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성령론> 비판에 대한 재반박
원세호님
timothy , 2005-08-24 , 조회수 (3223) , 추천 (0) , 스크랩 (0)

 

반복해서 지적하는 것은 이것이다. 원세호 님의 비판 글은 동일 내용이 중복해서 다뤄지고 있다. 체계가 없다. 따라서 이런 글들은 학문적인 가치가 떨어진다. 원세호 님은 자신의 (지방)교회 비판 책자를 교회론, 기독론, 신론 등의 제목을 붙여서 썼다. 그렇다면 사전에 잘 살펴보고 유사하거나 동일한 비판내용들은 하나로 묶어서 일괄 비판을 했어야 했다. 예를 들어 '주의 이름 부르는 실행'을 비판하려면, 기독론이든 성령론이든 어느 한 곳에서 일괄적으로 다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원세호 님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반박하는 입장에서도 불가피하게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게 된다. 이것이 합당한가?

또한 <성령>인가 <그 영>인가도 지금처럼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과대포장 할 일이 아니다. 우리말 성경은 동일하게 성령이라고 했지만, 영어 성경은 를 구분해서 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원문을 따라 을 <성령>으로 를 <그영>으로 읽고 말하는 것이 무슨 그리 큰 잘못인가? 물론 앞에서 이미 쓰였던 '성령'을 정관사를 써서 'the Spirit' 이라고 함으로 문자 상으로는 '그영'이지만 사실상은 '성령'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도 <그영>이라고 했다는 사실만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그영>을 좀 더 심도 있게 이해하려고 한다면 다소 복잡한 면이 없지 않다.


예를 들면 1) 마1:18, 20에서 아기 예수를 잉태시킨 영으로서의 성령과 고전15:45의 육신을 입었던 예수의 인성을 포함한 의미의 생명 주는 영 곧 <그영>은 차이가 있다. 전자는 삼위의 3격으로서 신성만 있으시다면, 후자는 그 영 안에 예수의 인성도 포함되셨다는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롬8:16의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라고 할 때'의 성령은 원문이 the Spirit으로서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또는 2)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는 고전 6:17 말씀처럼 <주의 영>과 <사람의 영>이 연합하여 한 영이 된 상태의 <그영>이 그것이다. 롬8:13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이라고 되어 있으나 원문은 역시 the Spirit 이며 우리의 영과 연합된 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지방)교회측은 이러한 영에 대한 분별과 인식이 있다(워치만 니,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한국복음서원, 2000년, 26쪽; 위트니스리, 온전케 하는 훈련(II), 한국복음서원, 1993, 124-146쪽). 만일 원세호 님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 비판했다면 좀 더 깊이와 무게가 있는 진리토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세호 님은 이런 부분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에 단순한 표현상의 이견이나 자신의 <예수=성령> 또는 <아버지=예수=성령> 틀에만 억지로 끼워 넣으려고 했다.


결국 원세호 님의 비판 글은 핵심을 비껴갔다. 대신에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차이점들만 중복되게 나열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들의 대부분은 그의 삼신론적인 사상 내지는 (지방) 교회측의 더 심화된 그영 이해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것이다. 결코 (지방)교회측 성령론이 거짓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세호 님의 그영 이해가 비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1. 원세호 님의 (지방)교회 <「그 영」에 대한 독특한 주장> 비판 반박


이제 구체적인 항목들을 다뤄가며 반박해 보겠다.


1) <원세호 님의 비판: ① 요14:16-17절의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하여 성경을 잘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또 다른 보혜사는 그 영이며 부활 안에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순절 때 오신 그 영' 이라고 하므로 성경을 인용해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


** 반박: 비판 원문을 인용하고 반박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 주장: ① "요한 복음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였다(14:16-17상). 보혜사는 실제(진리; 필자 주)의 영인 것이다. 영이 없다면 실제가 없으며 모든 것이 바로 의문과 교리가 된다. 17절 하반 절은 계속하여 이 실제의 영에 대해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14.(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함) p. 47).>


이미 이 '또 다른 보혜사'도 앞의 기독론 반박에서 다뤘던 것이다. 핵심만 다시 짚어보기로 하겠다. 원세호 님은 이 '또 다른 보혜사'가 <부활하신 아들 하나님은 제외된> 성령 만이라고 믿는가? 그렇다면 원세호 님은 우리의 생명 되신 아들 하나님은 언제 어떻게 영접했는가? 원세호 님은 아들과 성령을 철저하게 분리시키는 입장임으로 성령 받은 것이 곧 아들을 영접한 것이라고 얼렁뚱땅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들과 성령을 분리시키고, 또 다른 보혜사와 보혜사를 기계적으로 분리시킨 결과는 <아들의 실존체는 사람 안에 안 계신다>는 심각한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것은 성경적인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요일5:12는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명쾌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고린도 전서 15:45의 <생명 주는 영>을 요14:16-17의 <또 다른 보혜사>라고 믿으면 무엇이 문제인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이 생명 주는 영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이 구별되나 상호 내재하시는 온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삼위 중 어느 한 위격을 지칭할 때에는 다른 두 위격도 포함된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정통 삼위일체임을 원세호 님은 알아야 한다.


2) <원세호 님의 비판: ② 생명이 인간의 영을 통해 교통을 이룰 때 중생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이 영을 통하여 공급될 때 성화가 일어난다는 주장은 성경적인 듯 하지만 틀린 것이다. 그 이유는 거듭남이나 중생은 인간 영에 관한 신분에 관한 즉 출생에 관한 것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을 때에(롬10:9-10; 요3:3-6)즉 예수의 이름을 믿는 때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게되는 순간 거듭나게(요1:12)되어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을 받은 사람이 중생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 반박: 원세호 님은 중생의 시점과 상태를 혼동하고 있다. 자신이 확실히 체험한 사람의 말은 간단명료하다. 확신이 있다. 그러나 위 원세호님의 말은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그리고 <영을 받은 사람이 중생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중생의 참된 의미를 오해했거나 본인이 아직 참된 중생을 경험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원세호 님의 두리뭉실한 설명과는 달리 중생을 말하는 성경본문은 아주 명확하다. 즉 요3:6 후반부는 중생을 '그영으로 난 (사람의) 영'(and which is born of the Spirit, is spirit)이라고 했다. 즉 중생은 <출생의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중생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영'이라고 한 고전6:17처럼 <한 존재와 또 다른 존재의 연합의 문제>이다. 위 구절에서 '합한다'는 동사인 '콜라오'(2853)는 '아교'에서 유래된 말로서 원뜻이 '아교로 붙이다'는 말이다. 중생을 통해 우리는 서로 안에 거하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상태를 갖는다(요15:4-5).


3) <원세호 님의 비판: ③ 지방파의 주장은 성령님이 인간의 영과 연합해서 명목상 구별되며 하나가 되어 있어서 영이 풀린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 영이 풀린다는 교훈이 없으며 성령님과 인간 영이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근거도 성경에 없다.> <⑤ 성령님이 인간의 영에 내주 하심으로 풀려나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 영은 능력 있고 하나님이신 성령은 무능한 분으로 주장하므로 무례한 주장이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며...편재하시는 분이시다. 인간 피조물 영에게 들어가면 풀려나올 수 없다는 망언을 해서는 안 된다.>


** 반박: 우선 원세호 님은 정경사에서 나온 책자인 '자아가 죽을 때'를 참고했다. 그러므로 한국복음서원에서 나온 동일 책자인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과는 페이지나 문체나 단어사용이 많이 다르다. 실제로 원세호 님은 위 비판내용을 38-39 쪽에서 인용했다고 하나 한국복음서원 책자 해당 페이지엔 그런 내용이 없다. 이런 차이가 반박 글 작성시 어려움이 된다는 것을 원세호 님은 알기 바란다. 이제 원세호 님의 위 주장을 반박해 보겠다.


(1) 'the release of the Spirit'이란 원문은 '영이 풀렸다'라고 번역하기보다 '영의 해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은 번역이다. 영이 풀렸다는 말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2) 또한 <성령님과 인간 영이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근거도 성경에 없다>는 원세호 님의 주장은 거짓이다. 이 말은 고전6:17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함으로, 영이신 주님과 우리의 영이 연합되어서 한 영(one spirit)이 되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원세호 님은 자신이 모른다고 해서 함부로 '성경근거가 없다' 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3) 또한 우리 안에 주인이신 영 하나님이 살고 계시지만, 실제 체험에서는 우리가 주인노릇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원세호 님은 항상 성령님께 복종하는 삶을 사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주님이 원세호 님보다 무능하시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원세호 님은 본인의 실 생활을 한 번만 돌아보았어도 '무례하다' '망언이다'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상한 인격을 가지신 주님은 우리를 힘으로 강압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우리가 자발적인 헌신과 믿음의 반응을 통해 스스로 순종하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성경엔 '성령을 근심케 말라'(grieve not the holy Spirit of God)(엡4:30),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Quench not the Spirit) 라는 말씀이 있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때 옛 자아가 강하게 살아서 주님을 이기고 만다. 오직 많은 실패를 거쳐 자아의 실상을 알고 겉 사람이 파쇄된 자만이 사도 바울처럼 그의 삶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 수 있다(갈2:20). 다시 권하건대, 원세호 님은 지금처럼 말꼬리만 잡지 말고 위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책자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참고로 위 책자 서문은 이렇게 쓰여 있다 :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자아의 파쇄(부인)이다. 자아가 파쇄되어야 영이 해방된다. 마르틴 루터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교황이나 추기경이 아니요 나의 자아>라고 말했다. 자아는 파쇄가 필요할 뿐 아니라 분리가 필요한 것이다. ...헌신과 통제와의 관계, 파쇄와 분리의 필요성, 분리되는 방법 등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는 책이다...".


4) <원세호 님의 비판: ④ 성령님이 사람의 영을 통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인간의 영에 전능자로서 내주 하시는 것이다. 성령님은 전능하시며...편재하시므로 약속하신 대로 인간의 영에 내주 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영을 사용해서, 통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대로 말하라.>


** 반박: 원문을 좀더 넓게 인용하고 반박해 보기로 하겠다.


<워치만니 주장: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실 때는 사람의 영을 입고 오신다. 이것은 마치 전등의 전기가 하늘의 번개같지 않고 전선을 타고 가는 것과 같다. 오늘날 전력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전선이 있다. 전선을 입고 가는 것이 전기이다. 물리학에서는 이것을 전하(Electric charge)라고 하는데, '하'라는 단어는 짊어진다는 뜻이다.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기가 전선을 입고 전선을 타야 한다. 하나님의 영도 이와 같이 사람의 영으로써 성령을 짊어지게 하고 사람의 영으로 성령을 사람가운데로 가져오신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영 안에는 성령이 내주하신다>(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한국복음서원, 2000년, 26-27쪽).


원세호 님의 위 주장은 핵심이 없다. 즉 비판 요지가 분명치 않다. 원세호 님은 성령의 편재를 아무 곳에서나 적용하여 말하지 말기 바란다.


성령은 분명히 편재하신다. 그러나 불신자의 영 안에는 안 계신다. 이것을 부인하면 신자나 불신자의 차이가 없게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또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저 믿은 성도들의 복음전파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된다. 양육도 마찬가지이다. 영을 사용한 사람의 말씀공급 만이 참된 양육을 가능케 한다. 이와는 달리 단지 자기 생각 속에 있는 성경지식 전달만으로는 영과 생명을 공급하기 어렵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날 자신의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그분의 일을 하신다. 먼저 하나님은 사람으로 오신 주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셨다. 그 다음에 사도들도 마찬가지이다. 한 예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다>(I serve in my spirit)고 했다(롬1:9). 오늘날 하나님은 그분의 일의 주된 부분을 천사나 불신자나 하늘에서 번개처럼 나타나시는 방식에 의뢰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자신의 영 안에 계신 주님과 하나되고 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 즉 하나님은 오늘날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빌1:21)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통해 그분의 경륜을 이뤄 가신다. 이런 원칙을 알면 영적 생활에 진보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골로새서 1:29, 빌립보서2:13을 깊이 묵상해 보기 바란다.


5) <원세호 님의 비판: ⑥ 인간의 겉 사람이 성령의 훈련을 통해서 깨어지고 성령의 계시로 겉 사람이 속 사람과 분리된다는 주장은 성경 근거도 없는 소리이며, 믿는 사람은 롬7:18-25절과 같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리되는 것이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된다(롬8:13). 무엇이 성령의 훈련과 계시로 깨지는가?>


** 반박: 우선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워치만 니가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정의를 먼저 소개해 보겠다.


'로마서에서 '내 속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는 말씀이 있다(롬7:22). ...또한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하는 것을 보여 준다(3:16). 또 다른 곳에서 바울은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말한다(고후4:16). 성경은 사람을 속사람과 겉사람으로 나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 사람의 영은 속사람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 사람의 밖은 겉사람이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 사람의 영이 바로 속사람이고 보통 사람들이 감지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겉사람이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과 그분의 영과 그분의 생명을 두신 곳은 바로 우리 속사람이다. 이 속사람 밖에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으며 가장 밖에는 우리 전체의 육체인 우리의 몸이 있다'(워치만 니,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서울: 한국복음서원, 2000년), 10-11쪽).


(1) 계시로 겉사람과 속사람이 분리됨: 주님을 영접하고 난 이후에도 겉사람과 속사람을 구분 못하고 겉사람으로 헛되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사도 바울도 가말리엘 문하에서 그 당시의 최고의 신학 공부를 마쳤다(행22:3). 그러나 다매섹 도상에서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기 전까지는 그도 겉사람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 결과는 참된 주의 자녀들인 교회를 핍박한 것이다(빌3:6). 이처럼 성령의 계시가 없으면 겉사람과 속사람을 구분하고 분리하기가 곤란하다. 계시가 있어야 육체를 따른 삶이나 봉사가 무익함을 안다. 이에 대해서는 빌3:3-8을 읽어 보라.


(2) 성령의 훈련(징계)을 통해 겉사람이 깨짐: 히브리서 12장의 주의 징계는 주로 우리의 겉사람의 파쇄를 목적으로 한다(5-11). 즉 주님의 징계는 주로 우리의 겉사람을 다루어 그 안에 주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의 본성을 덧입게 하려는 것이다.


히12:10-11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케 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슬퍼 보이나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한다. 이런 말씀은 '너희는 유혹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생각의 영'(the spirit of your mind)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한 엡 4:22-24와 같은 맥락이다.


옛사람을 벗고...새 사람을 입는 과정에 성령의 훈련이 있다. 이런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원세호 님처럼 성경 근거가 없는 소리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원세호 님도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되면, 아래의 워치만 니의 말에 아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지 않고 계시와 체험을 통해 참되게 아는 사람이 복되다. 원세호 님도 이런 축복을 얻기 바란다.


<워치만 니: ⑥ "겉 사람은 성령의 훈련을 통하여 깨어집니다. 겉 사람은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됩니다"(히4:12)>(35. p.55, 워치만 니).>


6) <원세호님의 비판: ⑦ 성령님이 주의 이름의 보호자이시고 그리스도의 이름의 후견인이 되려고 오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은 전능자 하나님이신데 무슨 보호자와 후견인이 되며, '이름'을 보호하고 후견하려고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주의 이름 안으로 모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모임 주장이다.>


** 반박: 원세호 님의 지금 같은 지엽적인 것을 주목하고 성경적인 사실은 부인하는 비판은 옳지 않다. <주의 이름 안으로 모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모임 주장이다>라는 원세호 님의 말은 마18:20 본문으로 반박된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마18:20의 영어원문은 <...are gathered together in my name>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일 때 우리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이름 즉 그분의 인격과 임재 안에서 모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어떤 <물리적인 장소>를 말함이 아니고 모임에 오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원세호 님은 성경에 있니 없니 하는 말을 너무 경솔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성령이 주님의 이름을 '보호한다'(protects) 또는 '후견한다'(guards)는 말도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내어 비판할 일이 아니다.


워치만니는 위 말 바로 앞에서 <오늘 주님은 하늘에 앉아 계시지만 그분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 있고 그분의 영 또한 우리 가운데 있다>라고 말한다. 또한 인용문 바로 뒤에는 <성령은 주의 이름이 있는 곳에 계셔서 주의 이름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반드시 주의 이름 안으로 모여야 한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위 문맥에서 '주의 이름'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 모임에 참석한 성도들을 통해 나타나는 예수의 임재 또는 증거를 의미한다. 즉 성령은 주님의 이름이 모임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권위로 역사 되어 그 모임을 통해 주님의 임재와 인격이 나타나도록 하는 일에 보호자와 후견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같은 차원이다(마6:9). 이것을 <아버지 이름은 원래 거룩한데 무슨 또 거룩히 여김을 받느냐>고 비난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이러한 성령의 역사나 주의 이름의 나타남을 무시하는 예배모임도 많다. 그러나 그런 모임은 마18:20 이 말하는 예배모임은 아니다.


7) <원세호 님 비판: ⑧ 요한 복음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라고 성경이 증거 하는데 성경에도 없는 '함께'를 첨가하고 번역해야 한다고 하니 거짓도 이만 저만이 아닌 주장이다. 예수님이 성령을 보낼 때 아버지도 함께 보냈다고 번역해야 한다고 거짓 말을 하다니...>


** 반박: 이런 주장은 다 <삼위>를 <분리된 갑, 을, 병 같은 세 사람들>처럼 오해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원세호 님 말 대로라면, 예수님 승천 후 보혜사 성령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저 하늘에 남아 있고 제 3격만 이 땅에 오셨어야 한다. 이런 논리로는 고전 15:45, 계 5:6 같은 성경본문이 이해가 안 된다. 그러므로 삼위 중 어느 한 위격은 구별되게 상호내재 하심으로 다른 두 위격도 포함한다고 해석해야 옳다. 만일 세 하나님들만 강조하고 이것을 부인하면 즉시 삼신론이 될 것이다.


이제 위트니스 리 주장의 본문을 조금 더 넓게 인용해 보기로 하자.


<요한복음 15장 26절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이 구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그영을 보내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구절에 두 번 쓰인 헬라어 전치사 파라(para)가 <...로부터 함께>를 의미한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사실상 이 헬라어 전치사의 기본 사상은 <함께>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 있는 <파라>를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그영을 보내실 것을 분명히 가리키는 <함께>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위 책, 13-14쪽).


<요한복음 15:26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그영을 보내시며 그 영은 아버지와 함께 오신다. 14:26은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영을 보내신다. ..이 두 구절을 읽은 후에...누가 그영을 보내는가 아들인가? 아버지인가? ...아들과 아버지는 다 보내시는 분이다. ...결국 그영이 올 때 셋이 다 온다. 이는 그 영이 아들에 의해 아버지와 함께 오시며, 그영이 아버지에 의해 아들의 이름 안에서 보내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영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는 단지 그 영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이름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는 그 영을 갖는다>(14쪽).


위 내용에서 위트니스 리는 1) 헬라어 '파라'라는 기본 전치사의 의미 안에 'from with'의 뜻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Darby의 Holy Bible 1291쪽 각주 h를 참조). 2) 요15:26, 14:26 은 삼위의 상호내재 진리를 기초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세호 님의 비판은 '파라'에 대한 이견이나 삼위가 상호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전개해야 옳다. 무조건 <거짓도 이만 저만이 아닌 주장이다>라고 할 일이 아니다. 삼위를 분리시키는 삼신론 시각으로는 고전 15:45, 계 5:6, 또는 요8:16, 29(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등의 말씀이 잘못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진리이다.


8) <원세호 님의 비판: ⑨ 성령님이 오실 때 셋이 다 오고 그 영이 주어질 때 아버지와 함께 인간 안으로 들어와 함께 하는 영을 갖는다는 주장이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더라도 영은 성령님 하나님이신데 물건 같이 '갖는다'고 말을 하니 무례하고 변질된 성경 근거 없는 소리이다.>


** 반박: 삼위를 <갑, 을, 병 같은 세 사람>처럼 이해하면 위 주장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다. 갑이 혼자 갔는데 을과 병이 함께 갔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삼위의 상호내재 진리에 대한 신학적인 무지에서 오는 혼돈이다. 반복하지만 '갖는다' 역시 'have'라는 영어의 한글 번역 상의 문제이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기 바란다. 진짜 하나님을 물건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9) <원세호 님의 비판: ⑩ 창세기1:2절에서 그 영(성령님; 필자 주)이 알을 품었다고 주장하는데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니라"고 계시된 성경을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알이나 품는 이상한 분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 "운행하시니라"가 rchaph(라하프)인데 '움직이다, 흔들다, 운행하시다'로 의미를 해석해야지... 알이나 품고 날개 치는 새 모양으로 표현하다니 참으로 해괴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 알은 무엇이며 수면에 알을 품다니 성령님을 '그 영' '그 영'하는 속셈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어근이 '알을 품다' 이지만 수면에 운행하실 것이라 믿어야 하지 않겠나?>


** 반박: 역시 말꼬리 잡는 비판에 불과하다. 원세호 님은 운행하다는 동사의 어근이 '알을 품다'인 것은 인정하는가? 그렇다면 어떤 문맥에서 알을 품다 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알아보았어야 했다. 원세호 님은 문장 표현이 좀 색다르면 원래의 책자의 앞 뒤 문맥을 좀 더 폭넓게 읽어보는 성의를 보이기 바란다. 이제 조금 더 넓게 본문을 인용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 ⑩ "그 영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인데 삼일 하나님의 위격 중 세 번째이다(창1:2; 롬8:9; 고전2:11; 마28:19; 고후13:13).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은 먼저 알을 품고 있는 영으로서 언급된다. 창1:2는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알을 품고 계셨다고 말한다..."(11(그영). p.9).> <닭이 달걀들을 품는 것은 어떤 살아있는 것들을 산출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영은 생명을 산출하시려고 죽음의 상태 위에 그분의 날개를 펼치고 품고 게셨다. 창세기 1:2 에 있는 하나님의 영은 그분의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위한다.>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위 위트니스 리의 하나님의 영 해석을 읽고 전혀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다만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원세호 님의 눈에만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원세호 님은 앞으로는 좀더 무게 있게 비판하는 방법을 고려해 보기 바란다.


10) <원세호 님의 비판: ⑪ 온 종일 '오 주 예수여'라고 이름을 부르면 영으로 적셔지고 충만하고 잠겨진다 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사례가 있는가? 없는 주장이며 성령님이 물인가? 적셔지고 잠겨진다는 말인가? 성경에 없으면 해서도 안 되고 무슨 체험이 있어도 따라 해선 안 된다.> <⑫ 간단하고 단순하게 '오 주 예수여'를 피곤 할 때나 문제가 생기거나 할 말이 없을 때에도 하며 5분 만 해도 불이 붙게 된다고 위트니스 리는 ⑥ p.59, 하1-12 줄에 강조한다. 이것은 비성경적이며 예증이 없는 실행이며...거짓 영의 역사(요8:44)로 사료되니 금하기를 바란다.> <⑬ 주의 이름을 부르면 그 영 (성령) 안에 있게 되고 영으로 채워지고 잠겨진다고 주장하나 마음이나 체험은 있을 것이나 성경에 없는 실행이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 반박: 주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은 초대 교회에서도 발견된다. 즉 사울은 주의 제자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는 일을 할 때 주의 이름 부르는 자들을 잔해했다고 성경은 말한다(행9:14, 21). 또한 로마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의 부요를 체험한다고 말한다(롬10:12). 이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을 말한다(롬10:13). 이것을 원세호 님처럼 죄인이 구원받을 때 딱 한 번만 부르라는 의미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어서 고전 12:3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를 주시라고 고백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예수를 한 인간으로만 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절대로 이런 고백을 하지 않는다

(http://www.hightruth.or.kr/frame03/con_042.html). 


원세호 님이 주의 이름 부르지 않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성경에 없는 실행이라는 경솔한 말은 자제하기 바란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권했다(딤후2:22). 사도 바울은 주의 이름 부르는 자들과 함께 하라고 권하고 있는데, 원세호 님은 그런 말은 성경에 없으니 하지 말라고 금하고 있다. 누구 말이 참인가?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지방)교회측의 <주의 이름 부름> 관련 사이트 http://www.callingonthelord.org 를 방문해 보기 바란다.


원세호 님도 비판만 하지 말고 깊은 속으로부터 '예수님 당신은 나의 주이십니다'라고 고백해 보기 바란다. 또는 이것을 영어 식으로 'Lord Jesus!'(주 예수여)라고 선포할 수도 있을 것이다(행7:59, 계22:20).


2. 원세호 님의 (지방)교회 <그 영 곧 성령에 대한 양식적 주장> 비판 재반박


<구별된 삼위의 상호내재>(요14:11)와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사9:6, 고전15:45, 고후3:17, 계5:6)을 모르면, 성경적인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처럼 보일 수 있다. 특히 원세호 님처럼 삼위를 <갑, 을, 병, 세 사람>식으로 보는 삼신론 이단사상으로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트니스 리나 (지방)교회는 양태론자가 아니다. 다만 삼위의 구별된 상호내재를 부인하는 삼신론 자들에게는 양태론 자처럼 보일 뿐이다. 한국 교계 내에는 그 동안 삼신론 성향의 이단감별사들의 영향으로 균형 잡힌 성경적인 삼위일체관도 양태론처럼 오해된 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원세호 님의 비판 글을 반박하기 이전에, 서론에 갈음하여 이 점을 조금 자세하게 다뤄보고자 한다.


차영배 박사나 최삼경 목사는 위트니스 리의 신론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러나 이들도 위트니스 리가 사람 안에 삼위 하나님이 다 계심을 믿는다는 것을 자신들의 비판 자료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한 예로 차영배 박사의 인용 글 일부를 제시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