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찬송가는 재고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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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othy , 2005-08-24 , 조회수 (3098) , 추천 (0) , 스크랩 (0)

참고 자료로 올립니다.

출처는 목회자 신문(http://www.mokhoeja.com/) 칼럼 359번

(http://www.mokhoeja.com/column/xinu_view.php3?SN=359&CP=0) 입니다.


번호359 정장복칼럼-우리의 찬송가는 재고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찬송가는 재고되어야 합니다

※ 유럽이나 미국교회 예배에 참석하면 우리가 부르는 찬송들이 거의 보이지 아니합니다. 무슨 연고인지요?

※ 미국의 장로교 찬송에 아리랑 곡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찬송에는 한국적 가락이 전혀 없습니다. 어찌된 사연인지요?

※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는 어느 시대 어떤 영향을 받은 찬송들인지 알고 싶습니다.


외국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이나 예배신학자들이 한국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예배 시간에 부른 찬송가 곡들이 매우 반갑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연인즉 자신들이 어릴 적에 부모님들이 부흥회를 다녀와서 부르던 찬송들을 한국교회가 많이 부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서구의 민요곡으로 만들어진 찬송만 부르고 한국인의 음률이 담긴 찬송은 어찌하여 개발하지 않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때마다 느낀 수치감은 대단한 수준의 것이었으며 우리의 찬송이 없는 현실을 몹시나 안타깝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개신교가 하나의 찬송가를 가지고 각 교회가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은 분명히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1949년부터 1960년까지, 그리고 1983년부터 오늘까지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파주의가 강한 한국교회가 일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교단들이 모여 찬송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서로의 전통과 주장을 수용하다가 찬송가의 본래적 방향과 내용에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른 찬송은 「찬양가」를 비롯하여 「협동찬송가」, 「복음가」, 「부흥성가」등에 수록된 복음찬송이나 부흥성가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이제는 이것만이 기독교 예배에서 불러야 하는 정상적인 예배찬송의 전부로 아는 착각 속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에서 부르는 찬송의 역사는 이러합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이 있기 전까지 예배 현장에서의 노래는 훈련받은 찬양대의 독점물이었습니다. 루터는 회중이 참여하는 예배찬송의 시급성을 느껴 귀에 익숙한 그들의 곡에다가 시편을 활용하여 회중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는데, 이것이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예배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쯔빙글리와 칼빈은 예배찬송의 존엄성이 무너지고 노래가 인간 중심으로 흐름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처럼 시편송을 단순한 음률에 넣어 악기의 도움 없이 예배찬송으로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그후 화란의 개혁교회는 독일의 루터 교회가 유럽의 전지역으로 불길처럼 번져가는 원인이 그들의 일상화된 찬송 때문이라는 판단을 하고, 자신들도 시편송의 대중화를 위하여 편곡을 하면서 보급에 힘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후 감리교의 웨슬리를 비롯하여 아이삭 등이 대중을 모아놓고 복음을 전하는 부흥회와 같은 집회에서 그들에게 맞는 음악을 다량으로 만들어 보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의 찬송은 주로 신앙간증의 성격이 다분하였고, 스스로의 결단 또는 탄원의 내용을 대중적인 곡에 담아 보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부흥성가는 바로 미국의 1, 2차 대각성 부흥운동과 연결되어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특별히 19세기에 있었던 미국의 제2차 대각성 부흥운동의 확산과 함께 있었던 서부 개척기의 인구 이동은 회심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를 성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때 집회에서 불렀던 음악이 주로 우리가 부르는 찬송들이었습니다.


이 부흥운동의 과정은 각 교회가 해외선교에 열을 올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여파는 세계의 복음화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인 1884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반도에도 그들이 보낸 선교사들에 의하여 복음이 상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 교회의 찬송가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가져온 복음찬송이나 부흥성가가 주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아무런 수정도 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세계의 개신교는 찬송가의 갱신에 지대한 관심을 두었습니다. 모든 나라의 교회가 예배에 합당한 찬송의 개발을 서두르면서 시편을 대대적으로 찬송가에 도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교회는 악보도 없이 시편만 주로 담은 찬송가를 가지고 있으며, 미국 장로교는 1990년에 펴낸 찬송가에서 시편송이라는 항을 만들어 100편의 시편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찬송가도 우리 민족의 음률에 맞추어 기독교 예배의 찬송에 근원이 된 시편을 대폭 실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화와 정서가 함께 움직이는 곡조를 가지고 시편을 찬송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의 예배가 세계 어느 교회에 내 놓아도 자랑스러운 수준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도 우리의 언어와 정서가 서린 예배를 정착시켜 주어야 합니다.


목사, 장신대교수


※ 위 내용은 저자의 허락에 따라 단행본 내용 중 일부를 독자들을 위한 목회자료로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