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길을 정하셨을 뿐 아니라 교회의 길도 정하셨다. 무릇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표준적인 길을 갈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 가운데로 행할 책임이 있다. 이 책은 바로 주 안에 있는 한 형제가 1945년에 가졌던 한 차례의 성경 연구 집회 내용의 기록이다. 같은 해 11월에 필요로 인하여 중경에서 인쇄했으며, 다시 정리하여 대만에서 출판하게 되었다. 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게 정하신 하나님의 길을 알도록 돕는 데 있다.
이 책의 성질은 진리를 밝히는 데 있으며 변론을 하는 데 있지 않다. 독자들이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읽기를 바란다. 다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사 축복하시기를 원한다. 아멘. (1955년 6월 편집부)
인도의 말씀
성경 : 요한 계시록 1-3장, 22장 7절, 18-19절
서신 중에서나 복음 중에서나 요한의 것은 다 마지막에 쓴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은 주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행적을 쓴 것이고, 요한의 복음은 『하늘로서 내려와 여전히 하늘에 계시는 인자』를 말하는 것이다.
요한의 서신은 지식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혼란케 할 때 쓴 것으로서 사람을 하늘로 이끌고 가서 하늘에 있는 모든 영원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한은 우리를 사람의 테두리에서 이끌어내어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게 한다.
요한이 쓴 글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곧 우리를 태초로 끌고 가는 것이다. 요한의 복음은 태초의 그리스도를 말한 것이고, 요한의 서신은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을 말하며, 요한의 계시록은 우리를 장차 올 영원한 세계로 이끌고 간다.
그의 복음은 육신을 입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가 우리 가운데 계실 때 사람들은 그를 잘 알지 못하여 나사렛 예수로만 알았지만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육신을 입고 있는 이 예수가 바로 태초에 계신 그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깊은 내막의 사실이다.
요한의 서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분의 직분은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지 못했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서신에서는 특별히 이 두 가지를 제기하여 우리를 태초에 있는 가장 깊은 내막의 사실로 이끌고 가는 것이다. 요한이 계시록을 쓸 때 세상은 어지러웠으며 로마 가이사(시저)의 잔해는 최고도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요한은 우리를 장차 올 가장 깊은 내막의 상태로 이끌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보시는 관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계시록에는 이 세상의 상태뿐만 아니라 교회의 상태도 나타나 있다. 계시록에서는 교회가 외적으로 가장 어지러울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이 정죄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이 정하신 교회의 길은 어떠한 것인가, 교회의 외형은 역사적으로 다르게 나타났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상태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내막의 마음과 뜻이다.
성경 안에 두 무리의 일곱 서신이 있다. 첫 일곱 서신들은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쓰신 것, 곧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후서이다. 하나님은 또 요한을 통해 둘째 일곱 서신을 쓰셨다. 첫 일곱 서신은 정상적인 상태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고 다음의 일곱 서신은 비정상적인 상태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은 정상적인 것으로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고 요한의 복음은 불분명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므로 진리와 은혜를 많이 언급했다. 요한의 서신도 비정상적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므로 빛과 사랑을 많이 언급했다.
계시록 2, 3장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비정상적인 현상에 대처하여 공급해 주는 것이다. 바울의 첫 일곱 서신은 교회의 정상적인 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 후 교회는 정상을 벗어났으므로 요한은 계시록에서 다음 일곱 서신들을 쓴 것이다.
첫 일곱 서신은 교회가 마땅히 알아야 할 진리를 말한 것이고 다음의 일곱 서신은 교회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말한 것이다. 오늘 참으로 주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계시록 2, 3장을 보아야 한다. 계시록에서는 오늘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준다. 만일 계시록에서 그 길을 찾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
첫 일곱 서신들은 마지막 때 전에 쓴 것이나, 나중의 일곱 서신들은 마지막 때에 쓴 것이다. 요한 일서 2장 18절에서는 한 시대, 곧 마지막 때를 말하고 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 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같이 지금도 많은 적 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그리스도인이 첫 일곱 서신만을 보아서는 마지막 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성경 가운데 특별한 직분을 가진 세 사람이 있으니 그들은 곧 베드로, 요한, 바울이다. 베드로 후서는 베드로가 마지막으로 쓴 것으로서 거기에서 베드로는 진리를 배반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디모데 후서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것으로서 2장에서,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했다.
또한 디모데 전서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다(딤전 3:15). 그러나 현재는 어떠한가?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다. 문제는 천히 쓰임받는 데서 벗어나려 하는 것보다도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딤후 2:20-22).
요한의 서신은 요한이 마지막으로 쓴 것으로서 그 서신에서 요한은 적그리스도가 이미 나타났으니 주님의 말씀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했다(요일 4:1-3). 나는 이 문제를 좀더 확실히 해야 할 부담을 느낀다. 교회의 시초부터 지금까지는 한 시대-교회의 시대-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적어도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두 가지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오늘 교회의 외형은 황폐되어 있다. 당신이 만일 이 사실을 보지 못했다면 계시록을 읽을 필요가 없다. 첫 일곱 서신은 정상적인 것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땅 위의 혼란은 영적 사실에 영향을 줄 수 없고 하나님의 영적 사실은 항상 한결같은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외형적인 모습은 혼란되었다.
로마 천주교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주장한다. 1914년에 개신교에서 조사한 아주 작은 종파 외에 대규모적으로 조직된 교파만도 천오백여 개가 되었는데, 이 많은 교파들도 다 각각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요한, 바울, 베드로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이러한 일들이 이미 시작되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버렸다고 했다(딤후 1:15). 거기에는 에베소 교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가지 구하여야 할 것은, 나는 어떻게 해야 주님의 뜻을 따라 봉사할 수 있는가,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 교회의 외형이 황폐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는 것이다. 계시록 2, 3장은 우리의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 앞에 구한다면 계시록 2, 3장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알려 줄 것이다.
계시록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먼저 이 책이 어떠한 책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모두 이 계시록을 예언(豫言)으로 알고 있지만 그 일곱 교회도 예언적인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감히 대답하지 못한다. 계시록 1장부터 22장까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계시록의 특징은 예언의 성질을 띠었다는 것이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예언일 뿐 아니라 일곱 서신 역시 예언이다.
이 책은 예언의 책이므로 사람이 더 가할 수도 제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예언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이 예언이 이루어져 나타난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계시록의 성질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첫째, 그 책은 예언이요, 둘째, 그것은 예언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진다. 당시 아시아에는 교회가 일곱 개만이 아니었는데 요한은 왜 일곱 교회만을 제기했는가? 그가 밧모섬에서 본 것은 오직 일곱 교회뿐이 었으며, 이 일곱 교회는 능히 모든 기타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일곱 성질의 교회를 선택하여 그들에게 예언을 주신 것이다.
이 땅에는 일곱 교회가 있고 하늘에도 일곱 촛대가 있다. 여기에서 기이한 것은 요한이 하늘에 오직 일곱 촛대가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일곱 교회만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중경 교회도 끊겨 나가고 남경 교회도 끊겨 나가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므로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 예언이라는 점이다. 예언이기 때문에 일곱 교회만이 나타난 것이다. 이 일곱 교회는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 여덟 번째 교회는 없다. 이 땅에 교회가 일곱 개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일곱 교회가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하늘에 오직 일곱 교회만 있는 것은 이 일곱 교회의 역사가 곧 완전한 교회의 역사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제 1장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들과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도다』(3절). 22장에서도 말하기를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고 했다(7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예언이 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비록 밖으로는 예언의 옷을 입었지만 그 속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책은 실행을 위한 책이요, 연구를 위한 책이 아니다. 여기의 예언은 다른 예언과 다르다. 이 예언은 준수(遵守)하라는 것이다. 요한과 우리의 공동 원칙은 곧 이 예언을 우리에게 주어 지키게 하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는 것이다. 지키지 않는 자가 어찌 계시록을 알 수 있으며 어찌 일곱 교회를 알 수 있겠는가?
계시록 2, 3장을 읽어 보면 이것이 예언을 지키라는 말씀임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주님이 심판의 주님이심을 볼 수 있게 된다. 계시록 1장의 전반부는 계시록 전체의 서문이며 후반부는 2, 3장의 서문이다. 2장, 3장은 주 예수님의 계시로 시작한다.
여기에서는 주 예수님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신』 것을 볼 수 있다. 제사장은 긴 옷을 입으므로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이 곧 제사장인 것이다. 촛대는 성소 안에 있는 것이며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빛이 주야로 비추게 하기 위해 제사장은 계속 성소에서 촛대를 손질하고 기름을 더한다.
주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모든 교회 가운데로 다니시면서 어떤 촛대에 빛이 나지 않는가를 보신다. 손질함은 곧 심판함이요,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는 모든 교회 가운데서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
그러므로 오늘의 심판은 영원에서 본 것이다. 요한과 주님 사이는 가장 친밀했고 그는 주님의 품에 있던 자였다(요 21:20, 24). 아들은 아버지 품에 있었고 요한은 아들의 품에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가 주님을 볼 때 죽은 자같이 된 것은 그가 심판의 주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과거에는 그를 은혜의 주로 보았으나 현재에는 그를 심판의 주로 보아야 한다. 현재의 심판은 제사장의 심판이므로 계속 손질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이를 때에는 완전히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언젠가 주님의 두려움과 성결에 부딪혀야 하며 이 때에는 그 어떤 이유도 말할 수 없게 된다. 빛은 모든 이유를 제거해 버린다. 빛은 우리를 비출 뿐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성경에서 빛이 비취는 곳마다 사람의 육의 생명을 죽인다. 그 많던 이유도 주님 앞에서는 다 없어지고 요한처럼 땅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된다.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갈수록 커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한 번, 하나님으로부터 일격을 받아야 한다.
서신마다 첫 부분에서는 주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말하고 있고, 그 후의 말씀은 다 주님의 그 어떠하심으로부터 나온 계시이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를 볼 수 없다. 교회는 십자가의 계속이므로 십자가를 모르면 십자가의 연장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일곱 서신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끝에서는 다 이기는 자를 부른다.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 이기는 자인가? 그는 특수하게 수평선을 초월한 사람인가? 성경 가운데의 이기는 자란 다 평범한 사람이다. 비정상적인 때에 비정상적이지 않은 사람이 이기는 자이다. 지금 일반 사람들은 다 수평선 아래에 있다. 이기는 자란 수평선을 초월한 사람이 아니요, 오직 수평선에 있는 사람이다. 오늘 하나님은 여기에서 이기는 자를 부르신다. 일어나 처음의 정상적인 길로 가자. 하나님의 뜻은 곧은 직선처럼 한 번도 변치 않는다. 오늘날 인간은 타락하고 실패하여 계속 밑으로 내려가고 있지만 이기는 자는 또다시 새롭게 하나님의 뜻을 회복한다.
여기에서 또 두 가지를 볼 수 있으니 첫째, 교회는 금촛대요, 주님은 촛대 사이에 다니신다는 것이다. 둘째, 주님은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는데 그 일곱 별은 교회의 사자(使者)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금속에는 다 뜻이 있다. 철은 정권을 대표하는 것이고, 동은 심판을 대표하며, 은은 구속을 대표한다. 금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표한다. 동서 고금을 통하여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성결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아는 자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속한 최고의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금으로 만든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 교회는 사람과는 관계 없는 것이다. 풀과 나무와 짚의 역사(役事)는 다 육의 역사요, 금과 은과 보석, 그 중에서도 금의 역사는 가장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 일곱 서신은 다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쓴 것이므로 바울의 첫 일곱 서신과는 다르다. 바울의 서신 중 빌립보서만은 성도와 감독과 집사들에게 썼으나, 빌립보서를 제외한 모든 편지는 다 교회에 썼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교회에 직접 쓰지 않고-성령은 교회들에게 말씀하신다고 했으나-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쓴 것이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이다.
「사자(使者)」라는 이 두 글자는 헬라어로는 「Anggelos」이다.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 2, 3장을 읽을 때 나중 일곱 편지와 첫 일곱 편지의 공통점을 근거로 하여 여러 가지 잘못된 해석을 사자에게 붙이고 있다. 그러면 이 사자는 과연 누구인가?
여기에서 말하는 사자는 다 단수이므로 이 서신은 단수의 사자에게 쓴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단수는 단체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편지마다 마지막에는 이기는 자를 불렀으니 그것이 곧 다수를 말하는 것이다. 이 사자는 단체적인 사자로서 능히 전 교회의 소수인 이기는 자를 대표할 수 있는 자이다.
이제 하나님의 길은 달라졌다. 종전에는 교회가 주님 앞에 섰으나 지금은 사자가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촛불의 빛은 별빛보다 못하다. 주님은 꺼지지 않는 별빛을 택하시고 『이는 내 사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별은 주님의 손에 있다. 오늘 주님은 일부분의 사람만을 사자로 보신다. 왜냐하면 오늘 교회의 성질이 그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주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주님은 일부분-사자-만을 보시기 때문에 가히 그들을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종전에 교회의 대표는 지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장로의 직분을 가리켰지만 이제 교회를 대표하는 책임은 영적 사자에게 주어졌다. 이 사자는 어떤 장로나 집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에게 교회의 책임을 지게 하신다. 오늘은 지위나 직분이 문제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영적 능력이 문제 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책임을 참된 영적 능력을 가진 자에게 부여하신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모든 「종」에게 쓴 것이다. 그러므로 종이 아닌 자는 알 수 없다. 피로 사오심을 받고 사랑의 강권하심으로 종노릇하는 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 계시록을 알 수 없다.
요한이 계시록을 쓴 것은 주후 95년(혹은 96년)으로서 도미티안(Domitian)이 로마의 가이사였을 때였다. 요한은 열두 사도 중에 제일 마지막으로 죽은 사도로서 사도 시대의 교회는 요한에서 끝이 났다. 요한은 이 일곱 편지를 예언으로 썼다. 오늘 우리는 이 일곱 편지가 예언이었음을 깨닫지만 그것은 이미 역사적인 사실이 되고 있다. 요한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우리는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다.
이제 이 일곱 서신에 나타난 일곱 교회를 하나하나 보기로 하자.
워치만 니
[교회의 정통, "인도의 말씀",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