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100선-새예루살렘(3-2)
새예루살렘
살렘 , 2008-11-11 , 조회수 (3650) , 추천 (0) , 스크랩 (0)

생명의 교통
열여덟째 항목은 이 성에 참된 교통이 있다는 것이다. 이 교통은 보좌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문들에 이른다. 이 교통은 생명의 공급(나무)과 생명의 길과 함께 있는 생명의 흐름(강) 안에 있다(계 22:1―2). 그러나 이 교통은 우리 가운데 있는 교통일 뿐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교통이다. 그것은 수평적일 뿐 아니라 또한 수직적이다. 우리가 생명 공급을 누리며, 생명의 길에서 행하며, 생명의 흐름 안에 있을 때 자동적으로 우리는 서로 교통을 갖게 된다. 우리는 모든 성도와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합당하고 참된 교통을 갖는다. 당신의 체험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사실임을 알 것이다. 우리는 다음에 이 흐름, 이 교통에 대해 더 볼 것이다.

왕권과 제사장 직분

우리는 교통이 생명의 흐름 안에 있음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또한 보좌(계 22:1)에 관해서도 보아야 한다. 보좌는 권위를 나타내며 생명 안에 있는 합당한 교통은 항상 보좌의 권위에 관계된다. 다른 말로 하면, 권위는 왕권과 관련되고, 교통은 제사장 직분과 관련된다. 새 예루살렘의 모든 거주자는 왕들이요, 제사장들이다. 하나님의 건축에는 이 두 방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는 왕권, 즉 권위가 필요할 뿐 아니라 또한 제사장 직분, 즉 교통도 필요하다.

구약은 하나님의 건축에 관한 모든 구절에서 이 원칙을 분명히 설명한다. 모세는 성막의 건축에 있어서 왕권을 대표했고, 대제사장 아론은 제사장 직분을 대표했다. 이들 모두는 함께 교통을 가졌었다. 성막은 권위와 교통에 의해 건축되었다. 솔로몬 왕은 첫 번째 성전 건축에서 권위를 대표했고, 제사장 직분 또는 교통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 거기에 있었다. 70년간의 포로 생활 후에 건축의 회복에 있어서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있었다. 스가랴 6장은 하나님의 성전의 건축자이신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그분의 어깨 위에는 왕권과 제사장 직분의 두 직임이 있다. 왕으로서 그분은 권위를 소유하고 있고, 제사장으로서 그분은 교통을 갖고 계신다.

교회의 건축은 오직 두 직무, 즉 권위와 교통, 왕권과 제사장 직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만약 교회가 건축되려면 권위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주(主)되심, 왕권에 복종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를 모든 종류의 혼돈으로부터 구출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혼돈으로 충만하다. 그러나 교회의 건축에는 결코 어떤 혼돈도 있어서는 안 된다. 작은 혼돈조차도 건축을 허물어뜨린다. 어떤 건축 청부업자라도 건축하는 동안에는 합당한 질서가 유지되어야만 한다고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왕권과 제사장 직분을 체험해야만 한다. 수직적으로는 질서와 권위가 있고, 수평적으로는 교통이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교회 건축은 실현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머리되심 아래서 더 많은 교통이 필요하다. 그때 우리는 질서와 흐름을 가질 것이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모든 재료가 함께 모여지고 건축의 실재가 실현되고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의 모양을 닮은 성벽

스무째 항목은 성을 둘러싼 벽에 관한 것이다. 성벽의 모양은 벽옥인데 이는 계시록 4장 3절에서 하나님의 모양을 묘사한 것과 같다(계 21:18). 이것은 성의 벽이 하나님의 모양,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함을 의미한다.

성벽의 분별과 보호

스물한째 항목은, 이 벽의 목적에 관한 것이다. 성벽의 기능은 통속적인 것들로부터 거룩한 것을 분별하는 것,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하나님께 속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러한 분별하는 벽은 또한 보호이다. 어떤 집의 벽은 안과 밖을 분별하는 요소이고 그러한 분별은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호한다. 거룩한 성의 벽은 참된 분별이다. 이 벽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거룩하며 밖에 있는 모든 것은 통속적인 것이다. 이 벽은 또한 성안에 있는 모든 것에 완전한 보호를 제공한다.

바로 하나님의 모양이 이 벽의 분별하는 요소이다. 지방 교회가 하나님의 모양 안에 있으면 있을수록 세상과 통속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더 분별된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을 얻는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모양을 얻을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흐른다면 우리는 바로 그분의 모양 안에 있게 될 것이고, 그분의 모양은 교회의 분별하는 능력이 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왜 그렇게 세상 사회와 유사한가? 왜냐하면 기독교 안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밖에 하나님의 모양이 결여되었다. 왜냐하면 안에 그분의 생명의 흐름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 우리가 밖에 하나님의 모양을 지니기를! 이것이 교회를 통속적이고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분별되게 할 것이며, 동시에 그 많은 손상시키는 영향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벽의 건축

다음으로 성의 보호인 이 분별하는 벽은 건축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하루저녁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벽은 보석으로 건축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참된 건축은 이 분별의 면에 있다. 모든 것이 정금인 성은 신성한 본성을 상징하고 이 본성은 많은 부분의 건축을 포함하지 않는다. 성의 모든 문들은 진주들인데 이는 어떤 분량 만큼만의 건축을 가리킨다. 그러나 벽은 성의 건축의 주된 부분이다. 우리가 본 것같이 분별하며 보호하는 요소인 이 벽은 하나님의 모양을 닮았다. 그것은 높이가 144규빗, 즉 12곱하기 12규빗인데 이것은 완성 중의 완성을 뜻한다. 그 벽은 참으로 높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그러한 높은 벽을 가지고 편협한 모양을 보여 준다고 비난한다. 많은 때 우리의 벽은 충분히 높지 못하다. 우리는 모든 통속적인 것들로부터 지켜지기 위하여 144규빗 높이의 벽을 가져야 하고, 이 벽은 보석들로 건축되어야 한다.

흙벽돌을 만들기 위한 진흙을 찾아내기는 아주 쉽지만 보석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 우리는 하루저녁에 많은 양의 흙벽돌을 쉽게 생산할 수 있지만, 한 달 동안에 보석 한 조각을 얻기란 매우 어렵다. 보석은 많은 변화되는 일을 요구한다. 진흙 건물을 건축하는 것은 쉽지만 변화되는 것은 매우 느리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양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벽옥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기억하라. 오늘날 우리는 진흙들이다. 우리는 벽옥으로 변화되어야만 하며, 144규빗의 높이로 건축되어야 한다.

벽의 척량

스물셋째 항목은 벽의 척량이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계 21:17)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것이 마치 천사와 같은 사람의 상황에 있음을 상징한다. 누가복음 20장 35절, 36절은 부활 안에서 사람이 천사와 같이 될 것임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벽의 건축은 부활 안에서이다. 그것은 천연적인 생명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요약하건대, 우리는 벽의 몇 가지 특징을 보았다.

a) 벽은 하나님의 모습과 모양이다. b) 벽은 분별하는 요소이다. c) 벽은 보호를 제공한다. d) 벽은 아주 높이 건축된다. e) 벽의 돌은 변화된 재료이다. f) 벽은 부활 안에 있는 것이다. 오! 이 성의 모든 항목이 그렇게 풍성하다. 그것은 교회 건축의 모든 측면을 계시한다. 성경에 교회 생활에 관해 그렇게 풍성하게 다룬 부분이 없다.

성의 치수
스물넷째 항목은 이 성이 같은 크기의 세 차원―길이, 넓이, 높이―을 가졌다는 것이다(계 21:16). 온 성경에서 세 차원이 모두 같은 구조물이 있다면 오직 지성소(至聖所)뿐이다. 성막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지성소는 항상 세 차원이 같다. 성막에서 그것은 10곱하기 10곱하기 10규빗이었고, 성전에서 그것은20곱하기 20곱하기 20규빗이었다(왕상 6:20). 새 예루살렘의 온 성은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같다. 이것은 온 성이 지성소임을 증명한다.

거룩함(聖)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을 계시하고, 의는 하나님의 길이요,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거룩함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으로부터 분별된 분이시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은 절대적으로 분별되고 하나님과 연합된 성이다.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분별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과의 연합을 체험할 때마다 참된 분별과 참된 거룩함이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와 연합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갖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에서 거룩함을 체험한다. 거룩함은 통속적인 것으로부터의 분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 연합되면 될수록 당신은 더 거룩해진다. 당신은 일반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분별되고 분리될 것이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와 연합된 하나님께 속한 것을 갖는다는 것이다. 거룩함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고 본성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있지 않고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되었는가에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한 것이 거룩함이 아니다. 거룩함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연합됨을 체험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히브리서 12장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케 하고자 우리를 징계하신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과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본성에 참여케 하기 위해 우리를 징계하신다는 의미이다. 새 예루살렘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룩한 성이다.

새 예루살렘

스물다섯째 항목은 이 성의 이름에 관한 것이다. 왜 새 예루살렘(계 21:2)이라 불리는가? 무엇이 새로움인가?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새롭기 때문이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거룩함과 새로움이 필요하다. 교회 생활은 일반적이지 않아야 하고, 교회 생활은 늙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할 때, 우리가 받는 유일한 인상은 늙었다는 느낌뿐이다. 에베소서 5장에서 교회는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티는 손상된 무엇인가를 말하는 반면, 주름은 늙음을 상징한다. 교회는 티가 없어야 하고, 교회는 늙음으로 인한 주름잡힌 것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늙은 교회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다! 교회는 매우 새롭고, 늙음의 흔적조차 없는 것이다. 교회는 매일 새로워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매일 매일 체험한다면, 이러한 새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에 있어 매일 매일 자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늙은 어떤 것을 계속 반복할 것이다. 우리의 체험이 지난해에는 새로웠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올해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많이 늙은 것이다. 우리는 새로움을 갖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야 한다. 교회는 한 새사람이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한 가지 요소를 관찰해 봄으로써 어떤 지방 교회가 얼마큼 성장했는지 말할 수도 있다. 즉 만약 집회의 상황과 분위기가 올해도 지난해와 같다면, 거기에는 늙음이 있는 것이다. 자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교회가 계속 자란다면 집회는 계속적으로 새로워질 것이다. 거룩한 성에는 생명나무가 매달 새로운 과실을 맺는다(계 22:2). 그리스도는 너무 풍성하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결코 고갈시킬 수 없다! 우리는 새로움 안에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새로움과 신선함은 교회가 자라고 있다는 증거이다.

빛이신 하나님

스물여섯째 항목은 이 성에 사람이 만든 어떤 빛이나, 해와 같은 자연적인 빛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계 21:23, 22:5).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우리의 빛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가졌기 때문에 이들 외의 어떤 빛도 필요 없다. 천연적인 빛은 우리의 천연적인 시력이나 통찰력을 의미한다. 많은 때 교회 집회에 많은 형제자매들이 그들의 천연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때때로 집회에 사람의 손으로 만든 빛을 가져온다. 교회 생활에서 천연적인 빛과 만들어진 빛은 둘 다 처리받고 거절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 안에 계신 바로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빛이 되실 것이다.

무엇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빛인가? 가령 지방 교회 안에 정신이 온전치 않은 형제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므로 누군가가 그에게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한다고 추천한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빛을 의미한다. 그러면 당신은 우리가 이 형제를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심지어 때로는 금식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적인 방법을 거절하고, 주님을 바라봐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빛이 되실 것이다. 그분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우리에게 알게 하실 것이다. 모든 일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방법, 인간적인 빛뿐 아니라 천연적인 방법, 천연적인 빛도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신뢰해야 하고, 그분이 우리의 빛이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더 체험해야 한다. 거룩한 성에 오직 하나님만이 계신다. 하나님 자신이 모든 면에서 우리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어떤 형제들은 너무 많은 빛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가진 빛들은 햇빛, 달빛, 별빛, 촛불, 등잔불, 전깃불 등등이다. 그들은 너무 많은 방법들을 가지고 있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빛들을 내려놓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의 빛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그분이 빛이요, 길이시다! 그분이 모든 것이시다. 우리는 모든 다른 길들과 빛들을 거절해야 한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몇 가지 실제적인 공과를 배워야 한다.

밤이 없음

스물일곱째 항목은 새 예루살렘에 밤이 없는 것이다(계 21:25, 22:5). 우리는 이미 낮과 밤이 새 땅에서도 계속될 것임을 지적했다. 왜냐하면 거기에 여전히 해와 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을 비추시기 때문에, 해와 달이 필요 없다. 따라서 성안에 밤이 없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밤에 우리는 피곤하여 잔다. 그러므로 밤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피곤하지 않을 것임을 상징한다.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자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계속적으로 체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옛 창조 가운데 있기 때문에 피곤하게 된다. 밤은 옛 창조에 속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여전히 육체적으로 옛 창조 안에 있다. 따라서 항상 피곤한 어떤 기간이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결코 피곤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결코 영 안에서 지치지 말아야 한다. 교회 안에 밤이 있어서는 안 된다.

두 흐름과 두 성

스물여덟째 항목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온 성경에 걸쳐서 두 성과 함께 두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흐름은 사탄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흐름이다. 사탄의 흐름에는 큰 바벨론이라 불리는 성이 있고(계 17:5), 하나님의 흐름에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있다(계 21:2). 계시록은 이 두 성을 계시한다. 큰 바벨론은 다름 아니라 사탄과 인류의 연합이다. 하나님의 눈에 바벨론은 모든 세상적인 사람들로 구성된다. 다른 한편으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과의 연합이다.

이들 두 성은 결코 혼합될 수 없다. 거룩한 성은 항상 큰 바벨론으로부터 분별되고, 큰 바벨론은 항상 거룩한 성을 손상시키기 위해 기회를 찾고 있다. 결국 하나님은 큰 바벨론을 심판하고 거룩한 성을 건축하기 위해 개입하신다. 만약 오늘날 교회가 충분히 건축된다면, 항상 모든 세상적인 것들 위에 틀림없이 심판이 있을 것이다. 세상적인 것은 바로 큰 바벨론의 요소이다. 만약 우리가 세상적인 어떤 것을 교회의 건축 안으로 가지고 온다면, 그것은 거룩한 성과 바벨론을 섞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이것을 허락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그분 자신을 수호하시기 위해 오실 것이다. 우리는 교회 건축이 세상적이고 바벨론 성에 속한 어떤 것들과 그 요소들로부터 분별될 수 있도록 항상 경계해야만 한다.

이 모든 항목들을 기도 안에서 주님께 가져가기를 바란다. 교회를 위하여 이 모든 항목에 관하여 기도하라.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지 않음을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이 땅 위에서 성취될 것이다.

정사각형의 성
스물아홉째 항목은 그 성이 하나의 큰 사각형이라는 것이다. 계시록 21장 16절은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고 말한다. 그 성의 척량은 세 치수가 같은데 각 치수가 일천 스다디온의 열두 배이다. 그 성이 완전한 네모라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교회 생활에 조금도 기울어진 것이 없어야 한다는 원칙을 배워야 한다. 모든 것이 곧고 반듯해야 한다.

사탄의 상징인 뱀에 대하여 보면, 그것은 어떤 것도 곧고 반듯한 것이 없다. 그것의 모든 부분은 교활하고 구부러졌다. 많은 때 주 안에 있는 형제들이 우리를 뱀이 되도록 가르치고자 우리들에게 왔었다. 그들은 우리가 너무 곧고 너무 열리고 너무 솔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조금 ‘현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당신은 우리에게 현명하게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와 같이 교활하게 되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결코 법정에 선 변호사나 유엔의 외교관들같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랑스런 그리스도인 형제들이다. 우리는 반드시 할 수 있는 한 곧게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마지막 한 주일 동안 주 예수님은 장로들과 바리새인들과 유대인 지도자들과 마주 대했다. 그들은 그분이 하셨던 것 같은 그러한 행동을 할 권위를 누가 그분께 주었는지 주님께 물었다. 주님은 이 사람들에게 즉시 대답하지 않고,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마 21:24-25)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정치적인 회의를 열어서 주 예수께 “우리는 알지 못하노라”고 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알지만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나도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들(마 21:2327)에서 흠정역은 적절하게 번역하지 못했다. 흠정역에서 “우리가 말할 수 없다”라고 번역된 것의 헬라어 원문의 의미는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이다. 이 사람들은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주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구부러졌으나, 주님은 곧으셨다.

투명한 성

서른째 항목은 새 예루살렘이 완전히 투명하다는 것이다(계 21:18, 21). 이것은 거기에 아무것도 불투명한 것이나 감춰진 것이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교회 생활에서 모든 것이 깨끗하고 순수해야 할 뿐 아니라 수정같이 투명해야 한다. 거기에 아무것도 덮인 것이나 감춰진 것이 없어야 한다. 이 분야를 배우는 데는 많은 참된 공과들이 있다.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점검되고, 곧게 되고, 정결케 되고, 투명해져야만 한다. 우리 가운데 있는 교활하게 감춰진 어떤 것은 대적에 속하고, 뱀에 속하고 어두움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작은 문제를 하루나 이틀, 심지어 이십 일 동안 감출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심지어 어떤 것을 이십 개월이나 아마 십 년 동안 감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십일 년째의 첫 날에 그것은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결코 어떤 것을 영원히 감출 수 없다. 교회 생활에서 모든 것이 분명하고 투명하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성

이 성은 그렇게도 곧고 투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다(계 21:11, 23).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그 성의 내용이다. 그 이유는 그 성이 그분의 영광으로 완전히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성이 하나님을 담고 표현하는 그릇임을 의미한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보통의 탁상용 램프를 생각해 보자. 전형적인 램프에는 전등갓이라 불리는 바깥 덮개가 있고, 전등 속에는 빛의 충만이 있다. 램프는 빛을 표현하고, 빛은 램프와 갓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나타남이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성에서 나타나신다. 오늘날 정상적인 교회 생활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다.

숫자 12

다음으로, 숫자 12가 이 성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사용된 숫자의 상징적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전기를 예로 들어 사용할 수 있다. 전기를 이해하기란 극히 어렵다. 우리는 연구를 위해 이것을 조금 떼어다가 우리 손 위에 놓을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전기의 어떤 방면들을 대표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성에서 사용된 숫자는 그 성과 오늘날 교회 생활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숫자 12는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 최소한 열 번 사용되었다. 열두 천사들과 함께 열두 문이 있고, 이 문들은 열두 지파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 그다음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는 열두 기초석이 있다. 열두 문은 열두 진주이고, 열두 기초석은 열두 보석이다. 그 성은 삼차원으로 되어 있고, 각 치수는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다. 그 성벽의 척량은 144규빗인데, 144는 12의 열두 배이다. 이것에 더해 생명나무는 성안에서 열두 가지 실과를 맺는다.

숫자 12를 구성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지만, 이 두 장의 기록에 따르면, 3의 네 배, 또는 4의 세 배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아는가? 그 성의 네 방향에 각각 세 개의 문이 있기 때문이다. 3은 삼일 하나님의 숫자이고, 4는 피조물 혹은 창조의 숫자임을 기억하라. 계시록 앞 장에서는 숫자 7이 자주 언급된다. 일곱 교회들, 일곱 촛대들, 일곱 별들, 일곱 인들, 일곱 나팔들, 일곱 대접들이 있다. 이 숫자는 3 더하기 4나 4 더하기 3으로 이루어진다. 계시록은 숫자 7로 시작해서 숫자 12로 끝맺는다. 시작에는 네 생물 더하기 삼일 하나님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곱셈으로부터 나온다. 덧셈은 함께 더해지는 것을 상징하는 반면 곱셈은 함께 연합됨을 상징한다. 먼저 피조물인 우리는 우리에게 더해진 하나님을 갖는다. 그런 다음 거듭남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곱해진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렇게 연합되어야 한다. 새 예루살렘 온 성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온 성이 숫자 12에 의해 대표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교회 생활은 숫자 7로 시작해서 숫자 12로 성숙된다. 이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교회는 인성에 더해진 신성으로 시작해야 하고, 그 후 각 사람은 하나님과 연합되어야만 한다. 7은 12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교회 생활에서 거쳐야 할 길이다. 교회 생활의 성숙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내가 교회 생활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나 자신의 연합을 포함해야 한다. 무엇을 하기 전에는 나는 “내가 이것을 단지 스스로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하는가?”라고 점검해야 한다. 숫자 4 자체는 좋지 않다. 6은 더 나쁜 수이다. 우리는 최소한 하나님께서 사람과 더해지신 7과 같거나, 부활인 8이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숫자 12의 실재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일은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 가운데 있어야 한다.

기초

다음으로 우리는 그 성의 기초에 이르는데 여기서 여섯 방면을 다룰 것이다. 에베소서 2장 20절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건축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선지자가 없다. 우리는 에베소서가 쓰일 때 어떤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선지자가 필요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때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다. 선지자들은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사도들은 영원히 거한다. 왜냐하면 그 성의 열두 기초석 위에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들이 있기 때문이다(계 21:14). 사도들은 여섯 가지를 대표하기 때문에 영원히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