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구원론> 비판에 대한 재반박(上)
원세호님
timothy , 2005-08-24 , 조회수 (3904) , 추천 (0) , 스크랩 (0)

 

그 동안 원세호 님의 (지방)교회측 교회론, 신론, 인간론 비판을 차례로 재 반박했습니다. 이제 구원론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또는 구원론)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더라도 구원론에 대해서 큰 폭의 다양한 의견들이 있어 왔습니다(박상걸, 성경적 구원론, 생명의 말씀사, 1995, 366-399쪽). 한 예로 유니테리안파의 보편 구원설, 감리교단 쪽의 알미니안주의, 개혁교단의 칼빈주의는 구원관련 교리에 대한 시각 차이가 적지 않습니다(위 책, 383-385 쪽). 그러므로 본 구원론 재 반박 글은 특정 교단 교리나 학설을 의존하지 않고 성경 본문을 절대기준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필요시 부분적으로 원세호 님과 한국교계가 존중하는 구원론 관련 주장들도 반박근거로 삼을 것입니다.


아래 서론 글에서는 특별히 구원의 목표와 관련된 <신화>(Deification) 진리를 중점적으로 검토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아래 인용한 한 개혁주의 신학자의 구원관에서 언급된 <중생>과 <성화>와 <영화>의 성경적인 의미에 대한 검토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진리는 현재 (지방)교회측과 관련하여 원세호 님 등 일부 이단 감별사들의 오해와 부당한 정죄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 단계로 되어 있다. 중생과 칭의는 구원의 과거적 단계이며, 성화는 구원의 현재적 단계이며, 영화(榮化)는 구원의 미래적 단계이다".(김효성 목사,

http://www.oldfaith.net/st/salvatn4.htm#10. 성화(聖化))


1. 구원론 관련 서론 글 - <신화>(deification)


원세호 님은 자신의 문제의 변증 책자에서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측의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가르침'에 대해 여러 번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그의 글은 초대교회 정통 교부들과 동방정교회가 지속적으로 가르쳐온 '신화'(Deification)에 대한 사전 이해를 전제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의 글은 (지방)교회측의 주장 내용에 대한 충분한 연구를 거치지 않은 비판에 불과했다. 다만 '어떻게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인 하나님이 된다고 하느냐? 불경하다' 정도의 지극히 초보적이고 피상적인 이견제시일 뿐이다.


그러나 원세호 님과는 대조적으로, 서구 신학계는 아래 인터넷 영문 자료에서도 보듯이 이러한 신화에 대한 논의가 매우 진지하고 공정하다. 또한 원세호 님처럼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표현 자체를 문제 삼는 사람도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통 초대교회 교부들 중 상당수도 신화(Deification)에 대해 가르친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Gross, Jules. The Divinization of the Christian according to the Greek Fathers. Trans. Paul A. Onica. Anaheim :A&C Press, 2002 :이 책은 다마스커스 요한 등 1-8세기에 활동했던 초대교회 교부들 33인의 184개 저술들로부터 사람의 구원의 과정과 최종목표로서의 신화됨을 언급한 대목들을 뽑아내어 소개하고 있다. 원문은 프랑스어이나 (지방)교회측이 최초로 영어로 번역 출판했다. http://www.affcrit.com/acpress/index.html). 그들에겐 다만 신화에 대한 가르침이 그 내용에 있어서 초대교부들이나 동방교회의 경우처럼 인정될만한 것인가 아니면 뉴 에이지 주창자들이나 몰몬 교단의 경우처럼 성경의 가르침의 한계를 벗어난 것인가가 문제가 될 뿐이다.


따라서 원세호 님과 여타 이단 감별사들은 <신화>(Deification)에 대해 지금처럼 무조건 성급하게 정죄부터 하는 것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그 이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기왕의 관련 자료들을 충분히 연구하고 기초 사실들을 정리해 보는 신학자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http://www.brown.edu/Students/ocf/introduction/deification.html (동방정교회)

http://www.theonet.dk/spirituality/spirit00-13/You_are_gods_BP.html (동방정교회)

http://www.frimmin.com/faith/theosis.html (동방정교회)

http://www.angelfire.com/ny4/djw/lutherantheology.stuckwisch.html (루터교, 동방정교)

http://www2.ida.net/graphics/shirtail/deificat.htm

http://members.aol.com/sfantatreime/Articles/Simonca/Deification_Theosis.htm

http://www.cephasministry.com/mormon_ye_are_gods.html

http://www.lightplanet.com/mormons/basic/godhead/Deification_EOM.htm (몰몬교)

http://quitplaying.com/~neirror/neirr.org/Deification.htm

http://www.deceptioninthechurch.com/godsrus.htm

http://www.antiochian.org/theology/deification.htm

http://www.theonet.dk/spirituality/spirit00-13/Mormon_Deification_AK-MWH.html

http://www.pastornet.net.au/jmm/adev/adev0363.htm

http://www.orthodoxinfo.com/phronema/frluke_newage.htm (뉴에이지)

http://www.judeministries.org/cults/newage.htm (뉴에이지)

http://www.dashhouse.com/sermons/1996/PM/961117.htm

E See Bonner, Gerald, "Augustine’s Conception of Deification".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n.s., 37, October 1986, p. 369-386.


1) <신화> 진리에 대한 문제의 쟁점


장로교 전통이 강한 한국 교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람이...하나님이 된다>는 표현 자체가 매우 생소하다. 그러나 동방교회에는 심지어 크리스마스 카드 인사말로 주고받을 만큼 이 말이 보편화되어 있다(http://www.hightruth.or.kr/frame03/con_039.html).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한국 교계가 주로 서방 로마 천주교 또는 그로부터 나온 개신교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동방정교회는 정통 교부들의 가르침을 다소 전승 받아 지금도 <신화>(Deification)를 성도들의 구원의 궁극 목표로 가르쳐오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 신학계에는 이러한 동방교회 신학은 거의 소개되지 않는 것 같다.


이외에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현격한 차이는 여러 방면에서 관찰된다.


전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안토니 후크마는 그의 '개혁주의 구원론'(기독교 문서선교회)에서 <서방교회는 죄의 용서를 중시하나 동방교회는 영원한 생명을, 서방교회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를 강조하나 동방교회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중시한다>고 양측을 비교한 바 있다(112쪽).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계 내에서 소위 이단과 정통을 판정하는 근거가 되는 교리기준은 '서방교회 성향' 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원세호 님을 포함한 이단 감별사들은 자신들의 판단기준만이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닐 수 있다는 열린 사고가 요구된다. 물론 이것은 (지방)교회가 동방교회의 전통 아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지방)교회는 성경 66권은 물론 정통교부들과 역대의 정통 신학들이 가르친 진리들을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통교부들이나 동방교회에 의해 폭넓게 가르쳐지는 '신화' 관련 진리가 (지방)교회 내에서 구원교리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러한 배경설명을 전제로, (지방)교회가 가르치는 <사람이 하나님이 됨>(신화) 진리는 그 핵심 중점들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은 <신격>(Godhead)에서는 아니나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이 된다(the believers in Christ have been made God in His life and in His nature but not in His Godhead).(확증과 비평(http://www.affcrit.com/archives/ac_02_02.html), 2002년 10월 호, 49쪽)


(2) 이러한 신화 진리는 주로 성도들이 <하나님-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이루고, <하나님-사람>이셨던 주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수준의 인격적인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목적으로 강조된다(엡1:4-5, 요일2:6)(위트니스 리, 하나님-사람의 생활, 한국복음서원, 1998, 하나님-사람들, 한국복음서원, 1995, 하나님의 경륜의 중점들과 하나님-사람들이 가져야 할 생활, 한국복음서원, 1995).


(3) (지방)교회측은 피조물인 우리가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Godhead)에는 영원히 참여 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이 금지하는 이단사상이기 때문이다(위 확증과 비평, 48쪽).


따라서 원세호 님을 포함하여 (지방)교회측의 '신화' 진리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며 비판하려는 사람은 위 세 가지 항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원세호 님은 충분한 사전 연구 없이 이 주제에 접근했다. 그리고 경솔하게 비판했다. 신화 진리에 관련된 원세호 님의 이러한 '피상적인 글쓰기'는 (지방) 교회는 물론 한국교계에도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불충실한 연구와 신중치 못한 정죄로 인해 이단 감별사들의 위상만 실추시켰다.


2) 하나님의 생명, 본성, 신격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정통 교부인 아타나시우스는 '그(예수님)가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로 신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폴리캅에 의해 목양 받은 이레니우스도 '그는 끝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의 존재가 되셨고, 그리하여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그의 존재가 되게 하셨다' 라고 했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94쪽). (지방) 교회측도 이러한 연장에서 <믿는 이들은 신격에서는 아니나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신화 교리에 대한 검증은 피조물인 거듭난 성도들과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 그리고 그분의 신격과는 각각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검토해 나가는 형식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1) 믿는 이들과 하나님의 생명


요 1:12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듭남의 결과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엇갈린 이해가 있다. (지방)교회 측은 사람이 하나님(하나님-사람)이 되는 출발을 참된 거듭남의 체험에 두고 있다. 사실 현재 쟁점이 된 신화 진리 이해의 첫 단추는 '하나님의 자녀'를 얼마나 성경적으로 이해하는가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자녀> 이해가 비 성경적인 사람이 <신화>를 바로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고 이어서 참된 거듭남이 아닌 몇 가지 경우들을 열거해 보겠다.


<참된 거듭남>(http://www.regenerated.or.kr/life/index.html)은 <육신의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 이외에 하나님의 생명인 조에(Zoe)를 자신 안에 받아들인 두 번째 출생>을 말한다(요3:6-7, 1:12-13). 개혁주의 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는 그의 <개혁주의 구원론>(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거듭남(중생)을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심겨짐'(168쪽), 또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이식'(171쪽)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후크마도 거듭남이 전적으로 생명의 문제임을 잘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생명>(조에)은 과연 무엇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 피조물인 사람 안에 들어오시게 되는가를 보기로 하자.


요한복음 11:25, 14:6 에서 예수님은 '나는...생명(Zoe)이니'(I am...the life)라고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은 <주님자신>이시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생명이신 하나님은 사람 안에 들어오셔서 사람의 참 생명이 되시는가? 요5:26은 '아버지 하나님이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성한 생명의 근원이 아버지 하나님이시며, 동일한 생명이 영원가운데 아들에게도 주어졌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생명이 다만 아버지와 독생자 예수 안에만 있다면 그 생명은 우리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요일5:11-12는 '...이 생명이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라고 말한다. 따라서 사람인 우리는 이 <아들 하나님 자신>을 구주와 생명으로 영접함으로 신성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다른 길은 없다. 히2:11은 '거룩케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한 근원인 아버지 하나님)에서 난지라' 라고 말한다. 즉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이시고, 거듭난 우리는 동일한 아버지의 <많은 아들들>인 것이다(히2:10).

(http://www.hightruth.or.kr/frame03/con_051.html


이러한 말씀들은 평이하지만, 그 내용이 의미하는 것은 매우 깊고 비밀하다.


<생명>(요14:6)이신 아들 하나님이 <사람 밖>에만 계신다면 아직 <우리의 생명>(골3:4)은 아니시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우리 안의 생명이 되시도록 성육신, 죽음, 부활을 거쳐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 이제 마음 문을 열고 이 영을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안에 모실 수 있다(요3:6). 왜냐하면 부활 후 주님은 한 면으로 대 제사장과 그리스도의 몸의 머리로서 하늘 보좌에 계시지만(롬8:34), 동시에 다른 한 면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 안에 사실 수 있는 분이 되셨기 때문이다(롬8:10, 골1:27). 주님은 부활 후 생명 주는 영으로서 창세기 28:11-22에 언급된 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의 비밀을 성취하셨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2390) 즉 그분은 부활 후 머리로서 하늘 보좌에 계시나 이 땅위의 거듭난 모든 사람을 그분의 몸으로 하는 기묘한 <한 새 사람> <인자이신 사닥다리>가 되신 것이다(엡2:15, 요1:51). 따라서 주님은 하늘에 계시면서 땅위에 있던 자신의 몸의 지체들을 핍박하던 사울을 향하여 <왜 나를 핍박하느냐>(why persecutest thou me)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행9:4).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우리 주님은 거듭난 사람들의 영과 연합되신 <한영>(one spirit)이시다(고전6:17). 즉 <하나님과 사람의 신비적인 연합>이 거듭날 때 일차적으로 사람의 영 안에서 성취된 것이다. 이러한 <연합된 영>이 하나님-사람의 실제이다.


이것이 (지방)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주님자신>을 생명으로 영접하여 거듭난 사람들인 <하나님-사람들>의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위치와 상태이다.


이제 성경이 계시하는 <거듭남>과 유사하나 참된 거듭남은 아닌 몇 가지 경우들을 소개해 보겠다.


첫째, <죄 사함> 자체가 거듭남은 아니다.


죄 사함의 체험을 거듭남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둘은 다음과 같이 전혀 다르다. 먼저 죄 사함은 '예수의 피'로 인한 것이나 거듭남은 '생명 되신 예수님 자신'으로 인한 것이다. 죄 사함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된 것이나 거듭남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는다. 죄 사함은 하나님과 구속 주 사이에 '사람 밖'에서 이뤄진 사건인 반면, 거듭남은 그 구속주가 부활 후 '사람 안'에 직접 들어오심으로 체험된다. 예표 상 죄 사함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이뤄졌으나, 거듭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안에서 <어린양의 고기>를 먹음으로 체험된다. 로마서 5:10은 '(피로)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함으로 피로 인한 죄 사함과 화목을 생명으로 인한 구원과 구분하여 말한다. 이것을 법리적인 구속과 유기적인 구원이라고 구별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죄 사함과 거듭남은 각기 다르다. 체험으로 볼 때 죄 사함은 물론 거듭남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속죄의 피로 인한 죄 사함과 부활생명으로 인한 거듭남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거듭남 이후의 믿음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상적인 믿는 이의 생활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갈2:20)이다.


그러나 체험에 의하면 과거에 가졌던 죄 사함의 확신만 가지고는 이런 승리의 생활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 대신에 성경은 이러한 생활을 하려면 날마다 생명의 떡이시요 생수이신 <주님 자신을 먹고 마실 것>을 요구한다(요6:57, 고전12:13, 요4:14, 7:39, 빌1:21, 고전15:31, 롬10:12-13, 빌2:12). 또한 옛 사람을 부인하고 우리 안의 그리스도가 사심으로 말씀의 요구들을 이룰 것을 성경은 가르친다. 사실상 서신서 전체의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말씀의 요구들은 보혈만으로는 부족하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주님자신이 우리를 통해 사실 때만 지켜질 수 있다. 그러나 죄 사함 받은 사실이 이런 생활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죄 사함 확신자가 주님자신이 생명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인 참된 거듭남을 체험한 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둘째, <영적 출생이 없으면> 거듭남이 아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신학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심지어 열심 내어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다. 다소의 사울이 그 좋은 예이다. 그는 명망 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구약을 배웠다. 또한 그는 유대종교 중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했다. 그가 한 일은 열심 내어 교회를 핍박하고 유대교를 사수한 것이다. 그러나 훗날 그는 이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빌3:1-8). 심지어 그의 사역의 후반부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의 이러한 일들을 '믿지 아니할 때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이다'(딤전1:13) 라고 고백했다. <믿지 아니할 때>라는 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참되게 거듭나지 못했을 때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참되게 주님을 만난 이후 그는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았다(갈2:20).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길을 신실하게 갔다(고후11:28, 골1:28-29). 이처럼 그의 회심 전과 후의 삶은 극명하게 구별된다. 하나는 <거듭나지 않은 종교인>의 삶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거듭난 주의 종>의 삶이었다.


원세호 님은 앞에서 창2:7에서 코에 불어넣어진 생기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보아 사람은 이미 피조 될 때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는데 (지방)교회측은 거듭나려면 추가적인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며 이를 정죄한 바 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생명'과 '참된 거듭남'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원세호 님이 거듭났는지 여부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는 자신의 체험을 진리에 맞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주님자신>이 사람 안에 들어오심을 부인하면 거듭남이 아니다.


요일5:12 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he that hath not the Son of God, hath not life)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 의하면 <아들자신>의 내주가 거듭남과 직결된다. 그러나 <성령님>의 내주로 인해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고 말해도 위 말씀과 상치되지는 않는다. 삼위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심으로 성령의 내주는 다른 두 위격들의 내주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한 박상걸 목사도 자신의 '성경적 구원론'(생명의 말씀사, 1995)에서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은 곧 삼위 일체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은 이르기를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므로...아울러 우리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며...>(131-132쪽)라고 말함으로 이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단 소속 비중 있는 신학자 중에는 <성령님이 아들을 대신하여 우리 안에 계심으로 아들 하나님 자신은 사람 안에 오실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즉 아들 하나님의 사람 안의 내주 하심을 적극 부인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 보아 온 성경이 계시하는 거듭남의 진리를 위협하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장차 목회자가 될 신학생들을 교육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래와 같이 주장하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일이다.


"성령의 내주는 곧 주 예수께서 내주 하시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성령의 내주로써 충분하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 우리 속에 내주 하실 필요가 없다. 그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이 사도신경이다"(월간 교회와 신앙, 2001년 10월 호, 122쪽).


이 외에도 '<하나님의 말씀>(벧전1:23)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것이지 <주님 자신>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아니다' 라거나 '우리는 법적으로 하나님의 <양자>(엡1:5)로 입적된 것이지 진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다'는 주장들은 성경을 크게 오해한 잘못된 가르침들이다. 만일 누구든지 이처럼 <아들 하나님> 자신의 성도들 안의 내주를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나선다면, 그는 참된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거듭남이 <생명의 씨이신 주님자신>이 사람 안에 직접 '뿌려지는' 문제요(고전15:45, 막4:26-29), 위로부터의 <출생>의 문제(요1:13하)임을 보지 못한 것이다.


위 세 가지 유형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다음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요일3:9).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 이는...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거룩하게 하시는 자(예수님)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거듭난 성도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2:11).


위 말씀들은 독생자이시면서 동시에 맏아들이신 예수님이 나신 그 동일한 근원에서 우리가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행13:33, 벧전1:3). 그러므로 주 예수님도 피조물인 우리에게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않으신다. 위와 같은 성경 말씀들에 기초하여, (지방)교회 측은 주님은 신격(데오테스, 2320)을 가지신 <하나님-사람>(God-man)이시고, 우리는 이 분과 연합된 <하나님-사람들>(God-men)이되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은 없다 라고 이해한다. 이것은 <주님은 포도나무시요 우리는 가지>(요15:5), 또는 <주님은 그리스도의 몸의 머리이시요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골1:18, 고전12:27)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2) 믿는 이들과 하나님의 본성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는가? 벧후 1:4는 '너희로...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be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말한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7999) 물론 창조주 하나님의 본성 중엔 피조물인 사람들이 영원히 <참여 할 수 없는 것>과 <사람의 공유가 가능한 것>이 있다.

(http://www.oldfaith.net/st/god1.htm


(지방)교회측이 <사람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한다>고 할 때에도 이러한 상식적인 분별을 전제한다.(http://www.hightruth.or.kr/frame03/con_056.html) 즉 아래에서 보듯이 (지방)교회측은 사람이 하나님이 된 후에도 <하나님의 전지>, <편재>, <전능> 같은 절대적인 속성(비 공유적 속성)에는 참여 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