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죄(단수)를 처리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죄(단수)를 처리하는가?
> 우리는 아주 쉽게 죄와 죄들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죄는 단수이고 죄들은 복수이다. 우리는 죄와 죄들의 차이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죄와 죄들을 구분할 줄 모른다면, 당신은 구원에 대하여도 분명치 않을 것이다. 죄와 죄들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았을지라도 자기의 구원 여부에 대해 분명하지 못하게 된다. 성경에서 죄란 무엇이고 또 죄들이란 무엇인가? 간단한 정의를 내리겠다. 죄는 당신으로 범죄케 하기 위해 당신 속에서 당신을 지배하는 능력이고, 죄들은 밖으로 범한 낱낱의 죄들을 가리킨다.
죄란 무엇인가? 나는 죄의 뿌리, 죄의 근원 혹은 본죄, 원죄 등의 명사를 쓰기 원치 않는다. 이 명사들은 다 신학자들이 지어낸 것들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단순한 것이 좋다. 여기서 우리는 체험에서 이것을 보기로 하자. 우리 속에서 우리를 사욕과 정욕의 길로 향하도록 강요하고 그런 자연적 경향을 갖도록 우리를 지배하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한 죄이다. 그러나 우리 속에 우리를 강요하고 재촉하는 죄가 있을 뿐 아니라 밖으로 행한 낱낱의 죄들이 있다. 성경에서 죄들은 행위에 속하고 죄는 생명에 속한다. 죄들은 우리의 손과 발과 마음 곧 우리 온 몸으로 행한 바이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바 몸으로 행한 일들이다. 그러나 죄는 어떤가? 죄는 우리의 육체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일종의 율이다. 항상 우리로 범죄하고 악을 행하게 하는 이것이 바로 죄이다.
우리가 죄와 죄들을 잘 구분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는 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완전히 보여 준다. 이 여덟 장의 성경에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1장부터 5장 11절까지에서는 죄(sin)에 대해 말하지 않고 죄들(sins)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2절부터 8장까지에서는 죄들이 아닌 죄를 보여 준다. 로마서 1장부터 5장 11절까지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로마서 5장 12절 이후는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의 어떠함 곧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죄는 우리의 생명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로마서 5장 11절 이전에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다. 이는 거기서의 문제가 당신이 살아나야 할 필요성에 있지 않다. 당신이 범하는 낱낱의 죄가 어떻게 사함받을 수 있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5장 12절 이후의 둘째 단락에서 당신은 당신 속에서 강하고 힘센 어떤 것이 당신 몸의 지체의 율로서 당신을 끌어당기고 범죄케 함을 볼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당신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죄들은 우리의 행위이기 때문에 성경은 죄들이 사함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나 죄는 우리를 유혹하고 범죄케 하기 위해 억압하고 강요하는 것으로서, 이 죄에 대해서는 해방될 필요가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한번은 어느 선교사를 만났는데, 그는 대화하는 중에 죄 사함(the forgiveness of sin)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서 성경 어디에 죄 사함(the forgivenness of sin)이라는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주 많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한 군데만 보여 달라고 말했다. 그는, “당신의 말은 없다는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 전권에 죄 사함(the forgivenness of sin)이라고 말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죄들의 사함(the forgivenness of sins)이라고 말했습니다. 사함받는 것은 죄들이지 죄가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내 말을 믿지 않고 성경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는 내게, “니 선생, 참 이상하군요. 성경에서 죄들의 사함을 말할 때마다 복수를 표시하는 ‘s’를 붙였군요.”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함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죄들임을 볼 수 있다.
죄들은 우리 밖의 것이기 때문에 사함이 필요하다. 또 하나 당신 안에 강하고 힘세며 당신으로 범죄하도록 재촉하는 그것은 사함이 필요치 않고 다만 그것을 벗어나면 된다. 당신이 그것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그것과 관계를 갖지 않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죄들은 사함으로 해결되며 죄는 그 권세 아래 있지 않고 그것과 관계를 맺지 않음으로 해결된다. 죄들은 우리의 행위이고 낱낱의 행한 바이기 때문에 사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죄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한 번도 죄의 사함을 말한 적이 없고 항상 죄들의 사함을 말한다. 동시에 죄들로부터 해방받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나는 성경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음을 보장할 수 있다. 성경에는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있을 뿐 죄들로부터 해방된다는 말이 없다. 왜 그런가? 당신 속에서 당신을 억압하고 이끌어 범죄케 하는 그것에 대하여 당신은 다만 거기서 벗어나고 해방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성경에서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여기서 나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비교하여 제시해 보겠다.
성경에서 죄는 육체 안에 있고 죄들은 행위에 속한다고 말한다.
죄는 우리 몸에서 원칙(생명의 원칙)이고 죄들은 우리 몸에서 사실(생명의 사실)이다.
죄는 지체 안에 있는 법이고 죄들은 사실적인 범죄요 실지로 행한 바이다.
죄는 우리의 어떠함과 관련되고 죄들은 우리의 행함과 관련된다.
죄는 우리의 어떠함에 속하고 죄들은 우리의 행함에 속한다.
죄의 범위는 생명의 범위이고 죄들의 범위는 양심의 범위이다.(죄는 생명의 능력이고 죄들은 양심의 능력이다. 당신은 생명 안에서 죄의 지배를 받고, 밖으로 당신이 많은 죄들을 범할 때 양심 안에 참소와 불안함이 있게 된다.)
죄는 합일적인 것이고 죄들은 낱낱의 것이다.
죄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고 죄들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다.
죄는 해방을 필요로 하고 죄들은 사함을 필요로 한다.
죄는 성화와 관련되고 죄들은 칭의와 관련된다.
죄의 문제는 승리의 문제이고 죄들의 문제는 마음속의 평강의 문제이다.
죄는 사람의 천성 안에 있는 것이고 죄들은 사람의 길에 있는 것이다.
비유로 말하자면, 죄는 나무와 같고 죄들은 나무에 달린 열매와 같다.
많은 경우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죄인을 빚진 사람에 비유한다. 우리는 빚을 지는 것이 아주 좋지 않은 일임을 알 것이다. 그러나 빚을 진 사람에게 있어서 빚을 진 것이 하나의 문제이나 그의 속에 빚을 지는 성질이 있는 것도 하나의 문제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빚을 지다 보면 남의 돈을 빌려 쓰고서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남에게 빚을 질 수 없고 남에게 돈을 빌 수 없다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누구에게서 이삼백 원 또는 이삼천 원을 빌렸는데 나중에 갚을 능력이 없어서 친척이나 형제 혹은 친구나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 그 빚을 갚아 주었다 하자. 그런데도 삼사 일 후에 또 속으로 남에게 빌리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당신은 돈을 빌리는 것과 빌고자 하는 마음은 별개임을 볼 수 있다. 밖에서 빌린 것은 성경에서 말한 죄들과 같다. 당신의 습관과 성질은 걸핏하면 돈을 빌리려고 하는데, 그러한 돈을 빌리려는 마음은 죄인 것이다. 그는 누가 빚을 갚아 주었다고 해서 돈을 빌리는 일을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빚을 갚아 주는 사람이 있으므로 더욱 돈을 빌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범죄(범죄한 사실)를 처리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 속의 죄로 향하는 마음도 처리하신다. 우리는 죄들의 처리가 중요할 뿐 아니라 죄의 처리도 중요함을 본다. 우리가 이 두 방면을 보아야만 우리의 구원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하나님의 복음, 제1장)
주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하였는데 왜 우리는 죄가 있음을 다시 깨닫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가책되는 죄는 성질, 교만 등의 죄들이며 낱낱의 죄인데, 주 예수의 피가 이미 우리를 위하여 이러한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이 죄가 있음을 다시 깨닫지 않게 되는 것이다. 죄들은 존재하나 피가 이미 처리하였다. 만약 주의 피가 씻은 것이 단수의 죄라면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체험을 갖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단수의 죄를 깨끗케 하면, 이것은 바로 우리가 죄의 능력, 즉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는 능력을 영원히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한 것은 우리의 양심으로 하여금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죄들을 다시는 느끼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이 더 이상 죄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피의 깨끗케 함을 통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그러면 주인 노릇 하는 죄(단수의 죄)는 어떻게벗겨지는가? 로마서 6장 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여기에는 세 가지 항목이 있다. 첫째는 죄의 몸이여 둘째는 옛사람이요 셋째는 죄이다.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것은 몸이다. 옛사람을 통해 몸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라고 사주하는 것은 죄이며, 죄가 몸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이 몸은 죄의 몸이라고 부른다. 한면으로 죄의 선동을 받고 또 한면으로는 범죄하도록 몸을 사주하는 것은 옛사람이다. 옛사람은 죄와 몸 사이에 끼어 있다. 옛사람은 바로 우리의 인격이다. 죄가 유혹하면 옛사람이 찬성하고 곧 몸으로 하여금 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주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죄의 뿌리를 뽑아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주 예수님이 성취하신 것은 바로 옛사람을 제거한 것이다. 죄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죄의 몸 또한 존재하고 있으나 중간의 옛사람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여전히 사람이다. 그러나 죄가 이제 새 사람을 밀어낼 수 없으며 영원히 새 사람을 사주할 수 없다. 죄(단수)는 여전히 존재하나 우리는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왜 죄의 노예가 되지 않는가? 그것은 몸으로 하여금 범죄하도록 직접 사주하던 옛사람이 이미 못박혀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몸은 어떠한가? 원래는 범죄를 일삼았으나 지금은 실직해 버렸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죄들을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라고 말하고 있는 죄는 복수의 죄이며 형벌 방면의 죄를 가리키는 것이지, 결코 죄의 뿌리(단수의 죄)를 깨끗케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세상 사람의 「죄를 지고 가는」의 죄는 단수의 죄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 말씀은 정말로 죄의 뿌리가 뿌리채 뽑혔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가? 만약 이와같다면, 구원받은 사람의 죄의 근원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의 죄의 뿌리도 모두 뿌리채 뽑혔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여기에서의 뜻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온 세상 사람의 죄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결코 세상 사람의 죄의 뿌리를 뿌리채 뽑았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로마서 5장 12절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의 뜻과 상대되는 것이다. 죄가 한 사람을 통하여 이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또 다른 한 사람이 죄를 없애신다. 주님이 이미 죄라는 문제를 제거하셨고, 세상 안에 있는 죄를 해결하셨다.
우리는 어떻게 죄(단수)를 처리하는가? 로마서 6장 11절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여길지어다』고 말한다. 복수의 죄의 해결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고, 단수의 죄의 해결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죽음은 죽었다고 여기는 것이다(간주하는 것이다). 내가 만약 죄에 대하여 자신이 죽었다고 여기면, 죄는 비록 주인 노릇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를 이길 수 없다.
요한 일서 1장 7절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다. 여기의 죄는 단수의 죄이다. 이것은 주 예수의 피가 죄의 근원을 깨끗케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가 만약 빛 가운데에서 행하면 피차 서로 교통이 있고 그리고 난 후에 비로소 그분의 아들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우리의 죄의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빛 가운데에 계신 것처럼 우리가 만약 빛 가운데에서 행하면 우리에게는 이미 죄가 없다는 것인데, 또 왜 주 예수의 피로 정결함을 받아야 하는가?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시의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복음의 빛 가운데에서 행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주 예수가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이미 해결하였음을 보게 될것이라는 의미이다. 계속해서 9절에서는 또한 우리의 죄(복수의 죄)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수의 죄는 우리 안에서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며, 복수의 죄는 우리의 외면적인 행위이다. 단수의 죄는 전체적인 죄의 문제이며, 복수의 죄는 낱낱의 죄이다.
고린도 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의 죄는 단수의 죄이다. 주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것이지 우리를 위하여 죄들이 되신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수의 죄는 무슨 뜻인가?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죄(단수의 죄)가 없고, 원래 죄가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했고, 죄를 한번도 섬긴 적이 없고, 무엇이 죄의 능력인지도 알지 못했던 예수로 하여금 우리를 대신하여 죄와 죄의 문제가 되게 하셨고, 이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을 심판하게 하시어 죄를 처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죄가 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처리하시는 것처럼 그분을 다루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 예수가 만약 죄들이 되셨다면, 그분은 행위의 죄를 갖게 되었을 것이며, 그분 자신 또한 범죄한 사람이셨을 것이며, 교만, 질투, 부정 등과 같은 죄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분이 주 예수를 죄들이 되게 하지 않으셨으며, 주 예수를 죄의 문제로 간주하여 처리하셨기 때문에, 주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온 세상 사람의 죄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워치만니 전집 1집 2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