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된 사람들도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고, 이러한 자신의 죄를 처리하기 위하여 자백을 해야 합니까? 아니면 이미 죄와 상관없는 의인이므로 더 이상 죄를 자백할 필요가 없습니까? 또는 참되게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적으로 느끼는 죄의식(guilty feeling, 양심의 소리)"을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주위 사람들은 그 사람의 도에 지나친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고 있는데 정작 죄사함 받아 의인이 되었다는 장본인은 전혀 이에 대해 인식이 없고 회개할 필요성도 못 느낀다면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사람들 사이에서 한결같지 않은 것은 이 주제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짧은 글에서 저는 먼저 왜 이 문제가 심각한지에 대한 이해를 돕도록 몇 가지 사례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은 죄가 없다는 주장들과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죄(Sin)가 있다는 증거들을 차례로 제시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어서 죄를 합당하게 처리하는 길을 결론적으로 말할 것입니다.
1. 믿는 이들의 죄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몇 가지 실화들
1900년대 초반에 중국본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오순절 계통의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은 죄가 뿌리 채 뽑혔고 성령이 충만함으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 고 공공연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실제로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남녀 신도들이 혼숙형태의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이러한 실행이 어느 기간까지는 별 탈없이 잘 이뤄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러한 실행은 심각한 '도덕적인 타락'으로 이어졌고 결국 이러한 실행에 참여했거나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켰습니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중국 본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자신들은 죄를 안 짓는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모임과 최근에 연결된 새 신자와 함께 공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인도자중 한 사람이 매표소에서 인원수대로 표를 사지 않고 조금 부족하게 산 다음 한 번 사용한 표를 다시 가지고 나와서 남은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인도자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나 새 신자의 눈에 그런 행위는 분명히 불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그 새 신자는 그 단체와 관계를 끊었습니다.
한 형제님은 나이가 80이 넘은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타락한 육체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노인이고 자신의 몸을 가누기도 쉽지 않을 때에도 자매가 혼자 운전하는 차는 절대로 함께 타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평생동안 어떤 경우에도 문이 닫힌 방이나 사무실에 두 남녀만 남아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도록 지혜롭게 처신했습니다.
위 사례에서 보듯이 믿는 이가 죄를 지을 가능성에 대한 진리인식 차이는 실제 생활 속에서도 현저한 차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제 믿는 이가 죄를 지을 수 있는지에 대한 상반된 입장들을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습니다.
2. 믿는 사람들은 죄와 무관하다는 입장들
이 부류에는 믿는 이들의 본성 안에 '내주 하는 죄'(the indwelling sin)가 없다고 하는 영지주의자들, 믿는 사람은 생전에 완전한 성화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완전주의자들'(원죄제거설 주장자들), 요일3:9, 5:18을 잘못 해석하여 거듭난 사람은 죄성이 뿌리 채 뽑혔다고 믿는 사람들이 해당될 것입니다. 더 넓게 보아서 구원받은 사람은 죄사함 받는 순간에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해결되었다고 믿는 것도 여기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찌하든지 이러한 입장들을 취하게 되면 위 사례에서 보듯이 죄에 대한 경계나 자백의 필요성을 상대적으로 덜 느끼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참고로 요일 3:9의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그에게서 났음이라"라는 말씀은 믿는 이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한 로마서 6:2 말씀처럼 '거듭난 사람은 더 이상 습관적으로 죄 안에 살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일 3:9의 '죄를 짓지 않는다'라는 문구에서 쓰인 동사인 '포이에오'는 'doing(things) habitually and continually by abiding (in the things)'의 뜻이 있습니다. 즉 양도 어쩌다가 진흙에 더렵혀지긴 하지만 돼지처럼 습관적으로 흙구덩이에 살지는 않는다는 의미입니다(RcV 요일1:6 각주 5참조).
믿는이는 절대로 죄를 안 짓는다는 착각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라고 한 요일 5:18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잘못 해석하는데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요 17:15에 근거하여 그것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또 어떤 분은 이것을 '하나님의 영과 연합된 거듭난 사람의 영'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요3:6, 고전6:17).
둘 중 어떤 해석을 취하더라도 이 구절이 믿는이가 죄를 안 짓는다는 근거일수는 없습니다. 위 구절을 성도들이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우리의 실제 체험과도 맞지 않습니다. 즉 바울은 로마서 8:6에서 거듭난 믿는 이들의 상태를 다루면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육신의 생각의 결과인 사망이 죄로부터 오는 것임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또한 자신은 거듭난 이후 육신의 생각을 단 한순간도 해 본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3. 믿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본성의 죄가 남아 있다는 주장
이것은 성경이 밝히 증거 하는 것임으로 많은 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즉 요일1:8은 '만일 우리(믿는이)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요일1:10도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이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sin that dwelleth in me)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7절). 이런 표현은 같은 장 20절에서도 반복해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거한다'는 말의 원어(오이케오)의 뜻은 잠시 머무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죄가 우리 안에 '자기 집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구원받은 후에는 죄가 빠져나갔다거나 뿌리 채 뽑혔다는 성경근거가 없는 한, 이 구절이 기술하는 시점이 바울의 회심 전인지 후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죄가 거하는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도 어떤 분은 롬7:17절과 18절을 함께 보아 죄는 우리의 육체 (flesh)안에 거한다고 해석하고 또 어떤 분은 이런 해석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어찌 해석하든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성경 본문을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성경본문의 관점에 일반 신학자들도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즉 존 칼빈은 '원죄는 죽을 때까지 신자 안에 존속하며 신자의 성화는 죽음 또는 죽음 직후에 이뤄진다'고 말합니다. 웨슬리는 '원죄로부터 깨끗하여 지는 온전한 성화가 신자 생전에 이뤄진다'고 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두분은 성화의 시기에 대해 이견이 있을 뿐 믿은 후에도 여전히 성도들 안에 죄성이 남아 있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성기호, 교회와 신학논쟁, 성광문화사, 1995, 72-79쪽).
4. 죄(들)를 합당하게 처리하는 길
우리는 지금까지 믿은 후에도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으므로 성도들도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점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합당하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가 참으로 관심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은 후에 지은 죄로 인해 구원이 취소되고 지옥에 가진 않지만, 하나님 앞에 자백하지 않은 죄들로 인해 양심이 마비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끊어지며, 그 결과 생명의 성숙에 있어서 심각한 어려움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전에 죄를 지었더라도 죽으면 다 해결된다(죽는 순간 완전성화 된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 것은 믿는이들은 다 그리고 반드시 죽은 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며 생전에 우리 몸으로 행한 것과 우리 입으로 말한 그대로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임을 성경은 밝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5:10, 롬14:10-12, 마12:36-37, 고전3:14-15). 죽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설사 믿는이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시인하더라도 그 해결방법은 제각각 일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주님이 죄를 다 해결하셨다'는 성경진리를 오해하여 깊은 속에서의 양심의 책망이 있음에도 그것은 사탄의 참소요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애써 무시해 버립니다. 이런 식의 해결방법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양심이 무디어지게 만듭니다. 그 결과 가족이나 친구 직장 동료 등 주위 사람들에게 고통과 손해(심지어 금전적인 손해)를 주고도 정작 자신은 아무런 느낌이 없게 됩니다. 만일 죄 자백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이런 일들을 한 무리가 집단으로 행할 때는 이런 분들을 바로 잡아 도움을 드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다른 극단은 죄의식과 사탄의 참소에 눌려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가지 유형은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득죄한 것은 인정하고 또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서로 난처하게 과거사를 거론할 것 없이 앞으로 더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유형 모두에게 부족한 한 가지는 '철저한 죄의 자백'입니다.
그렇다면 믿는이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이 마련하신 길은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주님은 모든 죄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먼저는 빛가운데 이러한 성경진리들을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깨달은 진리를 철저하게 생활 중에 실행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의 눈이 열려 보아야 할 것은 1)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죄를 정죄 하셨다는 것(condemned sin in the flesh)(롬8:3), 2)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의 옛사람이 이미 죄를 향하여 죽었다는 것(how shall we, that are dead to sin)(롬6:2, 6-7, 11) 3)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자백하기만 하면 씻겨지고 용서되도록 보혈이 예비 되었다는 것(요일1:9)(주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다시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피는 영원히 효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민수기 19장의 '붉은 암송아지의 재'로 예표 되었습니다. 즉 송아지는 한 번만 죽되 그 재를 보관하여 두었다가 속죄제를 드릴 때마다 재차 사용되었던 것입니다(민19: 2-4, 9, 17절 참조)을 분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가 부득불 죄를 지었을 때는 하나님 앞에 그리고 필요하면 사람 앞에 '철저하게' '자백'(confess)해야 합니다. 만일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 있으면 입으로 만의 자백에 더하여 마땅히 손해를 배상해 줘야 합니다. 우리는 신구약에서 이런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눅19:8, 레위기 5:16, 민5:7-8). 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있어서 소홀히 함으로 사람들을 실족시키고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끊어져 있는지요!
지금까지는 열차가 철로에서 이탈한 경우 어떻게 다시 복귀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이탈하지 말고 계속 철길을 달리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6장57절 본문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을 "먹음"으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는 것"입니다(갈2;20). 이것은 순간 순간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연합된 영으로 돌이키고 우리 안의 연합된 영(고전6:17)으로 우리의 타락한 몸의 행실들을 죽음에 넘기우도록 영을 좇아 사는 것을 포함합니다(롬8:6, 13-14, 갈5:16).
오! 다만 자백함으로 언제든지 적용할 수 있는 보혈이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 안에서 생명되게 하시니 이 또한 어떤 은혜입니까? 이처럼 피와 생명을 우리에게 주사 좁고 거룩한 생명 길을 가게 하시는 그분의 경륜을 찬양하고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