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위해 바울이 고난받고 은혜를 누림
이기는자들
timothy , 2005-08-24 , 조회수 (3902) , 추천 (0) , 스크랩 (0)

성경 : 빌립보서 1:7-8, 12-14, 16-17, 28-30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바울이 복음을 위해 고난받은 것과 은혜를 누린 것을 보기로 한다. 복음을 위해 고난받음과 은혜를 누리는 것을 천연적으로 이해하기는 쉽다. 그러나 영적인 것들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천연적이거나 전통적인 이해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빌립보서에 따르면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것과 은혜를 누리는 것은 둘 다 깊은 것이다.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이 땅에서 오직 하나님의 경륜의 유익만을 위하는 것이다.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완성을 주의하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경륜을 포함하며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것은 실지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는 데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글들은 그가 복음을 위해 고난받았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가 고난을 받으면서 전한 복음은 낮거나 표면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복음을 위해 고난받은 것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경륜의 수행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단지 사람들에게 천당가기 위해 예수를 구주로 믿어야 한다고 전파하지 않았다. 그와같이 제한된 복음전파는 고난을 동반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바울은 종교와 율법과 문화와 의식과 관습과 습관 등 각종 주의(主義)를 거절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경륜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깨뜨렸다. 그의 복음은 종교와 정치와 문화를 깨뜨렸다. 어떤 의미에서 바울의 복음은 우리들까지도 깨뜨린다. 이러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바울은 문제덩어리로 여겨졌고 염병을 전염하는 자로 여겨졌다(행 24:5).

 

그의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경륜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깨뜨렸지만 바울은 그 복음을 평안의 복음(엡 2:17, 6:15)이라고 말했다. 에베소서 2장 1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 후에 이방인에게 와서 평안의 복음을 전하셨음을 지적했다. 평안이란 오직 복음에 위배되는 것이 멸절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 또 우리 서로간에 평안이 있으려면 종교와 정치와 문화와 형식과 율법이 끝나야 한다. 바울은 많은 것들을 깨뜨리는 것을 포함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의 복음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결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기쁘게 하지 않았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그의 복음은 종교나 정치나 문화나 각종 주의(主義)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바울처럼 복음을 전한다면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사탕발림식으로 복음을 전한다면 우리는 우주적으로 환영받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고난받는 자들이 되지 못할 것이다.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천연적인 관념에 따라 이해하지 말라. 우리가 지적한 바와같이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유익을 위해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해 주의 회복을 위해 남아 있는 한, 우리의 운명은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것이다.

 

주의 회복 안에서 전하는 복음은 오늘날의 종교의 반대를 당한다. 요한 계시록 생명의 수업에서, 우리는 계시록 2장과 3장에 따라, 유대교는 사탄에 속한 것이요, 천주교는 마귀적이요, 개신교는 그리스도가 없는 것임을 지적했다. 그러한 말이 어떻게 종교 안에 있는 그들을 기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단지 계시록에서 주 예수님이 사용하신 용어들에 동의한 것일 뿐이다. 주님은 「사탄의 회」(계 2:9)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분이다. 그러한 표현은 주님의 눈으로 볼 때 유대교가 사탄의 조직이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더우기 주님께서는 천주교를 의미하는 두아디라에 관해서는 『사탄의 깊은 것들』이라고 말씀하셨다(계 2:24). 이러한 표현은 깊은 것, 즉 사탄에 속한 비밀을 언급한 것이다. 그와 같은 것들은 확실히 마귀에 속한 것이다. 라오디게아에 관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문 밖에 서 계심을 볼 수 있다(계 3:20). 사실상, 우리가 개신교에 그리스도가 없다고 말한 이유는 그리스도가 문 밖에 서 계시기 때문이다.

 

유사한 관점이 토우저(A.W. Tozer 1897.4.21-1963.5.12)의 「교회 안에서 기울어져가는 그리스도의 권위」라는 제목의 글에서 표현되었다. 토우저의 글에서도 개신교에는 그리스도가 없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이와같이 복음을 전한다면 공격당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복음 전파에 있어서 우리의 목적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요 그들을 공격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다만 하나님의 진리를 말해 내는 것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많은 것들을 깨뜨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받을 것이다.

 

복음의 고난은 언제나 은혜의 누림을 동반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고난받는다면 당신은 누림을 가질 것이다. 나는 우리가 당하는 많은 반대 가운데서도 참으로 주님의 은혜를 누림을 간증할 수 있다.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고난받는 것은 은혜의 공급을 가져온다. 은혜를 이렇게 누리는 것은 복음을 위한 고난과 연결되어 있다.

 

은혜를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체험을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은혜의 누림을 알고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확신하거니와, 바울과 경쟁적으로 복음을 전한 유대교적 신자들은 은혜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전파는 그들의 누림을 위한 은혜이신 그리스도를 가져올 수 없었다.

 

또한 우리는 은혜란 바로 우리의 누림이 되기 위해 과정을 거친 바로 그 삼일 하나님이심을 지적했다. 어떤 분들은 은혜를 우리의 누림을 위해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이라 말하는 것이 참인지 아닌지를 의아해하며 은혜에 관한 이러한 이해에 대해 질문할지 모른다.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의 바울의 말을 생각해 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누림을 위한 삼일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란 우리의 누림이신, 과정을 거치신,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그러한 그리스도를 더욱 더 누리게 된다.

 

만일 내가 요한 계시록 2장과 3장에 있는 유대교와 천주교와 개신교에 대한 주님의 그러한 말씀을 말하지 않았다면, 의심할 바 없이 나는 복음 전파를 통하여 많은 친구들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유일한 친구인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는 결국 그분을 슬프게 했을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기쁨을 사람의 기쁨과 바꾸기를 원치 않는다. 빌립보서 3장의 바울과같이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해(害)로 여긴다. 나는 또한 기꺼이 은혜의 누림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害)로 여김으로써 고난받을 것이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사람을 기쁘게 하는 위임을 받지 않았다.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한 타협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경륜에 반대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서 멸절되어야 한다. 바울같이,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빌립보서에 따르면, 바울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여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특별히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했기 때문에 고난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복음이 하나님의 경륜과 관련되어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이 땅에서의 그분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았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륜의 이러한 복음을 곡해하고 왜곡시켜 전파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유대교나 헬라 철학이 설 수 없음을 선포하기 위해 일어났다. 바울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았다(1:16).

 

더우기 바울은 두 가지 비밀, 즉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를 전파함으로써 복음을 확정했다. 다른 이들도 그리스도를 전파했지만 그들은 이 비밀들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 가운데 있는 상황과 같다. 많은 선교 사업과 복음 전파가 있으나 많은 복음 전파자들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합당하게 전파하지 않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를 위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더 적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회피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복음을 확정함은 많지 않다.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변명함에 대한 부담을 주셨을 뿐 아니라 복음을 확정하는 데 대한 부담을 주셨다. 이것은 우리가 이 두 가지 비밀을 수행해 나가는 것을 주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반대를 당한다.

 

만일 당신이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함 없이 피상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한다면 따뜻한 환영을 받을 것이다. 나의 사역 초기에, 나이 많은 어떤 목사님은, 내가 그들의 방법대로 복음을 전하면 마을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나를 환영하며 나를 기뻐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내가 전한 방법을 고집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상할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그는 나에게 선한 마음으로 충고를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이 문제에 있어서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다고 말했다.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복음을 위한 고난의 내 몫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고난과 함께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부요한 누림을 가졌다. 그분은 실로 나에게 누림을 위한 은혜이셨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교회생활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누림의 가장 적은 부분도 알지 못했음을 간증할 수 있다. 당신은 교파에 있었을 때 그리스도에 대한 풍성한 누림을 가졌었는가? 교회생활을 떠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합당한 누림을 가질 곳이 없다.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교회 안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보다 더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는 곳을 다니며 찾아 보라. 1948년에 교회생활에 불평이 가득찬 어떤 형제에게 나는 더 나은 곳을 한번 찾아 보고 나도 그와 함께 갈 수 있도록 나에게 그런 곳을 가르쳐 달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에서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더 많은 곳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결코 하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는 교회 생활 안에서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으나 우리의 누림이 되기 위해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은혜로 누리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전파로 말미암아 깨뜨려진 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다.


Ⅰ. 복음을 위한 바울의 고난

 

A. 감금되어

 

바울은 빌립보서를 쓸 때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았다. 1장 7절, 13절, 14절, 17절에서 그는 그의 매임, 즉 그가 옥중에 있음을 말했다. 이것은 빌립보서가 옥중에서 쓰여진 것임을 가리킨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었지만, 그의 감옥은 잔칫집이 되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거기에서 주님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7절에서 바울이 은혜에 참예하고 있다고 말한 것은 이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매여 있었으나 은혜를 누리고 있었다. 이 구절은 바울에게 있어서 감옥이 단지 고난의 집이 아닌 잔칫집이었음을 분명하고도 강하게 가리킨다.


B. 복음의 변명과 확정에 기인함

 

바울이 투옥된 것은 특별히 복음의 변명과 확정에 기인한다(1:7).


1. 곡해하고 왜곡시키는 이단들로부터 소극적인 면으로 복음을 변명함

 

복음의 변명함은 갈라디아서에서 다뤄진 유대교나 골로새서에서 다뤄진 그노시스교와같이 벗어나게 하고 왜곡시키는 이단들에 소극적인 면으로 관련된다. 유대교는 복음을 곡해하고 있었고, 그노시스교와 헬라 철학은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바울은 모든 이단적인 곡해와 왜곡에 맞서 복음을 변명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와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라.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에 대한 이상을 받았지만 안디옥에서 이방 신자들과 함께 먹다가 물러났다. 이 문제에 있어서 베드로는 복음의 진리를 위해 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진리를 왜곡시켰다. 그러므로 바울은 베드로를 면전에서 꾸짖은 것이다.

 

곡해와 왜곡에 맞서 복음을 변명함에 있어서 바울은 유일한 존재였다. 신약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은 복음을 곡해하고 왜곡시키는 것에 강하게 맞서 서 있던 사람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많은 고난을 받게 된 이유였다. 그러나 그가 누린 은혜는 이러한 고난들을 능가했다.


2.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비밀들의 모든 계시로 적극적인 면으로 복음을 확정함


복음을 확정함은 적극적인 면으로, 바울의 서신들에서 계시된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비밀들의 모든 계시에 관련된다. 바울의 서신에는 두 큰 비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가 계시되었다. 다른 어떤 사도들은 이러한 비밀들을 바울이 쓴 것과같이 합당하게 계시하지는 않았다. 그의 가르침과 전파는 분명 복음의 확정과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에 대해 절대적이었던 바울과는 대조적으로 오늘날 많은 복음 전파자들이 이러한 면에 있어서 희미하다. 그들은 마치 등뼈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중 어떤 전파자들은 하나님의 경륜의 주요한 요점들을 취급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한 사탕발림의 메시지만을 전파한다. 그러나 주의 회복에서 우리는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복음을 곡해하고 왜곡시키는 가르침으로부터 복음을 변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복음의 목표를 지적해 냄으로써 복음을 확정해야 한다.


C.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1장 12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헬라어로 「진보(advancement)」라는 말은 군대가 행군을 하기 전에 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개척자들에 의한 진보를 뜻한다. 바울의 고난은 복음을 위한 그러한 진보를 가져왔다. 바울은 교회가 하나님의 군대로서 행군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헤치고 나아간 개척자였다. 그는 그의 고난이 복음의 진보를 위한 길, 심지어 고속도로를 예비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와 같은 고난이 없이는 이러한 진보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조차도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은 바울에 의해 닦여진 길로 행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닦아 놓은 길을 막기 위해 이 고속도로 위에 역대로 많은 부스러기들이 떨어뜨려져 왔다.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고속도로를 닦는 것이 아니라 바울에 의해 닦여진 이 길을 깨끗케 해야 한다. 이것조차도 반목의 원인이 되고 있다. 오늘날의 종교인들 중 어떤 이들은 우리가 이러한 부스러기와 장애물을 깨끗이 치우는 것까지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진보할 수 있도록 길을 깨끗케 할 위임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다. 우리는 청년들이 주님 앞에 신실하여 깨끗한 고속도로 위를 행진하여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여러 해 동안 우리는 길을 깨끗케 하기 위해 도와왔고, 주의 회복 안의 젊은 세대들이 계속 행진해 나아가리라 믿고 있다. 우리는 이르든지 늦든지, 주님의 백성들이 그들을 위해 깨끗케 된 길 위로 여행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현재 이 길을 택하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어떤 이들은 우리의 재료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사람의 영과 지방 교회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D.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도록 형제들을 격려함

 

1장 14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말했다. 『형제들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바울의 갇힘은 형제들을 실망시킨 것이 아니라 형제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 없이 전파하게 하는 격려가 되었다. 나는 오늘날 그 공격이 우리를 실망시키는 대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격려하기를 기대한다. 모든 성도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기 바란다.


E.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도록 형제들에게 힘을 줌

 

복음을 위한 바울의 고난은 또한 형제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는 힘을 주었다(1:28-30). 1장 28절에서 바울은 어떠한 일에서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그는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proof)이요 우리에게는 구원의 빙거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멸망이란 반대자들의 가진 것과 하는 모든 것의 멸망을 의미하는 반면에, 구원이란 우리가 가진 것과 하는 모든 것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바울의 강한 본(本)은 이땅에서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함에 있어서 기꺼이 고난받도록 형제들에게 힘을 주었다.

 

1장 29절에서 바울은 말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분 안에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헬라어로 번역된 「안에(in)」는 「안으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이 말씀을 사용한 것은 믿는 자가 그분 안으로의 믿음을 통해 갖는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연합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둘이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도록 우리의 존재를 그분 안에 넣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을 통해 그분과 하나 된 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은 그분을 위해 그분과 함께 고난받고, 그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다(3:10). 목적은 그분의 고난 안에서 그분을 체험하고 누리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그분을 거절하고 반대하는 상황에서 그분을 살고 그분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1장 30절에서 바울은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분의 신약 경륜(딤전 1:14-16)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세워진 본(本)이었다. 신약의 신자들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고난 안에서 행한 대로 생활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며 확대시켜야 한다. 그 목적은 그들이 그분과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기 위함이다.


Ⅱ. 이 은혜에 대한 바울의 누림

 

A. 은혜에 참여함

 

1장 7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은혜에 참여한 자들이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은혜로 나누고 누리는 자들이다. 사도는 복음의 변명과 확정 안에 있는 사람이었고,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은 그와 함께 이 은혜 안에 참여한 자들이었다. 은혜로 말미암아 바울은 복음을 위한 모든 고난을 견뎠다.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바울과 함께 이 은혜의 누림에 참여한 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의 고난 안에서와 은혜의 누림 안에서 바울과 하나였던 것이다.


B.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을 체험함

 

1장 8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속 부분들 안에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회복역 참조). 이 구절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을 체험했음을 지적한다. 헬라어로 표현된 「속부분들(inward parts)」이란 장(腸)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면적인 사랑과 인애와 긍휼과 동정을 의미한다. 바울은 성도들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부드러운 속부분들, 심장에서까지 그리스도와 하나였다.

 

7절과 8절은 연결된 구절로서 분리될 수 없다. 8절의 시작이 「왜냐하면(for)」이라는 접속사로 시작됨을 주의하라. 이것은 은혜가 그리스도의 속부분들과 관련됨을 지적한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속부분들 안에서 사랑했기 때문에 은혜에 참여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부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만 누림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그분의 속부분들 안에 거하는 것이며 그분을 은혜로 누리는 것이다.

 

그 외에도 바울은 이 장에서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사는 것을 말하고 있다. 체험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부분들 안에 거하는 것을 요구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되려면 그분의 속부분들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다정한 심장과 섬세한 느낌들 안에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거한다면, 그리스도를 은혜로 누릴 것이고 그분을 매우 실제적으로 체험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은혜로 누림으로써 우리는 오늘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를 수행하는 복음을 위한 고난 안에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위트니스 리
[빌립보서 라이프 스타디, "빌립보서 3",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