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계에 닫힌 핵심진리 - 『행함의 의』
구원
timothy , 2005-08-24 , 조회수 (3419) , 추천 (0) , 스크랩 (0)

(1)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렇게 고상한 표현은 아니지만 한국교계내의 어떤 분위기는 이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여기서 어떤 분위기란 믿음생활에서 (생명의 표현인) 행위를 강조하거나 구원과 관련하여 성도들의 동역을 언급했다가는 가차없이 이단으로 단죄하는 현실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전문 이단연구가를 자처하는 이대복 목사님은 기독교영성운동본부 대표인 박철수 목사님이 쓴 '변화되는 삶을 경험하라'는 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은 구원을 이뤄 가는 것이다'라는 표현을 트집 잡아, 이것을 믿음의 구원을 부정하는 행위신앙이고 이단요소라고 정죄했습니다(월간 교회와이단, 98.10월호).


저는 박 목사님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위 표현이 이단요소는커녕 성도들의 변화와 직결된 성경본문내용(빌 2;12)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생활 속에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사는 믿음의 행위', '생명의 성장 또는 믿는 이의 변화'와 관련된 성경말씀에 무지하여 이것을 이단사상으로 배척하는 작금의 한국교계 분위기가 '성도들의 성경적 행위'마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뒤뚱거리게 만드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다음에 보겠지만, 성경은 물론 장로교 신학에도 무지하고,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개념, 믿음의 행위 개념에 대해서도 무지한 결과입니다.


1. 이단전문가들과는 달리 정통신학자들은 '믿음의 행위'를 배척하지 않습니다.


1) 장로교 정통 신학자들의 태도 :

'행위'라는 말만 나오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부 이단전문가들(?)과는 달리 장로교 정통신학자들은 구원 또는 성도들의 생활과 관련한 성도들의 '인격적인 반응'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존 캘빈은 그가 작성한 제네바 요리문답 126번에서 '우리가 선한 일들을 행함이 없이 의롭게 만드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장 2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진 선행들은 생명 있는 신앙의 열매요 또한 증표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정훈택 교수(총신대)님은 '하나님의 구원도 행위를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필수적인 것, 하나님의 뜻을 승화시키고 천국의 떼어낼 수 없는 한 요소로 모두에게 강요하고 있다(마 7:21)'라고 말합니다(하나님나라와 교회, 생명의 말씀사, 1993, 40쪽). 박형룡 박사도 '진정한 신앙은 선행에서 그 자체를 나타낼 것이니 선행은 사람들 앞에 이 같은 신앙을 소유한 자의 생명의 의에 대해 증언할 것이다. 의인의 행함에 의한 칭의는 신앙에 의한 칭의를 굳게 한다'고 말합니다(조직신학 제5권 구원론, 1972, 294쪽). 이대복 목사 눈에는 이분들도 이단이 되겠지요.


2) 한국교회들은 이미 자신들이 가진 교리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정훈택 교수는 '한국보수주의 교회들이 신학이론으로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깊은 기독교적 진리를 받아들였고, 이것이 구원론적 의의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교리를 미처 소화하지는 못해서 주어진 현실 속에서 이것을 바로 적용하는데 실패했다'고 지적합니다(신학지남 229, 1991년, 63쪽).


김영재 교수도 같은 의견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살아 움직이지 못하고 불신사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교회도, 그 교회를 구성하는 개체인 성도들도 그리스도께서 위임하신 책임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실천이 없는 정도가 아니고 "그것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가 없다"'(신학지남 207호, 1985, 겨울호, 15쪽).


정훈택 교수는 '교회란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명실공히 예수의 순수한 몸이 되어간다... 행위와 믿음 사이의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한다면... 이 문제점은 한국교회에 아주 근본적인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고 말합니다(위 신학지남 229호,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1), 72쪽).


결론적으로, 성도들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러한 '성도들의 의로운 생활'의 문제를 성경에 무지한 일부 이단연구가들의 손이나 신학교리집에 묶어 둘 때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이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과 하나님의 갈망을 아는 분들이 성도들을 그러한 말씀의 실행 안으로 이끌어 살아있는 예수의 증거(계 1:2, 9, 12:17, 19:10, 20:4)들이 한국 땅 각 처에서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성경은 성도들이 주님을 생명으로 영접하여 거듭난 후 옛사람인 육체의 요구를 거절하고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갈 2:20, 5:16, 빌 1:21).


이러한 '새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이며 이것은 생명의 성장, 혼의 구원 심지어 주님이 지금 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과도 직결된 것입니다. 사실 신약의 서신서들을 자세히 보시면 상당부분이 성도들이 주님자신에 의해 '어떤 행위를 할 것' 또는 '어떤 행위는 하지 말 것'을 명령하는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갈 5:16, 26).


물론 이 때 그리스도는 없는 육체의 행위는 회심 전의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그것이 외견상 선해 보이고 하나님을 위한 일처럼 보여도 하나님 눈엔 가치가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참된 일에 방해만 될 뿐이라는 사실을 바로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빌 3:3-6, 롬 10:3).


요즘의 한국교계 일부에서는 '오직 믿음'만 강조하여 행함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거나, 반대로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집회, 병원 또는 고아원 방문 등의 '행함'에서 신앙의 열매를 찾으려는 노력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제 사견이긴 합니다만, 정작 자신을 깊이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아낸 '믿음의 행위'(살전 1:3원문, 갈 2:20)는 많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 원인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1. 한국교계가 행위를 경시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은 '행위' 또는 '공로구원'을 강조하며 성경에서 빗나간 천주교에 대해 '오직 믿음'을 외치며 반기를 든 혁명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때 천주교의 영향아래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는 고행을 통해 의롭게된다고 착각했던 말틴 루터가 '행위'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롬 1:17을 근거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외쳤고, 이러한 '자기 교리'를 근거로 믿음의 행위로도 의롭게 된다는 '성경말씀'(약 2:24)을 무시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칭의 진리를 균형있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처럼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사는 것인 '행함의 의'를 경시하는 풍조가 한국 땅에 복음이 전래될 때 특수한 한국의 풍토에 의해 더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이 땅위 생활' 에서 '좋은 행위'를 강조하는 유교와 차별되도록 '나중 천국' '오직 믿음'을 외쳤던 것입니다. 총신대학 정훈택 교수는 이러한 한국교계의 잘못된 전통을 그의 논문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1)'를 통해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신학 지남 229호, 1991, 57-88쪽).


정 교수님은 위 논문에서 한국교계가 '행함의 의'를 경시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최근에 깨닫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다음에 보듯이 정작 '믿음의 행위'를 살게 하는 핵심진리가 가려져 있어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 '믿음의 행위'를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심' 진리가 닫혀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과 비 그리스도인들의 구제와 선행 등 사회에 대한 기여는 나타난 결과는 같더라도 그 본질은 달라야 합니다. 즉 전자는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아낸 결과(빌 1:21)인 반면, 후자는 자신의 선한 행위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앞의 것은 새사람의 행위요 뒤는 옛사람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사는 것에 대해 무지하여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자기 과시에서 나온 선행을 일삼는다면 비 그리스도인들과의 차이점은 없게됩니다. 이것은 바울의 지적처럼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썩어질 '자기 의'를 세울 뿐입니다(롬 10:3).


많은 분들이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 일뿐이다'는 양자교리, '삼위 하나님이 구별되실 뿐 아니라 분리되기까지 한다'는 잘못된 삼위일체관의 영향으로 하나님 자신인 그 영이 우리 영 안에 들어오신 '거듭남 개념'에 있어 분명치 않습니다. 이처럼 첫 출발이 분명치 않을 때 '주님 자신'이 자기 안에 사시므로 일상 생활에서 자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아야 한다는 현실인식과 실행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승천하신 예수님과 생명으로 성도들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 부활한 주님과 성령님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는데 핵심구절인 요 7:39, 고전 15:45에 대한 진리가 한국교계 내에서도 열려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삼위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고 상호내재 하신다는 바른 삼위일체관을 가질 때 가능할 것입니다.


3. 사람의 혼과 영을 구분해야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 수 있는 기초를 갖게 됩니다.


사실 복잡한 신학지식은 없어도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내주를 확신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확신이 있는 분들조차도 일상생활 가운데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좇는 실제적인 길(마 16:24)을 몰라 금식, 기도원, 부흥회, 능력의 종들이 있다는 예배당을 전전하며 방황하십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제시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 영을 좇아 행함으로 육신의 욕심을 거절함'으로 그리스도를 살고 그분의 몸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더 구체적인 길은 순간순간 사람의 혼의 중심인 '생각'을 영이신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사람의 영'에 두는 것입니다(갈 5:16, 25, 고전 6:17, 롬 8:6). 신실한 성도들의 생활에서 볼 수 있는 밖의 의의 행동은 이러한 '영에 둔 생각'의 결과입니다. 또한 이러한 실제적인 삶은 날마다 참 양식이신 주님자신을 먹음으로 가능합니다(요 6:57).


이처럼 타락한 혼 즉 '옛 나'가 매일 부인되고, 새롭게 변화된 혼 즉 '새 나'가 우리 영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사는 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를 의로 여기십니다(약 2:24, 고후 5:21).


그런데, 사람의 영과 혼을 하나로 묶어 생각하는 '이분설'로는 이러한 '믿음의 행위'의 기초인 영에 둔 생각을 말하는 로마서 8장 6절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혼에 속한 부분인 생각이 사람의 육과 사람의 영 사이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생각이 사람의 영(슥 12:1)과 항상 하나라면 위 롬 8:6은 모순된 말씀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물론 진리적으로 이 점이 분명해도 막상 그러한 '믿음의 행위'를 살 것인지 말 것인지는 여전히 각 사람의 주님을 사랑하는 정도와 헌신의 정도에 달려있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진리에 대한 빛이 있어야 그 길을 신실하게 갈 수 있다는 것을 성경과 주님을 참되게 아는 분들은 양심가운데 인정하실 것입니다.


(3) 구원과 관련하여 사람 편에서의 책임과 역할을 말하면 '신인협동설'이니 '반펠라기우스주의'니 등 어려운 신학용어를 들먹이며 색안경을 끼고 보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실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의지의 동역' 여부는 신학자들이 오랫동안 논쟁해온 민감한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은 성경말씀을 자신이 지지하는 신학적인 틀에 넣어 억지로 체계화하거나 성경에 계시된 완전한 구원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입니다. 다음에 보겠지만 특별히 거듭남 다음 단계인 "성화" 즉 '사람의 혼의 구원'은 성도들에게 아버지 뜻에 맞는 믿음의 행위를 요구하며 이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마 7:21).


1. 한국교계는 성경에 의거한 바른 구원개념의 정립이 필요합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구원'은 한마디로 말해 '주님자신'이십니다(눅 2:30, 3:6원문, 롬 5:10). 그러므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 믿음을 통해 주님자신의 인격과 그분이 성취하신 역사의 모든 방면과 체험적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즉 타락한 사람들은 '죄'와 '사망'의 문제가 있는데, 죄는 주님의 죽음을 통한 보혈로, 사망은 우리 안에 들어오신 부활생명이신 주님자신으로 해결됩니다. 특별히 사람의 온 존재인 영, 혼, 몸이 타락 후 사망의 영향 아래 있는데, 이분들은 자신 안에 들어온 "생명"(ZOE)이 점진적으로 성장함으로 구원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영은 "거듭남으로 구원받았고"(요 3:6-7), 혼은 "성화"됨으로 구원받고 있으며(살전 5:23), 몸은 "영화롭게 됨"(롬 8:23, 30)으로 구원될 것입니다(하문호, 구원론, 한국로고스연구원, 1993, 45쪽).


그러나 실행에 있어 한국교계는 지금까지 십자가의 구속 즉 보혈의 공로로 인한 죄 사함은 강조했지만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생명을 통한 구원(롬 5:10)-영의 거듭남, 혼의 변화, 몸의 변형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온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케 하려 함이라'(요 10:30)고 말씀하십니다. 즉 사람들이 보혈의 죄 씻음뿐만 아니라 거듭나게 하고 생명이 성숙케 하는 것이 그분의 성육신의 목적임을 밝히시고 있습니다.


2. 구원에 있어 은혜와 행위 문제


구원에 있어 "오직 은혜"인가 아니면 "행위"도 필요한가를 놓고 율법주의, 에비온파, 노스틱주의, 반율법주의, 갈라디안주의, 펠라기우스주의, 로마카톨릭식, 개혁신학식 웨슬레식 등 다양한 주장이 있어 왔습니다(성기호, 구원에 미치는 믿음과 행위론, 목회와신학, 1991년 2월호, 186-188쪽).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성경이 계시하는 균형 잡힌 진리는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 자신에 속한 것이지만 사람의 '믿음의 행위'의 동역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개혁신학을 제외한 모든 교파들이 구원에 있어 사람의 자유의지의 동역을 인정합니다. 심지어 개혁신학의 대부 격인 어거스틴도 후반에는 신앙의 공로 필요성을 인정했고(박상걸, 성경적 구원론, 생명의 말씀사, 370쪽), 박형룡 박사도 구원의 단계인 성화를 '신자들이 협력하는 하나님의 공작'(구원론, 342쪽)이라고 말하며, 메이첸도 구원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적인 행동을 사용하신다고 말함으로 구원에 있어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였습니다(박상걸, 앞의 책, 84쪽).


만일 하나님이 인간 편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 또는 서신서에서 무수히 볼 수 있는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셨다면, 심지어 말씀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책망하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하나님이 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성도들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선택한 행위를 따라 심판하심으로 언제나 공의로우십니다.


따라서 만일 누가 반 펠라기우스주의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며 구원에 있어 인간 편에서의 동역의 필요성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쪽의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불의하게 만드는 '진짜이단'이 될 것입니다.


3. 구원에 있어 믿음의 행위의 중요성


한국교계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강조하며 육체의 행위의 무익함을 분별시킨 공로가 있으나 성경이 거듭난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믿음의 행위' 즉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것을 간과케 한 약점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자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그 영을 따라 행하고 육체의 욕심을 거절하시도록 동역 함으로 생명이 성숙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안의 기름부음의 가르침을 "거절"하며 이 땅에서 생명의 성숙에 게으르다면 비록 거듭났음으로 지옥가지는 않더라도 "천년왕국"에 들어가지는 못할 것입니다(마 7:21). 그러나 그러한 사람도 심판 날에 공력이 시험받고 "불을 통과하는 해를 받은 후" 성숙한 신부인 새 예루살렘엔 참여 할 것입니다(고전 3:13-15, 계 21:2, 9-10).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 때 두렵고 떨림으로 혼의 구원인 생명의 성숙을 관심 해야하며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인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길입니다(엡 4:11-12, 15-16).


'예수 믿고 죽으면 무조건 천국은 간다'는 가르침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마태복음 7장 21절과는 다른 가르침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4) 첨예한 대립이 있는 주제를 균형 있게 다루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는 이 주제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오해가 예상되는 개념들을 좀 더 분명히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우선 제가 구원에 성도들의 '행위'가 요구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의 행위'를 뜻합니다. 또한 믿음의 행위의 필요성이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구원과도 관련이 있는지, 거듭났지만 믿음의 행위를 통한 성화구원에 실패한 성도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하고자 합니다.


1. '믿음의 행위'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아낸 결과를 말합니다.


'믿음의 행위'는 옛사람을 거절하고 우리 안에 계신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사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행위는 육체를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은 결과이며, 생각을 육에 두지 않고 영에 둔 결과이며, 우리 안의 기름부음의 가르침을 거부하지 않고 순종한 결과입니다(갈 2:20, 5:16상, 롬 8:6, 요일 2:27).


만일 반대로 육체를 좇고, 생각을 육에 두며, 기름부음의 가르침을 거절한 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아무리 그럴듯해도 육체의 행위이며 하나님 눈에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전자는 그리스도를 산 것이고 후자는 타락한 자기를 산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번은 워치만 니 형제님이 전도여행을 가는데 차비가 충분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속에서 주님의 음성은 그나마 부족한 차비 중 일부를 가난한 동역자 부인에게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헌금을 더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있는 돈을 남에게 주라는 말씀에 쉽게 동의가 안되었지만 자신을 부인하고 순종했습니다. 결국 나중에 알게된 바로는 그러한 순종의 행위는 그 부인에겐 기도의 응답이 되었고 니 형제님의 필요는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주님이 채워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 그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주님의 음성을 거절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일상생활은 말씀에 순종하여 그리스도를 사는 믿음의 행위와 말씀에 불순종하여 자기를 사는 육체의 행위 사이의 끊임없는 싸움인 것입니다.


2. 성경은 믿음의 행위가 구원과 관계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성도들에게 믿음의 행위가 필요하긴 하지만 구원과는 무관하고 상급과만 관계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심지어 일부 존경받는 개혁신학자들도 믿음의 행위가 구원과도 관계 있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이상근 박사는 '형제들아...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 15:1,2)는 말씀을 '이것은 현재적이요 성화적 의미의 구원을 뜻한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고린도서 주해, 예장총회교육부, 1979, 205쪽). 위 문맥은 거듭난 형제들이 받은 '말씀을 굳게 지키는지 여부'가 성화구원과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핸드릭슨은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을 '이 말씀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는 것으로써, 현재적 구원, 즉 일생의 과업인 "성화라 불리는 구원의 한 국면"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핸드릭슨주석 빌립보서, 아가페출판사, 1985, 160쪽). 위 말씀은 거듭난 이후에 느슨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 생명의 성장을 통한 성화구원을 체험치 못할 가능성이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오!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찌하든지 천국은 간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이러한 엄중한 경고를 무시하고 있는지...


총신대학 신대원 출신인 박상걸 목사는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말씀에 대해, '이 말씀은 구원에 관한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관계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요구되는 행위는 진정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행위요, 믿음의 결과로서의 행위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성경적 구원론, 생명의 말씀사, 1995, 263-264쪽).


이외에도 '믿음의 행위'를 구원과 관련짓는 말씀은 많이 있습니다(딤전 4:16, 벧전 4:18, 히 6:9, 7:25).


3. 거듭났으나 천국에 못 들어가는 분들도 지옥은 안갑니다.


단적으로 말해, 한 번 거듭난 사람은 그 후 세상을 사랑하고 믿음생활에 실패했어도 결코 지옥엔 가지 않습니다. 한 번 하나님의 자녀이면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요 1:12-13).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이나 믿음이 약해 생활의 증거가 뚜렷치 않더라도 그를 불신자처럼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롬 14:1-4, 고전 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