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인과 스구디아인
믿는이들
Hannah , 2009-03-09 , 조회수 (7414) , 추천 (0) , 스크랩 (0)

 

 

야인과 스구디아인 

 

 

골로새서 3장 11절은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고 말한다. 골로새서에는 성경 해설가들이 어렵다고 느끼는 한 쌍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야인과 스구디아인이다. 야인은 영어로 바바리안(Barbarian)곧 미개인이다 그러면 스구디아인은 무슨 뜻인가? 스퀴데스(Skuvqh)의 어원은 불확실하며, “스구디아인(Scythian), 스구디아의 주민”을 의미한다.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을 찾아보면. 스구디아인들은 B.C. 700년경 소아시아 지방을 침입하여 근동 지역을 탄압하였지만, 영속적인 왕국을 세우지 못한 이란의 유목민이었다. 그들이 바벨로니아 편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바빌로니아는 앗수르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스구디아인들이 어떤 사람인가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가 서로 상이하다.

M. R. Vincent와 같은 학자는 스구디아인들은 사람을 희생물로 드렸으며 머리 가죽을 벗겼고 때로는 살해한 적들의 껍질을 벗겼으며 심지어는 그 희생자들의 해골을 마시는 잔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저스틴 같은 학자는 트리포와의 대화 28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의거한 새로운 그리스도교적인 질서에 의해 스구디아인들이나 바대인들같이 심지어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언급한다.

한편, Westcott와 같은 학자는 스구디아인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야만인들과 스구디아인들이 구별되는지 아니면 스구디아인들이 야만인들의 대표적인 예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스구디아인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어떤 학자들의 의견을 따르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이 가능하다.


1. 빈센트(M. R. Vincent)의 신약의 용어 연구에 따른 스구디아인들

골로새서 3장 11절에 대한 빈센트(M. R. Vincent)의 신약의 용어 연구에 따르면 스구디아인들은 사람을 희생물로 드렸으며 머리 가죽을 벗겼고 때로는 살해한 적들의 껍질을 벗겼으며 심지어는 그 희생자들의 해골을 마시는 잔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구절들에서 말한 야만인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이것은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인간의 문화를 우려했다는 강한 표시이다. 심지어는 할례자나 무할례자도-비록 종교에 관계되지만-역시 문화와 관계가 있다.


2. 웨스트코트(Westcott)의 헬라 고대 문학에 따른 스구디아인들

헬라어에서 스구디아인이라는 단어는 「제마(Zema)」에서 나온 것으로서 「제코타(Zecotha)」와 「제코티아(Zecothia)」와 「제코티안(Zecothian)」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므로 중국어에서는 스구디아로 번역한 것이다. 웨스트코트(Westcott)는 「제코티아」가 지방 이름이라고 말한다. 헬라 고대 문학은 제코티아와 갈라디아를 종종 같이 언급했다. 그러므로 스구디아인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떤 도시의 이름과 같이 그곳의 사람을 언급할 때마다 그 도시의 특징을 연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산서 사람들을 언급할 때 그들 가운데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보석 가게가 생각난다. 소흥 사람을 말하면 청나라 초기의 모사(謀士)가 생각난다. 한 지방을 언급할 때마다 어떤 사상이 연상된다.


3. 문화에 대한 바울의 우려

골로새서는 우리의 문화를 처리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광대하게 계시한다. 문화는 그리스도를 대치하는 매우 간교하고 숨겨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죄는 정죄하지만 문화는 정죄하지 않는다. 최근에 주님은 고린도전서가 죄스런 것들을 처리하고 갈라디아서가 종교와 율법을 처리하는 반면 골로새서는 문화를 처리한다는 것을 내게 보여 주셨다. 철학과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은 모두 문화의 방면들이다. 마찬가지로 금욕주의와 영지주의 같은 그러한 각종 주의들도 문화의 방면들이다. 그런 다음 나는 고린도전서 12장 12절, 13절, 갈라디아서 3장 27절, 28절, 골로새서 3장 10절, 11절 사이에 있는 유사성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만일 이 구절들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고린도전서 12장 12절과 13절,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 27절과 28절 안에는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골로새서 3장 11절은 할례자와 무할례자, 야만인과 스구디아인을 언급한다. 이것은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문화를 다루고 있음을 암시한다. 스구디아인들은 가장 야만적이었다.(골로새서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41)


4.문화의 구별을 없이함

헬라어로 된 많은 책을 보면 스구디아인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야인은 사람들의 멸시를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문화적인 문제이고 세상에서 이 분별은 너무나 큰 것이다. 이는 마치 정통 영국 신사를 아프리카 야만인과 함께 둘 때 그들의 문화적 수준이 크게 차이 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바울은 야인이든 스구디아인이든 그 분별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이 문화적인 구별은 많은 사람들을 어렵게 만들었다. 한번은 내가 두 유대인을 만났는데 나는 그들과 다소 안면이 있기 때문에 숨김없이 그들에게, 왜 많은 사람들이 당신네 유대인들을 반대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 유대인의 문화가 남보다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내가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그는 예를 들어 말했다.『만일 내가 미국계 유대인이라면 솔직히 말해서 미국인의 입장에서 나도 유대인의 문화가 너무 낮기 때문에 유대인을 싫어한다. 가령 한 미국인이 매달 이백 불을 번다면 그는 한 달에 식비로 얼마를 쓰고 집세로 얼마를 쓰며 하루에 한 번씩 구두를 닦고 와이셔츠를 하루에 한 번갈아 입고 신발을 두 달에 한 켤레 사며 집 안을 잘 정리하고 십 불을 남겨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르다. 유대인들은 한 달에 십 불을 쓰고 백 구십 불을 저축해 둔다. 그는 구두를 닦지 않으면 얼마를 절약하고 구두를 사지 않으면 얼마를 절약할 것인지를 계산한다. 와이셔츠도 새 것으로 갈아입지 않고 그냥 더러워진 채로 두고 비누 값을 절약한다. 우리가 거하는 장소가 좁아도 상관하지 않고 먹는 것도 대충 먹으며 미국인들과 같이 그렇게 편한 것을 찾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은행에 예금된 돈이 많기만을 바란다. 우리는 미국인이 아주 가난하기 때문에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미국인은 우리의 의복이 단정하지 못하고 거처가 너무 더럽다고 우리를 멸시한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우리 유대인은 돈을 벌 줄 알고 머리가 총명하나 문화에 있어서 어떤 사람과도 조화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이것은 내가 처음 들은 말이다.

문화 수준이 높은 사람이 문화 수준이 낮은 사람을 대하기란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계급의 높낮이나 지혜와 우둔함의 문제가 아니고 빈부의 문제도 아니며 문화적인 문제이다. 스구디아인이 볼 때 야인인 당신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 옷을 입을 줄도 모르고 먹을 줄도 모르고 거할 줄도 모른다. 야인이 볼 때 스구디아인인 당신은 물질을 중요시하고 먹는 것과 입는 것 등 그런 것들만 주의한다. 이 두 부류의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만일 이런 두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당신은 당신의 의견이 있고 그는 그의 의견이 있으며 당신은 그가 틀렸다고 느끼고 그는 당신이 틀렸다고 느낀다. 이 두 사람을 한 곳에 둘 때 분명히 충돌이 일어나고 어떻게 하여도 조화될 수 없다.

중국 사람은 젓가락으로 밥을 먹고 인도 사람은 손으로 집어먹는다. 이 두 사람이 두 끼만 같이 먹어도 그들이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마음 속으로는 편치 않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 서로 다투고 견딜 수 없게 된다. 당신은 밥을 먹을 때 젓가락을 사용해야 하고 손으로 집어먹는 것은 형편없다고 느끼겠지만 그는 당신네들처럼 가식적이거나 형식적이지 않고 통쾌하게 손으로 집어먹는다고 느낀다. 당신은 그를 틀렸다고 말하겠지만 그는 당신을 틀렸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문화적인 구별이다. 이런 문화적인 구별은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소멸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가장 위대한 사람이므로 모든 인간의 차별을 수용할 수 있다. 내가 어떤 표준을 세우고 다른 사람은 그 표준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 표준에 맞은 사람을 중요시하고 맞지 않은 사람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와 교회 안에와 새 사람 안에 있어야 할 상태가 아니다. 만일 인도에서 우리의 형제가 왔거나 아프리카에서 우리 형제가 왔다 하자 그들의 문화가 우리와 다르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오직 한 가지 질문 곧 그들이 주 안에 있는 사람인가를 묻는다. 또한 그들도 우리에게 다만 주 안에 있는 사람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만일 주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우리는 주 안에서 접촉하고 서로 사랑하며 기타 다른 일들은 모두 수용한다. 우리는 결코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나누지 않고 주 안의 형제 자매를 나누지 않는다.

우리는 교양이 있는 형제 자매들을 모아서 한 교회를 이룰 수 없다. 또한 거친 사람들 한 무리를 모아 교회를 형성할 수 없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며 교회 안에 이런 것이 없다. 이것은 교회 밖에 있고 몸 밖에 있으며 새 사람 밖에 있다 우리는 결코 이런 문제를 교회 안에 가져올 수 없다. 교회 안에서는 문화의 높낮음이 이미 제해졌다.
또 한면에서 우리는 로마인 가운데서 로마인이 되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되며 어떤 문화 아래 있는 사람 가운데서는 어떤 문화의 사람이 되기를 배워야 한다. 아프리카에서 하나님을 아는 한 형제가 중국에 왔다면 그는 마땅히 젓가락으로 밥을 먹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아프리카에 갔다면 우리는 마땅히 손으로 집어먹어야 한다. 우리는 그 지방의 형제 자매들과 문제가 생기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가 갈 경우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들이 올 경우에는 그들이 배워야 한다. 우리가 영국에 간다면 영국인이 되기를 배워야 한다. 영국인이 중국에 올 때 그는 중국인이 되기를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것이고 다른 사람을 얻지 못한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일에 있어서 좋은 출발을 갖는다면 장래 많은 어려움을 면하게 될 것이다.(그리스도인 50필수과정 1-8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