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일서 1장의 자백과 죄 씻음
구원
timothy , 2005-08-24 , 조회수 (3890) , 추천 (0) , 스크랩 (0)

성경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롬14:23).


불신자가 믿음으로 행할 리가 없으니 모든 불신자는 죄인인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면 거듭난 구원받은 사람은 항상 믿음으로 좇아 행하는가? 만일 그들이 믿음으로 행하지 않음으로 죄를 범한 것은 어찌되는가? 라는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분들은 '주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다 해결하셨으므로 이것을 믿으면(또는 깨달으면) 죄 없다. 즉 우리는 죄가 있었지만 주님이 다 해결하셨기 때문에 죄가 없다. 만일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여전히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기 죄를 자백하는 사람은 구원 못 받은 것이다' 라고 까지 주장하십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지은 죄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자백할 필요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구원받아 거듭난 이후에도 여전히 자백해야 할 죄(들)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상반된 주장들 중 어느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인지를 분별하려면 우리는 요한 일서 1:7-10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저는 후자가 더 성경적인 가르침이라는 전제아래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1. 요한 일서는 불신자를 향해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문맥이나 글의 흐름을 통해 특정인이나 특정 목적 또는 특정 조건을 말하는지 여부를 세심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우선 이 요한 일서가 과연 누구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인지를 보겠습니다.


요일1:8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또한 10절도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위 말씀은 "우리"가 죄가 있고 또 범죄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과연 누구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위 구절들이 지칭하는 "우리" 는 최소한 이 글을 쓴 사도 요한과 이 글의 수신인을 포함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선 이 서신을 쓴 사도 요한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요한 일서 5:11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고 했음으로 이 서신서의 수신인들도 불신자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또한 요일1:7은 예수의 피로 인해 모든 죄에서 깨끗케 되는 "조건"(But if we...)으로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사람이 죄를 씻음 받을 수 있는 조건인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은 불신자들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불신자가 구원받기 전에 '빛 가운데 행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글은 불신자만을 향하여 '죄인에서 돌이켜 자백하고 의인되라'고 촉구하는 글이 아님이 자명해 집니다.


위와 같은 점들을 감안해서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요한 일서 위 인용본문은 거듭난 구원받은 자들에게 그들도 죄를 지을 수 있고 이것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어떤 책임을 이행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믿는 이들의 죄(들)는 자백함으로 용서받고 깨끗케 됩니다.


미국의 형사재판과정을 보면 재판부는 먼저 피의자에게 자신이 죄를 지었는지 아니면 무죄인지('guilty' or 'not guilty')를 밝히도록 요구합니다. 만일 피의자가 죄를 시인하면 그 다음엔 형량만을 결정하면 되지만, 죄가 없다고 계속 고집하면 그 사람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조사하고 그것이 매듭 지어져야 비로소 형량을 정할 수 있습니다. 환자의 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를 하려면 최소한 환자가 자신에게 '치료할 그 무엇이 있음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먼저 필요할 것입니다. 나는 아픈 곳이 전혀 없는데 식구들이 강제로 나를 병원에 데려온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은 가장 치료하기 힘든 사람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거듭난 믿는 이들인 "우리"도 죄를 지을 수 있을 수 있으며 그 죄들이 용서되고 깨끗게 되는 길은 '자신의 죄들을 자백하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10, 9).


그렇다면 이제는 믿는 이가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어디까지 자백해야 하는가 하는 '자백의 범위'와 '대상'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우리가 자백해야 할 죄들은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운데 주님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주님과 깊은 교제가 없고 여전히 어둠가운데 있는 사람은 항상 자신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겐 다른 사람들의 허물만 크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도 어떤 계기가 되어 빛 가운데 주님과 깊은 교제 안으로 들어가면 평소에는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던 수많은 죄들, 허물들, 실수들, 남에게 상처 준 것, 교만한 것, 말 안들은 것, 남을 함부로 정죄 한 것, 금전적으로 남에게 손해 끼친 것, 잠깐 쓰고 준다고 가져왔다가 돌려주지 않은 것, 거짓말 한 것, 심지어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강팍한 마음 등등이 생각날 것이고 그것들에 대해 진심으로 자백하며 주님께 용서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백의 실행은 통상 내가 뭘 잘못했을까 하고 자신이 자백할 항목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고 주님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이뤄질 때가 많습니다. 마태복음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 하라'고 권면 합니다(마5:23-24). 그러므로 이러한 자백과 화목은 주님 앞에서 뿐 아니라 원망들을 만한 일을 가한 그 사람 앞에 가서도 행해져야 합니다. 과거에 돈을 빌리고도 갚지 않은 친구에게 가서 '내가 믿어보니 너무 너무 좋으니 너도 예수 믿으라'고 진심으로 전도하더라도 그 친구는 그가 자신의 과거 허물을 해결할 때까지는 돈 떼먹고 간 사람의 말을 그리 많이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의 장애물들은 마땅히 쌍방이 살아있는 동안에 해결해야 할 것들입니다(마5:25).


이런 방면들을 고려해 볼 때 '자백을 하기는 하되 다만 주님 앞에 가서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면 되지 미주알 고주알 일일이 자백할 필요까지는 없다'라는 일부 단체의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자백의 범위를 바로 가르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사람에게 끼친 손해나 허물은 다만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 '나는 이런 자입니다' 라고 시인하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죄나 허물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자백함으로 또 다른 차원에서 양심의 참소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원칙이 맞다면 천주교에서 실행하는 고해성사는 성경적인 자백의 범위를 벗어난 경우이며 단지 그 고해성사를 듣는 신부에게 직접적으로 죄를 지었을 경우에만 합당할 것입니다.


3. 믿는 이가 죄를 짓고도 자백치 않으면 지옥 가는가?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믿은 후의 죄와 이에 대한 자백은 불신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죄는 속죄제물과 속건제물로 영 단번에 드려진 어린양이신 예수의 피로 인해 이미 영원토록 해결되었음으로 소위 다시 '죄인'-거듭나지 않은 불신자-이 되어 지옥 가는 일은 없습니다(히9:28, 고전15:3, 벧전2:24, 레위기 4-5장, 사53:11, 롬8:3, 고후5:21).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식을 낳은 후 자기 자녀가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해서 멸망시켜 버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의 득죄로 인해 부모와의 달콤한 대화가 끊어지고 서먹해지는 관계가 생길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자백하지 않은 죄들로 인해 우리의 "양심이 둔해지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끊어짐으로 어둠가운데 거하여 그 결과 영적 생명의 성숙이 현저하게 방해받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실은 바로 이 점이 적지 않은 숫자의 기독교인들이 참되게 거듭났더라도 자라지 않고 여전히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또한 이처럼 '죄 자백'을 소홀히 하여 둔감해진 양심이 그들로 하여금 말로는 크리스챤이라고 하면서 실제 사회생활에서 세상사람들과 큰 차이 없이 처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 혼탁한 이 시대를 밝히는 등불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양심은 참으로 더욱 청결하게 보존될 필요가 있습니다(딤전1:5, 19).


이에 더하여 믿는 이들의 자백하지 않은 죄들은 장차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심판을 받고 징계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한 말, 우리가 한 행동 그대로 심판 받을 것임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딤전1:19, 마12:36-37, 롬14:10-12, 고전3 13-15, 고후5:10). 이러한 징계의 내용이 단순히 큰상 작은 상을 가리는 것만이 아니라 "훨씬 더 가혹할 수 있다"는 것을 천년왕국에 대한 성경전체의 계시를 통해 균형 있게 볼 수 있는 분은 주님께 큰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믿는 이들의 죄 자백과 주님의 용서'에 대한 진리가 균형 있게 가르쳐지지 않음으로 인한 성도들의 혼란과 주님의 몸된 교회 간증의 손상은 적지 않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음으로 죄가 없다거나, 죄가 있더라도 이미 영원토록 용서받았음으로 자백할 필요가 없다거나, 실제로는 수다한 죄를 지었음에도 양심이 무디어져 별로 감각이 없는 분들은 참으로 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장차 이에 대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양심은 청결하게 유지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모든 것들에 대해 주님 앞에 나아가 수시로 자백할 뿐 아니라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매일의 생활 중에서 살아 나타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갈2:20, 고후5:21). 즉 우리가 잠시 실패하여 육신을 좇아 살았더라도 마음을 강퍅하게 먹지 말고, 즉시 돌이켜 자백하여 예수의 피로 죄들을 씻어야 합니다. 그리고 평강 가운데 계속해서 그 영을 따라 생활해야 합니다. 즉 사도 바울처럼 자신을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일서가 묘사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모든 것을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 모두를 이러한 실제 안에 늘 머물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the Spirit : 사람의 영과 연합되신 생명 주는 영(고전6:17))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