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구원(영생을 얻음)의 조건인가?
믿는이들
Hannah , 2009-03-09 , 조회수 (3364) , 추천 (0) , 스크랩 (0)

 

 

무엇이 구원(영생을 얻음)의 조건인가?

 

 

무엇이 구원(영생을 얻음)의 조건인가?

성경에 의하면, 구원의 조건은 단지 한가지인데 그것은 곧 믿음이다. 믿음 외에 어떠한 것을 더이상 첨가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믿음만으로 여전히 충분하지 않으며, 믿음 외에 어떤 것들을 더 첨가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 과연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살아있는 믿음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살아있는 믿음의 표현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믿었다면 그는 구원받은 것이며, 또다른 어떤 기타 조건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일곱 가지 조건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믿음에 바라는 일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믿어야 하며, 그리고 난후 열심히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천국갈 수 있도록 바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희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하나님은 이미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로마서 3장 21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무릇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희망하고 있는 사람은 그의 믿음은 믿을만한 것이 아니며, 그는 결코 참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믿음은 「이미」이뤄진 것을 믿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이 믿음인지 알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의 마음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은 마지 못해서 사람들을 용서하셨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길 때까지 간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당신을 이미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주 예수가 그분의 보혈을 흘리신 것은 바로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한 것이다. 이 사실은 이미 성취되었으며, 당신이 믿기만 하면 당신은 용서받을 수 있다. 당신이 믿기만 하면 주님이 이미 성취한 용서는 바로 당신의 것이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당신에게서 나타날 것이다.

(2) 믿음에 시인하는 것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믿었으나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믿는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시인해야 하나 시인(是認)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인은 결코 구원의 조건이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지는 않는다.
마태복음 10장 32절부터 33절까지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람이 영생을 받는 것에 관한 말이 아니다. 이 부분의 성경은 장래 천국에서의 사람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며, 믿는이들의 혼의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이 땅에서 자신을 기꺼이 버리고 주님을 시인한 사람들을 주님 또한 장래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시인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결코 사람의 영원한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마가복음 8장 38절은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말한다. 이것 또한 왕국 시대를 말헌 것이다. 마가복음 8장 35절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혼)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한다. 이 땅에서 혼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바로 이 땅에 있을 때 주님을 위해서 혼 안에 있는 모든 누림을 잃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창피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수치를 두려워한다면, 장래 반드시 창피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주님을 위해 창피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치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장래 또한 반드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오늘날 주님과 함께 고난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장래 반드시 왕국의 영광을 잃게 될 것이다. 주 예수가 이 땅에서 왕국을 세울 때에 많은 사람들은 영광을 잃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32절에서 37절까지와 마가복음 35절, 38절은 모두 왕국의 문제를 말하고 있지 영생 얻는 문제를 말하고 있지 않다. 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믿는이들의 이 땅에서의 생활과 관련있다. 믿는이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해야 할 때 만약 시인하지 않았다면 비록 영생을 이미 얻었으나 왕국에는 참여할 수 없다.

로마서 10장 10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구절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전 후관계를 살펴보아야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을 말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로마서 10장의 주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서, 율법의 마침은 그리스도이며 무릇 그를 믿는 사람은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4절). 믿음은 의를 얻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8-9) 여기에서 믿는다는 것은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는 입으로 하는 것이며 하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믿음의 행위로, 한가지의 두방면을 말하는 것이며, 칭의와 구원이 한 가지의 두방면인 것과 같이 입에서 시인하는 것은 믿음의 한 표현이며, 믿음은 시인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다음 구절에서 결론적으로 말할 때에도 단지 믿음만을 말했지 시인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11절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도 무릇 믿고 시인한 사람은 반드시 혼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시인한다는 것은 믿음 안에 있는 것으로 반드시 다른 제목은 아니다. 14절은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하며. 16절은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라고하며. 17절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라고 말한다. 이 세 곳의 말씀은 시인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시인은 결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긴 자연적인 표현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시인은 어떠한 것인가? 여기에서의 시인은 일어서서 증언을 한다는 말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그의 어머니를 알아보고 엄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아 마음으로 믿었을 때 입에서 시인하면 그는 자연스럽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결코 믿음 외에 첨가되는 어떤 조건이 아니다. 사람은 단지 믿기만하면 구원받는다.

(3) 믿음에 선한 행위를 첨가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므로 반드시 선한 행위를 해야하며 단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면 너무나 값싼 것으로 자신은 반드시 한면으로는 선한 행위를 하고 또 한면으로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성경의 원칙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목적은 마치 에베소서 2장 10절의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는 말씀과, 디모데 후서 2장 21절의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의 말씀과같이 우리로 하여금 선한 행위를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선한 행위는 구원받은 이후에 행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결코 선한 행위를 한 다음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또한 믿음에 선한 행위를 첨가한 후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먼저 걸음마를 배운 후에 태어나는 것이 아닌 것같이 우리는 반드시 거듭나고 난 뒤에 선을 행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선을 행하고 난 뒤에 거듭나기를 바란다면, 이러한 일은 전세계 어느 곳에서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로마서 4장 4절부터 6절까지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라고 말한다. 일한 사람이 받는 삯은 은혜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받아야 될 것이며, 일을 끝마치면 삯을 얻는 것이다. 오직 일하지 않는 것은 단지 믿음-우리는 이 『믿음』이라는 글자를 매우 정확히 보아야 한다-만이며, 죄인을 의롭다고 칭한 하나님을 믿는 이것이 의로 간주된다. 일을 하지 않고도 단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 결코 믿음에 어떤 것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믿으라』는 말만 기억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다윗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일한 것이 없이」라는 것은 행위와 조금도 어떠한 관계가 없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8절부터 10절까지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8절과 9절은 우리의 구원은 은혜로 인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자신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또한 10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로 행하라고 예비한 선을 행하게 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으며, 구원받은 후에는 선한 행위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행하도록 예비해 놓으신 것이다.

(4) 믿음에 기도를 첨가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기도가 반드시 그 조건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원이 믿음으로 인한 것이지 기도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죄를 담당하셨고, 하나님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없으며 단지 믿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시기를 구하는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이 이미 성취한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하셨음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믿는다. 십자가는 이미 구속의 사업을 성취하셨으므로, 사람이 단지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믿기만 하면 반드시 구원받는다.

어떤 사람은 로마서 10장 13절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반드시 기도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지 않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14절을 볼 때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먼저 믿고 나중에 부르는 것이며, 믿음이 있어야 부름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부름은 믿음의 한 표현이지 독립적이거나 또다른 조건이 아니다. 믿음은 부름을 포함하며, 믿음은 자연히 부름을 산출한다. 동시에 여기에서 부르는 것은 일반적인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간구로, 바로 앞에서 말한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며, 또한 고린도 전서 12장 3절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의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주의 이름이 바로 구원이다. 무릇 주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를 주라 부른다면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다. 어떻게 예수를 주라고 믿으면서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없는가? 어떻게 예수가 주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예수는 주라고 부르지 않으며,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가? 그러므로 기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며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이다.

(5) 믿음에 침례를 첨가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이 바라는 것, 시인하는 것 또는 행위나 기도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고 침례받아야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 또한 틀린 것이다. 마가복음 16장 16절은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는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이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에 주의해야 한다. 성경에서는 영생을 얻는 영원한 구원, 믿는이들의 매일매일의 구원, 환란 중의 구원, 몸의 구원, 천년왕국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할 혼의 구원 등 몇 가지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다. 침례와 관련있는 구원은 세상의 죄의 범위로부터 구출됨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영생을 얻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영생을 얻는 것은 개인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며, 침례는 죄의 범위로부터 구출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단지 믿기만 하고 침례받지 않았다면 그 안에는 이미 영생이 있으나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는 여전히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다. 반드시 일어나 침례받고 그가 죄의 범위로부터 벗어난 관계를 선포해야만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구원받은 사람임을 인식하게 한다. 영생을 얻고, 정죄받지 않고, 영원한 구원에 이르려면 단지 믿기만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어떤 기타 다른 조건을 첨가할 필요가 없다. 마가복음 16장 16절 상반절은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것이요』라고 말했고 믿지 않고 침례받지 않으면 반드시 정죄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세상의 죄의 범위로부터 구출받으려면 믿고 침례받음이 필요하다. 정죄받으려면 다만 믿지 않는다는 것으로 충분하며, 바꾸어 말한다면 정죄받지 않는 조건은 단지 믿는 것이지 믿고 침례받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결코 침례받지 않았으나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0-43)고 말씀하셨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정죄받지 않았고 구원받았고 영생을 얻었다. 그러므로 침례는 결코 영생을 얻는 조건이 아니다.

(6) 믿음에 죄의 자백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가 종이에 쓴 글자와 같아서 한글자 한글자가 십자가에 달려 있으며, 자신이 한가지 죄를 자백하면 종이에 쓴 글자가 하나 감소하나,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여전히 거기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반드시 죄를 자백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응당 죄를 자백해야 하나 죄를 자백하는 것이 결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요한 일서 1장 9절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죄를 자백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한다. 성경에 이 구절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 일서도 결코 믿지 않는 사람에게 쓴 서신이 아니라 여기에서의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쓴 서신이다. 요한 일서는 다음 세 부류의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있다. 첫째 생명을 받은 어린 아이들, 둘째 능력을 받은 젊은이들, 세째 체험을 가진 아버지들이다. 요한 일서는 로마서와는 달리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서신은 교통을 말하고 있는 책이다. 그리스도인이 만약 죄를 범하면 죄를 자백해야 하며 만약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막히게 된다. 당신이 하나님과 교통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죄를 자백해야 한다. 만약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죄를 자백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성령이 어떤 죄인으로 하여금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미 성취한 역사를 믿게 하면, 그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는다. 어떤 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은 믿음이다. 성경에서는 죄인이 반드시 믿음에 죄의 자백을 첨가해야만 구원받는다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구속을 이루셨고 사람들이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 행한 하나님의 간증을 믿기만 하면 반드시 구원받는다.

(7) 믿음에 회개를 첨가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은 구원이 회개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로마서는 구원을 가장 분명하게 말하고 있으나 결코 한번도 회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요한복음은 복음을 가장 분명하게 말하고 있으나 한번도 회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구원은 믿음으로 인한 것이지 회개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회개는 필요없다는 말인가? 성경에 의하면, 믿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회개해야 하며 구원받은 사람 또한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믿기 이전에 회개하고 믿고 난 후에도 회개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죄에 대한 견해, 자신에 대한 견해, 세상에 대한 견해, 주님에 대한 견해가 변화되지 않았다면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 『회개』란 단어의 뜻은 생각의 전환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귀하게 여기던 물건을구원받은 후에는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며 믿음에 부속된 것이고 구원에 부속된 것이다.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는가? 믿음은 결코 어떤 신학의 원칙을 믿는 것이 아니다. 듣는 것은 교리를 들으며, 믿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다. 에베소서 1장 13절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한다. 듣는 것은 어떤 교리나 복음을 듣는 것이며, 믿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믿는다고 말하면서 사실 그는 어떤 교리에 찬성하고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는다. 혹 어떤 사람은 다른 의도를 가지고서 스스로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는 결코 그리스도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교리를 말하는 것은 결코 우리의 목적이 아니며, 우리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요한 이서 5장 9절부터 12절까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게 행하신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이 다만 그분의 아들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된다.

우리는 오늘날 다른 사실로 인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았기 때문에 기뻐한다. 우리는 반드시 선한 행위가 있어야 하고,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해야 하며, 죄를 자백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며, 침례받아야 하고 많은 기도를 해야만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기뻐하실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행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결코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