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 왕들과 치리자들과 그리스도를 산출함 창세기 49장 10절은,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홀(忽)은 왕권, 혹은 왕국의 홀을 가리킨다. 시편 45편 6절은,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라고 말한다. 나라의 상징인 홀은 그리스도의 왕의 권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10절에 있는 홀은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왕권을 의미한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는 것은 왕권이 그리스도로부터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히브리 시는 짝을 지어 구성된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치리자의 지팡이」는 「홀」과 동의어이다. 틀림없이 여기서 치리자는 그리스도이다. 이 구절에서 치리자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입법자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법을 만드는 분이시다. 그분은 지팡이와 홀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왕권의 권위와 지팡이와 홀을 가진 치리자이시다. 이 구절은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발 사이」라는 말은 씨나 후손을 가리키는 시적 용어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유다의 후손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다 지파에 언제나 왕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역대상 5장 2절에 따르면 유다가 왕권을 가지며 치리자가 그의 후손으로부터 나온다.(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99)
d) 실로를 가짐 이 권위는 실로가 오시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실로라는 단어는 「평화를 가져오는 자」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훌륭한 성경 교사들은 실로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실 때 평화의 왕으로서, 평화를 가져오는 분으로서 오실 것이다. 그때에는 온 땅에 평강이 충만할 것이다. 또한 창세기 49장 10절은,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백성은 나라와 동등하다.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는 모든 나라들이 그분에게 굴복하고 그분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사야 2장 1절부터 3절과 11장 10절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천년 왕국의 시작부터 모든 나라들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것임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받기 위하여 그분에게 나아올 것이다.
2. 평강을 가져다주는 자로 오시는 그리스도 창세기 49장 10절은 실로가 오시기까지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으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시리라고 말한다. 실로는 평강을 가져다 주는 자를 의미한다. 합당한 왕국은 평강의 영역이다. 당신에게 평강이 없다면 당신은 사실 왕국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왕은 평강을 주는 자, 평강을 가져다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왕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온 땅에 평강을 가져다주는 위대한 실로로서 오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실로로서 누리기 위해 그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를 실로로 누릴 수 있다.
가족 생활의 예를 깊이 생각해 보라. 어떤 의미에서 가족 생활은 소동으로 가득한 폭풍 이는 바다이다. 폭풍이 언제 올지 우리는 전혀 모른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가족 생활이라는 바다를 항해해 오고 있으며, 그것이 종종 매우 소란하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우리는 폭풍 이는 바다 위에서의 제자들의 체험에 대해 읽는다(마 14:22-23).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려 하셨을 때 그분의 제자들을,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다(마 14:22).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풍랑에 뒤흔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곳 산 위에서 기도하신 후 주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배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오셨다(마 14:25). 그분이 배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바람이 그쳤다(마 14:32).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수가 계신 곳에는 폭풍이 전혀 있을 수 없으므로 폭풍은 멈추었다. 폭풍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하늘에 속한 왕을 두려워 한다. 비록 폭풍이 우리를 괴롭힐 수는 있지만 그분이 파도 위를 걸으시므로 그분을 괴롭힐 수는 없다. 소란한 가족 생활의 바다 가운데서 우리는 구걸하는 식으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대신 권세를 사용하여, 『주님, 당신이 바다 위를 걷고 계십니다. 당신은 왕이시요 당신에게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이 소란한 상황을 이기기 위해 당신의 권세를 사용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와 같이 기도하기를 힘쓰라.
하나님의 눈에 승리는 얻은 바 되었고 왕국은 이 땅에 있으며 평강이 여기 있다.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주목하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14장 28절에서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마치, 『주님, 만일 주시라면 제게 말씀을 주시어 저를 당신에게 오게 하소서. 당신이 바다 위를 걷고 계시니 저 역시 바다 위를 걸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주님은, 『오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배 밖으로 나가 예수께 가려고 물 위를 걸었다(마 14:29). 베드로에게는 배 밖으로 뛰어나가 파도 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환경을 주목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믿음은 사라졌으며 그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베드로의 체험은 우리의 환경을 주목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서라는 교훈이다. 믿음은 그분의 말씀에 서는 것이다. 믿음은 환경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다. 만일 당신이 배 밖으로 뛰어나가 주님의 말씀 위에 선다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다. 당신은 구걸하는 기도들을 너무 많이 하였다. 구걸하는 대신 환경에게 명령을 발하여, 『나는 네가 나를 어지럽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예수님이 왕이시요, 왕국은 그분의 것이며, 그분은 실로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환경에 평강을 두어야 한다.』라고 말하라.
종종 우리는 골치거리들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그것들을 받아들였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심리적인 문제이다. 간교한 자인 사탄은 당신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심리적인 방법으로 당신을 접한다. 욥은,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말했다(욥 3:25). 욥의 어려움들이 그에게 임하기도 전에 그는 그러한 어려움들에 대해 생각하였고 그것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어떤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당신이 이미 그것을 받아들였음을 뜻한다. 두려울 때마다 당신은 즉시, 『사탄아, 나를 떠나라. 나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이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두려움은 사탄의 호출 카드이다. 만일 당신이 그의 호출 카드를 받아들인다면 사탄 자신이 올 것이다. 모든 두려움은 호출 카드이다. 사탄은 당신에게 실지적인 어려움을 보내기 전에 먼저 그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을 보낸다. 사탄의 두려움의 호출 카드를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을 내버리라. 이것은 영적인 전쟁에 관계된 문제이다. 어떤 형제들은 그들의 직장을 그만두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이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나서 며칠 후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해고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고, 『사탄아, 나는 결코 해고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이 해고된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고용될 것이다. 왕국 안에 있으므로 나는 이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승리를 얻으셨으며 그분의 승리의 결과는 왕국이다.
3. 열국의 복종과 순종 창세기 49장 10절은 실로가 오시기까지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천년 왕국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실로로서 두 번째 오실 것이며 모든 백성들은 그분께 복종하고 순종할 것이다. 원칙상, 그것은 오늘도 동일하다. 그리스도의 권세와 왕국이 지배하는 곳에 백성들의 복종과 순종이 있을 것이다.(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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