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어떤 분이 내주하시는가?
삼위일체
timothy , 2005-08-24 , 조회수 (3362) , 추천 (1) , 스크랩 (0)

 

우리 안에 어떤 분이 내주하시는가?


위와 같은 제목의 글을 쓰면서, 제 깊은 속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타고난 지혜로는 이것을 알 수 없습니다. 오, 주여! 우리의 한계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지혜나 없어질 관원의 지혜가 아니요,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것이 되게 하옵소서! 이 주제에 대해 자신도 뭔가를 안다고 하는 교만에서 우릴 구원하소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깊은 것들'(고전2:10)을 성령으로 보이소서! 우리 마음눈을 열어 주사 당신이 큰 비밀이라고 하신 그리스도와 교회(엡5:32)를 보게 하소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소서(골2:2)! 주여 ‘그리스도의 비밀'도 보게 하소서(엡3:4)! 주여 우린 눈먼 자들이오니 빛 비춰 주소서! 다메섹에서 사울에게 당신을 계시하신 그 강렬한 빛 비춤이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도 비춰지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곳 성경질문 코너를 지켜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은 고전15:45 하반절의 ‘마지막 아담', ‘생명주는 영', ‘되었나니'의 바른 의미와 골1:27의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저의 질문 때문입니다. 즉 거듭난 사람 안에는 1) 누가 들어 오셨으며, 2) ‘안에' 들어왔다(영접)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저는 질문자(배우는 자)이나 저의 관점도 소개해 달라는 요청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을 앙망하며 저의 입장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1. 고전15:45의 ‘마지막 아담'은 누구인가?


여기서의 ‘마지막 아담'(the last Adam)은 당연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분은 ‘둘째 사람'이시며(47절),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요1:14)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아담은 참 사람이시라고 고백합니다(딤전2:5). 또한 이 분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어 여자에게 나게 하신 바로 그분 즉 아들 하나님(삼위 중 2격이신)이십니다(갈4:4).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치지 말고 조금 더 깊게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 아담께서는 지상사역 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 땅위에서 사역하시던 그 시점에 ‘자신 안'에 함께 계신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 8:16, 29, 14:10-11). 그러므로 이것을 근거로 우리는 아버지가 그분 안에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은 또한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십니다(마1:18). 따라서 마지막 아담은 참 사람이시요 또한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되, 다만 2격만이 아니시고 ‘삼위 모두가 서로 안에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함께 계시는(윤무)' <온전하신 하나님>(the complete God)이십니다. 골2:9은 이러한 이분을 '신격(Godhead, theotees(데오테스), 2320)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아담>을 <사람>이시요 <아들 하나님>일 뿐 아니라 그분 안에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포함되신 기묘자(사9:6)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전적으로 성경에 기초하며 바른 삼위일체관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균형 잡힌 관점에서 벗어나 <마지막 아담>을 크게 오해한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현 한기총 이단상담소장인 최삼경 목사님의 경우입니다. 최 목사님은 마지막 아담이신 지상사역시의 예수님을 가리키며, “한 하나님 안에 두 분 하나님이 들어 있다면...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만다...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교회와 신앙, 1997년 6월호, 164-165쪽)라고 주장함으로 바른 삼위일체관인 예수님 안의 나머지 두 위격의 상호내재 사실을 이단론인 양태론이라고 정죄했습니다. ‘잘못된 기준'이 지극히 ‘성경적인 사실'을 틀렸다고 정죄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마지막 아담을 위 서술처럼 참 사람이시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삼위가 다 포함된 온전하신 하나님이라고 성경적으로 믿기만 한다면 아래 고전15:45의 나머지 두 항목들은 짧은 설명만으로도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마지막 아담이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 는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성육신 때 입으신, 죄만 없으시되 우리와 똑같으신 예수님의 인성이?죽음과 부활후 '신령한 몸(a spiritual body)' 또는 ‘영광의 몸'이 되신 것을 가리킵니다 (고전15:44, 빌3:21). 물론 이것은 예수의 인성이 제 3의 본성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약의 이사야 9:6, 신약의 요한복음 1:14, 고린도 전서 15:45, 계시록1:4(4:5)등은 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루기 위한 일종의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생명주는 영은 누구인가?


한 마디로 ‘마지막 아담'은 ‘부활 전 예수님'이시라면, ‘생명주는 영'은 <부활 후의 예수님>이십니다. 즉 ‘마지막 아담'과 ‘생명주는 영'은 동일한 분이되, 성육신 때 입으신 육신(flesh)이 부활 후 ‘신령한 몸', ‘영광의 몸'으로 변형되신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주는 영이 ‘예수의 사람의 영' 이라거나 ‘생명을 주는 어떤 상태'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역시 여기에도 한번 더 강조 되어야 할 두 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1) 성경은 예수님의 양성 중 그 본질이 영인 신성 뿐 아니라 뼈와 살이 있는 그분의 인성까지도 포함하여 ‘생명주는 <영>' (a life-giving Spirit)(스코필드 주석성경 고전15:45절 관주q 참조)이라고 말합니다. 2) 앞서 보았듯이 이 생명주는 영은 다만 제2격 또는 제 3격이 아니라 <성자>(제 2격) 안에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성부>(제1격)와 <성령>(제3격)이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 co-inherence)하시고 이에 더하여 <예수의 영화롭게 된 인성>까지 포함된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개혁신학자인 앤드류 머레이는 그가 쓴 ‘그리스도의 영'에서 이 생명주는 영을 요7:39의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헬라어 원문엔 '저희에게(given)가 없습니다) 계시지 아니하셨더라' 고한 바로 그 성령(the Spirit)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이러한 '신성과 인성을 가진 영'이 요7:39 당시는 없다가(the Holy Spirit was not yet)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인성까지도 영광을 받게 된(glorified) 고전15:45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요7:39의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그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는 말씀은 주로 예수님의 인성이 부활 후 받게 될 영광을 가리킵니다. 그분의 신성은 이미 영원전부터 영광이십니다.


4. 주님을 영접한 사람에게는 ‘누가' 그들 안에 들어오신 것인가?


이 주제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완전한 구원의 과정 또는 거듭난 성도들의 바른 신앙생활의 비결을 언급하는 신약 성경 본문을 깊이 이해하는 것과 중요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편의상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이 문제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부와 성자는 아니고 <성령만> 사람 안에 들어오셨다는 견해


장로교 신학자인 차영배 박사는 출애굽기 19장 기록을 근거로 성부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린 죽어버린다고 하고, 요한일서 3장 24절을 거론하며 성령이 주 예수를 대신하여 사람 안에 내주하심으로 주 예수께서 직접 우리 안에 내주하실 필요까지는 없다 라고 말합니다. 즉 이 견해는 성령의 내주는 인정하되 성부와 성자의 사람 안의 내주를 부인합니다(교회와 신앙, 2001년 10월호, 124, 122쪽 참조).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성경진리로 받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1) 만일 삼위가 동 본질을 소유하신다면 성부만 아니라 성령이 사람 안에 들어와도 역시 사람이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부는 안 되지만 성령의 내주는 가능하다는 주장은 성부와 성령이 각기 다른 본질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말임으로 다신론 이단 사상이 되고 맙니다. 2) 이런 주장은 언약의 피를 근거로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신 출애굽기 24장의 여호와는 간과한 주장입니다(8-11절). 3) 요한일서 4장 23절 문맥은 ‘성령이 성자를 대리하여 내주하신다' 는 말이 아니라, ‘그(아들)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성령으로 인하여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4) 예수님과 아버지가 우리에게 오셔서 거처를 함께 정하시겠다는 요한복음14장 23절 하반 절은 차 박사의 위 주장을 무색케 합니다. 5) 그냥 ‘<아들>이 있는 자라야 생명이 있다'고 한 요한일서5장 12절을 읽는 이의 머리 속에서 <성령이 대리한 아들>이라고 변환시켜 읽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삼위 모두를 포함한 한분 하나님이 사람 안에 오셨으되 <예수의 인성은 제외 된다>는 견해


저는 이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위 견해가 "Extra Calvinisticum"로 지칭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개혁신학의 독특한 이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divine person' 으로 계시는 분이시되, ‘divine nature'를 따라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human nature'을 따라서는 하늘 위 하나님의 보좌 위에 계시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이 땅의 “성도들의 영혼(인성)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늘로 들려 올려져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인성과 실제적으로 연합하는 것”( http://tribe.or.kr/frame.htm 자료실 15번글)이 성만찬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런 주장은 ‘살과 뼈'라는 물질적인 요소가 포함된 그리스도의 인성은 부활 후에도 공간제한 아래 있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위와 같은 견해는 매우 논리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부분 사람의 합리적인 이성을 충족시키고 있음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면과 함께 깊은 속에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1) 성만찬시 지상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의 인성(영혼)을 저 하늘로 끌어올려 그곳의 예수의 인성과 신비적으로 연합시킬 수 있는 성령이라면, 왜 반대로 그 예수의 인성을 지상의 성도들에게는 이끄실 수 없는 것일까?


(2) 부활하신 예수님의 살과 뼈가 물질적인 것이라 사람 안에 내주하실 수 없다면 문 닫은 방에는 어떻게 들어오실 수 있었을까? 보통의 물체가 그러하듯 뼈와 살인 예수의 인성도 늘 가시적이어야 할 텐데 왜 엠마오 제자들이 그분이 예수이심을 눈이 열려 뵌 순간 갑자기 안보이게 되셨을까? 일반 뼈와 살은 중력을 못 이기고 결국 떨어지고 마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그것은 하늘에 머무는 것이 가능한가? 이런 의문들은 예수님의 ‘뼈와 살'은 물질임으로 사람 안의 내주가 가능하지 않다는 논리와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요20:26, 눅24:31, 행1:9은 이러한 사람의 이성과 논리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현실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성경엔 예수의 인성을 배제하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속성과 하나 된 표현들이 있습니다. 즉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the bowels)'으로 빌립보 성도들을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말합니다(빌1:8). 우리는 또한 종종 생활 중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때를 따라 우릴 도우시는 그분(히4:16, 2:18)을 체험합니다. 즉 우리 주님은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인자)로서 시험받으셨고 그 체험으로 시험받는 상황가운데 있는 우리 마음을 만지시고 위로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4) 그러나 이외에 위 견해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케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의 내주를 말하는 성경의 기록들이 ‘신성만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단순히 ‘그리스도 자신'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이 지상사역 시 그분을 인성만이 아닌 신성과 인성을 다 소유하신 한분 예수님으로 제시했던 것처럼, 부활 후에도 다만 그리스도의 신성만이 아닌 인성과 신성을 다 포함한 한분 그리스도 자체를 사람 안에 내주하는 생명으로 제시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내주를 말하는 몇 군데 성경구절들인 아래 성경본문에서 우리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부터 그분의 인성만을 저 하늘에 거리를 가지고 따로 둘 이유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은 이 땅의 주의 제자들을 핍박하다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이 ‘주여 뉘시오니까' 하니 말씀하신 분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I am Jesus whom thou persecutest)고 답변하십니다(1-5절).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이 땅위의 성도들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나)의 전인격을 보게 됩니다(롬8:34, 10). 이 사도행전 전후 문맥에서 '그리스도의 신성만' 제자들 안에 내주하셨다는 어떤 암시도 찾기 어렵습니다. 대신에 '나'라고 자신을 지칭하신 인자이신 예수님 자신이 계실 뿐입니다(요1:51).


# 요한일서 1장에서 제자들은 이 '영원한 생명'을 자신들이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졌다고 말합니다(1-2절). 5장에서는 이러한 아들 하나님을 ‘가진 자(have)'는 생명을 가진 것이라고 말합니다(12절). 물론 여기서의 아들은 성육신 이후의 아들임으로 당연히 그리스도의 신성만이 아니라 '하나님-사람' 그 자체이십니다. 만일 우리 안에 들어오신 생명이 다만 그리스도의 신성만이라면 제자들은 그 신성을 보거나 손으로 만졌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앞서 우리가 다룬 고전15장 45절 내용을 여기 대입해 말한다면 요일1장에서 제자들이 보고 만진 생명이 바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 생명이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것'(the life also of Jesus might be made manifest in our body)을 말합니다(10-11절). 예수라는 이름은 인성을 입은 후에 주어진 이름(마1:21)임으로, 예수의 생명에 당연히 이러한 인성이 포함되어야 옳습니다. 그 예수의 인성이 저 하늘에 따로 떨어져 있다면 어떻게 그것이 이 땅위의 성도들의 몸 안에서 표현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 골로새서 1장은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그리스도의 남은 고난)(24절)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27절)와 '바울이 전파한 그리스도'(28절)를 같은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십자가에서 구속을 위해 고난 받으신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그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바로 그분이요 바울은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 구절들에서 역시 성도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아니고 신성만 거하신다는 어떤 암시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며 바울은 이것이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취었 왔던 비밀이라고 말합니다(골1:26-27).


#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내주를 말하는 구절에서 그리스도가 인성은 아니고 신성만 내주하는 분이라는 어떤 암시도 없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13:5).


-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롬8:10)


- 그 날에는...'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0)


-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3:17).


오! 사람의 이성을 뛰어 넘어 역사하시는 주 하나님! 위와 같은 구절들에서 계시된 그리스도 당신은 어떤 분이신지요? 우리로 영이신 당신을?참되게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3) 고전15:45의 생명주는 영 자신이 사람 안에 들어오셨다는 견해


이것은 <생명주는 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인데, 이분이 '공기 같으신 영'(the pneumatic Christ)으로서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 있다는 견해를 말합니다. 즉 죄인이 회개한 후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요1:12)은 바로 ‘영광의 몸으로 변형된 인성을 가지신 성자를 구주와 생명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단 이 분은 다만 성자가 아니요 성부와 성령이 상호내재하신 생명주는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앤드류 머레이도 그의 책 ‘그리스도의 영'에서 이와 동일한 견해

(http://www.worldinvisible.com/library/murray/7764/7764c.htm)를 취합니다.

옆 원자료 제 5장에 있는 “...And the Holy Spirit could come down as the Spirit of the God-man --most really the Spirit of God, and yet as truly the spirit of man. ...”는 믿는 사람 속에 계시게 된 그 성령(그영)자신이 인성과 신성을 가지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분은 하나님 사람이신 분이 맞지만 그분의 (신성한)영만 사람 안에 왔다는 말이라고 위 문맥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렇다면 성도들이 영접한 생명주는 영은 사람 속의 어디에 계시는가 ?'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6하반 절은 ‘성령(the Spirit)으로 난 것은 영(spirit)이니'라고 하고, 고전6:17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영(one spirit)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근거로 우리가 영접한 생명주는 영은 우리 존재의 깊은 속에 있는 <사람의 영>(고전2:11) 안으로 들어 오셔서 바로 그 사람의 영과 연합하여 한영을 이루시고 계신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거듭남'에 대한 참된 설명이요 정의입니다(요3:6). 이러한 거듭남 이후 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지금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확대하시고 계십니다(엡3:17). 그리고 마침내 주님재림시 우리의 죽을 몸까지 구속하사(롬8:23) 우릴 영광 안으로 이끄실 것입니다(히2:10).


주 예수님이 마16:18에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그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은 이처럼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생명)의 증가(increse)(요10:10하, 골2:19, 엡1:23)로 세워져 갑니다. 계시록 끝부분에 소개된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의 최종 결과입니다(계21:2, 9-10, 고후11:2). 다시 말씀드리자면,이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 받은 '새사람'(one new man)이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른 ' 한 온전한 사람'(a perfact man) 의 완성입니다(엡4:24, 13).


사람마다 자신의 믿음의 확신을 따라 위 세 견해들 중 어느 하나를 취하여 믿을 자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개인적으로 위 세 번째 견해가 가장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성경을 본 이후로 주님은 제게 가깝고 친근하셨으며, 성경은 제게 투명하게 열렸음을 간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그분의 기대에 못 미치고 그분을 탄식케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부인하고 제 안에서 저의 생명 되신 주님을 제 존재 안으로 받아들여(요6:57), 매일의 삶 가운데 살고 표현(빌1:20하-21)하는 시간이 처음 믿을 때보다 날로 늘어나는 것은 주님이 제게 주신 큰 긍휼입니다. 날마다 이 분을 더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제겐 가장 큰 기쁨입니다(빌3:8-9).


5. 삼위 하나님이 믿는 사람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요1:12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고 말합니다. 또한 골1:27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러한 본문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우리가 믿음으로 그 이름(주 예수님)을 인격으로 우리 안에 영접해 드리면 부활하신 주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깊은 속인 영 안에 내주하신다는 의미'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접한 주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신데(골3:4), 이 생명이 우리의 존재 밖에만 계시면, 요3:6, 고전6:17, 요10:10하, 요일5:12, 골2:19, 막4:26-29, 갈2:20, 빌1:21, 3:8, 고후13:5 등등의 말씀과 상충되며 또 우리의 신앙 체험과도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외에도 1)‘우리 안에'를 ‘(실제로는 그리스도가)우리 밖에 계시나 우리를 위하시는' 분으로 보는 견해, 2) '우리 안에'는 문자적으로 진짜 우리 안에 계신 것이 아니고 그분이 ‘우리의 삶 속에서 통치하시는 것'이란 견해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위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1:27)에서 '..안에'에 대해 위 셋 중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거듭남, 거룩케 됨, 새롭게됨, 변화, 형상을 본받음, 영화롭게 됨 등 화목케 됨 이후 '하나님의 생명'에 의한 우리의 구원 방면(롬5:10하)과 관련된 성경말씀들에 대한 이해와 체험에 현격한 차이가 있게 될 것입니다.


(위 '..안에'를 이해하는 세 가지 견해들에 대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알기 원하시는 분들은 루이스 B. 스미디즈 저(오광만 역)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Union with Christ)(여수룬, 1991) 제 5장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169-206쪽)를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결론적으로,

솔직히 처음에 이런 글을 쓰려고 했을 때는 제가 선호하는 관점을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수긍하기 어려운 견해를 최대한 깎아내려 보겠다는 생각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이것이 그러한 '변론의 영'으로 다룰 문제가 아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과 위격은 사람의 이성과 논리로 다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깊은 속에서부터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글들에서 저의 육에 속한 흔적이 여전히 만져지는 부분이 있다면 저를 용서하여 주시고 너그러이 덮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저는 우리 모두가 아래 골로새서 1장 25-29절의 바울의 간증을 주님 앞에 가져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여러 번 읽어볼 것을 제안하는 것을 저의 부족한 글의 결론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아멘.


‘내가 교회 일군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출처: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