주님께 그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는 주님께 『내가 사랑할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 뒤에 오는 비유에서 주님은 그에게는 사랑할 이웃이 필요치 않음을 보여 줌으로써 그 율법사에게 대답하셨다. 대신 그에게는 그를 사랑할 이웃이 필요했다. 그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므로 그를 사랑해 줄 어떤 사람을 필요로 했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 이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사마리아인의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서술된 유일한 비유 중 하나이다. 이 비유는 구주의 완전한 구원 안에 있는 높은 도덕성의 원칙을 전한다. 30절의 「어떤 사람」은 구주의 뜻 안에서, 평안의 기초(예루살렘)로부터 저주의 상태(여리고)로 떨어진 죄인으로서 스스로 의롭다 하는 율법사를 상징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누가복음 10장 30절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은 평안의 기초를 의미하며(히 7:2) 여리고는 저주의 도시였다(수 6:26, 왕상 16:34). 「내려가다가」라는 말은 평안의 기초인 도시로부터 저주의 도시로 떨어지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어떤 사람은 평안의 기초에서 저주의 장소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가고 있었던 길은 그러한 하락의 길이었다.
강도들을 만남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그 사람은 강도들을 만났고 강도들은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그를 버리고 갔다. 이 강도들은 유대의 율법을 존중하는 교사들을 상징하며(요 10:1),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 하는 율법사들처럼 율법을 사용하여 그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강탈하였다(고전 15:56). 「옷을 벗기다」라는 단어는 유대교 사람들에 의해 오용된 율법으로 벗겨지는 것을 상징한다. 「때리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문자 그대로 「세게 때려 눕히다」라는 뜻이다. 이 때리는 것은 율법으로 죽이는 것을 상징한다(롬 7:9-10). 더 나아가 강도들이 거반 죽은 사람을 버려 두는 것은 유대교 사람들이 율법 준수자를 죽은 상태로 놔두는 것을 상징한다(롬 7:11, 13).
모든 바리새인들, 유대교의 율법을 존중하는 교사들은 여기서 강도들에 비유된다. 그 율법사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들을 만나 그들에게 옷 벗김을 당하고 강탈당한 사람으로 비유된다. 유대 종교의 율법을 존중하는 교사들은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그들을 때리고 나서는 거반 죽은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비록 그가 그러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지라도 이것이 그 율법사의 상황이었다.
제사장과 레위인
31절에서 주님은,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라고 계속하신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돌봐야 할 사람이었다(신 33:10, 대하 15:3). 비유에서, 제사장은 같은 길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그 매맞은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32절은,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라고 말한다. 레위인은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경배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돕는 사람이었다(민 1:50, 3:6-7, 8:19). 이 레위인도 같은 곳에 왔지만 그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어떤 사마리아인의 행동
33절과 34절은 강도들을 만난 그 사람에게 이른 어떤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묘사한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이 사마리아인은 사람-구주를 상징하며, 누가복음 10장 25절과 29절에서 주님이 말씀하고 계셨던 사람을 포함하여 스스로 높다 하고 스스로 의롭다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낮고 천한 사마리아인으로 멸시받고 비방받은, 겉으로 보기에 낮은 신분의 평범한 분이셨다. 잃은 자를 찾으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그분의 사역 여행 가운데(19:10), 그러한 사람-구주께서는 유대교 강도들에게서 상처 입은 희생자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상태에 있는 곳에 오셨다. 그를 보셨을 때 그분은 신성을 지닌 인성 안에서 불쌍히 여기셨으며 절박한 필요를 완전히 충족시키는 부드러운 치료하심과 구조하는 관심을 그에게 베푸셨다(34-35절).
10장 34절과 35절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향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돌봄에 관한 모든 항목들은 율법 아래 정죄받은 죄인을 향한 주님의 신성을 지닌 인성 안에서의 긍휼과 부드러움과 넘치는 돌보심을 묘사한다. 이것은 구원하시는 은혜 가운데 있는 그분의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한껏 보여 주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에게 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었다. 상처를 싸매는 것은 그분이 그를 치료하셨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의 상처 위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는 것은 그에게 성령과 신성한 생명을 주는 것을 상징한다. 사람-구주께서 우리에게 오셨을 때 그분은 우리의 상처 위에 그분의 영과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부어주셨다.
그리고 나서 그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자기의 짐승인 나귀 위에 태웠다. 이것은 사마리아인이 낮은 방법으로, 낮은 수단에 의해 그를 실어갔음을 의미한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우리가 그러한 낮은 방법으로 「나귀」에 실려 교회 안으로 옮겨졌음을 간증한다. 우리는 화려하고 영광스럽게 교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대로 우리는 낮은 방법으로, 낮은 수단에 의해 교회 안으로 옮긴 바 되었다.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주막(여관)으로 데리고 와서 그를 돌보았다. 이것은 그분이 그를 교회로 데리고 와서 교회를 통하여 그를 돌보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35절은, 『이튿날 아침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을 위해 여관에 돈을 지불하였음을 본다. 이것은 그분이 그를 위해 교회를 축복하셨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추가로 소비한 것도 다 여관 주인에게 지불하리라는 그분의 약속은 이 시대에 교회가 그를 위해 소비한 것을 구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다 갚아줄 것임을 지적한다.
사랑 있는 이웃을 필요로 하는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
36절에서 사람-구주는 계속해서 그 율법사에게, 『네 의견에는 이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질문하셨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율법사는 그가 이웃으로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29절). 스스로 의롭다 하는 무지 아래, 그는 그 자신에게 사랑해 줄 이웃인 사람-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37절에서 율법사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자」로 번역된 헬라어는 「그를 자비롭게 다룬 사람」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그 사람은 그가 사랑할 이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해 줄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비유된 사람-구주) 사랑 있는 이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데 도움을 받았다. 구주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그에게, 그가 율법 아래 사망으로 정죄받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자신도 돌볼 수 없으며, 사람-구주께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완전한 구원을 주실 분임을 밝히려 하셨다.
사람-구주의 신성한 속성들과 인간적인 미덕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사람-구주의 신성한 속성들과 인간적인 미덕들을 볼 수 있다. 신성한 속성들에 관하여, 우리는 그 영과 영생과 축복과 보상을 본다. 그 영, 신성한 생명, 축복을 주시는 것, 교회에 대한 보상은 모두 신성한 속성들에 연관된다.
여기에 계시된 주님의 인간적인 미덕들은 그분의 동정과 사랑과 연민과 돌봄을 포함한다. 다시 한번 이 사례에서 사람-구주의 인간적인 미덕들이 그분의 신성한 속성들과 연합되었다. 그것들은 연합되어 최고 수준의 도덕성을 산출하므로 항목별로 명확히 구별하기는 어렵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우리는 사람-구주의 도덕성이 최고 수준의 도덕성이었음을 본다. 제사장은 강도 만난 그 사람을 보았을 때 그를 돕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이 제사장에게는 도덕성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레위인에게 있어서도 상황은 동일했다. 그러나 사람-구주께서는 그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그 딱한 사람을 돌보는 데 그분의 도덕성을 충분히 발휘하셨다. 사람-구주의 높은 수준의 도덕성은 신성한 속성들이 인간적인 미덕들과 연합된 생명의 산출이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사람-구주께서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인간적인 미덕들 안에서 그분의 사역을 수행하셨음을 명백히 본다. (누가복음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