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들의 교회론과 신학 및 성경해석 관점 비평에 대한 간략한 이의 제기
지방교회
청지기 , 2009-02-03 , 조회수 (4203) , 추천 (0) , 스크랩 (0)

 

 

2. 지방교회들의 교회론과 신학 및 성경해석 관점 비평에 대한 간략한 이의 제기

 

이 글에서는 전반부에 이어서 이천우 목사님의 답변글 후반부에 대한 내용들을 다루려고 합니다. 살피건대, 이 목사님이 여러가지를 언급하셨지만 외견상 주로  두 가지 쟁점인 ‘지역 교회를 지방단위 범위로 보는 문제’(한 지방, 한 교회)와 ‘성직으로서의 목사임명 문제’ 를 다루고자 하신 것같습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점은 지방교회들이 충분히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할 수 있는 항목들이며 또한 핵심진리에 속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이천우 목사님이 제기하신 교회론이나 신학적 관점 또는 성경해석 상의 차이가 상대적인 이견일 뿐이라고 보고 그것에 대하여 가볍게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에 대한 추가 해명을 부탁드리는 식이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천우 목사님의 언급을 먼저 소개드리고 그 밑에 간략한 해명, 이의제기 또는 질문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편의상 내용을 요약한 소 제목은 제가 임의로 달겠습니다.)

 

- 지방교회의 교회론 비평

 

 

1)  위트니스 리의 ‘성경에 나타난 교회’에서 묘사된 지방교회들의 교회관

 

(이천우 목사님) “지방교회란 한 도시에 한 교회가 나타난 것을 의미하며 가장 성경적인 교회의 나타남을 말한다. 최초의 지방적인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이며, 예루살렘 안에는 사도, 장로, 집사, 오순절, 방언, 침례, 복음전파, 떡떼는 모임, 병고침 등도 있었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한 교회로 모였다. 성경에서 교회는 한 도시, 즉 한 지방에서 한 교회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의 간증을 나타내기를 추구하기 때문에 어떠한 교파로 통합하지 않고, 다만 피로 씻음받고, 거듭나고,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들로서 각 지방에서 함께 하나로 모이고 있다. 우리는 모든 참된 믿는이들을 환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 자매들인 그들과의 교통을 추구한다. 이 땅 위의 주님의 간증이 확대되고, 그분의 신부가 그분의 곧 다시 오심을 위해 예비되도록 그 간증이 더욱 강화되는 것이 우리의 참 되고도 간절한 갈망이다. 주님이 오늘날 이 땅 위의 그분 자신의 사역을 존귀케 하고 옹호하시기 바란다." "우리는 각 지방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의 하나 됨의 입장 위에 선다(마 16:18, 계 1:1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 구속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이 각 도시에 있는 교회의 지체들임을 인정한다(고전 1:2, 12:23-26)." "믿는 이들이 각 지역에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를 단체로 나타낼 수 있도록 각 도시에 교회를 세운다(행 8:1, 13:1, 20:17, 고전 1:2, 계 1:11, 2:1, 8, 12, 3:1, 7, 14, 행 15:41, 고전 16:1, 갈 1:2, 고전 16:19, 고후 8:1)."

 

이 모두에서 두드러지는 지방교회의 교회에 대한 이해와 관점은 윗트니스 리가 쓴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내용에서 잘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어떤 조직체가 아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나님의 집이다'를 말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해지고 지방교회의 교회론은 지극히 성경적인 이해요 관점입니다.”

 

비평:  성경적인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 구속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을 가리키는 ‘우주적인 방면’(마16:18)과 그들이 거주하는 각 도시에 있는 교회가 되는 ‘지역적인 방면’(계1:11)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체가 아니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것이 지방교회들의 교회관에 대한 압축된 설명입니다.

 

 

2)  지방교회들의  독립성

 

(이천우 목사님)”윗트니스 리는 교회의 출현은 지방인 것과 이 지방교회의 특성이 '우주적'인 것을 들면서 지방 교회의 행정을 언급하고 있는데 "각개 지방 교회를 단위로 독립적이다"는 것입니다. 요지는 각개 지방 교회는 행정적인 독립성을 띤다고 하는 것으로 각 지방 교회가 독립적 단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지역에 하나의 지방교회만이 존재하는 것이요 각개 지방의 교회는 독립적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의 지방성을 유지하고 보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정 면에서 지방적이어야 하고 또한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독립성은 분명히 그렇습니다. 모든 지교회(Local Church)는 한분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며 따라서 한분 그리스도의 지시와 명령을 따릅니다. 그러기에 A교회가 B교회를 간섭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의 교단은 당회가 노회와의 관계 속에서 상하, 계급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교회 정치의 원리 면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행정적인 독립성을 띠어야 합니다.

 

비평: 이천우 목사님은 (지역) 교회의 행정은 독립되어야 한다는 위트니스 리의 관점에 동의를 표시했습니다. 아울러 당회가 노회와 상하 계급 관계로 있는 것은 교회 정치 원리에서 볼 때 잘못된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교파가 아무리 많아도 분열된 것은 아니다?

 

(이천우 목사님) “하지만 그럼에도 지방교회가 교회론에서 큰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은 교회는 '지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에서 '교회는 어느 지방에서든 하나이다'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지방에 단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 결코 두 개나 그 이상의 교회가 있을 수 없다. 한 지방에 두 개 이상의 교회가 있게 되는 순간 곧 교회의 일원성은 파괴되고 만다"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윗트니스 리는 어떤 뜻에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지상에 이런 저런 이름으로의 교회, 곧 교파가 존재한데 대한 반발로서였습니다. 윗트니스 리는 이를 교회의 일원성을 역행하는 '교회 다원화 경향'으로 봤습니다. 한 도시 안에서 장로교회가 있는가 하면 감리교회도 있고 성결교회도 있고, 침례교회도 있고 루터교회도 있고 구세군도 있고, 카톨릭교회도 있고 말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인데 무엇 때문에 '칼빈'의 간판을 걸고, '루터'의 간판을 걸고, '웨슬레'의 간판을 걸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를 영적 음란이라고 보았습니다. 한 여인이 여러 명의 남편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윗트니스 리는 각 지방에 여러 개의 교회가 있으나 여러 종류의 교회일 수는 없으니 단 한 종류의 교회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교회의 수는 많을지언정 많은 종류의 교회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가 종류별로 나누이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이 나누이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누일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물을 근거로, 인도자나 은혜를 끼친 자를 근거로, 받은 바 은혜를 이유로, 성경 해석의 견해 차이 등으로 나누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서 교회는 모든 입장을 버리고 지방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분열교회에서 회복교회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지방교회는 자신들을 '회복교회'라고도 부릅니다.

 

비평: 간략하게 보충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지역교회의 범위가 지방적(city)이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실행에 따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최초의 신약교회라고 할수 있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8:1)는 그 당시 이미 수만의 성도들을 가지고 있었고 도처에 집에서 모이는 모임들이 있었으나 성경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들’이 아니라  그냥 ‘교회’(단수)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은 성경에 일관되게 지켜지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계1:4, 11, 행14:23, 딛1:5, 롬16:1, 고전1:2, 고후8:1). 즉 도시(city) 보다 큰 개념인 갈라디아 도(道)의 경우는 그 안에 많은 도시들이 있음으로 성경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복수)이라고 복수로 말하고 있습니다(갈1:2). 또한 위에서 보았듯이 이미 예루살렘 도시 안에 수 많은 가정 모임들이 있었으나 성령은 그 각각을 소위 독립된 가정교회들로 보지않고 예루 살렘에 있는 교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위 가정교회에 대해서 고신교단 내에서 적극 검토된 적이 있는데 ( http://www.kscoramdeo.com/news/search.php?section=S1N4§ion2=S2N9 ) 결론은 가정교회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이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그 본질에 있어서  새 사람이며(골3:10-11), 그 안에는 그리스도만 충만한 유기체입니다(엡1:23). 이런 점에서 볼 때 교회가 ‘한 종류’ 이고 ‘여러 종류일 수 없다’는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천우 목사님은 오히려 “교회가 종류별로 나누이는 것”을 옹호하는 듯한 표현을 하신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천우 목사님)”윗트니스 리의 이러한 교회관, 곧 지방교회의 이러한 교회관은 첫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나누일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따른 것으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어떤 교파로의 이름으로 있든지 간에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어떤 교파로의 이름으로 있든지 간에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인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말하는 교파의 교회이든지간에, 또는 루터주의 신학과 신앙을 말하는 교파의 교회이든 지간에, 웨슬레주의 신학과 신앙을 말하는 교파의 교회이든지간에 그 교회가 참된 신앙에 의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참된 교회라고 하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적'입니다. 즉 '보편교회' 입니다.“

 

비평: 물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본질은 거듭난 사람 안에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행9:5)이심으로 그런 면에서만 본다면 이 목사님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체적으로 이 땅 위에서 표현된 모습에 있어서도 ‘하나’(엡4:2-3)로 나타날 것을 성경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17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경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취지의 본문은 디도서 3:10-11, 고전1:10-11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역사를 볼 때도 ‘교회의 단일성’(Unam Ecclesiam)은 ‘거룩’, ‘보편’, ‘사도성’과 함께 초대교회의 중요한 특색 중 하나로 인식되어 왔다는 것을 이 목사님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따라서 역대로 교회 인도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분열된 모습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예를 들어 최초의 교회 분열로 표현되는 동서 로마교회는  ‘Filioque Controversy’ 라는 약 천 년(AD 325-1453) 동안의 깊은 교리적 갈등이 있었음에도 최대한 분열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칼빈의 경우도 성만찬의 의미를 놓고 루터 등 같은 개혁 동지들과 심각한 이견이 있었으나 최대한 분열을 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종교개혁 이후 교회 는 외견상 세인들의 지탄을 받는 지경에 까지 나뉘어져 온 것이 애석하지만 사실입니다. 참고로 장로교 신학자인 이종성 박사는 “1517년부터 개신교회는 분열, 따라서 예수의 몸을 찢는 일에 대한 반성도 없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칼빈은 보이는 교회는 분열되어 있으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의 교회라고 하지만 그것은 성서적 교훈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종성, 교회론, 152쪽). 

 

 

4)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고백해도 ‘보편교회’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

 

(이천우 목사님)”그러나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말하더라도 참된 신앙에 의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참된 교회를 이루고 있지를 않다고 하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적'이지를 못합니다. 즉 '보편교회'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비평: 이천우 목사님은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를 본인의 ‘교회론 4강  교회 형태의 이해’ 에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인 과거, 현재, 미래의 전 피택자들” 이라고 정의하고 계십니다. 위 내용은 이러한 보편교회 정의와 비교해 볼 때 추가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5) 개혁신학이 보편교회에 속하는 지 여부를 결정짓는 절대기준?

 

(이천우 목사님)”우리가…카톨릭 교회를 참된 교회로 말하지 않는 것은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적 이지 않기 때문인데 그것은 예배를 비롯한 그릇된 교리의 신학 사상과 제도와 정치 때문입니다. 하지만 웨슬레 신학 사상과 신앙을 말하는 교파의 교회인데 그 교회가 올바른 신학과 신앙에 서서 나간다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에 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가령 감리교회의 교단교회이고 성결교회의 교단 교회인데도 불구하고 개혁교회의 신앙으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교회가 있는데 그러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인 것입니다. 하지만 장로교회의 교단교회로서 개혁주의 교회임을 말하는 고신을 말하고 합동을 말하고 이런 저런 교파를 말할지라도 개혁교회의 신앙에서 이탈하여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가령 순복음교회식의 신앙을 말하고 성시화 운동을 해 나가고 영성훈련을 강조하며 개혁교회의 신앙에서 이탈하여 있다면, 이러한 교회는 어떤 교파의 장로교회일지언정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는 아닙니다.

 

비평: 위 이 목사님의 주장은 카톨릭 교회는 보편교회가 아니며 그외에 감리교단, 성결교단, 심지어 장로 교단이라고 해도 개혁교회 신앙 즉 칼빈주의를 따르지 않으면 보편교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참고로 지방교회들은 그들이 어떤 단체 안에 소속되어 있건 심지어 천주교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참되게 주님을 영접하여 거듭난 사람들은 보편교회(마16:18)의 구성원으로 보며, 또한 그가 살고 있는 그 지역에 있는 지역교회 구성원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것이 더 성경진리에 부합하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6) 다만 성경적인 교회 모습을 추구할 따름입니다.

 

(이천우 목사님)”지방교회는 장로교회이니 감리교회이니 하는 이런 저런 여타의 교회의 또 다른 이름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비록 '회복교회'라는 의미를 부여하고서 분열교회와의 차이를 가지며 차별을 둘지라도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울교회, 부산교회 등 등 지방교회의 이름으로 말할지라도 소위 웟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를 따르는 '지방교회'로서의 이런 저런 이름의 지방교회가 아닌가요? 이렇게 스스로 모순을 안고 있는 교회가 지방교회  [회복 교회] 입니다.

 

비평: 이천우 목사님의 개인의 관점을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성경에는 ‘장로’는 있어도 ‘장로교회’는 보기 어렵고, ‘감리’(감독)는 있어도 ‘감리교회’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듭난 믿는 이들이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그가 거주하는 지역의 범위를 따라 그 지역 이름의 교회로 지칭된 사례는 성경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행8:1, 13:1, 계1:4, 11, 그외 서신서 수신인 언급부분 참조). 따라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그리고 동일한 원칙을 성경에서 본 사람들은 다만 그들이 성경에서 본 교회의 길을 따라가는 것 뿐입니다. 각자가 신앙 양심을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믿고 따를 권리가 있다고 봅니다.

 

 

7) 소위 ‘분열교회’ 구성원들도 참되게 거듭났으면 그리스도의 교회요 보편교회입니다.

 

(이천우 목사님)”무엇보다도 지방교회는 자신들을 회복교회로 말하면서 다른 교회들은 '분열교회'로 몰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서 분열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나누어져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죠.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있는 생명 없는 죽은 교회이니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인 교회들마저 부정하고 거부하는 잘못을 행하고 있습니다.”

 

비평: 이 부분은 약간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비록 [한 지방, 한 교회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참되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보편교회, 우주교회)의 일원입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밝혀왔습니다.

 

 

8) 성경의 원칙과 현실적 상황은 다를 수 있으나, 현실을 이유로 성경의 실행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천우목사님)”둘째로는, 아울러 지방교회는 각 지방에 오직 하나의 지방교회가 존재할 뿐임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하여 가는 사도의 교회 설립 시기에 있어서는 성령께서 각 지역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 나가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온 땅에 충만케 하여 나가시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각 지역[지방]에 세워진 교회에 그 지역 [지방]의 이름으로 교회가 불려지는 것 외에는 달리 다른 이름으로 불려질 까닭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지역[지방]교회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각 개교회는 지교회로 불려집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서이며 또한 오직 한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 지역 교회로서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 교회가 단지 지방의 이름으로만 교회 이름을 할 수 없는 실정에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지방의 이름을 포함해서 이런 저런 명사의 이름으로 교회를 부른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교의 다원주의'처럼 '교회의 다원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방교회가 서울, 부산, 대구 등 한 지방에 있는 여러 집회소를 서울, 부산, 대구 등 하나의 지방교회로 부르면서 제1집회소, 제2집회소 등으로 명명한다면 이것이 한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가 이런 저런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

 

비평: 이 목사님은 초대교회 때는 지역(지방)의 이름으로 교회가 불려졌다는 점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후 현실적으로 그런 원칙이 지켜지지 못할 상황을 지적하며 그것이 ‘교회의 다원화’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직면해 있는 수 많은 교파들로 나뉘어진 교회 모습들은 초대교회가 추구하던 ‘교회의 단일성’이 유지된 모습인지요? 단지 지역의 차이로 인하여 서울, 대구, 부천…이라고 구별하는 것과 교리적인 차이로 인하여 교회명칭 앞에 이런 저런 명사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조금 다른 성격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목사님이 지적하신 지방의 교회가  “제1집회소, 제2집회소 등으로 명명하는 것”은 서두에 언급했던  각 지방교회 간의 행정의 독립성 문제로 돌아가 생각하시면 해답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집회소는 몇 개가 되었건 독립된 행정단위가 아닙니다. 대신에 개 교회가 독립된 행정단위입니다. 집회소는 단지 성도들의 지리적인 편의와 고전 14:4, 31을 실행하기 위하여 인근 지역에 모임 장소를 둔 것뿐입니다. 참고로 서울교회의 경우 많은 집회소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장로그룹이 서울교회 행정 전반을 돌보고 있습니다.

 

 

9)  성직계급적 의미의 목사직은 없지만 양무리를 감독하며 목양하는 복수의 장로들이 있습니다.

 

(이천우 목사님) “한편, 지방교회의 교회론에서 문제되는 점은 교회의 직분에서 목사직을 세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지방교회는 목사직를 두지 않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는 자와 회중 간에 아무런 구별이 없이 단지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릅니다. 이는 소위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제도권적 담임목사 제도를 결코 용납치 않는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말씀 증거의 사역이 모든 형제들에게 동일하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말씀 증거의 사역은 실질적으로는 몇 몇 형제들에게 제한적으로 편중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점은 성경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일을 위해 교회에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위해서 목사를, 그리고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 나갈 수 있도록 하며 거짓된 진리로부터 신자를 보호하는 일을 위해서 다스리는 장로를,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자비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일을 위해서 돕는 집사의 삼직을 원리적으로 두셨기 때문입니다.”

 

비평:  지방교회들은 각 지역교회를 [복수의 장로들] 이 인도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영적인 생명이 성숙한 성도들인 ‘장로들(복수)’이 교회를 감독하고 대표한다고 말했고(행14:23, 딛1:5, 행20:17, 28- 38 요이1절, 벧전5:1, 5). , 더 나아가 성경은 장로(목사)들에게,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다만 본이 되라’고 충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벧전5:3). 그리고 이천우 목사님이 성경의 원리라고 소개하신 소위 ‘목사, 장로, 집사’ 삼직원리는 칼빈의 특수한 가르침일뿐 가까이는 침례교단의 실행과도 다릅니다. 특별히 목사와 장로를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계급적 차이로 구분하는 것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천우 목사님은 아래와 같은 장로교단 신학자들의 지적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장로교회에서는 목사의 직분을 중요하게 보는 전통적인 이해 때문에, 목사는 평신도 위에 있는 직분자로 알던 중세적인 계층제도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목사와 평신도와의 구분으로 쉽게 빠져드는 경향이 있음을 관찰하게 된다. 특히 오늘날의 한국교회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아주 농후하다“(김영재, 장로교회제도의 역사적 고찰, ‘한국교회의 갱신과 성령’, 17-21쪽, 한국로고스연구원, 1995년).

 

“한국장로교회는 더이상 세계장로교회와 그 동질성을 확인하기가 힘들 정도로 바뀌어졌다...이러한 성직자 중심의 교회구조는 현재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구조의 문제이다 (정일웅,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구조변혁, 위 책 69-81쪽).

 

이상에서 간략하게 워치만니와 위트니스리 교회관에 대하여 비판하신 이천우 목사님 글을 평가해 보았습니다.  쌍방 간에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지만 핵심진리 상의 이견은 아니라고  봅니다. 더 대화를 나눠가다 보면 서로를 좀 더 이해하게 될 것이고 참되게 거듭난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봅니다. 참고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을 위하여 소개드리자면, 워치만니 교회관은 ‘영광스러운 교회’ ‘교회의 길’(한국 복음서원)에 위트니스리 교회관은 ‘신약의 결론-교회편’(한국복음서원 , 1991, 약 530쪽 분량)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2) 지방교회의 신학 및 성경 해석의 관점 비평

 

(이천우 목사님) “지방교회는 형제교회의 신학과도 유사합니다. 이는 모두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방교회와 형제교회 모두가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함에 있어서 소위 영해적 해석(알레고리적 해석)의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영해적 해석은 참으로 자의적이며 주관적인 성경 해석으로서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추고 있습니다.

 

비평: 워치만니와 위트니스리가 형제회로부터 도움을 받은 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비판적으로 세대주의를 따르거나 영해적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예로 위트니스 리가 쓴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한국복음서원, 1991)을 보면, 성경해석의 첫번 째 원칙으로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를 들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성경의 어떤 항목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하는지 아니면 영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주의 깊게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59, 61쪽). 성경해석에 있어서 언약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은 많이 다르지만 성경이 그 양면을 다 포함하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임으로 서로가 대립하고 배척 하기 보다는 상호 보완 관계로 본다면 모두에게 유익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 목사님이 언급하신 [지방교회 신학과 성경해석적 관점]과 관련하여 한 가지 특별한 점을 소개드리자면 최근에 한국 복음서원이 주최하는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라이프스타디 세미나에 장로교단 목회자분들을 포함하여 수 백명이 참여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경기도 모 지역에서 열린 세미나는 지난 2년 동안 매주 월요일마다 실시되어 계시록부터 마태복음까지 신약 27권 전권을 마치고 이제는 구약 창세기를 다루고 있는 중입니다. 그동안 약 100 여분의 목회자분들이 꾸준히 참석하셨습니다. 전국적으로 행해지는 세미나에 참석하는 전체 목회자들의 숫자를 합치면 수 백명에 이를 것입니다. 이러한 교단과 신학을 초월한 상호 교제와 대화의 기회들은 서로 간에 있는 오해와 벽들을 허물고 한국 땅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세워가는데 일익을 담당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천우 목사님, 지금까지 간략한 비평글을 써 오면서 혹시 본의 아니게 무례한 부분이 있었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끝으로 이런 일을 계기로 지방교회들과 개혁신학계 사이에 좀 더 전진된 대화와 상호 이해의 기회가 더 확대되기를 소망하며 이상으로 부족한 글을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