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3장 12절 말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그리스도의 변화시키고 건축하는 생명을 체험함
1925년에 나는 계시록을 읽고 연구하며 탐구하기 시작했다. 내가 직면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처음 세 장, 특히 일곱 교회들에 관한 두 장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일곱 서신들에는 거의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한 많은 구절들이 있다. 가장 난해한 구절들 중 하나는 3장 12절이다. 거기에서 주님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말씀하셨다. 51년 전에 이것을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을 이해하는 데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기둥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그분의 새 이름을 우리 위에 기록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문제에 관해 내가 참고했던 책들 중 어떤 것도 내 의문에 답해줄 수 없었다. 초등 학생도 그 단어들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구절의 참 뜻을 파악하기란 매우 어렵다. 계시록 3장 12절은 모든 주석가들에게 난해한 구절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중 누구도 적절한 체험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마침내 나는 이 약속이야말로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서신들 가운데 있는 일곱 가지 약속들 중 가장 큰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 안의 이기는 자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큰 축복
우리에게 필요한 체험이 없다면 3장 12절을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 주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무엇으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생각할 때마다 그분이 우리에게 뭔가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관념에 따르면, 약속은 축복과 관련된다. 우리에게 축복이 없다면 약속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3장 12절에서 주님은 『내가 그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그를 만들리라』고 말씀하신다. 3장 12절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이나 하늘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신다. 그렇지 않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를 그 무엇으로-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으로-만들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는 것은 두 가지-변화와 건축-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이 나라(미국)에 온 이래로 나의 부담은 이 두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주께서 우리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우리를 변화시켜서 그분의 성전 안으로 건축되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또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우리 위에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의 수준에 달하는 이들은 그들 속에 합당한 이해를 갖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 수준에 있다면, 우리는 이미 주께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준비를 한 셈이다. 만일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적은 능력으로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에게 진실되다면, 그때 우리는 변화될 준비를 한 것이며 또한 그분이 우리를 기둥으로 만드실 수 있는 합당한 위치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먼저 귀한 재료로 변화되고 그 다음에는 기둥으로 건축될 것을 요구한다. 흙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수 있는가? 흙이 보석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건축 안으로 건축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3장 12절에 앞서 우리는 2장 17절에서 그분을 감추인 만나로 먹음으로써 흰 돌로 변화될 수 있음을 가리키는 주의 약속을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최고 큰 축복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어떠함과 관계 있으므로 바로 우리 존재를 연계(連繫)시키고 있다. 최고 큰 축복은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무엇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가령 내가 흙덩어리라 하자. 당신이 내게 그 무엇을 준다 해도 그것이 금이든지 다이아몬드이든지 나는 여전히 흙일뿐이다. 비록 당신이 나를 하늘로 데려가서 하나님 자신 앞에 둔다 해도 나는 여전히 흙일 것이다. 최고 큰 축복은 주께서 나를 하나님의 거처에 관계된 그 무엇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객관적인 축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의 축복은 우리를 그 무엇으로 만드는 것으로서, 우리를 귀한 재료로 변화시킨 다음 하나님의 건물 안으로 건축시키는 데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당신의 관념을 절대적으로 혁신시킬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 이상을 보았다면, 여전히 주께서 당신에게 외적인 것들로 축복하시기를 기대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런 기대를 저버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실로 이 이상을 보았다면 교회 생활에서 주님의 뜻은 우리 밖에서 무엇을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존재와 관계된 그 무엇을 하시려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다른 존재로 만드실 것이다.
우리 위에 쓰여지는 세 가지 이름
주님은 우리를 기둥으로 만드실 뿐만 아니라 우리 위에 세 이름-하나님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 그분의 새 이름-을 기록하실 것이다. 어떤 것 위에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그것에 칭호를 주는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신의 이름을 묻는다면 무어라고 답하겠는가? 『나의 이름은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담대함이 있는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 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가령 내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졌고 당신이 내 이름을 묻는다 하자.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내 위에 기록된 것을 읽어보세요. 하-나-님.』 이것이 나의 이름이요 나의 칭호이다. 어떤 대적자들은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성 모독이라고 나를 참소하거나 비난하지 말라. 나는 단지 기록되어진 사람일 따름이요, 기록자는 그분이시다. 당신은 그분을 비난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또 우리 위에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하실 것이다. 얼마나 많은 새 예루살렘이란 글자가 당신 위에 기록되어 있는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당신에게서 「새 예-」라는 글자만을 볼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어떤 일정 기간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새 예루살렘이란 이름의 모든 글자가 당신 위에 기록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주님은 그분의 새 이름을 우리 위에 쓰실 것이다. 주님은 늘 새로우시므로, 정녕코 그분은 옛 이름이 아닌 새 이름을 갖고 계신다. 주님의 새 이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체험한 그리스도이다. 오직 우리가 적절한 체험을 한 후에라야 비로소 이 새 칭호를 받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가장 큰 축복은 주께서 우리를 하나님같이 만드는 것이요, 우리를 새 예루살렘의 일부분으로 만드는 것이요, 우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표현으로 만드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주님이 우리 위에 기록하시는 방법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는 주님의 가장 큰 축복이 그분이 우리를 그 무엇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하신 것임을 보아야 한다. 그분이 이것을 성취하시는 방법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을 우리 위에 기록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역사되는 것과 새 예루살렘이 우리 존재 안으로 역사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속성들이 그분의 새 표현으로서 우리 안으로 역사되는 것을 말한다. 결국 이런 역사로 말미암아 이 세 이름이 우리 위에 기록될 것이다. 그분의 요소를 우리 안으로 역사하는 것이 이 이름들을 우리 위에 기록하는 것이다.
석화(石化)된 나무의 예를 살펴보자. 먼저 평범한 나무 하나가 있다. 물이 그것을 거쳐 흐르면서 그 물은 천연적인 나무 요소를 씻겨 내버리고 굳은 광물질 요소로 그것을 대치한다. 이런 과정이 일어남에 따라 그 나무는 점차 석화(石化)된다. 이 과정이 완성된 후에 우리는 그 나무 위에 「석화목(petrified wood)」이라는 글자를 써도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세 가지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신성한 요소가 우리 존재 안으로 역사되는 것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에서 가장 큰 축복은 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분이 자신을 우리 안으로 역사하심으로 우리를 새 예루살렘의 일부분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체험과 함께 하나님께 속한 그 무엇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외적인 축복들을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비록 주님이 우리를 돌보시지만, 우리는 이 외적인 돌보심을 진짜 축복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참된 축복은 그분이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놀라운 세 이름이 기록된 기둥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궁극적인 최종 완성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3장 12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당신에게 말해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역대로 하나님의 건축을 통해 수행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한 문제가 크게 간과되어 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당신은 기독교 안에서 하나님의 건축에 관한 말을 한 마디도 듣기가 어려울 것이다. 많은 이들이 건축이란 단어를 함양(涵養, 혹은 敎化: edification)과 동일한 의미로 생각하면서 오해하고 있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건축하는 것은 단지 함양하는 것이다. 비록 많은 이들이 함양(교화)을 역설하지만, 아무도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가 되는 하나님의 교회를 실지로 건축하는 것에는 주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경의 궁극적인 최종 완성이란 말인가? 성경의 마지막 두 장에 이를 때 우리는 종교나 도덕이나 윤리나 함양(교화)은 찾아 볼 수 없고 하나의 성 새 예루살렘을 보게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새 예루살렘을 하늘의 큰 저택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들은 이 성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을 결코 주목해 본 적이 없다(21:2).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 가기를 열망하지만, 하나님의 갈망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옛 창조와 새 창조 안에서 역사하신 것의 궁극적인 최종 완성이다. 모든 책은 반드시 하나의 결론을 가져야 한다. 어떤 책이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최후의 말이 가장 중요한 말이다. 성경의 결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최종 완성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보낸 서신이 일곱 서신들 중에서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이 서신은 하나님의 목적의 최정점인 새 예루살렘에 도달하고 있다. 그것은 전 성경의 궁극적인 최종 완성에 도달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과 이 서신이 모두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서신은 일곱 서신 중 하이라이트일 뿐 아니라 전 성경의 최정점에까지 이르고 있다.(계시록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