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종류의 사하심은?
믿는이들
Hannah , 2009-03-09 , 조회수 (3192) , 추천 (0) , 스크랩 (0)

 

 

다섯종류의 사하심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5-16).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7-38).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삼하 12:9, 14).


에베소서 4장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고 말한다(32절). 요한복음 20장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할 권위―“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23절)―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요한일서 1장 9절은, 만일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죄를 시인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사해 주신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6장 14절은 또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그분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야고보서 5장 14절과 15절은, 또한 만일 우리가 범죄했을 때 장로를 청하여 우리를 위해 기도하도록 하면 사하심을 얻는다고 말한다. 이 다섯 군데의 구절을 읽으면, 모두 사하심의 문제를 말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들에서는 단지 한 종류의 사하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종류의 다른 사하심을 말한다.



영원한 사하심


성경은 다섯 종류의 사하심을 말한다.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는 영원한 사하심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를 사하셨기 때문에, 영원한 사하심이라 칭한다. 내가 이 사하심을 얻으면 영원히 구원받고 멸망하지 않는다. 만일 주님이 나의 죄를 사하시면 나는 영원히 구원받은 것을 안다. 그러므로 영원한 사하심이라 칭한다.


간접적인 사하심

두 번째는 간접적인 사하심 혹은 선포의 사하심이다. 요한복음 20장 23절에서 우리는 주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누구의 죄를 사하면 사하여지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본다. 로마 천주교는 이 구절 위에 사하심의 체재를 세우려 하고, 신부에게 사람의 죄를 사하거나 그대로 둘 권위가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이것이 틀린 것임을 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할 권위가 있다고 말씀했는가?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주님만 사할 권위를 가진 분임을 안다.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 사람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만 사할 권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을 반대했다. 요한복음의 여기의 말씀은 영원한 사하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주는 사하심을 말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만일 죄인이 복음을 믿고 침례 받는 것과 떡 떼는 것을 원한다면, 교회는 할 말이 있다. 만일 교회가, 그가 참으로 주께 속했다고 믿는다면, 그를 받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를 거절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하심은 간접적인 사하심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용하여 죄가 사하심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를 선포하신다. 이럴 뿐 아니라 우리는 요한복음 20장 22절을 23절에 연결시켜야 한다. 22절은 “성령을 받으라”고 말하며, 23절은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교회가 만일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그 사람은 구원받았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다. 만일 교회가 그 사람이 구원받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사람을 구원받게 하거나 구원받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교회가, 하나님께서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선포하시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회복의 사하심

영원한 사하심과 간접적인 사하심 외에 세 번째로 우리에게 회복의 사하심이 필요하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로 자주 넘어졌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한다. 이전의 죄는 사하심을 받았지만, 또 죄를 범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새로운 사하심을 구해야 한다. 영원한 사하심으로 말한다면, 나의 위치는 해결되었다. 영원한 사하심에 관해서는 절대로 문제가 없다. 일단 하나님이 나의 죄를 사하시면 그분에게는 후회함이 없으시다. 그러나 내가 구원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다시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어버린다. 내가 여전히 그분의 아들이지만, 그분의 얼굴 대하기를 싫어한다. 당신의 아들이 당신에게 득죄할 때, 그아들의 죄로 인해 부자(父子)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지만 그는 당신과의 교통을 잃어버린다. 그와 당신 사이에 장애가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생명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하나님과의 교통은 잃어버릴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을 잃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재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할 때 새로운 사하심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1장 9절에서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라고 말한다(요한일서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구원받지 않은 자의 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의 죄를 다룬다). 그는 우리가 만일 자신의 죄를 시인하면 죄 사함을 얻는다고 말했다. 만일 성도가 범죄했으면,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시인해야 한다. “죄를 범했으니 사하여 주소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2:1). 그분은 나를 위해 아버지의 오른편에 계시며, 그분의 사역 전체를 하나님 앞에 두셨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의 공로 안에서 하나님을 앙망하고 나의 죄를 시인함으로 사하심을 받는다. 이 사하심은 영원한 사하심과 다르며 또한 간접적인 사하심과도 다르다. 교회가 구원받았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교회가 간접적으로 나의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사하심은 교통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통 혹은 회복의 사하심이라 칭할 수 있다. 영원한 사하심은 죄를 위한 것으로 영원한 구원과 관련된다. 간접적인 사하심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의 내 위치에 관한 것이다. 회복의 사하심은 나와 하나님과의 교통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는 구원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교회의 문제이며, 세 번째는 집 안에서의 생활 문제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과 교회와 하나님의 집에 관한 세 종류의 다른 사하심이 있다.


왕국의 사하심

네 번째 사하심은 왕국의 사하심이다. 마태복음 6장 14절과 15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18장 23절부터 35절까지에서 주님은 사하심을 받은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는 왕의 종이었다. 그가 사하심을 받은 후에, 그는 자신에게 빚진 함께 종 된 다른 형제를 만났다. 그는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 그와 함께 종 된 자는 백 데나리온을 그에게 빚졌다. 그러나 그는 함께 종 된 자에게서 이 돈을 받기 위해 그를 핍박하고자 했다. 그분의 주인이 어떻게 했는가?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주님이 어떻게 말씀했는가?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 영원한 구원은 노력에 있지 않고 그 근거가 주 예수님께 있기 때문에, 여기의 문제는 당연히 구원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역사로 구원을 받았다. 나의 죄는 주님이 흘리신 피로 인해 사하심을 받았지 다른 사람을 용서함으로 사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형제와 ‘주의 종’이라 칭함을 받은 후에 나는 반드시 나의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 예수께서 돌아오실 때 하나님이 나를 다루실 것이다. 왕국 시대에 주님은 그분의 생각에 따라 공평한 분깃을 내게 주실 것이다. 나는 생명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나의 행한 것에 따라 징벌을 받을 것이다. 영원한 구원은 견고하다. 그러나 왕국 안에서, 천년왕국 시대에서의 나의 위치는 지금의 행위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행한 것에 따라 나를 다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공평하심으로 나를 다루실 것이다. 이것을 천년왕국의 사하심 혹은 왕국의 사하심이라고 한다.


행정적인 사하심

다섯 번째 사하심은 하나님의 행정의 손 아래서 사하심을 얻는 것이다. 야고보서에서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약 5:14상)라고 말한다. 장로는 와서 병든 형제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또한 기도할 뿐 아니라 서로 죄를 시인해야 한다. 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15절)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아주 기묘한 사하심이다. 이전에 당신은 만일 장로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면 당신이 사하심을 받는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만일 내가 범죄했으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사하심을 얻으면 된다. 왜 장로를 청해야 하며, 서로 죄를 자백해야 하는가? 또 장로가 나를 위해 기도하면 내가 사하심을 얻는가? 이것은 어떠한 사하심인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다른 일을 말하기 원한다.


우리는 성경에 하나님의 행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행정은 다만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될 뿐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께는 그분의 모든 자녀를 다루실 방법이 있다. 당신이 만일 아버지 된 자라면, 마음을 써서 자녀를 교육시킬 것이다. 당신의 모든 계획과 행사의 배후에는 자녀를 교육시키려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더욱 그러하시다. 하나님은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신다. 즉 어떤 원칙에 따라 우리를 다스리고 계신다. 이것을 하나님의 행정이라 한다. 하나님의 행정 안에서의 주요한 원칙은 갈라디아서 6장 7절과 누가복음 6장 38절에서 거론되고 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 이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보리를 심으면 보리를 거둔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둔다. 우리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둘 수는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명하셨기에 이 율을 위반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인이 이와 같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도 이와 같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보다 그리스도인에게 더욱 그러하다. 누가복음 6장 38절 :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만일 우리가 인색하게 주면, 돌아오는 것도 인색하다. 아낌없이 주면, 아낌없이 받는다. 갈라디아서는 종류의 문제이고, 누가복음은 정도의 문제이다. 전자는 질의 문제이고, 후자는 양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전에 심은 것을 거두는 것이다. 우리가 1938년에 거두는 모든 것은 1937년과 그 이전에 심은 것들이다. 우리의 체험하는 것과 우리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시고 잰 것이다―가정에서와 개인 생활에서와 사업에 있어서 이러하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것은 이전에 혹은 몇 년 전에 심은 것들이다. 어떤 일도 우연히 임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로 우리가 심은 것을 거두게 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교육시키시기 위해서이다.


비평을 잘 하고 항상 다른 사람을 들추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 하자. 그는 굳이 결점을 지적하면서 항상 다른 사람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말한다. 그것이 그가 심은 것이다. 그럴 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거두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어떤 때 사람이 우리를 비평하면, 우리는 아주 화를 내면서 그들이 틀렸다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동일한 일을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깨이도록 힘을 다하신다. 만일 우리가 비평받는 것을 싫어하면, 다른 사람을 비평하는 것은 어떠한가? 나는 아주 비평하기를 좋아하는 한 형제를 안다. 그의 입에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말이 달려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병들었으면 그는 “이것은 하나님의 손이 당신에게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날 한 형제가 아들을 잃어버렸다. 그는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이것은 하나님의 손이 당신에게 있는 것이다.”라고 그에게 말해 주었다. 나는 그 편지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왜 이 사람은 그에게 이렇게 심하게 하며, 그를 안위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평하는가?’ 두 주 후에 그 자신도 아들을 잃어버렸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시험이 임했다. 나는 펜을 들고, “만일 그 형제의 아들이 죽은 것이 하나님의 손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라면,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하나님의 손이 당신에게 임하기를 원하는가?”라고 썼다. 편지를 다 쓴 후에 나는 스스로 책망을 받았다. 내가 바로 그를 책망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먼저, “이것은 하나님의 손이 당신에게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지금 나도 동일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편지를 찢어 버렸다. 내가 거두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결코 심어서는 안 된다. 만일 다른 사람이 나를 헤아리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헤아림으로 다른 사람을 헤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정의 손을 가져오지 않도록 아주 조심해야 한다. 일단 하나님의 행정의 손이 우리에게 있으면 벗어나기가 어렵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통을 회복하는 사하심은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정의 손을 옮기고 하나님의 행정의 사하심을 얻기는 어렵다. 이 다섯 번째의 사하심은 하나님의 행정의 사하심이라 칭할 수 있다. 하나님의 행정의 사하심은 그분이 나에게서 그분의 손을 거두어 가심으로 나로 하여금 나의 심은 것을 거두지 않게 하시는 것이다. 많은 때 회복의 사하심은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하나님의 행정의 사하심은 여전히 주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 남자 아이가 규율을 지킨다는 조건 아래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매일 오후에 공원에 간다 하자. 그는 다른 남자 아이와 싸우거나 창문에 돌을 던지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며칠은 아주 잘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다른 남자아이와 싸우고 돌을 던져서 몇 개의 창문을 깨뜨렸다. 비록 그의 어머니가 이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가 집에 돌아갔을 때 어머니를 볼 면목이 없었다. 저녁 식사 때에 그는 배가 고프지 않은 것 같고 또한 이상하게도 조용하다. 어머니와 아들과의 관계에는 이상이 없고, 그는 여전히 그녀의 아들이다. 그러나 교통이 끊어졌다. 그는 조용히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그가 병든 줄로 생각하고, “무슨 일이니? 약을 먹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양심에 있다. 관계는 변함이 없지만 교통은 잃어버렸다.

 

어떻게 회복하는가? 그가 철저히 회개하고 죄를 시인하면 곧 회복된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러하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하고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통은 우리의 무죄를 조건으로 한다. 만일 죄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죄를 시인해야 교통이 회복된다. 이제 아들은 죄를 시인하고 어머니도 용서했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평상시처럼 그로 공원에 가서 놀게 하겠는가? 어머니가 그를 포옹하면서 “너를 용서해 주마.”라고 말하는 것은 한 방면의 일이다. 그러나 다음날 그가 공원에 가서 놀도록 허락해 주는 것은 다른 방면의 일이다. 그녀는 아마, “네가 죄를 시인해서 정말 기쁘다. 그러나 너로 나가서 놀게 할 수는 없다. 이번 주에는 방과 후에 곧장 집으로 돌아오너라. 만일 네가 잘 순종하면, 다음 주에는 다시 너로 공원에 놀러가도록 하겠다.”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에서 회복의 사하심과 행정의 사하심 사이의 다른 점을 보았는가? 하나님도 이러하시다. 만일 내가 범죄해서 시인하면, 그분은 즉시 사하신다. 그러나 아마 그분은 나의 몸에 징벌을 가하실 것이다. 아마 그분은 나의 가정이나 사업에 어떤 일이 발생하게 하심으로 나를 징벌하여 다시는 경솔히 범죄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분이 타당하다고 보실 때, 그분은 그분의 손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회복의 사하심과 행정의 사하심의 차이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사무엘하 12장에서 이 일을 분명히 본다. 다윗은 두 가지 무서운 죄―살인과 간음―를 범했다. 다윗은 깊이 회개했다. 시편 51편에서 우리는 이 일을 본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셨다. 나단이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는가?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삼하 12:13). 우리는 아마 “할렐루야, 하나님이 다윗을 용서하셨다. 모든 것이 좋게 되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빨라서는 안 된다! 나단이 다윗이 용서함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칼이 영영히 다윗의 집을 떠나지 않고 그의 집에 재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것 등을 말했다. 교통은 회복되었지만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다윗에게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이 회복의 사하심은 주셨지만, 여전히 행정의 사하심은 주지 않으셨다.


우리가 어렸을 때 많은 사탕과 초콜릿을 먹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치아는 상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또한 “이전에 너무 많은 사탕을 먹었습니다. 나를 용서하소서.”하며 죄를 자백한다. 그러나 우리의 치아는 다시 자라는가? 우리의 치아는 일생 동안 좋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 많은 일에 있어서 그분은 행정적으로 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찬양한다. 모든 것이 은혜이다. 그러나 은혜 가운데서 그분의 거룩함을 배우도록 그분은 우리를 가르치신다. 우리 자신의 기쁨을 따라 생활하는 사람이 없기 바란다. 오늘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지만, 당신이 오늘 심은 것은 내일 거두지 않을지라도 거두는 시기가 언젠가는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야고보서 5장은, 어떤 사람도 자신의 병이 자연적인 율을 어겨서 왔는지 혹은 하나님의 그에 대한 행정의 손으로 인해 왔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럴 때 그는 장로를 청하고, 그들은 온다. 그들은 죄를 자백하고, 그들 서로 죄를 자백한다. 그들은, 그가 줄곧 단독적으로 행동했지만, 이제 우리는 그를 몸의 교통 안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기름을 바름으로 그를 몸 전체의 기름 바름 안으로 인도한다(시133:2 참조). 그러면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약 5:15)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성경 안의 다섯 종류의 사하심을 구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1) 영원한 구원에 관하여 (2) 우리의 교회 안의 위치에 관하여 (3) 하나님과의 교통에 관하여 (4) 장래 왕국 안의 위치에 관하여 (5) 순탄하거나 순탄하지 않은 세상의 생활에 관하여. 하나님은 어떤 자녀도 그분의 행정의 손을 피하도록 하지 않으신다. 오늘날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측량하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로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그분을 경외해야 한다. 하나님은 타는 불이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히 10:31). 바울은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우리의 행한 대로 받는다고 말한다. 다음 절은 어떻게 말하는가?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고후 5:11). 만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느끼고 또한 그분 앞에서 이 죄를 자백하면 즉각적인 사하심이 있게 된다. 하나님의 회복의 사하심에 관하여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지연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분의 행정의 사하심에 관하여는 문제가 있다.

 

우리의 환경과 육신의 어려움에 관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아래 순종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비교적 쉽게 그분의 손을 거두어 가신다. 만일 원망하고 반항하면서, “왜 내가 이런 일을 만나야 하는가? 왜 다른 사람은 순탄한데 나는 이러한가?”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반항할수록 하나님의 손은 더욱 우리에게 있게 된다. 어느 날 우리는, “아버지, 당신의 손은 나에게 있어야 하며 이것은 항상 옳은 것입니다.”라고 시인할 것이다. 어느 날 우리는 귀용부인처럼, “나는 징벌하는 그 막대기에 입 맞춥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 막대기는 옮길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다음과 같은 태도가 있기 원한다. “아버지, 당신은 절대로 틀리지 않습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일은 옳은 것입니다. 내게 임하는 모든 것으로 인해 당신을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워치만 니전집 제2집 제26권 제 193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