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들과 장로들과 봉사자들에게 말한 앞의 메시지들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의 말씀을 줄 수 있다.
1) 우리는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2) 또한 사람들을 얻을 목적으로, 우리는 목양하고 찾으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의 영을 가져야 한다.
3)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기억하고 이를 실현할, 즉 실제적으로 체험할 필요가 있다.
야심을 주의하라
이 메시지에서 나는 여러분과 중대한 사항들을 더 교통하고 싶다. 첫째로, 우리는 여러가지 요인들을 주의해야 한다. 이 요인들은 늑대들과 표호하는 사자들과 길에서 우리를 해할 수 있는 질주하는 차들과 같다.
첫번째 요인은 야심이다. 내가 관련 개요에 적은 내용은 나의 개인적인 체험에 따른 것이다. 나는 여러분만 이러한 소극적인 점들을 갖고 있고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나도 그것들을 체험했다. 누가 야심을 갖고 있지 않은가? 주님의 일에서 야심은 인도자가 되려하는 것이다. 당신이 동역자들 가운데 있다면 인도자가 되고 싶어할지 모른다. 당신이 그들 중에 으뜸이 될 수 없다면 여전히 「부회장」이 되고 싶어 할지 모른다. 심지어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자매들도 그들 가운데 인도자가 되고 싶어 한다. 교회 안에서 당신은 장로, 심지어 인도하는 장로, 즉 장로들의 인도자가 되고 싶어 할지 모른다.
두 번째로, 당신의 야심은 또한 당신의 사역을 위한 한 곳, 심지어 지역이라도 갖고자 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야심을 갖고 있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나는 니 형제님과 함께 있었고 그로부터 배웠다. 나는 결코 그에게서 한 곳, 그의 지역이나 소왕국을 위한 특정 지역을 가지려는 야심을 볼 수 없었다. 여기서의 지역은 소왕국을 가리킨다. 당신은 모든 것이 당신의 통제와 다스림 아래 있고 모든 이들이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하는, 당신의 지역에서 황제가 되고 싶어할지 모른다. 누가 이러하지 않은가?
나는 이러했으나 주님이 나를 다루셨다. 당신의 야심은 또한 당신의 사적인 동역자들로 삼기 위해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이 될 수 있다. 당신은 이러한 목적으로 사람들을 끌리게 하고 매혹시키며 사로잡을 수 있다. 이것은 당신이 주의 회복 안에서의 당신의 일 가운데 당신에게 사로잡히고 끌리며 매혹된, 당신과 아주 가까운 한 무리를 갖고 있음을 뜻한다. 그들은 당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당신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당신과 함께 서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들은 당신의 특정한 동역자들이 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동역자들이지만 특별히 어떤 사람의 동역자들인 것이다. 당신은 주의 회복 안에 그러한 상황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나는 이것을 체험적으로 보았다.
1984년 초에 나는 동역자들과 장로들을 세 번의 긴급한 집회로 불러모았다. 서두에서 나는 우리 가운데 분열의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이것은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상당수의 능력있는 동역자들이 그들의 지역을 자신의 제국으로 갖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특별한 동역자들로 삼기 위해 사람들을 끄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모두 보편적으로 동역자들이지만 어떤 이들은 매혹하는 어떤 이들과 특별한 동역자들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경고한 것이다. 내가 말한 후에 동역자들 중 한 명이 일어나서 이러한 상황이 맞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고백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의 고백은 매우 약했었고 오늘날 그는 주의 회복 안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는 아직도 회복 안에 있다고 주장하고 여전히 지방의 입장을 취한다. 그는 그의 집회가 지방 교회라고 단언하고, 그가 이 형제와 하나라고 선언한다. 그는 나의 사역을 받아들이며 오늘날까지도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Living Stream Ministry)의 도서정기구독자이다.
최근에 그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거의 한 시간 동안 내게 얘기했다. 나는 그에게 그 시점에서 대답하는 것은 주님의 때가 아니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나중에, 주님과 더 고려한 후에, 나는 분명한 말씀을 받았다고 느꼈고 그때가 대답해야할 주님의 때였음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분열입니다. 당신은 주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교회들로부터 당신의 집회를 단절시켰기 때문에 당신의 곳에서 당신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분열입니다. 더욱이 당신은 반역자들을 방문하고 그들과 함께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당신은 모든 교회들이 한 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당신 홀로 다른 교회들로부터 분리되어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분열입니다.』라고 말해야 함을 느꼈다.
고린도에서 어떤 이들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말했다(고린도전서 1:12). 바울은 이것을 인하여 그들을 책망했다. 당신이 심지어 당신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말할지라도 그것은 분열이다. 마치 바울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나뉘었습니까? 왜 당신이 바울에게 속하였다고 말합니까? 나에게 속하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속하였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 속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은 우리 가운데 어떠한 분쟁도 있어서는 안됨을 보여준다. 누구도 게바에게 속하지 않았고 누구도 아볼로에게 속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가장 높은 사도인 바울에게 속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누구도 다른 이들과 떨어진 상태에서는 그리스도에게조차 속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나뉘지 않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우리의 타락한 기질은 언제나 사람을 사로잡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이가 만일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면 그는 사람들을 끌기를 좋아할지 모른다. 그는 그들을 매혹시키고 사로잡는 것을 좋아할 수 있으며 그가 그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면 사로잡힌 자들은 그의 작은 무리의 일행이 된다. 주의 회복 안에서 그러한 무리를 가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당신에게 기회와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렇게 할지 모른다. 당신은 그러한 기회와 조건과 상황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았지만 과연 기회가 온다면 이것을 행할지 모른다. 이것이 주의 회복을 손상시키는 첫 번째 「땅 밑의 두더지」이다. 당신은 이것으로 손상을 입었을지 모른다. 당신 안에는 매우 강한 이 감추인 「두더지」가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것을 첫 번째 문제로 여긴다.
교만을 주의하라
우리는 또한 교만을 주의해야 한다. 교만하다는 것은 자랑하는 것이다. 당신은 공개적으로 자랑하지 않을지 모르나 당신의 영적 역량, 능력, 수완을 은밀하게 자랑할지 모른다. 때때로 사람들은 『내가 어떠한 역량을 갖고 있는지 보라. 당신의 역량이나 능력이 나의 것과 비교될 수 있는가?』라고 말하며 자랑한다. 심지어 역량이 부족한 자도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자랑할지 모른다. 교만하다는 것은 또한 자신을 높이고 다른 이들을 멸시하는 것이다. 내가 다시 묻겠는데, 『누가 자신을 높이지 않으며 다른 이들을 멸시하지 않는가?』 나는 이 공과를 배웠고 이 모든 것들을 체험했으며 그 상황들을 보았다. 그러므로 내 안에 여러분 모두에게 말할 강한 부담이 있으며 이 때가 야심과 교만과 자기 정당화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지 않는 것에 대한 사랑의 말을 해야할 때라고 느낀다.
교만하다는 것은 또한 당신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더 높게 생각하는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는 공통적인 질병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자신을 높게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고 명했다. 주님이 가신지 거의 이 천년이 되었는데 왜 그 몸의 건축에 있어서 성취한 것이 거의 없어 보이는가? 이는 단지 이 모든 「두더지들」 때문이다. 바울은 교만의 문제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새로 회심한 자가 책임을 지도록 위임받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그가 교만으로 눈멀어 사탄이 받은 그 심판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디모데전서 3:6). 나는 이것을 보았다. 어떤 이들로 책임을 지도록 위임하는 것은 그들을 교만으로 망칠 위험이 있다.
자기를 정당화시키는 것과 다른이들의 실패와 허물을 드러내는 것을 주의하라
우리는 또한 자기를 정당화시키는 것과 다른 이들의 실패와 허물을 드러내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다른 이들의 부족함, 실수, 허물을 드러내기 좋아한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항상 자신을 정당화시킴으로 이를 행하는 것에 있어 매우 각별하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을 정죄하는 것을 결코 들을 수 없고 오히려 그들은 항상 다른 이들의 실패와 허물을 드러내면서 자신을 정당화시킨다. 이런 식으로 속임을 당하는 것은 당신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당신의 성공과 장점들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일이나 저 일에서 당신이 어떻게 성공했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당신의 모든 좋은 점들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이것을 기억 속에 간직할 수 있도록 이 메시지를 당신의 생각 속에 넣어주길 원한다. 그러면 당신은 우리의 상황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상황은 이와 똑같다.
내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다른 이들을 목양하지 않고 찾지 않으며 사랑과 용서가 없는 영이 회복 안에 모든 곳에서 퍼지고 있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과 구주의 목양하고 찾는 영을 갖지 않는 것이 우리의 열매 없음에 대한 이유라고 믿는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알지만, 열매가 거의 없다. 주님은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마태복음 12:33)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아무 열매가 없는 나무이다. 우리 가운데 모든 곳에서 열매 없음은 매우 지배적이다.
선하고 부드러운 어느 목사에게 말씀의 은사와 같은 특별한 은사가 없을지 모른다. 그는 다만 사람들을 방문하고 그들이 그의 모임에 올 때 반갑게 맞이할 뿐일지 모르나 통계에 따르면 그에게 매년 10%의 증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10%의 증가조차 없다. 우리가 얼마나 열매가 없는지 보이는가?
여러분 중 상당수가 더 높은 그 진리들을 알아 말씀을 잘 전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진리들은 기독교계에 있는 것보다 훨씬 높다. 그러나 우리에게 열매가 없는 것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하며 용서하는 마음과 아들의 목양하며 찾으시는 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이들을 목양하고 찾기보다는 정죄하고 통제한다. 우리는 사랑과 목양함이 모자란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로 열매를 맺는 것, 곧 사람들을 얻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요소들이다. 나는 우리의 전시간 훈련에 대해 매우 염려스럽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사람들을 얻도록 훈련시키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통제하도록 훈련시키는가? 우리는 학개가 말한 바와 같이(학개 1:5) 우리의 소위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의 방법은 옳지 않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우리는 자주 다른 이들의 실패와 허물을 드러내면서 그들을 비난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좋게 말하고 다른 이들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천연적인 기질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기질은 태어나면서 이러하다. 우리는 다른이들의 허물에 대해 얘기할 어떠한 이유도 없지만 단지 그러기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때 형제들은 모여서 다른 이들의 약한 점과 허물과 실패에 대해 얘기한다. 나는 다른 이들의 허물을 말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떠는 것에 대한 공과를 배웠다. 세상에서는 이것에 대한 법적인 용어가 「명예훼손」이다. 왜 우리가 중상하는 식으로 말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우리는 거의 모두 이것을 행한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내가 그 공과를 배웠기 때문에 여러분은 내가 누구의 허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기가 매우 어렵다. 내가 다른 이들의 결점에 대해 말할 때마다 나는 자신에게 『너는 결점이 없느냐?』고 말하며 책망을 받는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주님께 죄많은 한 여인을 데려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한복음 8:5)라고 말했다.
먼저, 주님은 몸을 굽히셨다. 이것은 그들에게 겸손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는 서서 『뭐라고! 너희가 내게 오느냐? 내가 뭔가를 네게 얘기해주마!』라고 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땅에 뭔가를 쓰려고 몸을 굽히셨다. 내가 성경을 연구한 것에 따라 나는 주님이 쓰신 것이 『누가 죄가 없는가?』이었을 것으로 믿는다. 이는 마치 그분이 『그녀가 죄 많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그녀는 붙잡혔다. 그러나 너희는 죄가 없는가?』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그들이 주님께 뭔가 말할 것을 독촉했기 때문에 그분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하셨다. 그들의 양심은 붙잡힌 바 되었다. 나이든 자들, 노련한 자들로 시작하여 모든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누가 죄가 없는가? 당신이 다른 이들의 결점을 말할 때 당신은 결점을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태어나면서 갖는 우리의 기질을 따라 다른 이들의 허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취미」이다. 당신은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길 좋아하는가? 그렇지 않다. 당신은 그것을 가리길 좋아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지 않는 것을 주의하라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지 않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야 하지만 종종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고를 받아야 한다. 이것을 주의하라!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지 않는 것은 다른 이들의 자아가 아닌 당신 자신을 완전히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 위에 두는 것이다. 십자가를 떠나지 말라. 그곳은 당신의 자아가 있어야 할 적합한 곳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지 않는 것은 또한 항상 자신의 천연적인 사람을 못박지 않는 것이다. 종종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그들의 모든 말은 천연적인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천연적인 사람을 못 박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지 않는 것은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당신의 기질을 죽음에 넘기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민족이나 자신이 어느 나라로부터 왔다는 것을 자부심 가득한 영과 우월감을 갖고 자랑할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나면서 갖게된 자신의 기질을 자랑한다. 때때로 나는 『당신은 내가 빠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말이 내 혀끝에 오르자마자 나는 이것을 삼켜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누가 이와 같지 않은가?
이것이 내가 여러분 모두에게 전해줄 부담이 있는 사랑의 말이다. 야심, 교만, 자기 정당화,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지 않음은 네 가지 「두더지들」이다. 우리가 이 네 가지 문제를 처리한다면 주의 회복은 즉시 부흥을 갖게 될 것이고 한 달 안에 그 결과로 열매를 보게 될 것이다. 단지 이 네 가지 문제들 때문에 수년동안 시련에 시련이 주의 회복에 있었던 것이다. 어떤 동역자들은 한 곳이나 사람을 얻을 의도를 가지고 이 형제가 자기들을 보낸 인상을 주려고 내 이름을 사용하는 등 야심을 품고 있었다.
내가 그들을 보냈는가? 그렇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나는 『그곳은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것이 내가 그들을 보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설혹 그것이 보낸 것일지라도 나는 내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통제하고 굴복시키라고 여러분을 보내지 않았다. 나는 이것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했다. 어떤 이들은 『이 형제님은 그러한 사람이야. 그는 우리를 통제하기 위해 오지 않아도 어떤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를 통제하려는 거야.』라고 생각했었다. 이것이 회복 안에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어떤 이들은 내 이름을 이용한 자를 거절할 뿐 아니라 나를 더욱 더 거절했다. 그들은 『왜 이 형제는 이토록 나쁠까?』라고 했다. 사실은 거기 가서 내 이름을 이용하고 나를 오해하도록 한 자가 내게 어려움을 준 것이다. 그러한 일이 우리 가운데 2-3년 전에 일어났고 그 어려움이 아직도 남아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나는 여러분 모두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이 회복을 사랑하는 것을 안다. 나는 또한 여러분이 주님께로부터 나의 사역을 받는다는 것을 믿지만 커다란 「그러나」가 있다. 여러분이 이 네 가지 두더지들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얼마의 역량이 있을지 모르나 우리가 가진 역량은 우리의 기질과 우리의 교만과 우리가 나면서 갖게된 기질을 십자가 위에 두려고 하지 않음을 인해 무효화되고 근절될 것이다.
주님은 그분의 회복을 축복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축복하고 계신다. 회복의 확산을 보라.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고 말하는 아가서 2장 15절의 상황과 같다. 이것이 나의 염려이며 이것이 내가 이 몇몇 메시지를 말해내고자 한 이유이다. 이 네 가지에 대한 우리의 소홀함과 이 네 가지를 주의하는 것에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오늘날 주님의 회복에 꽃이 피는 것을 망치려는 사탄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적은 간교하다. 우리는 그의 책략에 대해 무지하지 말아야 한다.
진리의 고봉과 함께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필요
주님은 우리에게 진리의 고봉을 주시고 있고 우리는 그것에 감사하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을 배우고 있으나 감추인 쪽에 이 네 가지 소극적인 요인들이 아직도 우리 가운데 남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신성한 진리의 고봉들로부터 받는 어떠한 유익도 무효화시킬 것이다. 이것이 나의 염려이다.
의사들은 언제나 감추인 세균들에 대해 염려한다. 나의 부담은 이 세균들을 죽이는 것이다. 나는 주께서 그분의 회복을 긍휼히 여기시어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깊은 중점들을 열어 보이시었다는 깊은 깨달음이 있다. 최근에 나는 요한복음 14장에 있는 네 가지 「안에」를 설명하는 말을 했다. 17절에 의하면 실제의 영은 우리와 함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20절은 계속하여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고 말한다. 17절의 「안에」는 20절의 세 「안에」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셋이시다. 아버지는 근원이고 아들은 과정이고 그 영은 흐름이다.
이것은 수원(水源)과 샘과 흐름이 있는 강물에 비유될 수 있다. 이것은 세 종류의 물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흐름이 물의 완결이라는 것이다. 흐르는 강으로서의 그 영은 생수로서의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라고 말하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의해 강하게 입증될 수 있다. 실상은 이 축복 안에 세 가지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의 요소와 사랑의 요소가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 항목은 무엇인가? 그것은 은혜와 사랑의 요소의 운반, 교통이다. 모든 화물들은 운반될 필요가 있다. 그 영의 교통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의 완결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진리의 고봉들에 대한 예증이다.
나는 주님께로부터 로마서에 대한 전진된 결정 연구를 써야할 부담을 받았다. 나는 우리가 받은 넘치는 은혜에 의해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것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가운데 이 네 가지 「두더지들」이 처리받지 않는다면 우리 가운데 신성한 계시의 더 깊은 진리들과 더 높은 봉우리들이 해방될수록 우리가 더욱 교만해질 것을 염려한다. 이 나라 전체에 걸쳐 모든 교회들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데 바로 고봉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두더지들이 여기 있기 때문에 나는 뭔가를 해야 한다고 느낀다.
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단계, 포함의 단계, 강화의 단계로 된 세 단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에 대한 다가오는 국제 동역자 장로 집회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반복하여 말하고 더 강하게 강조할 것이다. 강화시키는 것은 당신에게 그 영을 더 많이 주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을 칠 배로 본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과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것은 칠 배로 강화되어야 한다. 당신은 십자가의 방면 없이 그 영에 대한 면만을 가르칠 수 없다. 십자가가 없다면 그 영은 없는 것이다.
니 형제님이 쓰신 찬송가(한국복음서원 찬송가 227장)는 우리에게 먼저 십자가가 필요하고 그후에 그 영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5절은 말하기를, 『황금빛 농촌의 익은 수확물을 볼 때 많은 씨앗들 이 땅에 떨어져서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네(원문 참조).』 풍성한 추수는 죽기 위해 땅에 떨어진 씨앗들로 인한 것이다. 우리의 천연적인 인성의 껍질은 깨어져야 한다. 첫째가 골고다요 십자가이고 둘째가 오순절이요 그 영이다(1절). 요단 강, 즉 십자가를 건너지 않고 어찌 좋은 땅 안에 들어 가려는가(4절)? 한 면으로 나는 육신 안에서의, 생명 주는 영으로서의, 칠 배로 강화된 생명 주는 영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역에 대한 진리의 고봉들을 사역할 부담을 느낀다. 또 한면으로 주님은 나에게 십자가를 사역하도록 부담을 주셨다.
당신은 당신의 천연적인 사람, 당신의 자아를 고봉의 진리들로 먹일 수 있다. 그것들은 당신에게 더 많은 역량을 줌으로 더 많은 야심을 갖게 할 수 있으며 이제 높은 봉우리들을 가져다 줌으로 당신을 더욱 교만하게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으나 오늘 당신은 그것들을 듣고 있다. 당신이 그것들을 가르치고 말하러 나갈 때 모든 이들은 당신을 환영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을 적극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소극적인 의미에서 먹일 것이다. 이러한 먹임은 소극적인 것이다.
좋은 의사는 환자를 먹일 때 먼저 세균들을 죽여 처리한다. 그들이 세균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먹는 것은 세균들로 가득할 것이다. 북쪽 중국인들은 종종 고기 만두를 마늘, 식초와 함께 먹는다. 마늘과 식초는 둘 다 세균들을 죽인다. 더 나아가 식초는 소화를 위해서도 좋다. 세균들은 죽고 사람들은 소화가 잘된다. 고기 만두를 먹는 자들은 살균하는 것들의 보호를 받아 아프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마늘과 식초는 고기 만두를 맛있게 할뿐 아니라 안전하게 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고봉의 진리들을 「마늘」 없이 먹일 수 없다. 비록 이것이 달콤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여러분에게 어느 정도의 마늘과 식초를 사역해야 한다. 사람들은 꿀을 선호할지 모르나 꿀은 성경에서 금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사람들은 소제에 꿀을 넣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세균을 죽이는 소금을 넣었다(레 2:11, 13). 나는 너무나 많은 고봉의 진리들을 말함으로 여러분에게 꿀을 먹였을까 염려스럽다. 이것은 필경 여러분을 죽일 것이다. 나는 소금을 좀 넣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소금에 절여질 필요가 있다.
나는 주의 회복을 염려한다. 특히 나의 노정의 마지막 시점에서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에 있지 않다. 나는 내 노정의 마지막을 보배롭게 여겨야 한다. 나는 최선을 다하여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와 복합적인, 만유를 포함한, 완결된 그 영을 사역하고 싶지만 십자가 없이는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여러분에게 「고기 만두」를 사역할 것이지만 그 안에 강한 식초와 함께 강한 마늘을 넣어야 하고 이것이 많을수록 좋고 많을수록 안전하다. 나는 모든 문제들을 드러낼 만한 능력이 없지만 주님의 다루심 아래 있다. 주님은 나에게 가시를 주셨다. 나는 이것을 인해 그분께 감사한다. 나는 그분께 『주님, 당신의 다루심을 사랑합니다. 이 가시를 사랑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주님의 회복을 관심하고 우리 자신의 일을 관심하지 않음
우리의 전시간 훈련은 아나하임의 훈련생들을 아나하임이나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일하도록 할 목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을 그들이 왔던 그 곳에 다시 보내야 한다. 최근에 나는 어떤 이들이 사람들을 얻는 데 많이 수고하고 큰 대가를 들여 네 학기 동안의 훈련에 그들을 보내지만 그 훈련생들이 결국 돌아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아나하임에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훈련생들이 네 학기를 마치고 아나하임에 남아 있도록 설득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야심이 많은 것이고 주님의 회복의 일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의 일을 위해 사람들을 얻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하지 않는다. 나는 주님의 회복을 위한다. 내가 세운 훈련은 모든 국가에서 온 사람들을 훈련시킬 의도가 있다. 나는 모든 외국인들이 훈련을 받은 후에는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야 할 것을 강하게 말한 바 있다. 뉴질랜드에서 온 많은 훈련생들이 남아 있기를 원했으나 나는 뉴질랜드에 돌아가도록 그들을 격려했다. 어떤 이들은 남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캠퍼스들에 더 많은 사람들을 두기 원하지만 다른 나라의 캠퍼스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여기에 뭔가 잘못된 것이 감취어 있는데 어떤 이들은 그것에 대해 불평한 바 있다. 내게 훈련생들을 여기에 남겨둘 의도가 있다고 생각지 말라. 그러한 관념을 내가 가지고 있다면 나는 책망받아야 한다. 이것은 가장 좋은 이들을 아나하임에 오도록 할 야심이 내게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주의하라. 당신의 캠퍼스를 위해 사람들을 남겨두지 말라. 대적은 일을 은밀하게 함으로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깨어있고 기도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교활한 자는 우리를 속이기 위해 들어왔다. 어떤 이들은 그들 자신의 도시에 좋은 이들을 보유하고 싶어하고 훈련이 너무 많은 좋은 이들을 다른 도시들에 안배한다고 불평한다. 당신은 『우리는 사람들을 더 얻기 위해 훈련생들을 보유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는 모든 곳이 똑같다. 그분이 한곳에서 사람들을 얻든지 다른 곳에서든지 똑같다. 당신은 왜 당신이 있는 곳에 사람들을 두고 싶어하는가? 그것은 단지 당신 자신을 위해서이다. 이것이 야심이다. 그것은 감추인 어떤 것이다. 내가 당신이 있는 곳의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 마음은 회복을 위해 있고 「회복」이라 할 때 나는 온 땅 위에 있는 주님의 움직이심을 말한다. 나는 교회들을 위하고 다만 한 교회만을 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이러한 것들을 볼 때 내 마음은 아프다.
당신은 극도로 자아를 책망하며 거절하는 것을 배우고 단순히 주님의 권익, 자신의 일이 아닌 그분의 회복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면 주님은 당신을 존귀케 할 것이다. 당신은 밖에 나가 광고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 돈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분께 길을 내어드린다면 그분은 공급하실 것이다.
1991년의 걸프 전쟁 후 우리는 러시아에서의 그분의 움직이심을 위해 주께 길을 내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음으로 바로 주님은 그분의 축복을 우리 위에 두셨다. 러시아에 간 성도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많은 이들이 단순히 가고 싶어했다. 이것은 주님의 행하심이었다. 나의 행함이 아니었다. 나는 줄 것을, 갈 것을, 기도할 것을 위해 밖에 나가 아무도 설득하지 않았지만 많은 기도들이 이 움직임을 위해 쏟아 부어졌다. 이제 우리는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러시아에 있는 몇 천 개의 주요 도시들에, 어떤 곳은 백 만 명이 넘는데, 우리의 출판물들이 도달했다. 나는 러시아 사람들의 반응을 좀 읽어보았다. 그들은 니 형제와 나의 책들을 더 구한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임을 깨달았고 다른 이들이 쓴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칠십 명의 미국인들과 육십 명의 중국인들을 보냈고 약 칠십 명의 러시아인들이 그 지방에서 세워졌고 전 시간으로 섬기도록 훈련을 받았다. 이것은 주님의 움직이심의 결과요 내 일의 결과가 아니다. 나는 이만큼 할 수 없다. 주님이 하셨다.
내가 받은 편지 중 응답하지 않은 많은 편지들이 있는데 이는 당신이 당신의 지역만을 관심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의 일을 위한 것이고 나는 그것을 위하지 않는다. 주님은 온 세계와 지구 전체에 걸쳐 널리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지역의 일을 위하지 않고 주의 회복의 일을 위하는 것을 보고 싶다.
위트니스 리
[사랑의 말씀(A Word of Love), "네 가지 소극적인 요인들을 주의하라",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