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관계
믿는이들
Hannah , 2009-03-09 , 조회수 (3115) , 추천 (0) , 스크랩 (0)
 

 

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관계

 

 

우리는 신약의 서신서를 읽을 때 반드시 ‘율법’과 ‘그 율법’을 구분해야 한다. 원문에서 앞에 정관사가 있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며, 없는 것은 율법을 하나의 원칙으로 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그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것은 ‘율법’의 이 원칙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것에 기초한다. 하나님은 다시는 율법의 원칙으로 우리를 다루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내 산의 율법과 어떤 관계도 없다. ‘율법’의 원칙은 ‘그 율법’보다 더욱 크다. 율법의 원칙은 ‘그 율법’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율법에 기초하여 우리를 다루시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율법의 원칙에 기초해서 산다면,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그분의 기쁨을 구하려는 노력은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탕자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것에 대한 가장 좋은 예이다. 아버지는,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라고 하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이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하는가를 본다. 형이 아버지를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동생이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항상 대가를 지불하기 원하는 형이 아니라, 항상 즐거이 받기를 원하는 동생이다. 탕자가 방탕한 생활로 모든 재물을 소비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한 마디의 책망하는 말이나 재물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이 허비한 모든 것을 인해 염려하지 않고 단지 아들이 돌아옴으로 더욱 많은 것을 소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음을 인해 기뻐했다. 하나님은 이처럼 부요하시며, 그분의 기쁨은 주는 데 있다. 그분의 창고는 보물로 가득하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그분에게 보물을 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드리지 않으면 그분은 고통스러워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옷과 반지와 신발을 주고 잔치를 베풀 때 기뻐했다. 그는 이런 것을 큰 아들에게 베풀 수 없음을 발견했을 때 근심했다. 하나님은 이처럼 부요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께 무엇을 드리려고 하면 그분의 마음은 근심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그분이 주시는 것을 받으면 그분은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능력이 있으시므로, 우리가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하면 그분은 괴로워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단순히 그분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하시도록 하기를 갈망하신다. 그분은 영원히 베푸시고, 영원히 일하는 자 되기를 원하신다. 오직 우리가 그분의 풍성하심과 위대하심을 본다면, 그분으로 모든 것을 베푸시게 하고 모든 것을 하시게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려는 것을 멈추면 자신의 좋은 행위가 정지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모든 분배와 모든 일을 하나님으로 하시게 할 때, 자신이 하는 것보다 만족스럽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율법의 행위의 기초 위에 서게 된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며 심지어 우리의 ‘좋은 행위’도 그러하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죽은 행실’(히 6:1, 9: 14)이므로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것을 멈출 때, 하나님이 어떠한 분배자이신가를 증명할 수 있다. 우리가 일하기를 멈출 때, 그분이 일하시는 분임을 볼 것이다. 큰 아들과 탕자는 동일하게 아버지 집의 기쁨에서 멀리 떠난 사람들이었다. 큰 아들이 비록 ‘먼 곳’에 있지 않았지만, 그는 단지 위치상으로 ‘집’에 있었을 뿐이다. 그가 자신의 좋은 행위를 거절하지 않고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이중적인 위치는 절대로 탕자와 같은 체험을 하게 할 수 없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하셨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에서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외식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를 말씀하신다. 빌립보서 3장으로부터 우리는 그들의 의가 율법의 의인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주님은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 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무엇이 ‘너희의 의’인가?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의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그의 의’라고 하지 않고 ‘너희의 의’라고 말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어떤 표준에 따른 것이며, ‘너희의 의’도 어떤 표준에 따른 것이다. 이 두 종류의 구분은 표준이 다른 데 있다. 우리는 앞뒤 문맥으로부터 다른 그것을 볼 수 있다. “옛사람에게 말한 바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1-22, 참조 : 27-28절).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율법에 기초한 의이다. ‘너희의 의’는’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에 기초한 의이다. 두 번째 표준이 첫 번째 표준보다 훨씬 높은 것을 주의하라.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첫 번째 표준에 다다르기 위해 노력하다가 실패했는데, 주님은 왜 표준을 더욱 높이셨는가? 그것은 그분이 그분의 생명을 믿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신에 대한 엄격한 요구를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의 왕국 율법들을 읽을 때, 이 율법들이 그분 자신의 생명에 대한 주님의 완전한 신뢰를 나타내므로 우리는 안식할 수 있다. 이 세 장은 신성한 생명의 신성한 ‘과세(課稅)’를 나타낸다. 그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큰 요구를 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이처럼 크게 신뢰하신다는 것을 계시한다.

우리는 율법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잘 생각하지 않는다! 율법은 이미 우리의 골수에 침투되었으며, 우리 전체에 침투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우리로 그 가운데서 해방을 얻게 하신다.(워치만 니 전집 제2집 제26권, 제 169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