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1) 선악 지식의 노선에서 벗어나야 그리스도의 삶을 산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이 시비, 옳고 그름, 선악의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질문2) 그리고 저의 삶에서 선악지식의 노선에 대하여 확실하게 밝게 알아 마귀에게 속지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명쾌하게 아는 방법과 생명노선도 사실 정의를 내리기 힘들며 다소 희미한 상태입니다. 밝히 아는 길은 없을까요.
답변 :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명의 노선과 선악지식의 노선을 알려면 이 두 나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생명나무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선과 악의 지식나무는 하나님과 분리된 모든 것과 사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활 가운데서 이 두 노선을 아는 일은 전적으로 <체험>과 관계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리적으로는 알아도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두 노선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노선과 선악지식의 노선을 아는 일은 두부를 자르듯이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체험은 진리의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노선에 대한 진리를 알 때 두 노선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올바른 체험 안으로 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두 노선을 알기 위해 먼저 우리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나무의 <원칙>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삼각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하고, 셋째는 <분별하는 길>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첫째와 둘째는 아래에 관련 내용을 발췌하여 실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는 셋째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현재 한국복음서원에는 찬송가 홈페이지가 따로 없습니다. 그리고 찬송도 몇 곡만 올려져 있습니다.)
생명의 노선과 선악지식의 노선을 분별하는 길은 로마서 8장 6절에 있습니다. "육신에 둔 생각은 사망이요,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원문 참조) 오늘날 생명나무는 우리의 영 안에 있고, 선악의 지식나무는 우리의 육신 안에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우리의 인격인 혼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혼의 주된 부분인 생각을 육신에 두면 <사망>이라고 말하며, 생각을 영에 두면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설탕과 소금을 분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육 안으로는 설탕과 소금을 알 수 없지만 <맛>을 통해 설탕과 소금을 알 수 있듯이, 생명의 노선과 선악지식의 노선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맛과 사망이라는 맛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체험>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교리나 두뇌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영 안에 있다면 우리는 생명과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 안에 있다면 불안, 두통, 약함, 원망 등등의 사망을 맛볼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망의 느낌을 갖는다면 우리는 즉시 주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유무>를 통해 이 두 노선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더 깊이 알기를 원하시면 복음서원에서 나온 <생명의 인식>과 <생명의 체험>이라는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생명나무의 원칙 - 의지
생명나무의 원칙은 의지(依支)이다. 아마 여러분 중 많은 사람이 의지의 원칙에 대해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졸업을 예로 사용하고 싶다. 이 메시지를 읽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초등학교, 고등학교, 전문대학, 혹은 대학교를 졸업했을 것이다. 우리는 학교를 졸업할 수는 있지만 식당을 졸업할 수는 없다. 공부는 졸업할 수 있지만 먹는 것은 졸업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물 마시는 것이나 공기를 호흡하는 것을 졸업할 수 없다. 나는 당신에게 공부를 잘 해서 최대한 빨리 학교를 졸업하라고 격려한다. 그러나 나는 결코 당신에게 호흡하는 것을 졸업하라고 격려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당신이 호흡하기를 졸업한다면 죽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지식은 독립을 산출하고 생명은 의지를 요구한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의 지식을 얻으면 우리는 졸업하여 단독으로 행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나는 요리하는 법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뛰어난 요리사 아래서 요리를 배운 후 나는 결국 지식이 있게 되어 독립할 수 있게 되고 교사의 도움 없이 요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에 속한 일에서는 결코 독립할 수 없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생명에 의지한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호흡하기 시작하여 하루에 스물 네 시간을 계속 호흡하고 있다. 나는 호흡을 졸업한 적이 없다. 나는 결코 호흡과 독립되어 살아갈 수 없다. 나는 이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나는 호흡을 충분히 연습했다. 이제 나는 뛰어나다. 나는 호흡을 당신에게 가르칠 수 있으므로 나 자신은 호흡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호흡을 의존해야 한다. 왜냐하면 호흡은 생명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셨을 때 그분은 지도(地圖)를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아, 여기 네가 여행하기 위한 지도가 있다. 나는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기를 원한다. 이 지도는 매우 분명하다. 만일 네가 정확한 길을 간다면 너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하나님은 다만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를 말씀하지 않았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렇게 대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에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타락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이렇게 인도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거절했으며 생명이신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절대적으로 지식을 따라 살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런 상황에서 불러내어 그분 자신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개입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지도나 지침을 주시지 않았는데 이는 그분의 의도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지도였다. 하나님의 임재가 지침이었고 인도였으며 지도였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주여, 내일 어디로 가야 할지 내게 말씀하소서.』라고 요구했다면 그분은, 『내 아들아, 잠을 잘 자고 평강 가운데 있거라. 걱정하지 마라. 내일 내가 너의 안내가 될 것이다. 나는 너의 살아 있는 지도가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을 것이다.
모든 자동차 운전사는 운전을 간섭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하늘에 속한 자동차의 운전사라면 당신에게는 동료 운전사가 필요하다. 그분은 당신의 살아 있는 지도가 될 것이며 당신의 살아 있는 안내가 될 것이다. 당신은 심지어 자신의 운전을 그만 두고 그분이 운전하시도록 허락할 것이다. 당신은 그분 가까이에 앉아서 그분의 운전을 누리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왜 내가 수고하며 운전해야 합니까? 주 예수여, 당신이 운전하소서. 주여, 내 대신 당신이 운전하소서. 나는 다만 당신의 운전을 누리겠습니다.』 이것이 생명을 의지하는 것의 의미이다.
반대로, 가령 내가 모든 교리를 배우고 성경 전체를 배워서 전 사역 기간 동안 나를 공급할 수백 개의 메시지를 준비한다 하자. 만일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다만 당신에게 지식 나무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은 의지(依支)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단 당신이 지식을 얻어서 그것을 당신의 기억 안에나 공책에 기록해 놓으면 당신은 주님의 임재에서 멀리 떨어진 채 여전히 그분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지식이 있을 때 당신은 주 예수를 의지하지 않게 된다. 주님은 삼층천에 계시고 당신은 멀리 떨어진 땅에서 여전히 당신의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생명의 길은 절대적으로 이것과 다르다. 많은 경우에 나는 다가온 집회에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에 대해 부담을 가졌다. 예를 들면, 어떤 때 나는 오후 내내 기도하고 저녁에 이렇게 말한다. 『주여, 내게 말씀을 주소서. 오 주여, 당신의 부담은 무엇입니까?』 내게 부담은 있었지만 그 부담의 내용에 관한 분명한 인도가 없었다. 나는 그날 저녁에 말씀을 전해야 했다. 집회소에 들어갈 때에도 내게는 말씀이 없었다. 회중이 찬송하고 기도할 때 나는 부담을 받았지만 여전히 말씀이 없었다. 나는 계속 기도했다. 『주여, 당신의 부담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오 주여, 당신은 내가 무슨 말하기를 원하십니까?』 메시지를 전할 시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단상 위에 올라가서, 『성경을 폅시다…』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성경의 어디를 읽어야 할지 몰랐다. 마침내 나는, 『창세기를 읽읍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몇 장을 읽어야 할지 몰랐다. 나는 『3장입니다.』라고 말했지만 몇 절인가를 몰랐다.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말한 창세기 3장 15절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살아 있는 메시지가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의존적이었다. 내게는 지식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살아 계신 주님을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이것이 생명나무의 원칙이다.
우리는 에베소서 5장에 있는 결혼에 관한 가르침에 이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인 모든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한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을 안다. 그리스도인들인 모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들과 남편들은 이 구절의 요구를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을 생명나무로 취하지 않고 지식나무로 취하기 때문이다. 남편들과 아내들이여, 여러분은 지식나무에 따라 살면 안된다. 여러분은 생명나무에 의해 살아야 한다. 아내인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한다. 『주여, 나는 어떻게 남편에게 복종하는지 모릅니다. 주여, 나는 그것을 알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겠습니다. 나는 이 요구를 이루기 위해 내 노력과 내 힘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주 예수여, 나는 다만 당신의 임재 안에 머물겠습니다. 나는 당신 안에 거하기 원하고 당신을 하루 스물 네 시간 동안 누리기 원합니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자연스럽게 당신 안으로부터 복종이 흘러 나올 것이다. 그것은 내적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의 넘쳐 흐름이 될 것이다. 이것이 생명나무를 의지하는 것이다.
생명나무의 원칙은 무엇인가? 그 원칙은 의존이다. 우리 모두는 의지해야 한다. 지식의 길을 취하지 말라. 그 길의 결과는 사망이다.
선과 악의 지식나무의 원칙 - 독립
우리가 생명나무의 원칙을 안다면 지식나무의 원칙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 원칙이 생명나무의 원칙의 반대이기 때문이다. 생명나무의 원칙은 의지(依支)이고 지식나무의 원칙은 독립이다. 주님을 의지하여 행하는 모든 것은 생명나무의 원칙 안에 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독립되어 행하는 모든 것은 지식나무의 원칙 안에 있다.
모든 사람은 독립을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주님과 독립되어서는 안된다. 영적인 독립은 사망을 뜻한다. 만일 우리가 독립된다면 우리는 자살하는 것이다.
주님과 독립되는 것은 우리와 주님 사이에 흐르는 신성한 전기의 흐름을 차단하는 절연체(絶緣體)를 가지는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막대한 자원을 가진 발전소가 있고 필요한 모든 시설이 합당하게 설치되어 있다 하더라도 스위치에 절연체가 끼어 있다면 모든 것이 소용없다. 그 절연체는 전기의 흐름을 단절시킨다. 종이처럼 얇은 절연체라도 흐름을 끊어 놓을 것이다. 독립은 영적인 절연체로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우리를 끊어 놓는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당신 자신을 뛰어나다고 생각지 말라. 전기가 아무리 오랫동안 통했더라도 절연체 없이 전기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결코 이렇게 말하지 말라. 『나는 그리스도 안에 많은 체험이 있다. 나는 수년 동안 영을 사용했으므로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결코 이런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계속해서 우리는 주님께 의존해야 한다. 살아 계신 주님으로부터 결코 독립하지 말라. 단 일 초만 독립해도 죽는다.
두 원칙을 깨달음
생명나무의 원칙과 선악 지식나무의 원칙은 성경 전체를 통해 볼 수 있다. 성경에 있는 소극적인 모든 것들은 지식나무의 노선 안에 있고 적극적인 모든 것들은 생명나무의 노선 안에 있다. 나는 첫째 노선을 지식 노선이라고 부르고 둘째 노선을 생명 노선이라고 부른다. 만일 우리가 이 두 노선을 따라 간다면 두 노선들은 우리를 성경 전체로 인도할 것이다.
먼저, 사람은 지식나무를 먹도록 유도되었다. 그 결과 사람은 타락했다. 타락한 사람의 후손들은 전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의지했다. 창세기 4장에 의하면 처음으로 인간 문화가 발명되었으며 이 문화는 노아 시대의 부패한 세상이 될 때까지 발전되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홍수로 땅을 심판하셨다. 노아의 후손들은 각각 다른 종족이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았다. 결국 두 번째 인간 문화인 바벨탑과 바벨 성이 세워졌다. 그때 하나님은 타락한 종족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이것들에 의해 우리는 두 노선의 발전을 볼 수 있다. 엄격히 말해서 생명 노선은, 타락되었다가 회복된 아담에게서 시작되어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이어진다. 이 생명 노선 안에서 우리는 노아의 장막과 아브라함의 장막과 성막과 성전을 본다. 지식 노선은 가인에게서 시작되어 경건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로 이어진다. 지식 노선 안에는 에녹 성과 바벨과 소돔과 바로의 국고성과, 생명 노선 안에 있는 것들을 사로잡은 바벨론이 있다.
우리는 신약에서도 똑같은 두 노선을 본다. 구약과 율법이 원래는 생명 노선 안에 있었지만 유대 종교인들이 그것들을 지식으로 대하여 지식 노선 안에 넣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을 지식적으로 사용했다. 주 예수님이 오셨을 때 종교 지도자들은 완전히 지식 노선 안에 있었다. 오직 주 예수님 자신만이 생명 노선 안에 있었다. 그후 주님은 제자들을 생명 노선 안으로 인도하셨다. 오순절날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을 생명 노선 안으로 인도했다. 따라서 그 당시에 유대종교는 지식 노선 안에 있었고 교회는 생명 노선 안에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교회는 하락되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부터 죽은 성경 지식으로 멀어짐으로써 기독교가 되었다. 교회는 생명 노선 안에 있었지만 기독교는 지식 노선 안에 있었다. 결국 기독교는 큰 종교적 바벨론이 될 것이며(계 17장), 세상 조직은 큰 정치적 바벨론이 될 것이다(계 18장). 큰 바벨론에는 두 면-종교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이 있다. 어떠한 면이든지 큰 바벨론은 지식 노선의 절정이다.
역대로 그리스도인들 중 이기는 자들은 생명 노선에서 지식 노선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생명 노선이 새 예루살렘에서 최종 완성될 때까지 이 노선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큰 바벨론과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모든 것들은 불의 강(단 7:10)에 의해 불못 안으로(계 20:10, 14-15, 21:8) 씻겨 내려갈 것이다. 모든 세대에 걸쳐서 성경에 있는 모든 적극적인 것들은 생명수의 강에 의해(계 22:1) 새 예루살렘 안으로 인도될 것이다. 불못의 반대는 물의 성인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계 21:10-22:4). 성경의 끝에서 우리는 못과 성을 본다. 못은 지식 노선의 최종 완성인, 목마르게 하는 불못이다. 성은 생명 노선의 최종 완성인, 목마름을 해결하는 물의 성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끝 부분에서 우리는 지식나무의 씨와 생명나무의 씨의 추수를 본다.
당신은 생명 노선과 사망 노선 중 어느 노선에 있는가? 하나님은 정직하시다는 것을 기억하라. 생명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생명은 또한 정직하다. 반대로 사망은 간교하다. 사망은 사망으로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지식으로 나타난다. 생명은 다만 생명이다. 그 내용, 본성, 결과가 다 생명이다. 사망은 지식이다. 모든 사람은 지식을 좋아한다. 심지어 작은아이들도 지식을 갈구한다. 아이들은 계속 질문함으로써 우리를 지치게 한다. 사람 안에는 지식에 대한 욕구가 있기 때문에 만일 당신이 하나를 대답하면 아이들은 또다른 여러 질문을 한다. 사람은 지식을 탐낸다.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지식을 탐낸다. 「지식」이라는 단어 그 자체는 좋은 단어이지만 지식의 배후에, 지식의 저변에는 사망이 있다. 문자는 지식이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다(고후 3:6). 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분리될 때마다 성경의 문자는 죽인다. 종교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분리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도 죽일 수 있고 사망을 퍼뜨릴 수 있다.
사망은 많은 선한 것들 아래 숨겨져 있으며 심지어 우리 자신의 가장 선한 의도 아래에도 잠복되어 있다. 사랑스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의 선한 의도에 의해 죽임 당해 왔다. 당신의 의도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사탄이 그 아래 잠복해 있다. 사탄은 사망이다. 모든 사람은 사망이 악한 것들 뒤에 숨는다고 알고 있다. 예를 들면, 라스베가스에 있는 도박장들은 현저하게 악하며 사망적이다. 그러나 성당에 참석하는 것은 선하게 보이고 도박장에 가는 것보다 휠씬 더 좋아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장소에 다 사망이 있다. 사망은 선한 것과 악한 것들 안에서 나타나고 퍼지기 때문에 외양만 다를 뿐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망은 간교하다.
이제는 우리가 어느 노선에 있어야 하는지를 안다. 우리는 생명 노선을 취해야 한다.
삼각 상황
아담은 두 나무 앞에 섰을 때 하나님과 사탄 앞에 서 있었다. 이것은 우주 가운데 사람, 하나님, 사탄의 삼각 상황을 형성했다.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 사람 위에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택하느냐 사탄을 따르느냐는 전적으로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이 삼각 상황이 지금 우리 안에 있다. 과거에 사탄은 아담 밖에, 즉 동산에 있었지만 지금 그는 우리의 육신 안에 있다. 과거에 하나님 또한 사람 밖에, 즉 동산에 계셨지만, 지금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 계신다.
열 번째 메시지에서 우리는 사람이 세 부분임을 지적했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다. 영은 우리의 가장 깊은 부분이고 몸은 우리의 가장 밖의 부분이다. 이 둘 사이에 우리의 주된 부분인 혼이 위치한다. 타락한 결과 지식 나무인 사탄이 사람의 육신 안에 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은 결과 생명나무인 하나님이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러므로 과거에 사람의 외부에, 즉 동산에 있었던 두 나무가 지금은 우리 안에-하나는 육신 안에, 하나는 영 안에-있다. 로마서 7장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고 죄만이 거한다고 말한 것을 볼 것이다. 죄는 사실상 사탄의 악한 본성이다. 죄가 우리의 육신 안에 거한다고 말한 것은 악한 자인 사탄이 우리의 육신 안에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증명하는 로마서 8장 16절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에덴 동산의 축소판이다. 당신의 혼의 생각은 당신 자신을 대표하고, 당신의 육신 안에 있는 죄는 사탄을 대표하며, 당신의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을 대표한다. 에덴 동산에서와 같이 이 셋이 우리 안에서 삼각 상황을 형성한다.
이 삼각 상황의 씨는 창세기 2장에서 뿌려졌고 이 씨의 성장은 로마서 8장에 있으며 거기에서 우리는 두 나무의 나타남을 본다. 로마서 8장 6절은, 육신에 둔 생각은 사망이요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한다(원문 참조). 창세기 2장에서 두 나무는 객관적이었으나 로마서 8장에서 두 나무는 주관적이다. 우리는 이 두 나무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당신이 이 메시지를 읽고 있을 때에도 두 나무는 당신 안에 있다. 과거에 나는 내 육신 안에 있는 지식나무를 뿌리뽑으려 했지만 내가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결국 나는 로마서 8장에서, 내 영 안에 거하는 또 다른 나무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에는 오늘날의 에덴 동산이 있다. 로마서 8장 2절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는 생명의 영의 법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에는 두 법, 즉 생명의 법과 사망의 법이 있다. 이 두 법은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 안에 있는 두 나무의 두 원칙이다.
나는 특히 이 메시지를 읽고 있는 청년들에게 한마디하고 싶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일찍이 주님을 생명나무로 누리기를 배우기 바란다. 주 안에서 체험이 많은 형제의 간증을 듣고 그들을 모방하려고 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지식 나무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당신은 다만 주님을 계속해서 접촉할 필요가 있으며 그럴 때 주님은 당신의 생명나무가 될 것이다. 그 결과 당신은 자연히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할 것이다. 당신의 사랑은, 주님을 당신의 살아 있는 근원이요 생명나무로 접촉한 결과가 될 것이다. 내가 청년기에 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할 때 나에게 이런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날 교회 생활 안에서 당신은 생명나무이신 주님을 누리라고 당신을 격려하는 형제 자매들로 둘러싸여 있다.(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13-14번 메시지에서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