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받은 자의 승리
이기는자들
timothy , 2005-08-24 , 조회수 (2711) , 추천 (0) , 스크랩 (0)

승리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체험 안에 있는 승리를 다루겠다(14:11-24). 창세기를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당신은 14장 외에는 이방 나라들간의 문제를 다룬 장(章)이 없음을 볼 것이다. 14장은 이방 나라들간의 전쟁에 관해 기록한다. 왜 여기에 이런 기록이 있는가? 성경의 말씀은 매우 경제적이다. 한 말씀도 필요없는 말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장은 거의 전체가 이방 왕국들간의 전쟁에 관해 기록한다.

 

그러나 14장에 있는 사건들은 나라들간의 문제에만 관련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주권적으로 관련된다. 왜 14장은 이방 나라들간의 전쟁에 관해 그렇게 길게 기록하는가? 외관상 이것은 나라들간의 전쟁이지만 사실은 주님에 의해 주권적으로 안배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 관련된 환경과 모든 사건에 관한 주권자이시다. 그 당시 가나안 땅에는 히브리 족속의 두 가족-아브라함의 가족과 롯의 가족-이 살고 있었다. 나머지는 모두 이방인들이었다. 이 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 주권적으로 어떤 사건을 일으키심을 볼 것이다.

 

창세기 14장은 한 무리가 된 네 왕과 또 한 무리가 된 다섯 왕 사이의 전쟁에 관한 말씀이다. 결국 다섯 왕이 네 왕에게 패배했다.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당신은 이 전쟁이 절대적으로 롯과 아브라함을 위한 것이었음을 볼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 히브리인들인 롯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시험을 받은 것이다. 이 전쟁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인간적으로 말하면 어떤 전쟁도 좋지 않다. 그러나 이 장에 있는 전쟁은 롯을 위하여, 특히 아브라함을 위하여 좋은 것이었다.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이 전쟁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익이 된 방면을 볼 필요가 있다.


(a) 형제가 사로잡힘

 

전쟁은 주로 소돔에서 일어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하나인 롯이 거기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있기 전에 롯은 스스로 아브라함으로부터 분리되었다(13:11). 당신은 롯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좋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 모든 청년들은 나이 든 세대로부터 분리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청년들이 아브라함인 나이 든 세대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좋지 않다. 만일 이렇게 하면 당신은 표적과 보호를 잃을 것이다.

 

창세기 13장의 시대에 하나님의 목표와 영원한 표적은 아브라함에게 있었다. 만일 당신이 거기에서 아브라함으로부터 분리된다면 이는 하나님의 표적에서 분리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목표는 부르심받은 자들에게 있다. 만일 당신이 부르심받은 자들로부터 분리된다면 이는 하나님의 목표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가 아브라함에게 있었기 때문에 롯은 결코 아브라함으로부터 분리되지 말았어야 했다. 아브라함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표적을 떠나는 것이었다. 더우기 아브라함을 떠나는 것은 보호를 떠난 것이었다.

 

롯은 처음부터 네 왕에게 패배하지 않았다. 그 패배는, 전에 있었던 최소한 두 번의 패배의 결과였다. 그돌라오멜에게 사로잡히기 전에 롯은 이미 두 번 패배했다. 첫번째 패배는 롯의 목자와 아브라함의 목자가 다툴 때 롯이 아브라함의 말대로 땅을 선택한 것이었다(13:7-11). 아브라함이 선택권을 주었을 때 롯은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삼촌, 내 선택은 당신입니다. 당신의 선택이 나의 선택입니다. 나는 자신의 선택을 하기 윈치 않습니다. 내 목자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들을 해고시키겠습니다.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나에게는 당신과 당신의 선택 외에 아무 선택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브라함이 선택권을 주었을 때 롯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즉시 선택하여 자신의 길을 갔다. 그것이 그의 첫번째 패배였다.

 

아브라함과 분리된 후에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13:12). 롯은 하향길을 가고 있었다. 하향길로 첫 걸음을 내디딘 후에는 둘째, 세째 걸음을 내딛기가 쉬웠다. 첫 걸음은 소돔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아브라함을 떠난 것이다. 롯은 소돔을 향한 길을 갔다. 그는 소돔 방향으로 걸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소돔은 악하고 죄 있는 성이었다(13:13).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하나인 롯은 분명 이것을 알았다. 그는 소돔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으며 소돔을 향해 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돔 주변의 땅이 비옥했으므로 롯은 소돔을 향해 움직였다. 결국 그는 성 안에 들어가서 살았고 거기에 정착했다. 이것이 롯의 두번째 패배였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그런 악한 성에 살도록 허락하신다고 생각하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그돌라오멜이 앞장서서 소돔을 공격했다. 하나님은 전쟁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다. 네 왕이 다섯 왕을 대항하여 싸웠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다섯 왕이 승리해야 하는데 이는 그들의 수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왕이 다섯 왕을 이겼으며 소돔 성은 빼앗겼다.

 

성경은 소돔 성이 빼앗겼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는 롯이 거기에 거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단지 네 왕이 다섯 왕과 싸우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중의 한 명을 위한 전쟁이었다. 소돔에 거할 때 롯은 평안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평안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롯이 거기에서 평화롭게 거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롯아, 네 안에는 평강이 있을지 모르나 나는 밖에 어떤 소란을 일으키겠다. 나는 네 왕을 보내서 다섯 왕을 멸하겠으며 너의 성을 사로잡히게 하겠다. 그들은 너와 너의 가족과 모든 소유를 사로 잡아갈 것이다.』

 

이런 일이 실지로 롯에게 임했다. 롯은 거듭해서 패배를 당했다. 패배의 마지막 단계로서 결국 그는 대적의 손에 붙잡혔다. 그는 사로잡혔으며, 소돔 왕은 그를 도울 수 없었다.


(b) 형제를 위해 싸움

 

롯이 사로잡힘에 있어서 하나님은 주권적이셨다. 창세기 14장 13절은,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라고 말한다. 네 왕은 소돔과 그 모든 재물을 노략했으나 거기에서 탈출한 한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와서 롯이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당신은 이런 일을 우연이라고 믿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사로잡혔는데 이 사람은 탈출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보존되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 일은 보이지 않는 중보 기도에 의해 발생되었음에 틀림없다. 탈출한 사람은 도망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와서 롯이 사로잡혔음을 말했다.

 

우리와는 달리, 아브라함은 형제의 약점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롯의 고통과 재앙을 기뻐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롯은 나와 헤어지지 말았어야 했어. 나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지. 그는 마땅히 당할 일을 당했어. 나는 하나님이 주권자이심과 롯의 고통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라고 믿어. 편히 집으로 가자. 하나님이 롯을 보존하실 거야.』 나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롯을 위해 싸우기로 강하게 결정했다(14:14).

 

나중에 보겠지만, 그 때 아브라함은 기도했다. 22절에서 아브라함은 소돔 왕에게, 그가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손을 들었다고(기도했다고) 말했다(22절과 23절의 원문 참조 : 역자 주). 어떻게 아브라함은 기도할 수 있었으며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중보 기도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중재자가 전쟁의 상황과 롯의 사로잡힘을 아셨다고 믿는다. 이 중재의 결과, 아브라함은 간단하고 담대한 결정을 내렸다.

 

아브라함은 삼백 십 팔 명을 데리고 네 왕과 그들의 군대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네 왕은 많은 군대를 가졌을 것이며 군사의 수는 아브라함의 군사의 수보다 훨씬 더 많았음에 틀림없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소수의 인원으로 그들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겠는가? 더우기 그들은 많은 전쟁을 치룬 왕들과 장군들이었고 아브라함은 전문가가 아니었다. 어떻게 그는 전쟁의 전문가들인 그들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러한 소수로 그들을 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담대했으며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가졌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의 형제의 사로잡힘을 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어떤 형제나 자매의 사로잡힘을 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만일 「형제의 집」에 있는 어떤 형제가 사로잡힌 것을 당신이 본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당신은 이것에 대해 참지 말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참을 수 없다. 나는 일어나서 행동해야겠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행했다.

 

아브라함의 담대한 결정은, 보이지 않는 어떤 사람이 그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한 사실에 기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아마 당신은 성경에 이런 기록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성경에는 멜기세덱의 부모나 족보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당신은 그에게 부모나 족보가 없다고 믿는가? 분명히 있었지만 성경은 그것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14장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기록되지 않았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 어떤 중보 기도가 있었다고 믿는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이익을 관심하는 어떤 사람이 롯과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전쟁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롯의 패배가 소돔에서 시작된 것이 아님을 보았다. 같은 원칙으로 아브라함의 승리는 왕들을 죽임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승리는 롯이 그를 떠날 때에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려는 땅을 향해 전진함으로써 그 부르심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아브라함에게는 거의 체험이 없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그분이 주시려는 땅을 향해 나아가는 작은 체험뿐이었다. 지난 메시지에서 보았듯이 기근은 아브라함에게 시험이었으며 그는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희생시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스스로 노력함으로써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가르침 아래에서 아브라함은 그 실패로 인해 많은 것을 배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권자이시며 그분의 백성에 관한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임을 배웠다. 하나님의 부르심받은 자와 관련된 모든 것은 그분의 손 안에 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보았고 체험했으며 그 안으로 온전히 들어왔다.

 

그후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아브라함은 승리했다. 그의 승리는 그 때에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애굽으로 내려갈 때 기본 공과를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기본 공과를 배워야 한다. 당신이 부르심을 받고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옴으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후에 하나님이 당신에게 가르쳐 주실 첫번째 기본 공과는, 하나님의 부르심받은 자인 당신에게 관련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아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 위의 주권자이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감으로써 배운 기본 공과였다. 이 공과를 배운 후에 그는 롯과의 관계에서 승리했다. 롯과 문제가 생겼을 때 아브라함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선택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았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승리의 시작이었다.

 

그후 아브라함이 하나님 편에 있다는 것을 온 우주에게 보여 줄 때가 왔다. 멜기세덱이 나타날 때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두 칭호가 계시된다. 그 칭호는 천지의 주재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다(19절).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둘다 하나님을 이렇게 칭했다.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었노니』(14:22, 원문 참조)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애굽에 내려감으로써 나는 내 하나님, 곧 나를 부르신 분이 천지의 주재(소유자)이심을 배웠다. 나는 무엇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 내 선택은 오직 그분이다. 나는 내 형제가 사로잡힌 것을 참을 수 없다. 이것은 나의 부끄러움이다. 나는 그를 찾아와야 한다. 나는 군사의 숫자나 왕들이나 그들의 군사들을 주의하지 않는다. 내 군사가 그들보다 소수임을 상관하지 않는다. 내 부담은 형제를 찾아 오는 것이다. 만일 내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부끄러움이다.』

 

형제를 위해 싸울 때 아브라함은 생명을 잃을 위험을 감수했다. 그가 사로잡힌 형제를 구출하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한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해 냈다. 전쟁은 순조로왔으며 아브라함은 대적을 남쪽에서부터 계속 쫓아가서 북쪽의 「단」까지 이르렀다. 그의 승리는 보이지 않는 중보 기도의 결과였음에 틀림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승리했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했다. 이와같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알기를 배워야 한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우리는 땅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지주(땅의 주인; 역자 주)이실 뿐 아니라 천주(하늘의 주인; 역자 주)이시다. 하늘과 땅은 우리를 부르신 우리 아버지께 속한다. 우리는 그분 안에 이런 신뢰를 둘 필요가 있다. 만일 이런 신뢰가 부족하다면 우리는 이미 패배한 것이며 롯이 될 것이다.

 

왜 롯은 패배했는가? 그가 아브라함과 달리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이심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구출된 후에도 롯이 아브라함에게 감사했다든지 주님께 말씀을 드렸다는 기록이 없다. 그에게는 전혀 기능이 없었다. 다음 장들에 의하면 그는 소돔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사로잡힘은 소돔으로 되돌아가지 말라는 경고였지만 그는 사로잡히고 구출된 후에도 여전히 되돌아갔다.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한 번 패배하면 그 패배로부터 자신을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롯은 패배했지만 아브라함은 승리했다. 이 승리는 그의 외적인 체험의 절정이었다. 그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적인 체험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c) 멜기세덱의 공급(사역)

 

도망한 자가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올 수 있었으며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처럼 간단하고 담대한 결정을 할 수 있었는가? 대적이 도망한 직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멜기세덱이 왔다.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그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매우 비슷하다. 그가 온 것은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상징한다. 그는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이것은 창세기 14장에는 없으나 시편 110편에 나타나 있다. 시편 110편은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자, 곧 그 그리스도는 아론의 반차보다 앞에 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말한다. 아론이 제사장 직분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아론의 제사장 직분은 죄를 비롯한 소극적인 것들을 처리한다. 반대로 멜기세덱의 사역은 적극적이다. 멜기세덱은 죄를 처리하려고 오지 않았다. 그는 아브라함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승리를 했기 때문에 왔다. 멜기세덱은 죄를 사하는 제물을 갖고 오지 않았고 승리자를 양육하기 위한 떡과 포도주를 갖고 왔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사하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알지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로 상징된, 우리의 영양분인, 과정을 거친 하나님을 공급한다.

 

당신은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공급하려고 오기 전에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롯과 아브라함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고 있었음을 믿지 않는가?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나는, 아브라함이 전쟁하는 동안 멜기세덱이 내내 잠자고 있다가 아브라함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일어나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롯을 구출하기 위한 아브라함의 간단하고 담대한 결정은 멜기세덱의 중보 기도에 의해 가능했다고 믿는다. 나는 또한 아브라함에게 롯이 사로잡혔음을 알려준 사람이 탈출한 것도 멜기세덱이 롯을 위해 중보 기도를 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제사장으로서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살폈음에 틀림없다. 그의 중재에 대한 응답으로 한 사람이 소돔에서 탈출하여 아브라함에게 소식을 전했고 아브라함은 롯을 구출하기 위해 싸우려는 담대한 결정을 내렸다.

 

우리가 이 땅을 걸어갈 때 많은 일들이 생긴다. 외관상으로 볼 때 이런 일들은 그냥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땅에 있는 일들의 배후에서 중보 기도가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멜기세덱이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늘에서 계속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신다(히 7:25). 그분의 중보 기도는 우리를 덮고 보호하신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온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암시한다. 오늘날의 아브라함인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대적을 멸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 중의 일부는 롯과같이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는 오늘날의 아브라함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라는 기본 공과를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땅에서 그분을 위해 살고 있으며, 우리는 그분의 간증이다. 우리는 땅에서 하나님의 관심이 어떤 피해를 당하는 것을 참지 않는다. 그러한 피해의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빠른 결단을 내려 대적을 패배시키고 왕들을 죽인다.

 

우리는 매일매일 어떤 왕들을 죽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생각, 감정, 의지 안에 있는 왕들을 죽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환경, 가족, 학교에 있는 왕들을 죽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왕들을 죽인 후에, 우리의 멜기세덱이 와서 우리와 만날 것이며 우리의 승리를 축하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모든 왕들을 죽일 때까지 재림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 후 주님은 마태복음의 말씀처럼 돌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6:29).

 

멜기세덱은 롯과 아브라함을 위해 중보 기도를 했다. 오늘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기는 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신다. 그분은 지금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시며, 우리는 지금 땅에서 왕들을 죽이고 있다. 이기는 자들이 모든 왕들을 죽인 후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신 우리의 중재자가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의 완전한 맛봄을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멜기세덱이 온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상징한다. 우리의 승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표현한다. 우리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는지 보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승리한다면 그 승리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할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새로운 방면에서 그리스도를 모셔올 것이다. 창세기 14장에서 의의 왕과 살렘 왕, 곧 평강의 왕을 의미하는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그리스도가 이기는 자들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공급됨을 상징한다 어느 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인해 온 땅이 놀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을 믿지도 않으며 그런 믿음을 어리석은 것이라고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왕들을 죽인 후에 그리스도께서 갑자기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왕들을 다 죽일 때 나타나실 것이며, 온 세상은 그분이 오실 때 놀랄 것이다. 이기는 자들인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두번째 나타나심이 놀라운 것이 아니겠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큰 놀라움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이 분이 누구인가? 그분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시는가?』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그분의 이름은 그리스도시요 참된 멜기세덱이시다. 그분은 여러 세기 동안 중보 기도를 하셨던 하늘에서 오시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중보 기도에 반향(反響)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서 그분을 접촉한다면 거기에 항상 어떤 반향이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환경, 대적, 자신까지를 잊어버리고 그 반향에 따라 나아간다면 우리는 승리할 것이며 왕들을 죽일 것이다. 모든 왕들을 죽인 후에 우리의 멜기세덱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두번째 오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온 땅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알 것이다. 그럴 때 온 땅은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이심을 알 것이다. 이 땅은 왕이나 대통령이나 정치가들의 소유가 아니라 천지의 주재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소유이다. 이 사실이 어떻게 땅에 선포될 수 있는가? 오직 우리가 왕들을 죽일 때 선포될 수 있다.

 

14장에 있는 아브라함의 승리는 작은 일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점진적으로 계시한다. 창세기 1장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없으며 또한 「천지의 주재」라는 특별한 칭호도 없다. 수 년 동안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아마 당신은 하나님께 그런 칭호가 있음을 몰랐을 것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며 천지의 주재이시다. 그분은 하늘의 주인이시며 땅의 주인이시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에 의하면, 하나님의 칭호는 점진적으로 우리에게 계시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며 천지의 주재이심을 깨달을 것이다. 이것이 왕들을 죽이려고 전진할 때 우리를 위한 매력과 자극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롯이 되지 말라. 그는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우리에게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천지의 주재가 계시므로 우리 모두는 단순하고 담대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요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 손을 들었다(기도했다)고 소돔 왕에게 말했다. 그는 그러한 영 안에서 전쟁에 나갔다. 아브라함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요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브라함에게 왔을 때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요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 아브라함의 축복을 빌었다(19절). 이것은 그가 아브라함보다 큰 자임을 증명한다(히7:6-7). 그는 또한 아브라함의 승리를 인해 하나님을 찬송했다(20절). 우리의 승리는 항상 우리의 멜기세덱으로 하여금 우리를 축복하게 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한다. 우리의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 많은 축복을 우리와 하나님께 가져다 준다.

 

멜기세덱의 축복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지 일, 곧 얻은 것 중의 십분지 일을 그에게 주었다(20절, 히7:2,4). 이것 또한 멜기세덱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우리의 승리는 전리품을 얻으며, 우리가 전리품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은 항상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선포한다. 승리가 없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 드릴 것이 없으며 그분의 위대하심은 선포되지 못할 것이다.


(d) 땅에 속한 물질의 유혹을 이김

 

아브라함의 승리는 모든 상황을 조절했고 회복했으며 환경 전체를 재구성했다. 네 왕이 다섯 왕을 이기고 모든 것을 사로잡아 갔다. 상황 전체가 뒤집어졌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승리는 이 상황을 정상으로 완전히 바꾸었다. 그는 불의한 환경을 의로운 환경으로 바꾸었으며, 모든 상황을 평강 안에 있게 했다. 그 결과 거기에 의와 평강의 왕이 있었다. 아브라함의 승리는 모든 전쟁과 충돌을 멈추게 했고 참된 평강을 가져왔다.

 

소돔 왕은 아브라함에게 겸손하고 정직하고 진실되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이 승리했습니다. 당신이 되찾아온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가지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만 내 사람들입니다.』 만일 당신과 내가 아브라함이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 말이 옳고 공평합니다. 나는 당신의 백성을 구출했고 당신이 잃었던 모든 것을 찾아 왔습니다. 당신은 백성을 가지고 나는 그 외의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승리로 재구성된 환경은 전혀 이렇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했다.

 

아브라함은 소돔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14:23). 아브라함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서 실 한오라기라도 취한다면 당신이 나를 치부케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부유함이 당신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온 우주에 온전하게 간증하고 싶다. 나의 부유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얼마나 순수한가! 그런 상황 안에서 우리는 의와 평강을 본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왕들을 죽인 후의 광경을 생각해 보자.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되찾아왔고 왕들이 그를 만나려고 왔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와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했고 또한 그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모든 백성들은 물품이 누구에게 가는가를 보고 있었으며 궁금해 하고 있었다. 사로잡혔다가 아브라함에게 구출된 백성들까지도 이제부터 자기가 누구의 소유가 될 것인가를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때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내가 손을 들었노니』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취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모든 백성들은 온전한 해결을 얻었다. 그 상황 안에 의와 평강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마치 의와 평강이 가득한 천년 왕국과 같았다(사32:1, 16-18, 시72:2-3,7).

 

아브라함은 공평했다. 그는 소돔 왕에게 아무 것도 취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14:24)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군사들과 동맹자들은 각자의 분깃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자기의 분깃은 소돔 왕에게 주었다. 이 어떠한 사람인가! 그는 네 왕을 죽였고 지금은 소돔 왕을 처리하고 있다. 그는 그들 모두보다 뛰어났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상 왕들과 사장들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 우리보다 뛰어난 분은 오직 한 분이 계시는데 그는 바로 우리의 멜기세덱이다.

 

창세기 14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매우 뛰어났음을 본다. 당신은 자기가 살려고 아내를 희생시킬 계획을 할 정도로 낮았던 사람이 그렇게 뛰어날 수 있음을 믿는가? 당신은 애굽에서 자기의 아내를 팔려고 했던 사람이 모든 왕들보다 뛰어날 수 있음을 믿는가? 기꺼이 아내를 팔려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가장 낮은 음부에 있었으나 왕들을 처리할 때에는 가장 높은 하늘에 있었다. 우리 모두는 아마 아브라함처럼 두 면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는 아내를 팔려는 계획을 짜거나 아니면 주님의 은혜로 왕들보다 뛰어날 것이다.

 

아브라함의 승리와 왕들보다 뛰어남은 절대적으로 보이지 않는 중보 기도에 의한 것이었다. 땅에 속한 광경의 배후에 전체 상황을 결정짓는 어떤 일이 하늘에서 진행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보아야 한다.


위트니스 리
[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제 43장, 부르심받은 자의 승리",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