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인간론> 비판에 대한 재반박(下)
원세호님
timothy , 2005-08-24 , 조회수 (3244) , 추천 (0) , 스크랩 (0)

5. 원세호 님의 (지방)교회 <인간의 영론> 비판 재반박


소금이 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 할 수 있는가? 누가 소금이 짜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우선 과거에 소금을 먹어 본 사람의 증언을 듣게 할 수 있다. 좀 더 고상한 방법은 과학적으로 화학성분을 분석함으로 소금의 짠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 소금을 직접 먹어보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런데 일단 소금을 먹어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이런 저런 이론을 들어 소금이 짜지 않다고 해도 그것에 쉽게 동의 할 수 없다. 이처럼 이미 사람의 영과 혼이 다름을 체험적으로 <경험 한> 사람은 이것을 부인하는 원세호 님의 이런 저런 교리적인 말이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뿐이다.


생명의 말씀사가 펴낸 워치만 니의 <혼의 잠재력>(2000년)에 쓰여있는 다음과 같은 워치만 니의 말은 사람의 <영과 혼의 분리의 필요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924년에 내가 처음으로 영과 혼을 분리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을 때, 호의를 보여준 많은 사람들은...어휘논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투쟁이 어휘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사실에 관한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영과 혼은 전적으로 다른 기관이다. 하나는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다. ...신자들은 영과 혼, 혼과 영을 혼동하거나 기만당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어지럽히는 악령의 위선을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5 쪽).


'모든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영을 통해 이뤄지고 모든 원수의 역사는 인간의 혼을 통해 이뤄진다. 성령은 인간의 영을 움직이는 반면에 악령은 인간의 혼을 움직인다. 이것이 하나님과 원수의 역사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에 의해 시작되지만 원수의 역사는 인간의 혼 안에서 시작된다.'(44쪽).


'영과 혼의 작용의 결과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이 영에 속한 것과 혼에 속한 것을 분별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첫사람은 산혼(living soul)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여기서 바울은 첫째 아담이 산 혼이 되었다고 한다. 그 혼은 생명을 갖고 있으며 그 생명이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일을 하게 한다. 이것이 아담이 차지했던 지위를 가리킨다. 바울는 계속해서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life-giving spirit)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영과 혼의 작용의 결과가 다르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고 그들을 살릴 수 있다. 혼은 그 자체가 살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밖에 없다....우리는 이 두 가지 작용을 명백히 구별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점에서 혼선을 빚고 있는 사람은 결코 만족스러운 사역을 할 수 없다...혼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아무 유익이 없다. 우리는 용어상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너무나 큰 원리이다'(81-82쪽). 영적인 세계를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들은 위 말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다는 영문자료는 다음 홈페이지들을 참고할 수 있다.


http://www.truthinlove.com/concise/parts_of_man.shtml

http://www.pbc.org/dp/dyingtolive/ch10.html

http://www.heavendwellers.com/hd_body_soul_spirit_chart.htm

http://www.aaronc.com/bodsoul.html

http://www.geocities.com/Athens/Acropolis/3087/

http://www.endtimesnetwork.com/antipas/ant_chp8e.html

http://www.cjf.org/pages/BibleQuestions/bq34ans.htm

http://www.valiantfortruth.com/html/sin06.html

http://threshingfloor.org/spiritsoul.htm 


이제 원세호 님의 비판을 항목 별로 간략하게 반박해 보겠다.


1) <원세호 님의 비판: ① '요한복음3:6을 설명하면서...소나 말로부터 태여 난 것이 소나 말이듯이 인간은 영으로부터 났는데 그 영이 하나님이시다(요4:24)라고 하면서 분명히 신격 안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 안에서 하나님들이다'라고 주장한다...위의 주장은 그럴듯한 것이지만...그 때에(창2:7) 하나님으로부터 추가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네샤마' 이며 생기로 번역된 것이다. 이것이 '영'인 것은 사실이지만 만들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일부분을 넣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으로 영을 출산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하나님과 대등하게 '본성 안에서'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이 본래부터 가진 하나님 되심의 고유한 특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인간은 피조물로 믿음을 통해 거듭나지만 양자의 신분이며 하나님은 아니다.> <② '위트니스 리'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영들(하나님 종류에 속한), 하나님들이 된다'고 주장한다.>


** 반박: 원세호 님은 원문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다. 위트니스 리의 원문을 인용하고 반박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 주장: ① "요한복음 3장은 거듭남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6절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육체이며 천연적인 생명 안에서 육체로부터 난 육체이다. 소로부터 난 것은 소이다. 말로부터 난 것은 말이다. 우리는 영으로부터 났고 그 영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요4:24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이 영이심을 말해준다. 우리가 그 영 하나님께로 났다면 우리는 분명히 신격 안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 안에서 하나님들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하나님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영(Spirit)으로부터 난 영(spirit)이다">(27.(하나님-사람의 생활) p. 19).


원세호 님은 지금 오해를 하고 있다. 위트니스 리는 지금 창조 시 사람 안에 들어온 '네샤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네사먀인 사람의 영 안에 <영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말하고 있다. 즉 네사마가 하나님의 일부라는 말이 아니라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는 요3:6에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이신 그영이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인 우리는 <하나님-사람들>이 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위 인용문에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위트니스 리의 글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 종류에 속하는 <하나님-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재적인 연구이다...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종류에 속한 <하나님-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로서 나고 하나님의 종류에 속한 하나님-사람으로서 우리는 느슨한 방식으로 우리의 배우자에게 말할 수 없다. 남편은 반드시 하나님 사람으로서 살아야 한다'(하나님-사람의 생활, 19-20쪽).


하나님이 사람인 우리와 연합하셔서 한 유기체(그리스도의 몸,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고전12:27, 요15:5).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사람이시라면, 그 몸인 우리들도 하나님-사람들이라는 말은 당연한 것이다. 포도나무 줄기만 포도나무이고, 그 가지는 포도나무가 아니라고 말하면 안 된다. 우리는 거듭났지만 양자의 신분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라는 원세호 님의 말은 하나님의 참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음을 부인하는 듯한 말로 들린다.

이처럼 거듭남의 정의(http://www.regenerated.or.kr/whatisit/index.html)가 바르지 못할 때 정통교부들이 가르쳤던 '신화'(사람이 하나님이 됨) 진리를 소화하기엔 벅찰 수 밖에 없을 것이다.


2) <원세호 님의 비판: ③ 영이 힘을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몸에 있을 때 중재자인 혼 즉 영과 몸이 접합으로 생긴 혼이 중재를 해야 힘을 낸다는 주장이다. 우선 혼의 생성 이론 자체가 성경 창2:7과 약2:26; 히12:9; 롬8:6-7절에 의하여 거짓인 것이 증명된다.>


** 반박: <워치만 니 주장: ③ "영은 직접적으로 몸에 힘을 행사할 수가 없다. 거기에는 중재자가 필요한데, 그 중재자가 영이 몸을 접함으로서 생겨난 혼인 것이다">(24.(영에 속한 사람) p.41). 사람의 영 안에서 무엇을 원하더라도 사람의 혼에 해당되는 생각 또는 의지의 자발적인 도움 없이 우리의 몸이 그대로 움직여 주지는 않는다는 위 주장은 성경적이다. 물론 우리의 체험도 이와 같다.


증명해 보자. 마26:42 은 '영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the spirit indeed is willing, but the flesh is weak) 라고 말한다(여기서 개역 성경에서 '마음'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이라고 해야 맞다. 왜냐하면 원문이 spirit(푸뉴마, 4151) 이지 heart(카르디아, 2588)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 말씀에서 영이 원하는데 왜 제자들은 실제로 입을 열어 기도 할 수 없었는가? 그것은 영의 원함을 따라 입을 움직여 기도해야 할 그들의 혼(자유의지, 생각, 감정)이 영의 요구보다는 피곤해서 늘어지는 육체의 요구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서 7장의 세 법에 대한 설명은 위 워치만 니의 주장을 지지한다. 즉 롬7:22-23에 의하면, 우리의 <영>을 가리키는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우리 <육체>인 지체 속에 있는 또 다른 법이 우리 <생각>의 법과 싸운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 안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 잡아간다. 즉 깊은 속에서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양심의 음성이 있지만 그 음성에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순종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말라는 깊은 속의 영의 요구는 육체에게 영향력이 없게 된다. 대신에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육신의 욕구에 이끌려짐으로 오히려 영의 요구가 아닌 육신의 욕구가 실현되고 만다. 이런 일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자주 경험되는 일이다(롬8:6). 원세호 님도 정상적인 믿는 이라면 이런 갈등을 충분히 겪어 보았을 것이다.


3) <원세호 님의 비판: ④ '영'이 세 가지 중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양심, 직관, 영교, 라고 주장하는'워치만 니'는 성경에서 이탈하여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주장이다. 그 이유는 육신도(몸) 생각하며 영도 사유하며 생각한다. 이것은 혼작용이며, 영혼의 생명현상이다(롬8:6-7; 7:22-24).> <⑤ 인간의 영이 거듭나기 전과 구원받은 후에는 영과 혼이 분리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거듭나기 전에 영은 혼의 부속품처럼 보이도록 영이 잠식을 당해 영의 기능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그러나 위의 주장은 거짓이다. 첫째는...추측에 불과 한 것...둘째는 성경 롬8:6:7절에 의하면 육신인 몸도 동물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생각을 하며....따라서 거듭난 후에는 영의 생각과 몸의 생각이 구별되며(롬7:22-24)...>.


** 반박: 원문을 소개하고 반박해 보겠다.


<워치만 니 주장: ⑤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는 그의 영이 혼에 둘려 쌓여 너무나 침체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혼에서 발산되는 것인지, 어느 것이 영에서 발산되는 것인지를 도무지 구분 할 수가 없다. 영의 기능이 혼의 기능과 혼합되어 있다. 게다가 영은 하나님께로 향한 최고 주요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그 영이 하나님을 향하여는 죽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은 혼의 부속품처럼 보이도록 영은 잠식을 당하여 영의 기능이 거의 나타나지 못하게 마련이다. 구원받은 후에는 영과 혼을 분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24. (영에 속한 사람) p.55,)


우선 원세호 님의 비판은 우리의 체험과 판이하게 다르다.

우리의 몸(body)은 오감은 가졌지만 이러한 신체 자체가 심리적 기능인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의 몸(신체)이 생각한다고 말한 곳이 없다. 이것은 과학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원세호 님은 아마도 로마서 8:6의 <육신의 생각>이란 말을 <육신이 생각을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의 <몸>인 육신이 생각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주체)이 육신에 속한 것들(대상)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골3:2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롬8:6의 <육신의 생각>은 여기의 <땅엣 것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눈 코 입 팔 다리 등으로 이뤄진 우리의 몸 자체가 생각을 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신체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의학도들에게도 금시초문의 이야기일 것이다. 생각은 심리작용이지 신체작용이 아니다.


4) <원세호 님의 비판: 육의 율법에 관련해서 사람이 애초에는 영, 혼, 몸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설명은 모두 거짓 주장으로 사료되니 정신차려 확인하라, 성경 창2:7과 약2:26; 행5:59; 요19:30등 증거에 의하여 '워치만 니'의 주장은 거짓 말이며 성경에 대하여 부인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 반박: 여기서도 워치만 니 글을 우선 인용하고 이어서 반박해 보겠다.


<워치만 니 주장: ⑥ "이와 같이 "육"의 용법과 관련해서 사람이 애초에는 영, 혼, 몸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혼은 사람의 인격과 인식의 자리이기 때문에, 혼은 사람의 영을 통하여 영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혼은 영에 순종하며 하나님과 그의 뜻이 연합 될 것인가, 아니면 몸과 물질 세계의 모든 유혹에 굴복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인간의 타락을 기화로 해서 혼은 영의 권위를 대적하여 몸과 그 정욕의 종이 되었다. 이리하여, 사람은 영적이 아닌 육적인 사람이 되었다">(24.(영에 속한 사람) p.118).


원세호 님은 사람이 '영 혼 몸'(3분)이 아닌 '몸과 영'(2분)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원세호 님이 제시한 창2:7, 약2:26은 요19:30은 이분설을 직접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도행전5:59는 성경에 있지도 않다. 성경을 이처럼 함부로 인용하면 안될 것이다.


이분설, 삼분설 관련 논의는 앞에서 이미 충분히 다뤘다. 생각해 보라. 만일 사람이 몸과 영만 있다면 물질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만 있어야 옳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엄연히 심리적인 정신세계가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독서는 마음의 양식> <책을 읽는 것은 우리의 정신을 살찌운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라. 일반 고전문학을 읽는 것이 <육신>의 배를 부르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신자들의 <영>의 양식이 되지도 못한다. 영적 양식은 오직 책 중의 책인 성경뿐이다. 그러나 고전문학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 분명히 우리 <정신, 혼> 안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원세호 님은 이런 실증적인 현실을 외면한 채 자신의 교리 안에서 사실과 다른 말을 반복하면 곤란하다. 원세호 님은 자신과 워치만 니 중 누가 성경과 과학적인 증거들을 부인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5) <원세호 님의 비판: ⑦ '위트니스 리'는 인간의 영이 해방될 때 성령이 우리 영과 함께 해방되며, 이것이 성취되려면 우리의 천연적 사람 곧 겉 사람이 폐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영만 죄에서 해방하는가? 아니다. 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영의 해방을 말하는 것은 거짓이 된다. 그리고 특별히 성령이 영의 해방과 함께 해방된다니... 언제 성령님이 죄에서 얽매인 바가 있는가? 그가 부자유스러운 때가 있어 자유스럽게 된다는 것인가? 이런 말은 정신이 없는 소리이다.>


** 반박: 본문을 인용하고 원세호 님의 비판을 반박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의 주장: ⑦ "나는 '(자아의 파쇄와)영의 해방'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는 많은 독자들이 영의 해방은 성령의 해방이라고 생각할까봐 염려스럽다. 이것은 진리를 따른 것이 아니다. 영의 해방은 성령의 해방이 아니라 우리의 영의 해방이다. 우리 영이 해방될 때,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해방된다. 이것이 성취되려면 우리의 천연적 사람 곧 겉 사람이 파쇄되어야 한다">(40.(교회의 역사와 지방교회들) p.63).


위 인용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 뒤에 이어지는 것이다.


'내가 니 형제님과 함께 있을 때마다 그는 늘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이 파쇄 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 우리의 자아, 우리의 천연적인 조성은 파쇄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것은 성령이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 안배하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을 파쇄시켜 성령이 내주하시는 우리의 영으로 해방되게 한다. 우리의 영이 해방될 때 성령이 자동적으로 우리의 영과 함께 해방된다'(위 책, 62쪽).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마16:24). 여기서 '우리 자신이 부인되고 십자가를 진 상태'가 천연적인 사람 곧 겉사람이 파쇄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고 했다. 여기서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생활 중에 표현되시는 것이 '성령이 우리 영과 함께 해방 되셨다'는 말과 역시 같은 맥락의 말이다.


즉 <사람의 영의 해방>이라는 말은 우리의 생각이 영에 두어짐으로(영의 일을 생각함으로) 영의 의도와 원함이 우리의 생각을 거쳐 우리의 몸으로 실행되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다(롬8:6). 이와 반대로 굳어진 마음과 생각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 안의 원함이 좌절되고 실천되지 못할 때 우리는 속에서부터 답답함과 갇힌 듯한 느낌을 체험한다. 이것은 우리의 영이 우리의 겉 사람의 고집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제한되고 심지어 묶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 자아가 부인되고 그리스도가 사셔야 하는데(갈2:20) 우리의 자아가 너무 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대로만 함으로 그리스도가 부인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때에 성령은 우리 영 안에서 근심(grieve)하기까지 하신다(엡4: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의 불순종이 계속되면 깊은 속의 성령의 역사는 잠잠해져서 마치 성령이 소멸된 듯한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성경은 이런 상태가 되지 않도록 '성령을 소멸치 말라'(Quench not the Spirit)고 경고한다(살전5:19).


매우 고집스럽던 사람도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겉 사람이 깊이 다뤄지면 자기 주장이 줄어들고 매사에 주님께 묻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구약에서 광야 생활 이전의 모세와 이후의 모세, 신약에서 회심 전의 사울과 회심 후의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런 것은 영의 역사를 알고 주관적인 십자가의 체험(마16:24)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 공감이 되는 말들이다. 이런 당연한 주장에 대해 원세호님이 <이런 말은 정신이 없는 소리이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자신에게 이런 성령의 역사와 주관적인 십자가의 체험이 아예 없거나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6) <원세호 님의 비판: ⑧ '위트니스 리'는 영이 혼에 깊이 박혀 있고 혼 안에 감추어져 있으며, 혼은 쉽사리 인지되지만 영은 알기도 어렵다고 주장한다. 위 말은 어리석은 고백이다. 왜냐하면 '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혼은 생명현상으로서 정신이니 눈에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 마음은 인지하나 보지 못함 같이 영혼의 생명현상 혼이 인지되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근본이 성경에 맞아야 모든 것이 이해되는 것인데 근본이 틀렸으니 무슨 말인들 맞을 수 있겠는가!>


** 반박: 원문 인용 후 비판에 대해 반박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 주장: ⑧ "우리는 우리의 혼과 영을 분별해야 한다. 혼은 마치 뼈가 골수를 감추고 있듯이 영을 덮어 감추고 있다. 뼈를 보기는 쉬워도 속에 감추인 골수를 보기란 쉽지 않고...영은 얼마나 혼에 깊이 박혀있는지! 우리 영은 숨겨져 있고 혼 안에 감추어져 있다. 혼은 쉽사리 인지되지만 영은 알기도 어렵다">(7.(하나님의 경륜) p.41).


원세호 님의 위 비판은 오히려 위트니스 리의 <혼은 쉽사리 인지되지만 영은 알기도 어렵다>는 말을 재 확증해 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혼인 심리적인 영역은 학문적인 접근과 체계화라도 가능하지만 영의 영역은 그보다 더 깊고 비밀한 것이 사실 아닌가?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은 영으로부터 나온 것과 심리적인 정신 세계로부터 나온 것들을 체험적으로 구분하기도 한다(고전2).


7) <원세호 님의 비판: ⑨ 사람의 영은 영적 음식인 삼일 하나님을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다고 요6:35;51;57; 요7:37을 인용 증거하고 있다. 우선 인용한 성경 요6:35절은 생명의 떡이라고(단수) 하셨고 목마르지 않겠다고(단수) 하셨다. 주리지 않는 것이나 목마르지 않는 것은 믿음(단수)과 관련 있으며, 단회적인 행동이므로 계속적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트니스 리'는 실수가 아니라 거짓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영생을 얻은 자는 계속 먹을 필요가 없다...이 모든 예수님의 증거는 단회적 믿음으로 해결되는 것이고 계속 먹는 것이 아니다.>


** 반박: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안 먹어도 저절로 자라는가? 그렇지가 않다. 마찬가지로 거듭날 때 단 한 번 영적인 양식을 먹었으면 그것으로 족하고 계속 먹을 필요가 없다는 원세호 님의 주장은 너무나 엉뚱하다. 목회자들은 죄인을 거듭나게 할 뿐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에게 영의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매 번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오늘날 이미 거듭난 성도들을 향해 행해지는 이 땅위의 모든 목회자의 말씀전파는 무익하다. 요6:31-35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먹었던 만나와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함께 말하고 있다. 즉 만나는 참 떡(요6:32)이신 주님자신의 예표인 것이다. 따라서 만나를 날마다 먹어야 했다면 참 양식인 주님을 날마다 먹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처럼 원세호 님의 주장은 일반 상식으로나 교리 적으로나 말이 안 된다.


즉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들은 원세호 님의 주장과 크게 다르다. 요10:10은 예수님이 양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더 풍성하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원세호 님 말 대로라면 한 번 생명을 주어 거듭나게 했으면 되지, 그후에 왜 더 풍성히 생명을 주실 필요가 있는가? 고전3:6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신다'고 한다. 한 번 (생명의 씨)를 심어 거듭나게 했으면 되지 무엇 때문에 영적인 물을 또 주어 자라게 하는가? 요6:57하는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한다. 예수님이 직접 하신 이 말씀은 단 한번 먹은 것으로 평생을 살라는 권면의 말인가? 그렇지가 않다. 예레미야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받아 먹었사오며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라고 말한다(렘15:16). 이 말씀도 단 한번만 먹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본문 문맥대로 바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원세호 님에게는 <영적인 생명의 성장>에 대한 성경적인 인식이 없는 것 같다. 또한 원세호 님의 <영생을 얻은 자는 그후에 영적인 양식을 계속 먹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문제가 심각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 성장(엡4:16)을 근본적으로 가로막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목회자들이 붙들고 있는 한 그들로부터 목양 받는 성도들의 영적 생명은 늘 갓난아이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다(고전3:1-2). 원세호 님은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으로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의 증가하심으로 증가한다'(increaseth with the increase of God)는 골로새서 2:19 원문 말씀을 좀 더 깊이있게 연구해 보기 바란다. 영 육간에 생명의 성숙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먹음이 필요하다.


8) <원세호 님의 비판: ⑩ 하나님의 영이 인간 영에게 들어 올 때에 인간 영이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이란 워치만 니의 주장은 거짓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영, 인간 영이 거듭나며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것이며 깨어나는 것이 아니다(요3:6; 1:12; 엡2:8; 롬10:9-10)>.


** 반박: 워치만 니의 본문을 인용소개 한 후 반박해 보겠다.


# [생명의 말씀사 번역] <워치만 니 주장: ⑩ "하나님의 생명(하나님의 영이라고 해도 좋다)이 우리의 영에 들어 올 때 인간의 영은 그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던'것(엡4:18)이 이제는 다시 살아났다. 그러므로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8:10)">(25(영에 속한 사람 2). 정동섭 역, p.15).


# [한국복음서원 번역] <하나님의 생명(혹은 '영'이라고 칭함)이 우리의 영속에 들어 올 때 곧 죽고 혼미케 된 우리의 영을 살렸다. 본래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으나'(엡4:18) 이제는 다시 살아났다. 이러므로 '육신으로는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8:10)>(영에 속한 사람(중국어 원문 직역), 260쪽).


먼저 원세호 님이 비판하고 있는 <인간의 영은 그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다>는 생명의 말씀사 번역은 <죽고 혼미케 된 우리의 영을 살렸다>는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한 것이다. 해당 원문 내용은 진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원세호 님은 다음부터는 비판대상 책자를 선정할 때 이런 점들을 잘 감안하기 바란다.


엡2:1은 우리가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었다고 말한다. 2장 5절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한다. 골2:13도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다만 우리의 죄가 해결되는 방면뿐 아니라 우리 안의 어느 부분이 죽었던 상태로부터 살아나는 상태로 전환되는 것을 포함한다. 특히 위 워치만 니가 인용한 로마서 8:10에 근거해서 우리의 영이 죄로 인하여 죽었다가 거듭날 때 다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이 죽었다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것은 영구적인 사망으로 소생이 불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의 영의 주된 기능인 하나님을 접촉하고 대화하는 기능이 매우 약화되어 마치 죽은 상태와 같이 된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분리할 수 없는 연합을 이룬다(고전6:17). 원세호 님은 이러한 것을 비판하려면 <예수를 믿는 순간 인간의 영이 거듭난다>는 자신의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된다는 것인지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