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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6장 4절부터8절까지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멸망하는가?
히브리서 6장 1절부터 8절까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절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 3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절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역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5절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절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7절 땅이 그 뒤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절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어떤 사람은 6절과 8절의 말씀을 읽고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4절과 5절에서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고 말한 사람들이다. 4절과 5절 말씀은 다음의 네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첫째 한번 비췸을 얻었고, 둘째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고, 셋째 성령에 참예한 바가 되었고, 넷째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상의 네 가지를 이미 맛보았으나 이러한 원칙을 내버려두고 돌보지 않는다면 그의 결말은 8절에서 말하고 있는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도록』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그의 결말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람이 영생을 얻었을지라도 영생을 잃을 수 있으며, 사람이 구원받았을지라도 구원을 놓칠 수 있다는 말인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우리는 히브리서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반드시 분명히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진보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두 방면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전진해야 하며, 둘째 가르치는 사람은 반드시 진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생활 면에서 반드시 더 많이 주님을 인식해야 하고 더 전진해야 하며, 가르치는 사람 또한 전진된 진리를 말해야 하며 일년 내내 구원에 대해서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진리도 가르쳐야 한다.
히브리서에서 진보의 최고점을 말하고 있는 곳은 5장부터 6장까지이다. 5장은 멜기세덱을 말하고 있다. 이 서신을 쓴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5:11). 본래 당신은 성장한 사람이 될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당신은 나이가 많지만 어린아이와 같다. 본래 당신은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의의 말씀을 배울 수 있으나 안타깝게도 당신은 우유를 먹어야만 되는 사람이 되었다. 6장은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한 말씀으로,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진보해야 하며, 언제나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각종 침례와 안수에 관한 교훈,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 등의 여섯 가지 진리만을 말하지 말고, 반드시 진보할 때 다른 진리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6장 1절부터 8절까지는 구원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에 관한 문제를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진보를 말하는 것이지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주제를 혼동한다면 여기에 대해서 더이상 언급할 수 없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진리와 왕국의 진리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고, 다만 그들은 마치 구원받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그들의 눈을 구원에만 주의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구원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많은 일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먼저 주제를 파악하고 난 후에 히브리서 6장 1절부터 8절까지에서 말한 말씀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구절의 말씀들은 세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단락은 1절부터 3절까지로 제목은 『할 필요가 없다』이며, 둘째 단락은 4절부터 6절까지로 제목은 『할 수 없다』이며, 셋째 단락은 7절부터 8절까지로 『해서는 안 된다』이다.
(1) 할 필요가 없다
『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은 여섯 번 제기되었다. 첫째 죽은 행실을 회개함, 둘째 하나님께 대한 믿음, 셋째 각종 침례, 넷째 안수, 다섯째 죽은 사람의 부활, 여섯째 영원한 심판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다시는 터를 세우지 말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 여섯 가지는 모두 터가 되는 말씀으로, 터는 이미 닦아졌기에 다시 터를 세울 필요가 없으며,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이 터를 잘 세우지 않았다면 집을 건축할 수 없으므로 다시 터를 세워야 한다. 이 말은 터가 이미 세워졌으므로 다시 터를 세울 필요가 없으며, 반드시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2) 할 수 없다
4절에서 나오는 한 번이라는 말은 역사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6절의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에서 『다시』라는 말은 2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의 『다시』와 원문에서 동일한 글자이다. 『도의 초보를 버리고』의 『버리고』는 원문에서 「미끄러지다」,「넘어지다」의 의미이다. 「도」라는 말은 원문에는 없는 말인데 더해진 것이다. 이 단락에 있는 모든 접속사는 원문을 읽어볼 때 「또한」, 「만일」, 「왜냐하면」등의 단어가 없고 「그리고」라는 말만 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을 읽을 때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는데, 즉 『비췸을 얻고,(그리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그리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이다. 이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만약 이상의 네 가지를 이미 체험했다면, 한번 넘어졌다고 다시 새롭게 회개할 수가 없다는 말로서, 그것은 그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고, 그분을 현저하게 욕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새롭게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한번 넘어진다면-이것은 결코 그가 걷고 있는 길에서 이탈한 것이 아니다-그가 걷고 있는 방향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새롭게 회개할 수 없으며 다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없고, 현저하게 그분을 욕보일 수 없다.
이 서신을 쓴 사람은 1절부터 3절에서 이미 히브리인들에게 다시 터를 세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는데, 그렇다면 만약 히브리인 가운데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이 4절부터 6절까지에서 말한 상황에 있다면, 그가 넘어지고 또 넘어진다면 그는 다시 터를 세워야 되지 않겠는가? 이 넘어진 사람은 다시 회개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 서신을 쓴 사람은 그들에게 대답하길, 설령 어떤 사람이 4절부터 6절까지 말한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또한 그가 범죄한 것이 사실 일지라도 그는 다시 새롭게 회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부분의 말씀에는 「다시」라는 말이 두 번 사용되었는데, 한 번은 1절에서 『다 닦지 말고』이며, 다른 한번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으니』에서 사용되었다. 터의 교훈은 여섯 가지이며, 회개는 한번 언급되었다. 이 서신을 쓴 사람은 첫째 단락에서 그들에게 다시 터를 세울 필요가 없다고 말했으며, 둘째 단락에서 그들에게 설령 오늘 어떤 사람이 여기에서 넘어졌다면 그는 다시 새롭게 회개할 수 없고 새롭게 다시 터를 세울 필요가 없음을 말했다.
우리는 거듭났다가 다시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우리는 다시 회개하고 다시 거듭날 수 있는가? 6절의 회개는 1절의 회개와 같으며, 터를 세우는 회개이다. 이것은 결코 사람이 다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터를 세우는 단계까지 다시 돌이켜 새롭게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기에서의 가장 큰 관건이다. 다시 회개하고 다시 터를 세운다의 「다시」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길 바란다. 다시 터를 세우고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부분의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이 하나님께 속한 좋은 것들을 받았는데도, 만약 그가 한 번 넘어졌다면 다시 회개하고 다시 터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듭남은 단지 한차례이며, 길에서 한번 넘어졌다고 다시 처음부터 이 길을 걸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넘어지면 응당 이와 같이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3) 해서는 안 된다
비록 1절부터 3절까지는 우리에게 『할 필요가 없다』를 말하고 있고 4절부터 6절까지는 우리에게 『할 수 없다』를 말하고 있으나 7절부터 8절까지는 『해서는 안 된다』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즉 계속 넘어져서는 안 되고 범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마치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이와같이 행한다면 형벌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구원받고 난 후에 죄를 범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구원받고 난 후에 어떠한 죄를 범했든지간에 결코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두 가지 생각은 모두 틀린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이 성장하길 원하신다. 만약 당신이 넘어져서 다시 되돌아가 새롭게 터를 세우려 한다면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악한 삶을 산 후에 어머니의 뱃속에 다시 들어가 다시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진정 여전히 과거처럼 악한 일을 하고 6절에서 말하고 있는 일들을 행하고 있다면, 그는 어떻게 되는가? 거기에는 세 가지 결말이 있는데, 첫째는 버림을 당하고, 둘째는 저주함에 가깝고, 세째는 불사름이 된다.
(1) 반드시 버림을 당할 것이다. 『버림 당하다』는 바로 고린도 전서 9장 27절의 『버림이 될까』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바울은 자기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이 될까 하여 자신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였고, 가장 엄격하게 자신을 처리했다고 말한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울이 결코 구원받지 않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며, 그는 면류관을 받지 못함을 두려워하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두려워 하였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당신에게 한 대의 자전거가 있는데 원래 좋은 것이었고 사용하기에 합당하였으나 지금은 고장이 나고 녹이 슬어서 못쓰게 되었다고 하자. 이 말은 이 자전거가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버림받았고, 한쪽에 제쳐두었고, 쓸모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은 영생이 없으며 구원받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쪽에 제쳐두어 쓸모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범죄한 믿는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형벌을 가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이 사람을 영광 밖에 있는 흑암의 장소에 두시며, 천년왕국에 참여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25장 30절에서 말한 것의 의미이다.
(2) 저주함에 가깝다. 여기에서 저주함에 가깝다라는 말은 저주받는다라는 말이 아니다. 저주함에 가깝다는 것은 저주처럼 보이지만 저주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형벌의 경중의 어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형벌의 종류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형벌을 받아야 하며, 그리스도인도 형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저주함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악한 행동을 했을지라도 형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저주함에 가깝다』는 것이 바로 형벌이 있다는 사실임을 기억해야 한다.
(3) 불사름이 된다. 불사름은 바로 고린도 전서 3장 1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불은 이 사람의 모든 생활과 모든 일을 불사를 것이다. 이 사람은 마치 살아있는 쓰레기통과 같아서 그 안에는 많은 더러운 것들이 차 있으며, 불의 불사름을 거쳐야 깨끗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는 즐겁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경계를 받아야 한다. 한면으로 우리의 구원은 안전하고 확실하나 다른 한면으로 만약 우리의 행위가 좋지 못하면 형벌을 받아야 한다. 비록 이 형벌이 영원한 것이 아니지만 천년왕국에서의 우리의 분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상에서 말한 것을 결론지을 수 있다. 히브리서 6장 1절부터 3절까지는 다시 터를 세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4절부터 6절까지도 터를 다시 세울 필요가 없고, 어떤 믿는이가 어떤 곳에서 넘어졌다면 그 넘어진 곳에서부터 일어나 가는 것이지 결코 다시 새롭게 회개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며, 7절부터 8절까지는 우리는 좋지 못한 일을 행해서는 안 되며 만약 어떤 사람이 계속해서 그러한 행위를 지속하면 반드시 형벌이 있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워치만 니 전집, 제1집 제20권, 4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