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100선-새예루살렘(3-3)
새예루살렘
살렘 , 2008-11-11 , 조회수 (3786) , 추천 (0) , 스크랩 (0)

- 하나님의 간증

첫째 사도들은 하나님의 건축이요, 예수의 간증인 이 성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임을(갈 1:10-12) 의미한다. 사도들 중 누구도 사람으로부터 인한 자가 없다.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인한 자들이다. 이것이 참 간증이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이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교회 생활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어야 한다. 어떤 것도 사람으로 인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어떤 인간적인 요소가 있다면 조만간에 그것은 약점이 될 것이고 대적에 의해 크게 공격받을 것이다. 그러한 요소는 대적의 공격을 대항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난 어떤 것으로 시작한다면 그 기초가 강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도시에서 우리는 교회 생활이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게 해야만 한다.

- 하나님의 긍휼

사도들은 또한 하나님의 긍휼의 참된 증인들이다. 열두 기초석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인정해야만 한다. 긍휼과 은혜의 차이는 무엇인가?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두 형제가 있다고 가정하자. 어느 날 첫째 형제가 좋은 성경책을 사서 둘째 형제에게 그것을 선물한다고 하자. 이것은 은혜의 행위이다. 이제 둘째 예를 생각해 보자. 그 둘째 형제가 그리 사랑스럽지 않다고 생각해 보자. 즉 그가 가난하고 더러운 거지라고 가정하자. 그러한 사람은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 그러나 첫째 형제가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선물을 준다면 이것은 긍휼의 행위이다. 긍휼은 은혜보다 훨씬 더 멀리 미친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만약 우리에게 어떤 가치가 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하고 더러운 거지보다 더 가련한 상태에 있다. 그분의 긍휼이 그처럼 멀리 미쳐 우리 같은 가련한 죄인에게도 이르렀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자.

이제 열두 기초석을 자세히 보라. 사복음서를 연구했을 때마다, 나는 항상 ‘가난하고 가련한 베드로’라고 말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에 의해 택함 받고 쓰임 받았다. 그는 긍휼로 말미암아 장식되고 장비되어 그의 이름이 그 성의 한 기초석 위에 있다. 하나님의 긍휼로 장식된 후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겸손하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가 진실로 얼마나 가련한지, 그분의 눈에 얼마나 가치 없는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긍휼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긍휼을 받은 후에 그분을 찬양할 수 있고, 그분께 이제 우리가 그분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의 자격과 아무 관계가 없고 모든 것이 다만 주님의 긍휼이기 때문이다.

열두 사도를 생각해 보라. 베드로는 가난한 어부였고(마 4:1819), 마태는 세리였다(마 9:9, 눅 5:27). 그 당시에 사람들은 세리를 언급할 때마다 침을 내뱉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이사와 로마제국을 위하여 세금을 거두었다. 그들은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미움 받았다. 그들은 가련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의 하나가 사도가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의 한 기초석이 되었다. 이 어떤 긍휼인가! 이 열두 기초석은 영원히 하나님의 긍휼을 선포할 것이다. 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아야만 한다.

- 하나님의 은혜

열두 기초석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의 누림으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자기 안에 사는 것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니고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그는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선포한다(고전 15:10). 이 두 구절을 함께 놓고 볼 때, 우리는 은혜가 참으로 그리스도 자신임을 본다. 은혜는 나의 강함, 나의 능력, 나의 누림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다. 이 가난한 어부와 세리가 거룩한 성의 그러한 중요한 기초의 일부분이 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다.


- 하나님의 신실하심

사도들이 그 성의 기초석이 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경에서 무지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표시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분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다. 거룩한 성에서 기초는 옆으로 나란히 놓인 것이 아니고 층층이 쌓여 있으며, 열두 층의 각각은 각각 다른 종류의 보석들이다. 각 층은 독특한 색을 나타낸다. 이 문제를 철저히 연구한 어느 전문가에 따르면 그 성의 기초를 이루는 보석들의 층은 무지개 색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바로 그 성의 기초라는 것을 증명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는 ‘기초석들을 가진 성’을 갈망했다(히 11:10). 그들은 그 성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위에 건축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성을 갈망했다. 시편 89편 2절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바로 하늘에서 견고케 된다고 말한다. 엄밀히 말해서 열두 돌만으로는 홀로 거룩한 성의 기초를 구성하지 못한다. 오히려 열두 돌에 부여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기초를 이룬다. 사도들 자신은 기초를 구성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나는 베드로나 마태 자신들에 대해서는 어떤 신뢰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알므로, 그들 위에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한다. 보석으로 된 열두 층의 기초석은 무지개로 나타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영원히 선포한다.


- 보석들

이 모든 보석들은 원래 단지 진흙덩이들에 불과했었다. 의학적인 연구는 우리 인간이 기본적으로 흙의 구성체임을 보여 주었다. 우리 몸은 약간의 염분, 동, 철분, 유황과 이 땅의 다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베드로와 요한과 다른 열 사도들이 어떻게 그러한 보석들이 되었는가? 변화시키는 일에 의해서이다.

하나님의 건축에 있어서 세 종류의 귀한 재료들이 있는데, 그것은 금과 진주와 보석들이다. 금은 변화가 필요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원래 상태 그대로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석은 뜨거운 열 아래서 함께 눌린 몇 가지 요소들의 복합물이다. 보석은 원래 상태에 있는 물체가 아니며 완전히 변화시키는 일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건축에 있어서 또 다른 재료인 진주 또한 어떤 변화시키는 일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진주는 분명히 거듭남을 상징한다. 따라서 그것은 그 성의 입구, 문을 구성한다.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신성한 본성을 받았다. 그때로부터 우리는 밖으로 눌리고 불태워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라지 말라! 우리는 모두 베드로와 요한과 다른 제자들을 높게 평가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많은 압력을 체험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더 이상 진흙덩이들이 아니고 보석들이다. 그들은 뜨거운 열과 압력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를 읽어 보라. 그들이 통과했던 고통을 보라. 그들은 강하고 보배롭게 되기까지 눌리고 태워졌다. 오순절날 베드로와 요한을 생각해 보라. 그때 그들은 더 이상 진흙덩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매우 강하고 보배로운 돌들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신성한 정금의 본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생명의 거듭남의 진주가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그 영의 변화시키는 일로 말미암아 보석들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의 기초와 벽을 갖도록 변화되어야 한다.
- 열두 가지의 다양성
그 성의 열두 기초석은 열두 종류의 보석들로 이루어져 있다(계 21:19-20). 이것은 다양성 안에서의 하나를 상징한다. 한 돌도 같지 않다. 베드로는 한 색이고 요한은 또 다른 한 색이다. 사도들 가운데 나타난 열두 색이 있다. 이는 참된 다양성이다. 그러나 또한 이 다양성 가운데 하나가 있다. 오늘날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가 되지 않은 것같이 보인다. 이것이 참으로 문제이다. 요한은 그의 일을 하고, 베드로도 그의 일을 한다. 다양성은 있으나 하나는 없다. 오늘날 그렇게 많은 은사 있는 형제들이 하나 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함께 일할 것으로 기대되는 형제들조차 하나가 아니다. 각자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같게 되도록 혁신시키고자 노력한다. 나는 벽옥이고 당신은 홍보석이라고 가정하자. 문제는 나는 당신을 녹색으로 만들려고 하고 당신은 나를 적색으로 만들려고 하는 데 있다. 만약 내가 당신을 바꾸는 데 실패한다면 그 후에 나는 당신과 아무 관계를 갖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가련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역을 가진 누군가를 존경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해야만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이 되게 하려고 설득시키고 바꾸려는 편협함과 강요를 미워해야 한다. 베드로는 베드로이고 요한은 요한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 주 예수님은 아주 크고 놀라운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 한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으로는 충분치 않다. 돌들 중 하나이면서 다른 것들과 다르게 되는 것은 참으로 긍휼이다. 다른 사람을 우리와 같게 만들려고 설득시킬 필요가 없다.



새 예루살렘에서 묘사된 그리스도

서른넷째 항목은 새 예루살렘에서 묘사된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그분은 최소한 네 항목으로 나타나 있다. 첫째 그분은 어린양이시다(계 22:1). 심지어 영원에서조차, 주 예수님은 항상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우리의 만족을 위하여 생명의 양식으로 그분 자신을 주신 어린양으로 기억될 것이다. 둘째 이 어린양은 또한 등으로서 그 안에 하나님의 빛이 있다(계 21:23, 22:5을 보라. 흠정역에서 ‘빛’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등’이다). 등은 바로 하나님을 담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그릇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그분 자신을 체현시키셨고, 하나님의 체현인 이 그리스도가 온 성의 중심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는 그분 안에 체현된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그 중심으로 가져야 한다. 셋째로 바로 이 그리스도가 생명의 나무요(계 22:2), 모든 생명 공급의 근원이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린양, 등, 그리고 생명나무로 가져야 한다. 넷째로 그리스도는 심지어 그 성의 성전이시다(계 21:22).


성전

역사적으로 말해서, 고대 예루살렘 성안에 성전이 있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성에는 성전이 없다(계 21:22).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과 그리스도께서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성전이시기 때문에, 그분들이 그 성안에 거하는 거주자인지, 아니면 거하는 곳인지를 물을지도 모른다. 그 대답은 둘 다 되신다는 것이다. 그분들은 성전이시다. 거기에서 섬기는 자들이 거하고 섬길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거하는 곳이다. 우리는 이미 어떻게 거주자들이 거처가 되고, 거처가 거주자들로 구성되는지 보았다. 만약 우리가 오늘날 교회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그 안에 건축되어야 하고 그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주관적이다. 거주자들이 또한 거처이다. 만약 우리가 새 예루살렘 안으로 건축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 성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곳인 성전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은 아주 깊다. 오늘 당신은 어디에서 하나님을 섬기는가? 당신은 물질적인 건물이나 조직 안에 있는가? 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성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 하나님 자신과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성전이시다.


하나님의 거처

서른여섯째 항목은 거룩한 성이 또한 하나님의 거처라는 것이다(계 21:3).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 성안에 거하신다. 한편으로 그분들은 우리가 그 안에 거할 성전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분들은 또한 그 성안에 거하는 거주자들이시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상호 거처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처요(엡 2:22), 하나님은 우리가 거할 집이시다(시 90:1). 그것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5장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셨다(4절). 사실상 그분은 “나는 너희의 거처이고 너희는 나의 거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서로 거처가 된다. 얼마나 심오한가!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는 성이고 우리에게 대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성전이시다. 우리는 우리에게 성전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임재를 갖는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임재와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임재가 우리를 위한 성전이 된다. 만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려면,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둘러싸이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덮여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 오, 얼마나 우리에게 그분이 필요한지! 그분은 우리가 섬길 분이고, 그분은 심지어 우리가 그 안에서 섬길 성전이시다. 당신은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는가? 당신은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가? 이것은 아주 주관적인 것이다.

사람의 논리는 그러한 상호거처가 불합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그러면 도대체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가? 만약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없다.”고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공기는 우리 안에 있고 또한 우리 밖에도 있다. 공기는 내 안에 있고, 나는 공기 안에 있다. 공기가 내 안에 있지 않다면, 나는 즉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공기 안에 있지 않다면 나는 결코 숨쉴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실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분을 찬양하자. 우리는 생활에서 이것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 어느 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가장 완전하게 이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이 되시는지를 볼 것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최대한도로 누릴 것이다.


지성소

이것은 우리를 서른일곱째 항목으로 이끈다. 거룩한 성에 성전이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온 성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 성은 정사각형이고 세 치수가 같기 때문에 온 성이 성전일 뿐 아니라 지성소이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때에 작은 장막과 제단은 매우 작은 모양이었다. 거기에는 바깥뜰도, 성소도, 지성소도 없었다. 하나님과 두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그와 함께 장막 바깥쪽에서 거했다(창 18장). 그런 뒤 모세의 때에는 보다 넓게 건축된 제단이 있는 성막이 있었다. 이 성막에 있는 지성소의 세 치수가 같았다. 후에 솔로몬의 성전은 모든 치수를 확대해서 성막과 같은 모형으로 건축되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건축의 최종적인 단계인 새 예루살렘은 오직 한 부분만 있다. 즉 모든 것이 지성소에 의해 흡수된다. 거기에는 더 이상 바깥뜰이나 성소가 없다. 성전이 필요 없는데 이는 온 성이 성전이고, 성의 모든 부분이 지성소로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성이 거룩한 성으로 불리는 한 가지 이유이다. 그러한 성이 하나님의 건축의 궁극적인 나타남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되심

서른여덟째 항목은 새 예루살렘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 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건축의 모든 단계들을 거쳐,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거룩한 성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 되신다.

하나님의 이름
서른아홉째 항목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찾는 자들의 이마 위에 적혀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이마 위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고,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이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결혼할 때 그녀는 남편의 이름을 취한다. 그녀는 남편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우리 이마 위에 쓰인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과 하나임을 증명하고 선포한다. 이 항목들은 매우 깊고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의 얼굴

거룩한 성에 관한 마흔째 항목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영원토록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다. 아마 가장 좋은 예는 어린 아기의 예일 것이다. 그의 어머니의 얼굴만큼 어린아기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에게 그것이 모든 것이다. 어느 날 우리는 그분 안에서, 그분의 임재 안에서 그분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

마흔한째 항목은 그 성 안에서 우리는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는 것이다. 영원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외에 아무 할 일도 없을 것이다.


열국을 다스리는 왕들

마흔두째 항목은 우리가 열국에 대해 왕으로서 다스릴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될 것이며, 열국의 왕들이 될 것이다. 당신은 이전에 새 예루살렘에서 당신이 갖게 될 지위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열국의 빛

마흔셋째 마지막 항목은 새 예루살렘이 열국들에게 빛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열국들은 새 예루살렘의 빛 가운데서 행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성만이 유일하고도 우주적인 촛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촛대로서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 등이신 그리스도를 지탱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성을 통해서 비추시므로, 주위의 모든 열국들은 그 성의 빛 가운데서 행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의 이 궁극적인 최종 완성이 오늘날의 교회 생활을 그린 완전한 그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거룩한 성의 축소판이라면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 비출 것이다. 그럴 때 불신자들, 세상적인 자들이 우리의 빛 가운데서 행할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을 비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 모든 요점들을 기도 안에서 주님께 가져감으로써 오늘날 교회 생활이 무엇인지 완전히 깨닫고 또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동역하기를 바란다.

주가 구속하신 백성 주의 몸, 주의 신부
주의 풍성 나타내는 주의 충만 또 표현
그의 모든 것이 되신 주의 은혜 선포해
주 영광에 참여토록 주로 적셔 주소서

(후렴) 보라 거룩한 성 하나님 충만해
인성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 표현

경건의 큰 비밀이여 하나님 사람 연합
하나님의 영광만이 충만하고 찬란해
하나님의 모든 충만 온전하게 표현한
우주 안의 위대한 몸 크신 그릇이로다

하나님이 변화시킨 사람들의 집합체
진주처럼 보석처럼 주 영광에 부합돼
성의 중심 보좌에서 생명 생수 흐르네
생명나무이신 주님 새 열매 늘 풍성해

밝은 등인 그리스도 붙드는 정금 촛대
하나님은 주 안에서 성의 영광 되시네
하나님이 건축하신 최종 완성인 표현
하나님과 사람의 거처 주 계획의 목표일세
(한국복음서원 찬송가 77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