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나 교회
이기는자들
timothy , 2005-08-24 , 조회수 (4411) , 추천 (0) , 스크랩 (0)

성경 요한계시록 2장 8절-11절

 

우리는 이제 계속 두번째 교회, 곧 서머나 교회를 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사 우리가 이 몇 곳을 잘 보고 소홀히 넘기지 않기를 원한다.

 

교회 역사 가운데서 사도 시대와 사도 시대 후의 교회가 연결될 때 큰 핍박이 있었다. 고난을 받는 것은 교회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교회의 이름은 「서머나」이다. 「서머나」는 「몰약」이라는 글자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고난」의 뜻을 갖고 있으며 환난받는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다.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8下절). 이 서신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주 예수님의 이름이 특별함에 따라 이기는 자의 상도 특별하다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말할 때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하셨다(8절). 또 주님은 이기는 자들에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11절)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생명이 사망을 이기는 것을 증명한다.

 

많은 사람들이 삶만을 볼 뿐, 영원한 삶과 「다시 삶」을 보지 못함은 얼마나 큰 문제인가? 오순절 때에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고 했다.

 

사망이 매어 놓을 수 없었다. 바꿔 말하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들어가면 나올 수 없으나 주 예수님은 사망이 묶어 놓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망이 그를 묶을 힘이 없음은 그가 곧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의 생명은 죽음을 견뎌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부활의 원칙은 성경 가운데서 가장 보배로운 「변화」인 것이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은 그 생명이 죽음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음부의 문이 교회를 향해 열려 있지만 그 음부의 문이 교회를 이기지 못하고 교회를 그 안에 가두어 놓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질은 부활이다.

 

어느 때든지 교회가 고난을 이기는 힘을 잃을 때 교회는 아무 쓸모없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오면 죽음을 만난 듯 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고난을 받을 때 그가 죽음을 견딜 수 있음이 증명된다. 당신의 생각으로는 OO형제가 그러한 일을 당하면 넘어지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그 일을 거쳐 다시 나온다. 죽음을 거쳐 능히 존재하는 이것이 곧 부활이다.

 

많은 경우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도 이와 같다. 때로 시련이 오고 시험이 올 때, 기도도 할 수 없고 성경도 볼 수 없고 형제들도 다 말하기를 거의 넘어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얼마 안가서 다시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이 당신 속에 있다면 얼마 안가서 다시 그 환경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거치고 끝나버리는 것은 부활이 아니다. 교회의 한 가지 기본 원칙은 죽음을 거쳐도 죽음에 매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머나 교회에는 특별히 이 진리가 나타나 있다. 당신이 만일 폭스(Fox)가 쓴 순교사를 보았다면 교회가 어떠한 환난과 고난을 받았는가를 알 것이다.

 

당시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Polycarp)은 대적자들에게 붙잡혀갔다. 그는 이미 팔십육 세였으므로 그들이 차마 죽이지 못하고 특별히 대우하여 한 마디-『나는 나사렛 예수를 모른다』-만 하면 놓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대답했다. 『나는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주님을 믿고 살아온 이 86년 동안 그는 한 번도 나를 외면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내 몸을 위해 그를 부인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그를 타오르는 불 속에 던졌다. 그의 하반신이 이미 다 타들어갈 때에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 말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저들이 나를 태우는 이 기회에 내 생명을 다해 당신을 간증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또 한 자매는 그들이 그 자매에게 다이아나[Diana: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 성(城)의 우상 아데미의 또 하나의 이름]를 향해 한 번만 절하면 석방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 자매는 어떻게 말했던가? 그녀는 말했다. 『너희들이 내게 그리스도를 택하든지, 다이아나를 택하든지 하라는 것이냐? 처음에 나는 그리스도를 택했다. 지금 너희들이 다시 택하라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택한다.』 결국 그 자매도 피살되었다.

 

또 그 때 두 자매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많은 자매들을 붙잡아 갔는데 우리는 왜 여기 남겨두느냐?』고 했다. 그 후 두 자매도 잡혀가 감옥에 들어갔다. 그 자매들은 많은 사람이 잡혀와 야수에게 먹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피로 간증을 하는데 왜 우리는 입으로만 간증하게 하느냐?』

 

그 두 자매 중 한 자매는 이미 결혼했었고 또 한 자매는 약혼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모, 남편, 약혼자가 다 와서 그들을 권면했다. 심지어 그 자매의 아이들까지 달려와 주님을 부인하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그 자매들은 말했다. 『너희들 생각해 보아라. 그 무엇을 그리스도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 결국 그 둘도 끌려가서 사자에게 먹혔다. 그 두 사람은 사자에게 찢겨 먹히기까지 그 길을 가면서 찬송을 불렀다.

 

서머나 교회가 받은 핍박은 그 얼마나 처참한 것이었던가! 그러나 그 어떤 사태에서도 생명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핍박은 그 교회가 어떠한 교회인가를 나타낼 뿐이다. 그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시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9上절). 당신은 이 땅에서 가진 것이 없지만 주님은 당신이 부요한 자임을 아신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10上절). 서머나 교회 전체가 다 핍박을 받았으나 죽었다가 다시 산 생명은 능히 그 모든 것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서머나 교회가 능히 큰 핍박을 견뎌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활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직 부활만이 당신을 능히 무덤 속에서 나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9中절).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주의해야 할 것은 유대인의 문제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 환난과 궁핍은 쉽게 이길 수 있지만 안으로부터 오는 것은 해결하기 어렵다고 하셨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대인-앞에서 「백성」을 말할 때 세상의 백성이 아닌 교회의 평신도를 가리킨 것과 같이-은 세상의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오직 교회의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님은 여기에서 그들이 유대인의 해(害)를 입었다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그들의 고난 가운데 가장 큰 고난이었다.

 

이 일곱 서신들에는 한 무리의 반대적인 노선이 있다. 그 하나는 니골라당으로서 두 번 제기 되었는데 한 번은 에베소 교회에서, 또 한 번은 버가모 교회에서였다. 유대인도 두 번 제기되었으니 한 번은 서머나 교회에서, 또 한 번은 빌라델비아 교회에서였다. 버가모 교회에서는 발람의 교훈을 제기했다.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이세벨에 대해 언급했다. 이것들이 다 반대적인 위치에 서 있는 노선들이다.

 

당신은 『여기에서 유대인이란 무슨 뜻이냐?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냐? 왜 그들을 비방하느냐?』고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유대교이며 무엇이 교회인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유대교와 교회 사이에는 여러 가지 기본적인 분별이 있다. 여기에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 첫째는 성전이요, 둘째는 율법이요, 셋째는 제사장이요, 넷째는 미리 하신 약속이다.

 

유대인은 세상에서 돌과 금으로 휘황찬란한 성전을 지어 그들의 예배 장소로 삼았다. 그들에게는 십계명과 많은 규례가 있어 그들의 행위의 표준이 되었다. 그들의 제사장의 직분은 일반 사람들보다 특별한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영적인 일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땅의 축복이 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곧 유대교는 하나의 땅에 속한 종교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물질적인 성전과 의문과 교리가 있고, 중간 계급인 제사장이 있으며, 그들은 땅에 속한 것을 누리고 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성전을 건축했다. 만일 내가 유대인이라면 하나님께 봉사하고자 할 때 반드시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봉사해야 한다. 만일 내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제사가 필요하게 되면 반드시 성전에 가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그 은혜에 감사를 드리려 할 때에도 역시 성전에 가서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언제나 이 길을 가야 한다. 성전에 가야만 나는 비로소 하나님께 경배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배하는 곳이다. 유대인은 예배하는 사람이요, 성전은 그들이 예배하는 곳이다. 예배하는 사람과 예배하는 곳은 다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렇지 않다. 교회란 물질적인 장소나 성전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곧 성전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장 21절과 22절을 보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당신은 보지 않았는가? 교회의 특징은 우리 자신이 곧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인 것이다. 개인으로 말하면 우리 각 사람이 다 성전이요, 단체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고 연결하여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어가는 것이다. 교회란 예배 보는 건물이 아니요 예배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예배 장소를 메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유대교의 성전은 물질적인 성전이요, 교회의 성전은 영적인 성전이다. 유대교의 성전을 모두 계산해 보면 그 액수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얼마큼씩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성전은 어떠한가? 거기에는 절름발이도 있고, 소경도 있고, 궁핍한 자도 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이다.

 

오늘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만일 당신들에게 장엄하고 찬란한 성전이 없으면 최소한 예배당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가는 곳에 예배당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사람 자신을 거처로 삼으실 뿐 건물을 거처로 삼지 않으신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거처로 하신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이 건물을 거처로 하셨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려면 반드시 경배하는 곳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심지어 예배당을 교회라고 칭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유대교요 교회가 아니다!

 

교회라는 글자는 헬라어로 「Ecclesia」, 곧 부르심을 받아 나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 온 사람이요, 이것이 곧 교회이다. 오늘 우리는 이층에 성전이 있고, 솔로몬 행각에도 성전이 있고, 미문에도 성전이 있고, 아래층에도 성전이 있다.

 

물질적인 장소가 있는 유대인은 무엇인가? 그들은 바로 물질적인 장소를 교회 안에 가지고 오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의 길을 가려면,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사 교회는 영에 속한 것이요 물질에 속한 것이 아님을 보게 하시기를 구해야 한다.

 

유대인에게는 또 생활의 규례, 곧 율법이 있다-하나님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게 할 뿐이다. 유대인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십계명을 잘 지키는 자이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네가 십계명을 잘 지킬지라도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다(눅 18:20-22).

 

유대인의 생활 원칙의 표준은 돌판에 새겨져 있으며 그것은 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곧 내가 글자를 알면 그것을 알 수 있고 글자를 모르면 그것도 모르게 되며, 내가 기억력이 좋으면 기억할 수 있고 기억력이 나쁘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교이다. 유대교의 생활의 표준은 죽은 것이요 밖에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다른 곳에 둔 율법은 없다. 그것은 돌판에 새긴 것이 아니요 오직 마음판에 새긴 것이다. 생명 주는 영의 법을 우리 속에 넣으셨다.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이 곧 우리의 율법인 것이다.

 

히브리서 8장과 예레미야 31장을 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고 하셨다. 오늘 옳고 그름은 돌판에 있지 않고 마음속에 있다.

 

오늘 우리가 지닌 특징은 곧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즐거이 한 가지 일을 이야기하여 그 안에 있는 뜻을 나타내고자 한다. 고령에 유 씨 성을 가진 전기 기술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글은 잘 몰랐지만 구원을 받게 되었다. 구원을 받은 뒤, 날씨가 추운 어느 날 그는 술을 마시던 습관에 따라 반찬을 준비하고 술을 데워 놓았다. 그는 아내와 종업원과 같이 먹으려고 앉아 감사 기도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가 말하기를 『나는 이제 그리스도인인데 그리스도인이 술을 마셔도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겠다. 전도하시는 분에게 물어 보면 좋을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분은 내려가시고 안 계시는구나. 그러니 우리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 술을 마시는가 안마시는가를 찾아보자.』

 

그러나 그 세 사람이 아무리 성경을 뒤져봐도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아내에게 제의하기를, 『이번에는 마셔야지, 나중에 그 전도인에게 편지를 써서 답장에 마시지 말라고 하면 다시는 마시지 말고 마시라고 하면 또 마시기로 하지.』라고 했다. 그 유 형제는 일어나 다시 감사 기도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 후에 유 형제는 그 전도인을 만나 이 일을 말하게 되었다. 그 전도인은 유 형제에게, 그때 그 술을 마셨는가 안 마셨는가를 물었다. 유 형제는 『내 속에 계신 주인이 허락지 않아서 마시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속에 주인이 있다.』는 이 한 마디는 정말 귀한 말이다. 당신이 뭐라 해도 성령이 허락지 않으면 안 되고 당신이 뭐라 해도 성령이 허락하면 되는 것이다. 율법이 밖에 있지 않고 속에 있는 것이 되었다.

 

유대교에서는 율법이 성문화(成文化)된 규례가 되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많은 규례와 교리가 있으나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밖의 율법이 없으며 우리 생활의 표준은 안에 있다. 서머나 교회의 환난은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이 유대교의 교리를 그 몸에 더 짊어지게 하는 데 있었다.

 

유대교 안에는 예배하는 사람과 예배를 받는 하나님의 거리가 매우 멀다. 그 거리가 곧 유대교이다. 사람은 유대교의 하나님을 보기만 하면 죽는다. 그러면 유대교인들은 어떻게 하나님과 친근할 수 있는가? 그들은 중간 계급의 사람, 곧 제사장을 의지해야 한다. 제사장이 그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다. 그들 자신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므로 다만 세상에 속한 일만 할 수 있고 세상을 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제사장은 어떠한가? 그들은 완전히 영에 속하여, 와서 영에 속한 일만 한다. 결국 유대인의 책임은 소와 양을 끌고 성전에 오는 것뿐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제사장의 일이요 유대인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올 뿐 아니라 우리 인간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신다. 오늘날 이러한 중간 계급은 이미 없어졌다.

 

그러면 무엇이 유대인의 훼방하는 말인가? 그것은 서머나 교회 안에 일부분의 사람들이 『만일 무엇이든지 다 형제가 하게 되어 형제가 다 세례를 주고 형제가 떡을 뗀다면 질서가 없지 않은가? 이것은 큰 일 날 일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중간 계급을 세우기 원한다.

 

오늘의 기독교는 이미 유대교화 되었다. 유대교에는 제사장이 있고 기독교에는 엄격한 신부와 엄격한 성직자와 보통의 목사 제도가 있다. 신부와 성직자와 목사가 모든 영적 일을 도맡아서 하며 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헌금뿐이다. 평신도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며 세상 일만 할 수 있고 세상을 마음대로 따를 수 있다.

 

그러나 형제 자매들이여! 교회에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세상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요 세상이 우리를 만질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다 영에 속한 것이다.

 

우리가 알 것은 교회의 영적 일을 몇 사람만이 도맡아 하게 될 때 교회는 이미 타락되었다는 것이다. 신부(神父)에게는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갈수록 보통사람과 같지 않아지고 갈수록 그들이 영적 일만 맡기 때문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교회는 오직 우리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길이다.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께 봉사하며 세상 일은 다만 생계를 위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계속 네번째 분별점을 보기로 한다. 유대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은 밭에서 밀을 더 많이 추수하기 위함이요, 소와 양이 낙태하지 않고 많이 번성하여 야곱처럼 되기 위함이다. 그들의 목적은 세상에 속한 축복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신 약속은 다 세상에 속한 약속이요, 이 세상 국가 중에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첫번째 약속은 바로 우리로 십자가를 메고 주님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내가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밥을 주느냐?』고 묻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 나는 『예수를 믿으면 밥그릇이 깨진다.』고 했다. 이것이 교회이다.

 

당신은 믿음으로 인해서 무엇을 더 얻으려고 생각지 말라. 언젠가 나는 남경에서 어느 전도인이, 『당신이 만일 예수를 믿으면 큰 부자는 안 되도 먹을 만치는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가 전한 것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교훈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더 얻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앞에서 더 잃는 것이다. 교회란 하나님 앞에서 잃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오늘날 이 네 가지-물질적 성전, 외면적 교리, 중간적 제사장, 세상-에 속한 약속이 교회 안에 있지 않는가? 형제 자매여,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하여 바라는 것은 다 세상에서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님은 여기에서 한 마디 가장 중한 말씀을 하셨다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이 「회」라는 글자는 교회가 아니요, 헬라어로 「Synagoge」이며, 중국어에서 회당이라고 번역된다. 이 글자는 특별히 유대교와 관계 있는 것으로서 불교의 「묘(廟)」와 도교의 「관(觀)」과 회교의 「사(寺)」와 관계된다.

 

집회하는 곳을 교회 집회소라고 칭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인의 회당이라고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 형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유대인이 그곳을 지나갈 때 그들의 회당으로 잘못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회당」이라는 말은 유대교에서만 쓰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회당이라고 말하는데 유대교가 들어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님은 그것을 사단의 회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신 유대인은 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들이 「회당」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로 유대인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하시기를 원한다.

 

서머나 교회에는 환난과 궁핍과 유대인의 훼방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어라 하셨는가?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10上절).

 

두려워 말라! 언제든지 우리가 그 일이 사탄의 짓임을 안다면 이미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사람이 한 것으로 생각하면 어렵게 된다. 그러나 사탄이 한 것임을 알면 문제는 해결되고 우리의 마음은 즉시 하나님 앞에 안정된다.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10中절). 여기에 「십일」의 문제가 있다. 계시록과 다니엘서를 해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하루를 일 년으로 잡는 것이다. 그들은 십 일을 십 년으로 잡아 역사에서 그 십 년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찾을 수 없다.

 

내 개인의 느낌-이것은 성경의 근거는 없는 것이다-으로는 하루를 일 년으로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계시록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곧 삼 년반이라고 말한 것이 있다. 또 한 군데에서 일천이백육십 일을 말했는데, 유대인의 일 년은 삼백육십 일이므로 일천이백육십 일은 곧 삼년 반이다. 만일 하루를 일 년으로 잡으면 일천이백육십 년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 큰 환난이 이같이 오랫동안 계속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십 일은 무슨 뜻인가? 성경에 몇 번 십 일이 나온다. 창세기 24장에서 「십 일」이 한 차례 나온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데려올 때 리브가의 오라비와 어머니가 말하기를 적어도 십 일간 집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왕의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식사를 관리하는 자에게 우리를 십 일만 시험해 보라고 했다. 그러므로 「십 일」은 성경에서 짧은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신 것도 같은 뜻이다. 한면으로는 환난의 날짜를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환난받는 날짜를 주님께서 다 세어 보신다는 것이다. 그 날이 지나가면 자유케 되어 욥과 같을 것이다. 또 한면으로, 십 일은 가장 짧은 기간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은 시험은 어떤 것이든 길지 않다. 그 날이 차면 마귀도 어쩔 수 없다. 당신이 받고 있는 시험은 신속히 지나갈 것이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10下절).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것은 시간적인 것이며 또한 태도의 문제이다. 주님은 그분을 섬기는 사람의 생명이 그분께 속하기를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당신은 죽기까지 충성해야 한다. 무릇 보혈로 산 사람들은 주님께 속했으므로 완전히 주님께 돌려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신다. 이제 그분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충성해야 하며, 시간에 있어서 죽기까지 충성해야 한다.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면류관은 상급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 때에 이르러 생명은 면류관이 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여기에서 우리에게 밝히 말씀하시는 것은 네가 이미 배웠기 때문에 죽지 않을 뿐 아니라 해도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난은 무서운 것이지만 당신이 그 환난에 떨어지지 않고서는 그 환난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없다. 궁핍이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지만 당신이 궁핍해 보지 않고서는 그 맛을 알 수 없다. 훼방하는 것은 사람을 누르는 것이지만 당신이 훼방을 받아보지 않으면 그 고통을 알 수 없다.

 

우리에게 닥치는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사망으로 끌고 가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신이 그 모든 것들을 거쳐 나올 때 당신은 이 부활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주님은 무덤에서 나오셨다. 우리도 그것들에게서 나오게 된다. 오늘 그 무엇도 이 부활의 생명을 매장할 수 없다. 감히 말하거니와 우리도 매장시킬 수 없다.


워치만 니
[교회의 정통, "서머나 교회",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