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하나님
poimen , 2009-01-29 , 조회수 (3906) , 추천 (0) , 스크랩 (0)

 

II. 신화


A. 서론


신약에 나타난 이러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묘사와 , 특히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면에서의 왕국을 바탕으로 두 번째 주제인 신화에 대해 고려해보기로하자.


요한복음 3장에서 도덕적이었던 니고데모의 대화는 세기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것은 영원 전부터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어떻게 도덕적인 삶을 잘 살 수 있느냐, 어떻게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니고데모를 창조의 시작으로 데려가셨다. 그분은 니고데모와 수세기에 걸친 요한복음의 독자들에게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보여주신 것이다. (창 2:17, 롬 9:21,23)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이란 그릇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 편에서는 신성한 출생에 의한 것이며,(요 3:3, 5-8) 사람 편에서는 믿음에 의한 것이다.(3:16,18) 이것이 사람의 천연적인 출생에 더하여 두 번째 출생을 포함하기 때문에, 이것은 신화라 불린다.(Gk. theosis from theos, God) 자신의 육체의 부모님에 의한 출생으로 사람은 인간이 되지만, 하나님에 의한 출생에서 사람은 하나님화, 혹은 신화된다.


 B.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의 주제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다양하게 다루어져왔다. 몇몇의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초창기 교회 영적 아버지들 사이에서는 흔한 주제였지만, 고대 교회 역사에서는 이것의 중요성이 경시되고, 심지어 관망되기까지 했다고 말하고있다.  이 주제에 대한 한 사람의 태도는 역사적 연구에 영향을 미치고, 신화에 대한 성경적인 기초를 찾으려 고 하느냐 마느냐조차 결정짓는 듯 하다. 윌리암은신화에 대한 그의 글에서 “서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신화란 단어는 매우 많은 의혹을 샀다” 라고 말했다. (West,Dict. Of Christian Spirituality, p.106) 월(Baker’s Dict. Of Theology, 161)은 신화에 관한 그의 글을 보면 그리스도의 유일함과 사람의 피조성과 타락을 이유로, 사람에게 신성을 수여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성경적 기초도 완전히 배제시켰다. 이 주제를 역사적으로 다룰때, 그는 신화란 개념이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이교도 개념, 동양적인 감언, 혹은 로마 가이샤의 자기 신격화라고 여겼다. 그는 신화가 교회 영적 아버지들 사이에서 흔한 개념이었다라는 사실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반면 래시는 신화의 역사적이면서도 성경적인 근거를 찾았다. (West, Dict. Of Christian Theology, p.148) 그는 신화가 정통적 신념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고, 신화되며, 은혜에 의해 하나님이 되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신화는 하나님 안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신화된 창조물은 별개로 그 자체 그대로 남는다고 말했다. (Ibid.)


신화에 대한 생각은 데오필루스, 히폴리토스, 오리헨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 교회의 모든 영적 아버지들의 주된 입장에서도 나타난다. (Harnack, History of Dogma, 3:164fn.) 그 뿐만 아니라, 카파도키아, 아폴리나리스, 에브라임 시리아, 에피파니우스, 시릴, 소프로니우스, 고대 그리스, 러시아 신학자들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Ibid.) 10세기 말 시므온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인 그는, 그분 자신이 은혜에 의해 하나님으로 만든 사람들과 대화하신다.”(Lash, Ibid. p148)


신화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나는 캥거스가 말한 정의와 의견이 일치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과 본성, 조성, 모양, 표현에서 하나님이 된다.

그러나 신격에서는 아니며, 경배의 대상으로써도 아니다.”(Becoming God, p.3)


C. 창조 안에서의 하나님의 형상과 사람


“사람은 무엇인가?”(시편 8:4)에 대해 알려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창세기에 있는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아야하고, 그다음 사복음서를 넘어 신약 전체를 고려해보아야한다.  “계시가 하나님의 진리의 점진적인 나타남인것과 같이 사람의 본성에 대한 발견도 또한 점진적이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Heard, The Tripartite Nature of Man, 36) 구약에 나타난 사람과 하나님의 형상은 신약 전체에서, 성경의 끝부분인 계시록에서 궁극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사람의 창조는 창세기 1장 26-27절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창세기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안에서 만들어졌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여기에서의 형상은 복사본이 아닌 근본적으로 원천, 혹은 표본이다. 사람이 그 복사판이다.”(Bromiley, The Image of Man, 803)


이 형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이다. (골 1:15) 사람은 원형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의 생명과 본성 없이 만들어졌다. 신성한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형상이다.”(Henry, “Man”, 339) 이 형상에 따라 사람은 형성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에 따라 만들어졌다. 헨리는 이 점을 강조했다. (Ibid.)


사람이란 존재는 신성과 연결되어있지만, 그 존재 자체는 본질적으로 신성하지 않고 창조된 것이며, 하나님께 의존적이다.   창조에 의해 사람은 실제로 원천에 일치하는 형상을 지니게 된다.


“사람은 마치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어떠함을 보여주는 사진과도 같다.” (Lee, Life-Study of Genesis, 119) “하나님의 본성은 사람안에서 형상으로서 표현된다.” (Delitzsch, A System of Biblical Psychology, 225) 하나님이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한 것에 대해 델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Ibid., p.48)


이것은 시간안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목적에 대한 계시이다.  6일 전체기간동안의 일은 연역적으로 그 차제를 최종적으로 사람에게 집중시키려는 것이었다. 사람은 이 계획이 일시적으로 실행되기도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의 본질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만드는 방법은 창세기 2장 7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산 혼이 된지라.”


하나님은 땅의 흙과 생명의 호흡, 두 가지 근원을 사용하셨다. 흙은 마치 토기장이가 흙의 모양을 짓고, 만드는 것처럼 사용되어졌다. ‘짓다’라는 말은 창세기 1장 1절, 1장 27절에 나오는 ‘창조하다’라는 말과, 1:26의 ‘만들다’라는 말과는 다르다. 라일은 그의 책에서 (The Book of Genesis, 29) “토기장이가 흙의 모양을 짓고, 틀을 만드는 은유법은 창조주에게있어서도 가장 좋아하는 은유법이다. 참고: 사 45:9, 예 18:1-6, 롬 9:20-24” 아담이라는 이름은 땅, 흙이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라고 말했다.


두번째 근원은 생명의 호흡이다. 호흡은 히브리어로 네솨마(neshamah)로 잠언 20:27에서는 ‘영’으로 번역되었다. 리에 의하면(Life-Study of Genesis, 10:129), “창세기 2장 7절의 호흡은 인간의 영을 의미한다. 사람의 영은 특별히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다. (슥 12:1)” 허드는 또한 주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호흡을 불어넣으신 것이 사람의 영을 창조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Ibid. p.42) 델리취는 이것을 “피조된 영, 사람의 영”이라고 불렀다. (Ibid.p.102)


D. 신화와 교부들


역사적으로 말해 신화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초기 교회 영적 아버지인 이레나이우스와 아타나시우스에 의한 것이다. 쉐프는 이 주제에 대해 그들의 공헌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3:886)


이레나이우스와 아타나시우스는 인간 본성을 공유하는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이 신성한 본성을 나눠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말씀이 아들이 되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분은 인성을 입으셨고, 우리는 신성을 입는 것이다. 그분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1. 이레니우스

이레니우스는 (c. 130- c.200) 그의 글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아시아 지방, 서머나 민족으로 극심한 박해기간 동안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을 통하여 그는 사도시대와 접하게 되었다. 쉐프의 의견으로는(Ibid., 2:751) 그는 “반 니케안 교부들 중 가장 정통한 자” 였다. 그는 또한 ‘이단을 반대하며’라는 저서의 제 5편에서 영지주의를 반대하며 그의 위대한 저술 작업을 통하여 믿음을 지키는데 매우 강했다. 그는 “신약전체를(복음서와 모든 서신서) 충분히 사용하고 구약과 신약의 일치성을 보여준(Schaff, Ibid., 2:751-2) 교부시대 저자들 중 첫번째” 였다.  윌리암은 그의 논문 ‘라이언의 이레니우스’(214)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공유하신 목적은 우리가 신성한 생명을 공유하기 위함이다라는 분명한 요점을 밝힌 최초의 그리스도인 작가였다.” 라고 언급했다.


이레니우스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이 형상은 하나님의 말씀이다(Irenaeus, Ibid, 5:16:2)라고 가르쳤다. 사람은 아들의 형상 안에 있기 때문에 이는 “아버지께 소중한 것”(Ibid)이다. 이 사람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표현하기 위함이다”(Bethune-Baker, Intro. To the Early Hist. of Chr. Doct., 131)라는 말은 사람은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며 또 같은 존재성을 가지며 하나님과 동일한 속성을 표현한다. 사람은 창조의 의해서는 신성한 속성들을 가지지 않지만 오히려 타락하지 않고 영원불멸 할 수 있다.Harnack, Ibid, 2:241).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로 부터 그러한 능력을 부여받았다(Bethune -Baker, Ibid.). 이레니우스는 이것이 “oikonimia theou (하나님의 경륜), …인간의 신화” 의도하신 목적이라고 말했다(Harnack, Ibid., 240-1). 하나님은 따라서 사람을 형상화하셨고 신성한 생명을 위하여 사람을 준비하셨다(Irenaeus, Ibid, 5:16:1).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의 첫번째 특징은 다음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시도한 것이다.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 (Cur Deus Homo) [Ottley, 1:217].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 되었다” (Irenaeus, 3:18:3). 성육신은 “충만하고도 가장 적정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람은 보이는 분이 되셨고 무한하신 존재가 자신을 제한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분의 피조물과 연합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이 살아있는 사람들 안에 표현되었다”(Ottley, 1:212). 이레니우스의 이 간략한 언급을 통해 그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영원한 목적과 성육신 안에서 그분의 목적의 성취를 종합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어떠함이 되었고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어떠하심을 가지고 오셨다”(Irenaeus 5:Preface) 라고 말했다.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그분과 사람의 본성을 연합하여… 사람의 본성을 신성하게 하고 생명의 유업을 보장하는 것” 이다(Bethune-Baker, Ibid, 131).


하낙(Hist. of Dogma, 2:10) 은 폴린의 교리를 반영한 이레니우스의 교리에서 양자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통한 인류의 신화” 를 보았다. 고대 철학자들과 신화 작가들 중에서와 이교도들이 가능성이 을 가지고 희미하게 소망하는 것(예, 신화)이 여기(바울의 글)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으며 실제로 이미 발생하고 있다”(Harnack, 2:11). 하낙(Ibid.)은 열정적으로 첨부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어떤 메세지인가!”


2. 아타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통하여 “정통의 아버지”라고 알려져있으며 (Schaff 3:886) “믿음 안에 견고하여서 그의 목적이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 순간 까지” (Miller, Church History, 1:382)서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니케아 종교 회의에 (325) 참석했으며 비록 그가 “종교회의에서 공식적인 지위은 없었으나… 알렉선더(알렉산드리아의 추기경)의 서기로서 그의 노트와 회람과 회칙등은 회의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Mikolaski, “Athanasius”, 81). 니케아 종교회의 중간과 그 이후에도 그는 “매우 뛰어났으며…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변호하고 아리안 주위를 반대하는데 매우 열정적이고 능력있었다” (Schaff, 3:886). “유배기간과 그리고 의회와 황제의 반대아래에서도” (Schaff, Ibid), 아타나시우스는 진리의 변함없는 수호자였다. 당시는 그 혼자만이 진리의 싸움에 목소리를 내고있는 것 같았다. 쉐프(각주)는 진리와 연관하여 교회 역사동안 이런 일들은 자주 발생하였다라고 지적했다; “진리는 항상 다중의 편에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주 소수에게도 있다.”


하나님의 인간의 창조 안에서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이 인간을 다른 창조물과는 다르게 만드셨다고 주장했다. 사람에 관해서는, “그분은 그들에게 그분의 형상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그리고 그 분의 모양을 따라 그들을 만들었다” (Athanasius, On the Incarnation, 11). 이것은 사람을 “말씀의 거울” (Ibid, 3)로 만들었다. 사람을 보는것은 사람 안에 반영된 말씀을 보는 것이다. 성육신 안에서 말씀은 “그 하나님의 본성의 의해” 육체가 되었다(Athanasius, Discourses, 2:70). 그분은 “신격의 본성 안에 계시고… 아버지로부터” (Ibid). 성육신을 위한 목표는 다만 하나님을 사람에게 가져오는것이 아니고 또한 신성이 인성을 입는 것 만이 아니다. 아타나시우스는(On the Incarnation, 54)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분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우리로 하나님되게 하려함이다” 또는 “그분이 인격화 된것은 우리가 신성화 되기 위함” 라고 표현하였다. 그의 Discourses에서 (1:39) 아타나시우스는 아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분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되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셨고 또한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되게 하셨다”.


사람이 신화되기 위하여 아타나시우스에 의하면 신분이나, 위치에 변화, 그 이상의 것이 연관된다. 이것은 그의 본성의 변화를 의미한다. 우리는 아담의 자녀들로 태어났다. 신화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들들이 된다. 그의 Discourses에서(1:38) 아타나시우스는 사람과 인자의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었고 그분 자신이 사람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신화시키신다.”


사람이 거룩함에 참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속성들 중 하나의 참여해야 한다(Bavinck, Doctrine of God, 09-15).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분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것은 사람또한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벧전 1:5). 거룩함과 또한 다른 신성한 본성의 속성들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분의 신성을 채우시는 일을 하신다. 그분의 일은 “사람안에… 그분의 신성에 어떠함 외에 다른것을 제하시고 그분을 아는 지식으로 채우시는 것” 이다 (Athanasius, On the Incarnation, 15). 주님은 옛 창조에 몸을 입으셨다. 그것은 우리가 새 창조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그분은 참 육신을 입으셨고…육신 안에서 통과하셨으며…우리의 새 창조를 위하여” (Athanasius, Discourses, 2:70)


(하나님의 나라 책 202 p~210 p 짐 리스키 논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