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이렇게 시작하겠습니다.
런던신학교 학장인 필립 입슨이 쓴 <칭의론 논쟁>(원제: The Great Exchange)(기독교문서선교회, 2001년)을 읽어 본 독자라면 현재 다루고자 하는 소위 '칭의론'이 여전히 많은 혼란과 이견들이 뒤 섞인 진리 항목이라는 것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즉 이 책은 '이신칭의'를 외치며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마틴 루터의 후예들(루터파 세계연합회)이 약 500년이 지난 최근(1998년)에 그동안 자신들이 주장해 왔던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이신칭의)는 주장이 모두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공개적으로 시인한 충격적인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루터의 개혁을 이어간 요한 칼빈과 낙스 등이 단지 오해를 불러일으킨 루터의 추종자로 졸지에 전락된" (위 책, 9쪽) 사건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추세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며 이미 '루터교'(1983), '성공회'(1987), '주류 복음주의자들'(1994)이 로마천주교의 칭의교리에 합의해 온 궤적들의 연장일 뿐입니다. 이러한 기존의 <개신교적 칭의론>에 대한 재검토 움직임에는 영국 복음주의 신학의 선두주자라는 A. E. McGrath 가 포함되며, 그 외에 이름있는 복음주의자들인 N.T. Wright, E.P. Sanders, J.I. packer, Bill Bright 등이 가세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인가' 하는 주제에 대한 논의가 지금 이 시간에도 '현재 진행형'임을 암시합니다. 이런 배경아래 우리가 마태복음 5장과 7장에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천국(the Kingdom of heaven)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의 의(rightiousness)>(마5:20) 또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의 아버지의 뜻을 행함>(마7:21)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성경본문을 통해 알아보는 기회를 갖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II. 이런 것들을 다루고자 합니다.
이제 본론으로 <너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한 마태복음 5:20이 말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너희 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알아 보고자 합니다. 이런 논의는 1. 칭의의 의미, 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 3. 로마 천주교식 칭의, 4. 객관적인 칭의, 5. 주관적인 칭의, 결론의 말 순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1. 칭의의 의미
편의상 <칭의>(Justification)를 '하나님이 그분의 의의 표준에 따라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이라고 정의하고자 합니다. 또는 칭의는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이런 칭의의 정의로 아래 네 가지 유형의 칭의론을 검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마5:20)
이것은 그들이 구약의 율법이 요구한 항목들을 자신들의 노력으로 지킴으로 얻게 된 의를 가리킵니다. 즉 <안식일 준수>, <1년 3차 예루살렘 방문> <의식 율법을 따른 제사의 실행>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것>, <할례>, <이방인과 음식을 같이 먹지 않음> 등등을 포함합니다. 율법선생들인 서기관들이나 율법을 실 생활가운데 철저하게 준수하기로 소문난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율법준수의 삶은 거의 완벽할만 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그들의 눈에는 의로왔을지 모르나 정작 '하나님 눈'에는 불의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몰랐고(롬10:3),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만 범해도 모두 범한 자가 되고(약2:10), '율법 책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결국 불의하게 되는 것'도 몰랐습니다(갈3:10 ). 더 큰 문제는 율법을 준수하려고 애 쓰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인 일뿐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롬3:20). 그러므로 <의롭게 되려고 애쓰는 그들 존재 자체>가 하나님 눈엔 <불의>인 셈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참된 거듭남이 없는 상태에서 소위 주일성수, 십일조, 구제, 성직자들을 잘 모심 등의 행위를 한 것을 가지고 자신이 천국에 갈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현대판 바리새인들'에 불과하며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 사실도 없이 다만 아는 신학 지식과 교리로 목회자, 성경교사, 신학자 행세를 하는 경우 또한 '현대판 서기관'에 불과할 뿐이며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할 것입니다.
3. 로마천주교식 칭의
로마천주교의 칭의론은 '트렌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선언' 중에서 1547년 1월 13일에 개회된 제 4차 회기에서 채택된 '칭의의 교리에 대한 법령'(Decree on Justification)내용이 그 핵심입니다.
위 필립 입슨의 책 121쪽은 그 내용 중에서 <칭의가 일련의 과정을 의미하는 칭의의 과정에 대해서 서술하였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라고 언급한 대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128쪽에서는 <'칭의는 죄의 사면뿐 아니라 인간 내부의 성화와 갱신'을 의미한다. 이 조항은 계속해서 칭의는 '그 전인(whole being)의 성화를 수반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라는 대목을 인용하여 소개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로마천주교 칭의론에 대한 필립 입슨의 비판은 1) 칭의는 우리 내부의 성화를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하나님의 법정적 선포행위로 인하여 지금 즉시 의로워진 것이다. 2) 칭의는 세례성사 고해성사 등 우리의 밖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것이다 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위 책, 121-136쪽 참조). 이에 대하여 개괄적인 평가를 하자면, 입슨은 성경이 말하는 칭의의 두 방면 중 하나만을 칭의로 본 오류가 있고, 로마 천주교는 두 방면의 칭의를 말하되 칭의에 면죄부, 연옥, 공적보고, 고해성사 등 '믿음 외 요소' 를 가미한 오류가 있습니다.
4. 객관적인 칭의
이것은 롬3:24, 26이 말하는 칭의입니다. 즉 이러한 칭의는 '사람 밖'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간에 이미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근거로 하나님이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고 선포하신 것이라는 점에서 '객관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객관적인 칭의를 근거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릴 수 있고 부활하신 주님을 생명으로 영접하여 거듭날 수 있습니다(롬4:25, 5:10). 우리가 믿음으로 영 단번에 받는 이러한 칭의는 영원한 효능이 있으며 훗날 우리의 상태로 인해 번복되어 죄로 인한 지옥형벌을 받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필립 입슨이 '칭의교리와 복음적 프로테스탄트 입장'이란 소 제목으로 그의 책 93-119쪽에서 소개한 내용에 따른다면, 현재 한국 장로교단을 포함한 프로테스탄트 원래의 칭의론은 바로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전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객관적인 칭의론'은 성경이 말하는 '또 다른 방면의 의'(주관적인 칭의)를 배제한 칭의론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인 하자가 있습니다. 이점은 <객관적인 칭의를 얻었다면 "더 이상 정죄함을 당하지 않을 것" (위 책, 119쪽)임으로> 이들이 <실 생활가운데 죄악과 불의에 빠져 하나님을 거스리는 삶을 살아도 여전히 의인>으로 보아야 하는 교리와 체험 간의 괴리 속에서 극명하게 표출됩니다.
이러한 모순은 한번 의인은 영원한 의인임으로 누가 만일 거듭난 후에도 죄를 자백하면 그 사람의 구원을 의심하는 박옥수 계열 구원파 실행 안에서 대표적으로 발견됩니다. 그들에겐 문맥상 이미 객관적인 칭의를 받은 자들이 생활가운데 지은 죄들을 자백하는 것을 용서받는 조건으로 말하고 있는 요한일서1:9-10 본문이 골치거리 입니다. 그들은 초기에는 이것을 불신자의 경우라고 고집하다가 최근에 믿는 자를 염두에 둔 것임을 인정함으로 한 발 후퇴했습니다. 그럼에도 죄가 전가되어 영 단번에 영원히 의인된 자신들이 또 뭔가 죄를 자백해야 용서를 받는다는 사실 앞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은 <객관적인 칭의에 더하여 믿는 이들의 삶 속에서의 의로움>까지를 요구하는 성경 본문들인 마5:6, 10, 계19:7-8, 롬8:4, 6, 7, 8, 12, 13, 갈3:3, 갈5:16, 25, 6:8, 벧전 5:5, 마16:24, 고후5:21을 실 생활에 적용할 때도 동일하게 발생합니다. 즉 객관적인 칭의 후 삶속에서 내주하는 생명의 영의 법(롬8:2)을 거스려 함부로 행하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고, 세상 법으로도 죄가 되는 불의한 생활을 해도 여전히 자신을 의인이라고 애써 자부함으로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키고 양심의 소리를 묵살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자칫하면 <이미 칭의를 받았으니 어떻게 살든 나중에 천국엔 간다>는 맹신으로 발전될 수 있습니다. 오늘 날 한국교계에 만연된, 성경의 경고적 말씀에 대한 무감각과 불신자에게 조차 손가락질을 받는 도덕적 불감증이 이런 '교리적 모순'에 기인한다면 문제는 심각합니다.
이제 이 단락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주된 관심사인 마 5:20, 7:21이 말하는 천국 들어가는 조건을 이러한 객관적인 칭의가 충족시키는지 여부를 판단해 보고자 합니다.
언뜻보면 <객관적인 칭의> 역시 '믿음'에 의한 것임으로 '율법의 행위'로 인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 5:20 전후문맥은 실제 삶 속에서 이행해야 할 어떤 표준-형제에게 화 내지 않음, 음욕을 품지 않음 등-에 상응하는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객관적인 칭의> 이상을 말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 점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언급하는 마5:6, 또 다른 천국가는 조건인 '아버지의 뜻의 이행'(마7:21)이 역시 객관적인 칭의 그 이상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확증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문맥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주장하는 객관적인 칭의를 얻은 자일지라도 그후에 실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의의 생활을 추구하지 않고(마5:6) < 아버지의 뜻을 행함>(마7:21)도 없다면 천국에 못 들어갈 수도 있음을 경고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고 봄이 옳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엄중한 현실을 성도들이 바르게 인식하고 대비하도록 잘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5. 주관적인 칭의
<객관적인 칭의>가 우리가 믿음으로 인하여 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으로 '위치적으로' 옮겨진 결과로 얻어진 것이라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주관적인 칭의>는 이미 믿음으로 위치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역시 동일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실제 삶 속에서' <아담>(옛사람)을 살지 않고 우리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시는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살아 나타낸 결과를 가리킵니다(고전1:30, 빌1:21, 롬10:4, 고후5:21).
이미 위치적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은 실제 생활 속에서도 사도 바울이 세워 놓은 좋은 본을 따라 순간 순간 자신(옛사람)을 죽음에 넘기우고(고전15: 31, 롬8:13후반부), 그리스도를 살므로(빌1:21, 갈2:20),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빌3:8),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한분 그리스도만을 얻는 방식(빌3:8)으로 이러한 주관적인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더 구체적으로, 1) 날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먹고'(so he that eateth me-이것을 1년에 고작 몇 차례 실행하는 성만찬의식만을 가리킨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요6:57) 2) 생활 속에서 매 순간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며'(the mind set on th spirit)(롬8:6) 3)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않도록(롬8:7)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through the spirit do mortify the deeds of the body)(롬8:13) 등의 신약 서신서들이 요구하는 실행을 통해 얻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실행들은 '믿음의 행위'(the work of fauth)(살전 1:3)로만 실천이 가능한 것입니다.
주관적인 의를 추구하는 이러한 생명의 성숙의 노정은 우리를 맏아들의 형상을 닮은 영적 생명이 성숙한 <하나님의 후사들>(휘오데시아)로 만드시려고 창세 전부터 예정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에 정확히 일치합니다(롬8:29, 엡1:5, 마7:21).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의로 인하여 받는 핍박을 감수하는 좁은 길을 가고자 하는 자는 사도 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결과로 마침 내 <의의 면류관>을 얻고, 넉넉히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딤후4:7-8, 18).
다시 강조하건대, 오직 이러한 주관적인 칭의를 이룬 사람만이 마5:20, 7:21이 말하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의 의를 충족시키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한 것으로 인정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주관적인 칭의와 관련하여 제기된 두 가지 이의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로마 천주교가 '죄의 사면과 인간내부의 성화와 갱신'이라는 두 방면의 칭의를 말함에 있어서 필립 입슨(프로테스탄트들)이 '인간 내부의 성화와 갱신'은 <성화>이지 <칭의>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점입니다. 이 점은 두 방면의 칭의를 말하는 성경본문을 통해 해결될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5장 19절에서는 <세상(불신자)>을 하나님과 화해케 하는 방면(이것이 입슨이 말하는 (객관적인)칭의임)을 말하고 이어서그 바로 뒤 20절에서는 이미 이러한 칭의를 얻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라'(Be reconciled to God)고 요구함으로 추가적인 칭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신자>의 화해와 <성도>의 추가적인 화해가 모두 <성화>가 아닌 <칭의>의 문제임은 물론입니다. <의로 지어진 새사람을 입는 문제>(엡4:23-24)에서도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는 과정' 역시 거듭난 이후의 과정임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롬12:2참조). 그리고 주관적 칭의 방법론에 있어서 행위구원 주장으로 의심되 로마천주교의 입장에 대한 입슨의 우려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를 더 얻고, 실제 삶 속에서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사는> 주관적 칭의의 과정이 성경적이고 또 전적으로 믿음의 영역에서 이뤄진다는 사실로 해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III. 이제 이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은 죄가 없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사람인 그리스도 예수> 한분 뿐입니다(딤전2:5, 히4:15). 그외의 타락한 모든 인류는 그 존재와 삶이 전적으로 죄악되고 불의합니다(롬3:10).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미 타락 이전인 창세 전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장성한 하나님의 아들들(휘오데시아)이 되도록 예정하시는 그분의 뜻>을 세우셨습니다(롬8:28, 엡1:4-5).
우리가 지금 관심하는 <천국가는 조건인 칭의>(마5:20) 내지는 <천국가는 조건인 아버지 뜻을 행함>(마 7:21) 문제는 이러한 아버지 뜻을 이뤄가는 하나님의 경륜을 감안하면서 검토해 나갈 때 비로소 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위 필립 입슨의 책이 보여주듯이 지금까지의 칭의논쟁은 이 점을 간과한 채 <칭의> 그 자체에만 과도하게 집착함으로 혼선과 오해가 가중된 면이 있습니다.
성경 전반을 볼 때, 죄인을 구원하여 영적 생명이 성숙한 하나님의 상속자(휘오데시아)를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은 크게 볼 때 다음 두 단계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지옥의 형벌에서 건지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입니다. 이것을 우린 편의상 객관적인 칭의라고 불러왔습니다. 둘째는 부활 후 생명주는 영이 되신 그리스도가 성도들의 존재 안으로 의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 편의 역사(고전15:45, 요10: 10하, 롬5:10, 요3:6, 고후3:18, 엡3:17, 엡4:15-16)와 이러한 생명을 믿음으로 받고 더 풍성히 받는 성도들의 믿음의 반응 또는 믿음의 행위(your work of faith)(살전1:3)를 통해 이뤄집니다. 이러한 그분의 경륜의 성취는 전적으로 믿음 안에 있는 문제입니다(딤전1:4). 이러한 하나님 편에서의 지속적인 생명공급과 사람 편에서의 지속적인 생명의 받음(영접)의 최종결과는 죄인이었던 우리가 마침 내 하나님의 의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we might be made the rightousness of God in him)(고후5:21). 이것을 우리는 그동안 편의 상 <주관적인 칭의>라고 불러왔습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칭의의 기준으로 기존의 칭의 관련 주장들을 평가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5:20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지칭된 <유대교>적 의는 본질상 하나님의 의를 거스린 자기 의에 대한 추구일 뿐입니다(롬10:3).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이 추구하던 칭의는 지극히 성경적이되, 성경에 기록된 또 다른 방면의 의를 성화의 과정일 뿐이라며 배척한 오류가 있습니다. <로마 천주교>의 칭의론은 칭의의 두 방면을 보았으되 소위 주관적인 의를 성취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사람의 인위적인 노력을 가미하는 등 성경에서 크게 빗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칭의론들 만으로는 마5:20, 7:21이 제시하는 천국 가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그러나 이것이 그러므로 그들 모두가 지옥의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오류입니다). 그리스도의 값없는 대속의 선물로 죄사함 받고 거듭난 성도들은 그후 날마다 그들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신의 존재를 열고, 말씀이신 그분을 먹음으로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얻고 더 풍성히 얻는 생명의 성숙의 길을 감으로써 바울처럼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천 뮈넉넉히 들어가는 확신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골1:27, 3:4, 2:19, 엡1:23, 요10:10하, 딤후4:18). 주님이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분들을 이러한 복으로 축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