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초보의 말씀이란?
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초보의 말씀
히브리서 5장 13절은 『대저 젖을 먹는 이마다 의의 말씀을 체험치 못한 자니 이는 그가 어린아이임이라』고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의 말씀(행 14:3, 20:32)과 생명의 말씀(빌 2:16)과 심지어 하나님의 선한 말씀(히 6:5)까지도 이해하고 있지만 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 그 말씀이 의의 말씀이어야 하는가? 저자는 그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에 대하여 말할 때 의의 말씀을 언급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 그는 「할 말이 많이」 있었지만 이 서신을 받는 이들이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웠다」(히 5:11).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배우는 자들이었다. 히브리서 5장 12절과 13절에서 저자는 그들에 대하여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라고 말한다. 이 서신을 쓸 당시에 그들은 선생이 되어야 했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이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했다. 그들은 여전히 어린아이들이었다. 『젖을 먹는 이마다 의의 말씀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히 5:13), 우리는 의의 말씀이 어린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숙한 자들을 위한 것임을 본다.
젖
성경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 부류, 즉 어린아이들을 위한 젖과 성숙한 자들을 위한 단단한 음식으로 분류한다(5:12-13).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그들이 어린아이들이었기 때문에 그가 그들을 젖으로 먹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으며(고전 3:1-2), 베드로 역시 똑같은 관념을 갖고 말하기를 『갓난아이들과 같이 말씀의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벧전2:2)고 했다. 히브리서 5장 12절에서는 젖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초보의 말씀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다(히 6:5). 우리는 모두 이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 요한복음 3장 16절과 로마서 6장 23절은 모두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말하는 선한 말씀의 예이다.
단단한 음식
장성한 자들을 위한 단단한 음식은 의의 말씀을 가리킨다(히 5:14, 고전 3:2). 의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과 생명의 말씀보다 식별하기가 더 어렵다. 의(義)는 항상 하나님의 통치와 통치적인 다루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통치적인 다루심에 관한 의의 말씀은 딱딱한 뼈와 같아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든 못하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적인 다루심 아래 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와 민수기와 신명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적인 다루심들을 본다. 하나님의 통치적인 다스림에 관한 말씀은 은혜의 말씀이나 생명의 말씀이 아닌 의의 말씀이다.
만일 당신이 여전히 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히브리서 3장과 4장을 다시 읽어보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말씀은 의의 말씀이지 은혜의 말씀이 아니다. 시편 95편에서 인용된 3장 15절에서 우리는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는 것을 본다. 히브리서 4장 11절에는 또 다른 의의 말씀이 있는데,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동일한 순종치 않음의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보다 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경륜적이고 통치적으로 다루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와 의에 대한 더 깊은 사상을 구체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오늘날 이런 종류의 말씀에 주의한다. 게으른 종들은 바깥 어둠으로 내어쫓길 것이라는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이나 생명의 말씀이 아닌 의의 말씀이다. 고린도전서 3장 12절부터 15절도 마찬가지이다. 그 말씀에서 우리는 교회 생활에서 어떻게 건축할 것인지 주의하라는 것을 본다. 만일 우리가 인간적이고, 육적이고, 땅에 속한 방법으로 건축한다면 우리는 나무와 풀과 짚으로 건축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재료들로 건축된 모든 것은 타버릴 것이며 그것들로 건축하는 사람들은 해를 당할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한 모든 것들이 타버릴 것이며,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을 통과하여 받는 것 같으리라』(고전 3:15)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의의 말씀이다.
계시록 22장 14절에 있는 약속은 『그들의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를 먹을 권리를 얻으려함이요 문들을 통하여 성으로 들어가려 함이라』고 말한다. 17절에 있는 부르심은 『그 영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는 올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는 것이다. 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은혜의 말씀(14절)과 생명의 말씀(17절)을 본다. 그러나 계시록은 또한 의의말씀으로 끝나는 것을 보게된다. 우리는 계시록 22장 12절에서 『그리고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것을 따라 갚아주리라』는 것을 발견한다. 당신은 주님의 오심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분이 오실 때는 은혜나 생명의 시기가 아닌 의의 시기가 될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지만 자기 자신이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 이유이며(고전 9:27), 또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말한 이유이다(딤후 4:7-8). 계시록 2장 10절은 생명의 면류관에 대하여 말하고, 베드로전서 5장 4절은 영광의 면류관을 언급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의의 면류관을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오심에 대해 호기심이 있지만 그들은 주님이 보상을 가지고 오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분은 긍휼의 두 눈이 아닌 태우고 살피는 심판의 일곱 눈으로 오실 것이다. 이것이 의의 말씀이다. 우리는 「달콤한 것」이나 「사탕」이나 「디저트」의 말씀이 필요치 않다. 우리는 단단한 음식인, 의의 말씀이 필요하다. 이 메시지들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엄중한 말씀을 하셨다.(출처: 히브리서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29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