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희들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운동회가 학생들에겐 그야말로 신나는 연례행사였습니다.
새로 수확한 고구마, 밤, 땅콩을 삶고, 김밥을 싸서 준비한 점심, 운동장에는 휘날리는 만국기, 이런 저런 공지사항을 알리는 선생님들의 마이크 소리, 청군 백군 모자를 쓰고 신나서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는 장난꾸러기들...
아! 지금 생각해도 활력이 넘칩니다. 운동회에서 곤봉체조, 기마전 등도 볼만했지만 가장 스릴 넘치는 것은 역시 등수에 따라 상품이 걸린 달리기 시합입니다. 부모님들은 다 자기 자녀가 달릴 차례가 되면 마음을 조리고 지켜보게 됩니다. 한 번에 여덟 명씩 조를 이뤄 뛰지만 상품은 오직 1, 2, 3등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고학년 전체가 운동장을 일곱 바퀴 반을 달려야하는 1500미터 경주는 6등까지 상품이 있었습니다. 1등은 공책이 30권이나 되어 그야말로 푸짐했지요.
1. 이기는 자'(overcomer)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한 것입니다.
위와 같은 일상의 예에서도 우린 "이긴 자에 대한 보상"의 원리를 보게 됩니다. 또한 이런 행사에 대한 더 깊은 의미는 학생들을 체력단련을 통해 건강한 국민으로 키우려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난 성도들이 승리하는 믿음생활을 통해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의 성취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뜻은 씨를 심어 수확하는 것입니다. 즉 "그분 자신"이 생명의 씨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 속에 뿌려지시고 자라서 익고 수확되는 것입니다(요일3:9, 막4:26-29, 요일5:12, 히10:7, 마16:18, 엡1:4-5, 4: 11-16, 갈4:19, 롬8:29). 즉 사복음서는 '씨이신 그리스도'를, 서신서는 성도 안에서 '자라시는 그리스도'를, 계시록은 '수확되시는 그리스도'를 계시합니다(마13:3, 고전3:6-9, 골2:19, 엡1:23하, 계14:14-16)).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기는 자'는 먼저 익은 자들 즉 '첫 열매들'입니다(계14:4).
2. 사탄의 전략은 사람들을 "생명(성숙)"에 대해 무관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사탄의 왕국"을 이루는 뱀과 뱀의 후손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는 여자의 후손(그리스도와 믿는 이들) 간의 전쟁예고 후 숱한 영적 전쟁이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이 순간에도 믿는 이들 안팎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마16:18, 12:26-29, 요일3:10, 벧전5:8, 롬13:12-14).
그런데 자세히 보면 천하를 꾀는 자, 거짓의 아비, 세상의 임금인 사탄이 성도들을 이겨먹는 방법도 가지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 물질, 건강(치유), 승진, 학교진학, 기적, 출세, 심지어 성경지식을 사람들에게 주어 이런 것들로 만족케 하고 "생명 되신 주님"을 추구하지 못하게 합니다(마4:8-9, 요5:39-40). 즉 성도들을 엉뚱한 것에 한눈 팔게 하는 전략을 써서 하나님의 뜻인 '사람들이 하나님 자신(성령)으로 충만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엡1:22-23, 5:15-17).
고린도 교회는 이런 건강한 가르침을 무시하고 엉뚱한 데 세월을 낭비하고 결국 젖이나 먹는 영적 어린아이로 사도 바울에게 발견되었습니다(고전3:1-3). 오늘날 한국교계의 현실은 과연 어떠한 지요? 깊은 곳에 탄식과 기도가 있습니다.
오! 누가 사탄이 던져준 '사탕과 장난감들'을 던져버리고 기꺼이 '생명 되신 그리스도' 한 분만을 주목하고 사랑할 것인지! 주님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이기는 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계2:7상, 고후3:16-18).
3. 한국교계에는 '이기는 자'에 대한 균형 잡힌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이기는 자" 개념은 특히 요한 일서 5장과 계시록 2-3장에서 강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묘사된 이기는 자의 양상은 매우 다양하고 그 실체가 얼마간은 가려져 있어 여간 해서는 그 중점을 잡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성도 분들에겐 '이기는 자'(계2:7, 11, 17, 26, 3:5, 12, 21) 개념 자체가 생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 이것을 언급하는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혼돈과 치우침에 빠져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은 대다수 분들의 안일한 생각처럼 단지 상으로 "공책 몇 권"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의 성취여부와 아버지의 뜻대로 믿음생활 한 보상으로 천국에 들어갈 것인지를 결정짓는 심각한 일입니다(롬12;2, 엡5:16-18, 마7:21,). 또한 사탄에게 속아 헛된 일에 세월을 낭비한 분들은 일정기간 '불을 통과하는 징계'(지옥은 안 가지만)를 받게될 수도 있음을 말해주는 진지한 주제입니다(마25 :1 -12,30, 빌2:20-21, 고전3:15).
그러나 한편 천년왕국, 대 환란과 휴거시기를 포함하여 요한계시록 내용 이해에 있어 큰 폭의 견해차이를 보이고 있는 한국교계의 현실을 감안할 때, 이런 주제를 가지고 세세히 파고들어 무익한 논쟁에 말려드는 것도 지혜로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이기는 자'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몇 가지 원칙적인 개념을 선명하게 확인하는 굵은 그림들을 먼저 그려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강조하지만 이런 글을 쓰는 주된 목적은 우리 모두가 느슨한 믿음생활을 한다면 장차 심각한 징계가 있을 것임을 경고 받고, 생명이신 그리스도 한 분만을 뜨겁게 사랑하여 "주님자신"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엡1:23).
(2) 성경은 제대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만일 성경을 원칙도 없이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다보면 본문내용과 정반대의 뜻으로 알고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은 '누룩'을 항상 부정적으로 언급하셨건만,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 부풀리고 확장하니 얼마나 좋으냐고 해석하는 식입니다(마13:33, 16:6, 고전5:8). 이런 식의 해석은 끔직한 일입니다. 가장 안전한 성경해석방식은 전체문맥 안에서 특정 말씀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요한 일서 안에서 '이기는 자' 의 의미를 합당하게 이해하려면 먼저 요한 일서 전반에 대한 그림을 파악하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1. 요한 일서는 '생명'과 '생명의 교제'와 '생명을 살아냄'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복음과 요한 서신들에서 "생명"(Zoe)을 아주 많이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요한 일서도 이러한 노선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 그리고 또 다른 자녀들과 나누는 신성한 생명의 교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일서는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첫 단락인 1:1-2:11에서는 신성한 생명의 교제를 위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죄들을 자백하고, 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의 교제'의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1:5-2;2, 2:3-11).
둘째 단락인 2:12-27에서는 생명이신 주님의 내적 활동이신 기름부음의 가르침에 대해 말합니다. '기름부음'은 특히 생명의 성장에 따라 하나님을 알아 가는 단계와 하나님 안에 거하는 문제에 대해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12-19, 20-27).
마지막으로 2:28-5:21에서는 생명 가진 분들의 생활의 간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의를 행하고(2:28-3:10상), 신성한 사랑-천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을 실천하고(3;10하-5:3), 생명의 교제를 방해하는 세상, 사망, 죄, 마귀, 우상들을 거절하고 이기는 것입니다(5:4-21).
2. 우리 안의 신성한 생명과 중보 기도로 이기는 것입니다.
위 전체문맥 이해에서 보았듯이 같은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이겨야 할 대상은 음부의 권세 아래 있는 한 영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세상'-코스모스(5;4), '사망'(5:16), '죄'-모든 불의(5:17), '사탄'-악한 자(5;18) 그리고 '우상'-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여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모든 것(5:21)입니다. 오! 무엇으로 이 거대한 대적 골리앗을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은 그것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요일5:4). 그런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참된 믿음은 생명 되신 그리스도만이 참이고 다른 것들은 썩어질 거짓임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히11:6). 믿음은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갈2;20, 빌3:8). 사탄에게 속한 "한 자리"를 얻어 보려고 사탄과 은밀한 뒷거래를 하고 있으면서 사탄을 이긴다고 큰소리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옹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사탄은 그에게 직격탄을 날려 버리지 않겠습니까?
한국에 기독교인들이 천만 명이라고 외치는 분에게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고 말씀하십니다(눅18:8) 그렇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소수의 바보들"만이 신성한 생명 안에서 저들을 이기고 있고 또 사망에 이르지 않은 죄를 지은 약한 지체들의 이김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습니다(5:14 -17).
오! 만일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라면 'we are all men most miserable!'(고전15:19-20).
3. 한국교계는 엄중한 하나님 말씀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적을 '이기는 문제'는 최소한 거듭나서 생명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한국교계는 먼저 생명 되신 아들을 "참되게" 영접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이상한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안에 한 인격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사시는 문제임을 바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빌3:10, 갈2:20). 씨도 안 심고 싹이 나길 바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명 떡이신 주님자신을 먹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을 의미하는 "믿음의 행위"(요5:57, 갈2:20)를 말하면 '행위 구원을 가르친다'고 경솔하게 정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줄을 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심지어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다'고 까지 말합니다(요일2:29, 3:10).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결과적으로 성도들의 생활의 표준을 끌어내려 세상사람들과의 구분이 없게 한다면 심각한 혼란이 올 것입니다. 아니 이미 와 있습니다(약4;4).
생활의 증거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성경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럴 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날을 기억하며 깨이게 될 것입니다(롬14:10, 고후5:10-11, 마7:21, 요일2:17, 약2:17, 요일2:29, 27-28, 5;2-3).
(3) 계시록 2-3장에서 주님은 일곱 교회들 각각에서 "이기는 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계2:7, 11, 17, 26-28, 3:5, 12, 20-21). 또한 주님은 이기는 자들에게 특별한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성도들 모두가 이기는 자는 아니며 주님은 이기는 자들에게 믿음뿐 아니라 믿음 표현인 "생활의 간증"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1. 한국교계 내의 계2-3장의 '이기는 자'에 대한 이해
저명한 장로교 신학자인 박윤선 박사는 요한계시록 주석에서 '이기는 자'를 '죄를 회개함으로 승리하는 자'(영음사, 1984, 102쪽)로, 김철손님은 '개인적인 신앙의 결단으로 모든 영적인 대적 자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자'(요한계시록성서주석, 대한기독교서회, 1993, 88쪽)로, 이순한님은 '신앙의 적이나 불 신앙 요소들을 극복하고 이기는 것'으로 보았습니다(요한계시록 강해,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5, 88-89쪽).
또한 국내 신학자에 의해 번역 소개된 한 계시록 주석 자는 이기는 자에 대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실천적인 면은 중요한 것이다. 실제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끝까지 지킬 수 없게되면 신앙의 승리자가 아니고 실격자가 되고 만다(고전9:27).'고 해설했습니다(아사노 중이찌외, 신성서 주해, 기독교문사, 1986, 87쪽).
위 내용들은 이겨야 할 대상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는 성경본문 내용을 지나치게 추상화한 점이 있으나 이긴다는 것이 "실생활의 간증"임을 강조한 것은 합당하다고 봅니다.
한편 말씀보존학회 소속 어느 분은 계시록 2-3장의 '이기는 자'를 교회가 휴거 된 후에 나타날 '환란 성도'들(?)에만 적용시킴으로 크게 빗나갔습니다. 그분은 생명나무 '먹는 것'은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에 은혜시대인 교회에 적용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자신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57)는 말씀을 통해 신약성도들이 믿음생활-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사는 것-(갈2:20)을 할 수 있는 근원이 '생명 되신 그분을 먹는 것'에 있음을 가르치신 것과 반대됩니다. 무엇보다도 계2-3장 본문에서 주님이 일곱 차례나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을 찌어다'(let him hear what the Spirit saith unto the churches)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심으로 '교회'가 이러한 말씀을 들고 실행해야할 주인공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보아도 위 주장은 잘못된 해석임을 알 수 있습니다(계2:7, 11, 17, 29, 3:6, 13, 22).
자기와 무관하다고 해석된 말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어떠한 무모함 인지요.
2. 성경본문이 말하는 이겨야 할 대상들
각 교회마다 다르긴 하지만 본문은 이겨야 할 대상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에 대한 첫 사랑의 상실(계2:4), 니골라 당의 행위(2:6), 핍박(2:11) 사탄의 보좌가 있는 교회(2:13), 발람의 교훈(2:14), 니골라 당의 가르침(2:15), 큰 음녀, 우상의 제물을 먹음(2:20), 영적 사망(3:5, 21), 미지근함과 교만, 주님의 임재를 놓침(3:15, 20) 등입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특히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는 것이 모든 하락의 근원임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주님도 미워하시는 '니골라 당의 행위'(계2:6)는 그 어원해석상 '계급적인 성직제도'를 가리키며 '발람의 교훈'(2:14)은 '돈 때문에 성도들을 영적 간음과 우상숭배로 잘못 인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 누가 하락한 교회들을 향해 이기는 자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신실하게 반응함으로 이런 혼탁함을 이기고 담대하게 주 편에 설 것인지!
3. 계2-3장이 보여주는 이기는 자에 대한 보상
성경은 이기는 자들에 대한 보상으로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함(계2:7), 둘째 사망의 해(not be hurt of the second death)를 받지 않음(2:11, 20:14),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을 받음(2:17), 만유를 다스리는 권세, 새벽 별을 줌(2:26), 흰 옷을 입음, 이름이 생명 책에서 흐리지 않음(not blot out)(3;5), 하나님의 성전 기둥이 됨, 하나님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 새 이름을 새김(3:12), 주님의 보좌에 앉게 하여 줌(3:21)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위 내용들은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가진 성숙한 믿는 이들인 이기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타남과 다스림이 충만히 표현됨을 묘사합니다. 즉 이기는 자들은 십자가로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하는 실제를 체험하며 이것이 곧 그들의 보상이 되는 것입니다(요15:4-7, 14:20, 요일5:15-16).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특별한 보상은 덜 성숙한 실패한 믿는 이들에겐 결여될 것입니다. 이 어떠한 격려와 경고인지요! 주여 우리 모두를 교회의 하락에서 건지사 당신의 표준에 이르게 하소서(롬8:28-30)!
(4) 성경이 보여주는 이기는 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관심하며 주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영적 싸움은 이처럼 그리스도와 절대적으로 하나된 믿는 이들과 사탄의 왕국에 속한 모든 것과의 싸움입니다(마12:26, 엡6:12). 사탄 마귀는 심지어 주님자신에게 까지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네게 주리라'고 미혹하는 말을 합니다(마4:9). 그러나 세상 임금인 사탄은 썩어질 '이 모든 것'을 줄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이기는 자들이 갈망하는 바 유일한 것, 썩지 않을 '생명'(요일5:11-12)은 결코 줄 수 없습니다. 이 생명은 부활 후 '생명 주는 영'이 되셔서 지금 이 순간에도 '생명분배를 통해 그분의 몸을 건축'하고 계신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요10:10, 고전15:45, 고후3:6본문, 마16:18, 엡4:11-12, 13-16).
그러므로 이기는 자들은 마땅히 '생명'을 얻게 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배설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 회개하고, 깨어 있을 수 있도록 이 주제에 관련된 구체적인 사례들을 몇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1. 소극적인 사례
한국교계의 현실은 안타깝게도 교인들 숫자는 많아도 사회를 향한 소금의 역할은 현저하게 부족합니다. 한 예로 교회갱신을 위해 고민하며 기도하는 한 단체의 열린 공간에 이런 내용이 올라와 있습니다.
'...기독교단체 광고를 보면 목회자의 잘난 사진으로 도배를 하고 있다. 무슨 직함은 그리 많은지... 회장은 뭐고, 총재는 뭐고, 이사는 뭐고, 위원장은 뭐고, 직전 회장은 뭐 그리 따지는지... 집회광고를 보려고 하면 정작 중요한 장소 날짜는 코딱지 만하게 쓰고, 임원들 사진으로 도배를 하고 있으니 이생의 자랑(명예욕)이 그토록 간절한지...' 또 다른 곳에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일생을 헌신한 신학생들이 신학교에 입학 때는 순수했으나 졸업할 때가 되면 사람과 교단의 눈치를 살피는 존재로 전락한다는 조소 섞인 고백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한국교계 실상의 전부는 아니며 이름도 빛도 없이 숨어서 주님께 충성하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난 한국교회들의 주도적인 분위기는 참으로 다니엘서 9장의 내용처럼 가슴을 찢는 기도가 절실히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적극적인 사례
1) 다니엘과 세 친구 : 그 당시 하나님의 선민들 대부분이 포로로 잡혀가 이방 땅 바벨론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이 주는 진미를 거절하고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통해 오히려 느브갓네살 왕을 굴복시켰습니다(단1:8, 2:46). 그의 세 친구들도 "극렬히 타는 풀무 불"의 위협에 굴복치 않고 끝까지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믿음은 결국 이방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했습니다(단 3:17-18, 28-30).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 아니하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음으로 사탄에게 승리했습니다(히2:15).
2) 주 예수님 : 주님은 "인자의 신분"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또한 항상 아버지로 인하여 사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슬려 자기 뜻대로 살려는 유혹도 이기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교회를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신 참 이기는 자이십니다(마4:1-11, 26:39, 요6:38-40, 57, 12:24, 마16:18, 히5:7-10, 고전15;23, 57, 빌2:6-8). 사탄은 그분 안에 어떤 지위도 갖지 못했습니다(요14:30 the prince... hath nothing in me).
3) 사도 바울 : 그는 하나님의 뜻이 생명 되신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 충만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단체적인 한 새사람을 얻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모든 역경 속에서도 오직 "교회"만을 관심 했고,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들까지도 다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 한 분만을 얻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생명 길을 신실하게 달린 후 마침내 추수하시는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익은 곡식임을 확신케 되었습니다(엡1:22-23, 4:13-16, 빌3:7-9, 고후11: 23-28, 고전 9:24-27, 빌3:12-14, 딤후4:8, 18).
그는 우리의 본임으로 우리도 그가 간 길을 똑같이 가야할 것입니다(딤전1:16).
이 외에도 가슴 뭉클한 여러 이기는 사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 사례들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성도들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어둠이 점점 깊어 가는 이 배역의 시대에 한국 땅에도 '부활능력'을 아는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간구 합니다(빌3:10-14).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탄이 주는 미끼를 향하여 단호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이기는 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참으로 원합니다(마4: 10).
주 예수여! 음부의 문들이 이기지 못하는 당신의 교회를 건축할 신실한 성도들을 많이 얻으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마16:18, 6:10).
(5) 최근에, 한국에 유입된 기독교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하나는 쿠르트 알란드(이기문 옮김)가 쓴 '네 사람들의 개혁자들'(컨콜디아사)이고 다른 하나는 전 총신대학 총장 김의환 박사님이 쓴 '도전 받는 보수신학'(생명의 말씀사)입니다. 앞의 책은 천년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성경의 가르침에서 멀리 빗나간 천주교에서 나와 개신교의 초석을 놓았던 루터, 맬란히톤, 칼빈, 쯔윙글리를 다룬 것입니다. 이 책은 강력한 천주교적 종교, 사회구조 안에서의 프로테스탄트들의 '개혁의 업적과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엿보게 합니다. 뒤의 책은 이미 서구와 미주를 휩쓴 자유주의 신학이 한국교계내의 보수주의신학과 어떤 갈등구조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근원부터 알게 해줍니다.
소수의 예외가 있겠지만 국내의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위 두 책이 말하고 있는 배경과 그 영향 아래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성경이 계시하는 이기는 자와 한국교계의 현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성경이 계시하는 이기는 자들은 자아를 부인하고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살므로 사탄에 속한 악하고 죄된 것들과 그 외에 그리스도를 대치하는 모든 것들을 정복하고 이긴 성도들을 말합니다(마16:24, 갈2:20, 고전15:5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