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첫째 항목은 이 성이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세대들을 거친 하나님의 건축의 일의 최종적인 결론이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그의 이상 가운데서 처음 본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계 21:1). 그것에 이어 그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일을 대표하고,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건축하시는 일을 대표한다. 이것은 창조의 첫 번째 일에 이어 하나님께서 많은 세대들을 통하여 그분의 최종적인 건축을 성취하기 위해 계속 일하셨음을 의미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하나님의 창조의 일을 기록하지만, 창세기 3장부터 성경의 끝까지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그분의 건축을 위하여 일해 오셨다. 하나님의 건축의 중요한 의미를 회상해 보자.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 안으로, 사람을 그분 자신 안으로 건축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모든 세대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목적을 위하여 오직 이 노선을 따라 일해 오고 계신다. 성경은 주로 창조 이래 하나님의 온 일이 그분 자신을 사람과 하나로 연합하시는 것임을 계시한다.
하나님 자신인 말씀이 사람으로 성육신하셨을 때, 이것은 산 장막의 표현이었고, 하나님과 사람의 실제적인 연합이었다. 이 시간 전에는,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하나님이었고, 사람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육신의 때와 그때 이래로 이 땅 위에서 무언가가 발생했다. 즉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사람과 연합하신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이사야 9장 6절과 친밀하다. 그러나 한 아기가 태어났고 그 이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렸다는 것에 인상을 받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만약 성경에 이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그 한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릴 수 있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이 아기가 장막과 성전이었고, 바로 하나님의 건축이었다(요 1:14, 2:19). 신성이 인성과 연합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건축의 실제적인 정의이다.
하나님께서 성육하신 때로부터, 특히 삼년 반 동안에 이 땅에 그분 안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는 참 사람이요,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분 안으로 오셨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고, 또한 사람 안으로 오셨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주 예수는 또한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끄셨다.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분은 이것을 성취하셨다. 오늘 하늘 위에, 하나님 안에 있는 한 사람이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사람 안으로 오셨고,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 안으로 인도되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던 동안 그분은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한 사람이었다. 오늘 예수께서 하늘에 계시는 동안 그분은 바로 그분 안에 사람이 함께 한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의 연합이고, 하나님의 건축의 의미이다. 이 연합은 이미 성취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이 연합의 대량 재생산이다. 우리 모두는 체험적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성육신하시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그분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분명히 이끄실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우리는 더 하나님 안에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그렇게 충분히 하나님 안에 있지 않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 땅에서 그분의 건축의 일을 하고 계시는 이유이다.
오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성육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 다음 즉시 우리는 건축의 일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하나님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대량 생산품이 된다. 이렇게 재생산하는 일이 충분히 완성되어 함께 구성될 때, 그 결과는 확장된 장막, 새 예루살렘이다.
66권으로 구성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지난 육천 년 동안 그분의 최종적인 건축을 출현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일해 오셨는지를 말해 준다. 성경 연구가들은 하나님께서 한 시대에는 어떤 방법으로, 다른 시대에는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말하는 많은 시대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모든 세대들을 통한 하나님의 모든 일의 최종적인 결과는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시대들을 해석할지라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의 모든 다양한 방법들은 결국 어떠한 종류의 결과, 즉 새 예루살렘을 산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건축에 대한 그러한 그림이 성경 육십육 권의 마지막에 있다는 것은 참 논리적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역사의 초기 단계에 한 작은 제단과 함께한 장막이 있었음을 보았다. 많은 시대들을 통하여 그 장막이 최종적으로 커다란 장막이 될 때까지 증가되어 왔다. 새 예루살렘이 여전히 장막이라 불리는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모른다(계 21:3). 이 장막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총체이다.
왕국을 나타내는 성
둘째 주요 항목은 이 하나님의 일의 최종적인 완성이 다만 하나의 장막이나 성막일 뿐 아니라 하나의 성이라는 것이다. 장막은 그렇게 강하거나 영구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 장막은 또한 한 성이다. 성경적인 의미에 의하면 성은 권위를 행사하기 위한 중심이다. 그러므로 그 성은 왕국을 상징한다. 새 예루살렘은 거처인 장막일 뿐 아니라 그것은 또한 왕국의 중심인 성이다. 역사의 초기 단계에 한 작은 장막이 있었다. 그 뒤 성막이 왔고, 결국 성전이 되었다. 마지막에는 가장 강하고 모든 것 중에 가장 견고한 구조인 한 성이 있을 것이다.
장막이나 성막이나 심지어 성전에 의해 상징된 권위를 가시화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성은 권위가 행사되고 있는 중심을 적절히 상징한다. 그것은 왕국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보좌가 새 예루살렘에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성이 하나님의 권위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계시록의 앞 장에서는 성으로부터 분리된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을 계시한다(계 4:2―3). 그러나 결론적인 장에서 하나님은 성 안에 있는 보좌에 앉아 계신다(계 21:5, 22:3). 이것은 마지막 때에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때라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성 안에서 보좌에 앉으실 것임을 의미한다. 그분은 지금 보좌 위에 계시지만, 그때에는 전체 왕국 위에 그분의 권위를 행사하실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의 영역이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그의 글에서 이 중요한 원칙에 대해 말한다. 로마서 12장은 그리스도의 몸을 계시한다. 그러나 로마서 14장은 왕국에 대해 말한다. 합당한 교회 생활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권위를 행사하시는 영역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합당한 교회 생활은 하나님의 왕국이다. 교회 생활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권위를 행사하시는 중심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과 같아야만 한다.
질서 있게 건축된 성
셋째 주요 항목은 새 예루살렘이 완전한 질서 가운데 건축된 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보석더미가 아니고, 보석으로 건축된 성이다(계 21:10―11). 우리는 건축을 위한 많은 이상적인 재료들을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들 재료들이 단지 한 무더기로 쌓여 있을 뿐이라면, 그것들은 분명히 하나의 건물을 구성할 수 없다. 심지어 교회 생활 안에 있다 할지라도, 참된 건축이 있어야 한다. 단지 훌륭한 믿는 이들이 함께 모인 집단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첫째 필요는 보석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그다음 우리는 하나의 건축으로 다른 이들과 함께 건축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참된 건축을 가질 때 그 성이 질서 있게 나타날 것이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 모두는 단지 재료 무더기로만 쌓여 있어서는 안 된다. 질서 가운데 있어야만 한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나의 집에 초대한다면, 나는 그를 목재 야적장으로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를 훌륭하고 합당한 질서대로 건축된 집으로 데려갈 것이다. 합당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건축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의 성이 될 것이다.
성막
넷째 주요 항목은 새 예루살렘이 바로 하나님의 성막이라는 점이다(계 21:3). 성막은 세 가지 기본적인 사상을 전달하는데 이는 바로 거함과 안식과 표현이다. 교회는 그러한 성막이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요,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곳이요, 자신을 표현하시는 곳이어야 한다.
신부
다섯째 항목은 이 성이 또한 신부라 불린다는 것이다(계 21:9―10). 신부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묘사한다. 첫째 신부인 하와는 남편의 일부분이었다. 그녀는 아담으로부터 나왔다(창 2:21―24). 그러므로 그녀는 그의 배필이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일부분이어야 한다(엡 5:30―32). 신부는 또한 사랑과 연합을 말한다. 남편은 신부를 사랑하고, 신부는 남편을 사랑한다. 그녀는 남편과 하나로 연합된다. 그러한 연합은 사랑의 문제일 뿐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담은 그의 배필을 다른 피조물 가운데서 찾지 않았다. 그 어느 것도 자신과 같은 생명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하와만이 아담과 같은 생명을 갖고 있었다. 교회는 먼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와 사랑의 연합 가운데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과 본질을 가져야만 한다.
신부가 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신부는 또한 아내가 되어야 한다. 결혼식 날에는 모든 것이 놀랍다. 그러나 후에 신부는 아내가 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보다 심각하다. 새 예루살렘은 신부일 뿐 아니라 또한 영원히 그리스도의 아내이다.
하나님의 권위의 중심
다음으로 우리가 볼 것은 이 성에 중심, 곧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이다(계 22:3).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빛이신 하나님을 담는 등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계 21:23). 새 예루살렘 성은 빛이신 하나님을 담은 등이신 그리스도를 떠받치고 있는 촛대와 같다. 이같이 하나님은 보좌 위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 때문에, 거기에는 오직 한 보좌만 있다.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 성의 보좌에 앉아 계시므로, 이 보좌가 성의 중심이다.
오늘날 교회 생활에도 역시 중심이 있어야 한다. 그 중심은 하나님의 보좌이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보좌로부터 교회 안에서 그분의 권위를 행사하신다. 온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머리되심의 문제를 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다. 교회 안에서 항상 우리는 결코 우리의 권위를 행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교회 안에서 실제적인 권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머리되심에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빛
일곱째 중요한 항목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머리되심은 바로 빛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권위 안에 계시는 곳은 또한 빛이 있다. 다른 한편 혼돈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어두움이 있다. 하나님의 권위가 지방 교회 안에 행사될 때 그 교회는 신성한 빛으로 충만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보좌 위에 계시지 않는다면, 그분이 권위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그분은 비추실 수 없고 결코 빛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 권위를 행사하시도록 지위를 드린다면, 만약 우리 모두가 기꺼이 그분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킨다면,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빛으로 충만할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시인하고 그분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킨다면 그분은 우리를 빛으로 이끄실 것이다. 거스름은 우리를 어둠 가운데 두지만, 복종은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인도한다.
촛대
여덟째 항목은 이 성이 하나의 큰, 우주적인 촛대라는 것이다. 계시록의 처음 몇 장들에는 일곱 지방의 일곱 촛대들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에는 온 우주 가운데 하나의 거대한 촛대가 있다. 새 예루살렘은 마치 솟아오른 산과 같은 정금성이다(계 21:18). 이 산성의 정상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보좌 위에 계신 하나님은 등이신 어린양 안에 있는 빛이시다(계 21:23). 그러므로 온 성이 금으로 된 촛대이다.
지방 교회는 그러한 촛대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지방 교회 안에서 보좌 위에 계실 때, 그리고 그분이 그분의 권위를 행사하시고 비추실 때, 그 교회는 한 촛대가 된다. 영원 안에서는 오직 한 우주적인 교회가 있을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많은 지방 교회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 안에, 역사 안에 있는 교회를 묘사하는 계시록에 있는 일곱 촛대들을 본다. 영원 안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의 큰 촛대, 새 예루살렘만 볼 수 있다.
생명의 흐름
아홉째 항목은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흐름이 나오는 것이다(계 22:1). 무언가가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온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어떠함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흐름은 생명으로서 흘러나오는 하나님 자신이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머리되심을 행사하는 것과 빛으로 비추시는 것이 허락될 때, 그분은 자연히 우리에게 생명으로 흐르신다. 누구든지 그러한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는 즉시 이 생명의 흐름을 느낄 것이다. 어떤 메마른 느낌이 아닌 적셔짐의 느낌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생명의 흐름은 교회 안에 세워진 보좌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빛이 비치고 그 생명이 흐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위가 행사되어야만 한다.
생명나무
열째 항목은 이 흐름 안에 풍성한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이다(계 22:2). 이 나무는 생명의 공급이요, 생명을 위한 음식이다. 교회 안에서 생명의 흐름이 있을 때마다 우리의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완전한 공급이 그 흐름 안에서 우리에게 올 것이다. 우리가 집회에 나갈 때마다, 기도 집회이든, 주님의 상을 위한 집회이든, 교통의 집회이든, 우리는 생명나무의 열매에 참여할 것이다. 모든 집회에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한 길
열한째 항목은 이 생명의 흐름과 공급과 함께 한 길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단지 한 길, 하나의 도로만이 있다. 새 예루살렘의 길 안에 하나의 강이 흐르고 그 강 안에 그 가지가 강 좌우에 이르는 한 나무가 자란다. 영적인 길은 항상 생명의 흐름과 공급과 함께 있다. 우리 자신의 체험을 점검해 보자. 생명의 흐름과 생명의 공급이 없다면 길이 없다. 우리는 어떻게 가야 할지 알지 못한다. 교회의 집회에서 하나님의 빛과 권위와 더불어 생명의 흐름 안에서 생명의 공급이 충만할 때, 우리는 길에 관하여 아주 분명할 것이다. 그러한 집회 후에 그리고 심지어 그 집회 동안에 우리는 “나는 이제 분명하다. 나는 이것을 해야 할지 저것을 해야 할지를 안다. 나는 어떻게 나아가야 될지를 안다.”라고 말할 것이다. 거기에 길이 있기 때문에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 교회 집회가 혼돈과 어둠과 빈곤함과 메마름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보좌가 없고, 빛도 없고, 생명의 흐름도 없는 집회이다. 그러한 집회에서 우리는 어둠 가운데 있을 것이고, 후에 우리는 어떻게 나아갈지 알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길이 없다.
위의 그림은 하나 안에 있는 세 항목―길, 생명의 흐름, 그리고 생명의 나무―을 계시한다. 생명의 흐름을 가질 때 생명나무와 생명의 길을 갖는다. 생명의 길은 생명나무와 함께 하고, 생명나무는 생명의 흐름 안에서 자란다. 그 흐름 안에 생명의 공급이 있고 나아갈 길이 있다.
한 흐름, 한 나무, 한 길
열두째 항목은 오직 생명의 한 흐름, 생명의 한 나무, 생명의 한 길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길이 나의 길과 다르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당신이 잘못되었든지 내가 잘못되었든지, 아마 우리 둘 다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아무도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때 우리는 같은 길 안에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오직 한 길만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도시들은 너무 많은 길들과 너무 많은 도로들이 있다. 따라서 길을 잃어버리기가 쉽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그런 문제가 없다. 그 성은 오직 한 길과 한 도로만이 있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의 그림은 또한 그 길이 나선형으로 놓여 있음을 계시한다. 그 성 자체는 정상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산과 같이 가파르다. 그 길은 그 성의 기초석으로부터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열두 문을 지나간다. 그 길은 보좌에 이를 때까지 성 주위를 나선형으로 감아 올라간다. 생명의 강이 그 보좌로부터 그 성의 모든 열두 문에 이를 때까지 길 가운데로 흘러내린다. 당신이 어떤 문을 통해 들어가든지 당신이 한 길 안에서 나아가면 결국 보좌에 다다를 것이다. 그 길은 위로 올라가지만 생명 강은 아래로 내려온다.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를 위로 이끄시기 위해 우리에게 흐른다. 우리 안에 흐름이 있을 때마다 항상 그 흐름은 우리를 길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갈 때 그 길은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로 이끌 것이다. 생명의 흐름에 대한 누림은 생명의 길을 가져다주고, 생명의 길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다. 만약 우리가 오직 생명의 길만 따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 생활에서는 오직 생명의 한 흐름, 하나의 생명나무, 그리고 생명의 한 길이 있다. 생명의 길은 항상 위로 향한다. 이 길을 따르면 따를수록 우리는 더욱더 보좌를 향하여 위로 나아갈 것이다.
정금 길
열셋째 항목은 이 한 길이 모두 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계 21:21). 이것은 생명의 길이 하나님의 본성 안에 있음을 상징한다. 영적인 길은 항상 하나님의 본성과 함께 하는 생명의 길이어야만 한다. 당신이 어떤 방법으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느낄 때마다 그 방법은 하나님의 본성을 포함해야만 한다. 만약 하나님의 본성에 반대되는 방법으로 당신이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옳은 길은 정금 길의 방법, 즉 하나님의 본성의 방법이다. 당신이 생명의 흐름 안에 있을 때 당신은 길을 갖게 되고, 이 길은 항상 하나님의 본성을 갖는다.
새 예루살렘에 나타난 이들 중요한 항목은 교회 생활의 모든 방면들을 인식하는 데 나를 크게 도왔다. 왜냐하면 이 성이 하나님의 건축의 궁극적인 최종 완성이기 때문이다.
성의 문들
성에는 동서남북 모든 방향을 망라하는 네 방향에 각각 세 문들이 있다. 숫자 4는 항상 창조나 피조물을 나타낸다. 계시록 4장은 네 생물을 계시하는데 이것은 모든 생물을 대표한다. 숫자 3은 신격의 세 위격을 상징한다. 이것은 신격의 세 위격이 땅의 모든 네 방향으로부터 온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입구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신격의 세 위격은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으시다.
누가복음 15장은 세 비유를 기록하고 있는데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여인, 그리고 방탕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가 그것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려고 목자로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일하신 후에 성령께서 우리를 되찾아오기 위해 우리 마음 안에서 찾으며 비추시는 여인으로 오셨다. 성령의 찾으시는 일로 말미암아 우리는 회개하고 기쁘게 받으시는 아버지께로 돌아온다. 그때 우리는 문으로 들어왔다. 신격의 세 위격이 바로 우리를 건축 안으로 이끄셨다. 그분들은 땅의 네 모퉁이에서 온 누구에게나 입구이시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의 누림, 즉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교통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있는 말씀과 일치한다.
거듭남의 진주
열다섯째 항목은 열두 문의 각각에 한 진주씩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주는 거듭나는 일을 상징한다. 우리가 신격의 세 위격을 통하여 하나님의 건축의 영역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된다. 진주는 죽음을 나타내는 물속에 거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인 진주조개 안에서 형성된다. 진주조개가 모래알에 의해 상처받을 때 조개는 모래알이 아름다운 진주로 변화될 때까지 상처 받은 영역에 남아 있는 이 모래알 위에 생명의 액체를 분비한다. 이것은 그 의미가 풍성하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물 가운데 오신 살아 있는 ‘조개’이시다. 그분은 모래알들과 같은 우리에 의해서 상처 받았고, 모래알인 우리는 상처 입힌 곳에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분비되었고, 우리는 거듭났다. 거듭남은 변화시키는 일의 시작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일 깊이, 변화의 과정 안에 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이들은 거듭남에서 과정이 멈추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변화되는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지만 오늘 저녁이나 최소한 내일 안에는 실패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괴상하고 악하다. 우리 각자 안에는 거역하는 본성이 있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께 그 모든 것을 포기하기 원하고 또 변화되든 안 되든 주의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조차 했을 것이다. 그러나 5분 후에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용서해 주시길 구한다. 우리는 달아날 수 없다! 우리는 되돌아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평강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오! 이 변화시키는 일 가운데 포함된 많은 항목이 있다. 거듭남의 진주 문은 단지 시작이요,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건축의 영역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변화시키는 일 안에 있어야 한다.
신성한 본성의 체험
열여섯째 항목은 일단 진주 문을 통해 들어가면 즉시 성 안에서 정금 길 위에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는 것이다(계 21:21). 이 정금 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체험에 따르면 우리가 주님의 변화시키는 일의 첫째 단계인 거듭남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접하고 있고 정금 길 위에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체험 가운데서 거듭나는 일에 관해 알아야 하고, 매일 매일 우리 안에서 십자가의 일인 조개의 상처 냄을 체험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조개로부터의 분비, 즉 그 영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신성한 생명의 분비를 항상 필요로 한다. 우리가 십자가를 체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부활, 곧 생명의 분비를 더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주 예수님의 상처 가운데 거하는 십자가의 공과를 매일 체험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부활 생명의 분비로 말미암아 우리는 계속 정금 길, 곧 거룩한 본성 안에 있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 것이다. 이 길 가운데서 우리는 생명의 흐름을 체험할 것이고, 이 흐름 안에서 우리는 생명의 공급, 영적인 음식을 누릴 것이다. 이 모든 항목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고, 우리에 의해 체험되어야만 한다.
생명의 내적 흐름
열일곱째 항목은 어떤 방향에서 왔든지 간에 우리는 성에 이를 것이고, 어떤 문을 사용하든 우리는 오직 한 길 위에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계 22:2). 새 예루살렘은 성의 기초가 정사각형인 산과 같은 모양임을 기억하라. 이 ‘산’은 모두 같은 크기인 삼차원으로 되어 있다. 그것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는 각각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다. 성의 한 길이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나선형으로 감아 내려온다. 그것은 정상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시작하며 나선형 길의 마지막은 바닥에 있는 열두 문들을 지난다. 그래서 어떤 방향에서 왔고, 어느 문으로 들어왔든 당신은 다른 모든 이들과 함께 같은 길 위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한 길, 한 흐름 안에 있다.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단지 같은 길이 아니고 한 길이다. 한 성에 아주 비슷한 두 길이 있을지 모르나 이 길은 한 길이다. 이것은 거기에 오직 한 흐름만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내적인 흐름만 주의한다면 얼마나 놀랍겠는가? 내가 일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러 온 한 중국인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해 보자. 중국 사람은 일본 사람과 아주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외적인 것들을 잊어버리고 단지 내적인 느낌과 내적인 흐름만을 주의할 때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거기에는 같은 맛과 같은 감정과 같은 느낌이 있다. 모든 것이 같다. 이 원칙은 물론 유럽과 미국에서 온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된다. 문제는 비록 내적 흐름이 하나이고 우리가 그러한 한 흐름 안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너무 많은 외적인 것들을 주의한다는 것이다.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있어 놀라운 교통을 갖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들은 모두 생명의 한 흐름 안에 있다. 그러나 그때 어떤 그리스도인이 대화 가운데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어느 교회에 속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상대편 사람은 아마 자기가 감리교인이라고 대답할지 모르며 질문을 던진 첫째 사람은 아마 좀 경직된 채 자기를 침례교인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우리 중 대부분은 이러한 체험을 갖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함께 교통할 때, 거기에는 놀라운 흐름이 있지만, 교파에 관하여 말할 때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길어진다. 결국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흐름, 한 길 안에 있을 것이며, 모두 같은 음식에 참여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너무 늦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