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원세호 님의 (지방)교회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영> 비판에 대한 재 반박
원세호 님은 (지방)교회의 기독론을 비판한다고 하면서 주로 체험을 다룬 책자 내용을 문제시 하고 있다. 그러나 원세호 님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다.
우리 주님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우리의 경배의 대상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그분은 우리가 매일의 생활에서 친근하게 체험할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 말씀도 다만 흰 바탕에 있는 검은 글씨만이 아니다. 주님과 그분의 말씀은 믿는 이들이 '먹을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 최고의 믿음 생활임을 배웠다(갈2:20). 그러나 그런 힘은 어디서 얻는가? 바로 그리스도와 말씀을 먹음으로 얻는다(요6:57, 마4:4). 그럼에도 이런 평범한 진리는 오랫동안 가려져 왔다. 다만 소수의 경건파나 속 생명 무리들이 이것을 조금 맛보았다. 그러나 개인의 영성만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진리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통해 폭넓게 해방되었다.
이러한 체험의 문제는 그러한 실제를 맛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원세호 님처럼 이 말 저 표현이 다만 못 마땅하기만 한 것이다. 어느 날 원세호 님이 영적인 눈이 열려 주님을 참되게 체험한다면 오늘날 자신이 비판하던 항목들을 자신도 그렇게 실행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바울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옥에 가두는 일을 했었지만, 후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과 함께 하라고 디모데에게 권하게 되었다(행9:14, 딤후 2:22). 심지어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분의 부요함을 체험케 될 것임을 말함으로 이런 실행을 하도록 격려하고 있다(롬10:12). 원세호 님도 이런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제 계속해서 각 항목별로 반박해 보겠다.
1) 위트니스 리 주장: <① "만일 당신이 요한복음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당신은 태초에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표현 되셨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뒤 마지막에 그 분이 영이 되신다(20:22). 말씀이신 그 분은 땅에 있는 전기 줄이시다. 즉 그 분은 안테나이다. 이 두 가지 말씀이 영이 요한 복음 6장63절에서 함께 왔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 안테나와 접지 선이 하나 될 때 전기가 온다. 말씀과 영이 섞여질 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달된다">(28.(생명 메시지) p. 39, 9-16줄).
<원세호 님의 비판: ①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성경이 아님) 되셨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여기 말씀은 인격적 실존개념이다(요1:1-2). ...요한 복음 20:22절에는 "성령을 받으라"라고 하셨지 예수께서 영이라고 한 증거가 없다. 예수님은 성령이 아니다. 그리고 '안테나'는 더욱 아니다. 거짓 말이다. 특히 명심할 것은 요한복음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내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 ...성경 어느 곳에 성경, 말, 예수님의 말씀이 영(살과 뼈가 없는 실존체 ; 눅24:39)이라고 한 곳이 있는가? 없다. 그리고 이 성구는...너희에게 '이른 말'이 인간의 영에 관한 것이며 영의 생명에 관한 것이란 교훈이며, ...그러므로 '이른'은 인간의 영과 육에 대한 이른 말이고 '말'(복수)은 영과 생명(단수)이라고 한 것이므로 '이른 말이 영'이고, 예수님 말씀이 모두 영(단수)이라는 주장은 문맥을 고려치 않은 실수요 거짓이 된다. 고로 '말씀과 영이 섞일 때 그리스도가 전달된다'는 지방파의 주장은 큰 거짓 말... 그 이유는 영과 주는 실존적 개념이고 말씀은 사역적 개념이며 생명은 현상적 개념이므로 넷이 하나 된다는 것은 거짓이다>.
** 반박: 원세호 님은 무엇을 복잡하게 풀고 있다. 위트니스 리의 말의 핵심은 이것이다. 성경 말씀은 때로는 자체만으로는 교리가 되어 남을 영적으로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말씀을 통해서 빛 가운데 영을 접촉한다면 그 말씀은 사람에게 생명을 전달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체험이 아닌가? 또한 안테나와 접지선은 예를 든 것뿐이다("..우리는 이것을 안테나와 라디오의 접지선인 두 개의 전선에 비유할 수 있다" 생명 메시지Ⅲ. p.39). 원세호 님은 위트니스 리가 예수님을 '진짜 안테나'라고 말했다고 믿는가?
주님은 요1:4 에서 '그(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요한 복음 6장은 주님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 산 떡, 하늘로서 내려 온 떡 등 먹을 수 있는 분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요6:57에 가서는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산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사실상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분을 먹을 수 있다. 이것은 상식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요 6:63의 말씀도 무슨 헬라어 단 복수를 따질 일이 아니다. 말씀이 복수이면 어떻고 단수이면 어떤가? 주님이 하신 말씀이 성경을 구성하고 이런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영과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사실 아닌가?
만일 이것을 부인한다면, 원세호 님은 하나님 말씀 이외에 누구 말을 듣고 믿음이 생겼고 생명을 얻어 거듭났는가? 공자나 석가 말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에게 영과 생명을 주사 우리로 거듭나게 하고 영적 생명이 자라게 할 수 있다. 이런 평범한 사실을 부인한다면 원세호 님의 성경관이 의심스러워진다.
또한 실존개념(영, 주), 사역개념(말씀), 현상개념(생명)은 도대체 누구 이론인가? 실존개념과 현상개념의 차이가 무엇인가? 요11:25에서 '나는 ...생명이니', 골3:4에서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는 말씀은 주님과 생명을 동격으로 말하고 있다. 원세호 님은 검증 안된 이상한 이론을 어디서 가져와서 말씀을 혼잡케 하지 말아야 한다.
2) 위트니스 리 주장: <② "그 분은 주, 말씀, 영이라고 불리우는 한 분 인격이시다. 주님은 또한 생명이시며(요14:6), 말씀과 영이시다(6:63; 롬8:10), 주, 말씀, 영, 생명을 하나 안에 있는 넷이다">(28.(생명의 메시지) p. 48, 하 2-4).
<원세호 님 주장: ② '그 분 (예수)은 주, 말씀, 영이라고 불리는 한 분 인격이시다' 란 주장은 ①변증에 나타남 같이 주님 말씀이 영이 아니므로 한 분의 인격이란 주장은 헛된 주장이다.>
** 반박: 주님은 <말씀>이시다(요1:1, 14, 계19:13 ...그 이름은 하나님 말씀이라 칭하더라). 또한 주님 자신이 직접 '나는...<생명>이라'고 하셨다(요11:25). 주님이 하나님으로서 본질이 <영>이신 것은 참이다(요4:24).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이요, 영이요, 생명이시며 이는 하나 안에 있는 넷이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원세호님의 주님의 말씀은 영이 아니라는 주장은 원세호 님의 성경관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준다. 딤후 3;16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데오프뉴스토스, God-breathed (2315))로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호흡은 '바람' 또는 '영'을 가리킨다. 어떻게 박사 학위까지 가진 사람이 이런 기본적인 진리마저 부인하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3) 위트니스 리 주장: <③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골3:16) 한다면 그 결과는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에베소서5장 18절부터 19절에 있는 유사한 구절이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말한다. 당신을 채우는 말씀이 영이 된다">(28. p. 13 ; 12-17줄).
<원세호 님의 비판: ③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와 엡5:18-19절을 합하여 '채우는 말씀이 영이 된다'는 지방파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말씀은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큰 거짓이다.>
** 반박: 원세호 님은 안에 말씀이 풍성히 거할 때 자연스럽게 감사의 마음이 생기고 찬양이 나오는 체험이 없는가? 그렇다면 신앙생활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말씀을 담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서로 화답하다보면 어느새 우리 안은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 그냥 기쁘고 좋고 얼굴은 해 같이 빛나게 되는 체험을 원세호 님은 맛본 적이 없는가?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머리만 복잡하게 하는 연구를 잠시 떠나서 골3:16을 직접 실행해 보라. 그리고 그 말씀을 영의 충만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이 큰 거짓인지 아니면 참된 말인지를 스스로 검증해 보기 바란다. 신학지식으로 머리만 크고 주님에 대한 참된 체험은 없는 사람은 주님을 핍박하던 서기관 바리새인들처럼 큰 전환이 필요하다. <사울>은 <바울>이 되어야 한다.
4. 원세호 님의 (지방)교회의 <그리스도를 마시려고 그 이름을 부름>비판 재반박
원세호 님은 같거나 유사한 내용을 항목을 달리해서 반복해서 비판했다. 그러나 재 반박 글에서는 이것을 동일 내용 별로 한데 묶어서 다루고자 한다.
1) 위트니스 리 주장: <①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그 영이시다(고전15:45 하 ; 고후3:17).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체현된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부활 안에서 그 영이 되셨다. 그러므로 그 분은 그 영, 즉 공기 같은 그리스도이다">(10.(삼일 하나님) p. 87, 2-4). <③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 곧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가 되어 그 분의 유기적인 구원을 수행하여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도록 교회를 산출하시고 그 분의 몸을 건축하심">(39.(그 책임을 이행하는가?) p. 38, 하 5-3). <④ "현재 지금도 계신다. 아침, 점심, 저녁, 밤에도 그 분은 항상 계시며 항상 존재하신다. 그 분은 공기와 같이 당신과 함께 하신다. 당신이 가는 곳마다 공기가 있다. 공기는 항상 있으며 항상 존재한다">(16.(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비결) p. 64, 3-5). <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에 예수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뉴마라는 것을 모른다. 그 분은 바로 뉴마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으로 충만 될 때 우리 또한 공기로 가득하여 탱탱하게 된다">(16. P. 86, 1-4).
<원세호 님의 비판: ①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그 '영'이라 하고 그리스도는 '공기'같은 분이라는 지방파의 주장은...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님이 공기 같은 자라는 주장이다. 영이란 단어가 푸뉴마이고 그 특수 의미는 인격에게 쓰일 때는 영이라고... 일반적 용법의 의미는 호흡, 숨, 미풍, 공기의 흐름...으로 성경에 인용되고 있으나 실존체를 나타내는 때는 일반적 의미를 적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기 같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주장은 성경 근거가 없는 거짓 말이 된다>. <③ 예수님이...'공기 같은 영'이란 말을 해서는 안 된다...성경에 그런 말이 없기 때문이다...무례한 언행이니 삼가야 한다.> <④ 공기와 같이 아침, 점심, 저녁, 밤에도 공기와 같이 함께 한다는 것은...성경 근거가 없다. 예수님은 편재하시는 하나님...우리와 함께 하시나(마28:20) 공기를 예수님으로 착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 <⑤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이실 때에 생명 주는 공기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 반박: 위트니스 리도 '푸뉴마'가 인격적으로는 영을, 일반적으로는 공기, 호흡, 미풍 등으로 쓰인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이런 것은 상식에 속한 일이다. 그리고 위트니스 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주는 뉴마'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 대기 중에 있는 공기라고 말 하는 것이 아니다. <공기와 같다> 라는 말과 <공기이다> 는 다른 말이다. 설사 <예수 그리스도가 공기이시다> 라는 표현이 있다해도 그것이 예수님이 진짜 대기 중에 있는 공기라는 의미가 아님은 앞 뒤 문맥을 보아서 금방 이해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떻게 대기 중에 있는 산소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줄 수 있겠는가? 또한 <공기를 예수님으로 착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원세호 님의 충고 역시 무익하다. 정상적인 사람 중에 진짜 공기를 예수님으로 착각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공기 같으신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아마도 'the pneumatic Christ'의 한국어 번역일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교계엔 매우 생소한 분야일 수 있음
예수님 생존 당시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하고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하는 예수를 돌로 치려고 했다(요10:30-33).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셨다(요10:38). 즉 성육신 당시는 이러한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무지가 종교인들이 예수님 본인과 그를 따르는 참된 믿는 이들을 핍박하는 주된 이유였다(요16:2-3). 그들은 <아들과 아버지의 참된 관계>를 몰랐다(요14:7, 23, 요일2:22-24). 이제 오늘날은 어떤가? 요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에 대한 몰이해가 형식적인 종교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고 핍박하는 주된 원인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 생각에 따르면 하늘에 계셔야 할 아버지 하나님이 이 땅에 온 예수 안에도 계심을 몰랐다. 오늘날의 한국 교계 내에서는 승천 후 하늘 보좌에 계셔야 할 주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심과 동시에 믿는 사람들 안에도 'the pneumatic Christ' 로서 계심에 대해 매우 생소해 한다. 즉 '주는 지금 영이시니'라는 고후 3:17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분야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루이스 B. 스미디즈(오광만 역), 서울: 여수룬, 1991)이란 책자를 참고하기 바란다
(http://www.hightruth.or.kr/frame03/con_021.html).
(2) (지방)교회측 '확증과 비평' 신학잡지가 특집으로 다룸
앞서도 간략하게 언급했듯이 '공기 같으신 그리스도'(the pneumatic Christ)는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 를 가리킨다(빌3:21). 또 이것을 연구하는 것을 'the pneumatic Christology'라고 한다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summary/answers/trinity.html).
(지방)교회측이 펴내고 있는 신학전문 잡지인 'Affirmation & Critique (확증과 비평)' 1997년 10월 호는 4편의 신학 논문을 포함하여 총 64쪽에 걸쳐 이 주제를 다뤘다. 특히 오늘날 기독론의 정통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인 칼케돈 신조(451)는 그 당시의 현안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데 치중한 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에게 긴요한 <성령과 그리스도의 인격 간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위 논문들은 이 분야에 관련된 근거자료들을 기초로 <성령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소위 '공기 같으신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인 인식을 잘 제시하고 있다.
즉 그것은 삼위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신다>는 안전장치를 가지고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 기능과 활동에 있어서 그 영과 동일시되는 성경본문의 문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고후 3:17). 이 점은 박형룡 박사(합동신학교대학원)도 그의 고후3:17 관련 신학 지남 발표 논문(1978년 봄호(통권 180권), 28-39쪽)에서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원세호 님 등은 이런 지극히 균형 잡히고 성경적인 기독론을 함부로 양태론이니 뭐니 정죄 해서는 안될 것이다.
2) 위트니스 리 주장: <②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찬양으로서 이 네 마디의 말을 호흡할 필요가 있다. 깊은 속에서부터 다만 '오, 주여, 아멘, 할렐루야! 를 부름으로 주를 알 수 있고 그의 부활의 능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의 구원을 즉각 경험할 수 있으며, 그와 하나되어 행할 수 있음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 알고 또 누리고 있다">(22.(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p. 34, 5-11).
<원세호 님의 비판: ②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이시나 그리스도 자신의 향기로움 호흡하는 방법으로 '오 주여 아멘 할렐루야! 네 마디를 부름은 성경적인 듯 하나 성경 근거가 없는 호흡 방법이며, 이 방법이 주를 아는 것과 구원체험하고 부활의 능력으로 들어간다는 주장은 성경 근거가 없는 것이다.>
** 반박: 위 내용 역시 주님에 대한 체험을 돕는 실행에 관한 이견이다. 실행에 대한 이견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원세호 님이 생각하기에 생명 주는 영이신 주님을 체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지 소개해 보기 바란다.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기도하거나 찬양 할 때 나름대로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많은 방법 중에 '오 주여'라고 할 수 있고, 또는 주님을 향하여 '아멘' 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할렐루야'라고 외칠 수도 있다. 원세호 님은 롬 10:12-13, 엡 5:18-19, 골 3:16-17을 깊이 묵상해 보기 바란다.
3) 위트니스 리 주장: <⑥ "우리는 우리 속 깊은 곳에 거하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이다. 깊은 속에서부터 그를 부를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흐름과 교통을 느낄 수 있다">(22.(정상적인 교회생활) p. 30, 하 2-1). <⑨ "한 편으로 그 분은 여전히 삼층 천에 있는 보좌에 계신다(롬8:34; 골3:1). 삼층 천에서 그 분은 만유의 주시요 온 우주의 행정가이시다. 그 분은 위대한 하나님이시요 위대한 주이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생명 주는 영이신 그 분은 어느 곳이나 계신다. 우리가 그 분을 부를 때마다 그 분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다. 이제 그 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 할렐루야! 이를 인해 주님을 찬양하라>"(16.(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비결) p. 64, 10-16줄).
<원세호 님 반박: ⑥ 깊은 속에 이미 계시는 그리스도를 부를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성경적인 듯 하지만 성경에 맞지 않는다. 맞지 않는데도 불러서 어떤 체험이 있는 것일지라도 성경은 지지하지 않는다.> <⑨ 셋째 하늘에 계시는 주님은 (롬8:34; 골3:1; 고후12:2) 보좌에 계시는데 부를 때마다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다면 사람의 영에 깊숙한 곳에 계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부를 때마다 들어오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근거가 없는 무례한 실행이다.>
** 반박: 이 점 역시 성경진리의 양면을 이해하지 못한 비판이다. 주님은 대제사장이요 중보자로서 하늘 보좌에 계심과 동시에,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계신다(골1:27, 3:4, 고후13:5, 딤후 4:22). 양면이 있는 것이다. 이사야 12:3-4는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라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부르며(call upon His name)'라고 말한다. <생수의 근원>이신 아버지(렘2:13)가 하늘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생명으로 오신 아들과 함께 상호내재 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깊은 속에 있는 영 안에 연합된 영으로 계신다(고전6;17).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혼(soul, 생각, 감정, 의지)을 포함한 마음(heart)에도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기를 원하신다(엡3:17).
특히 거듭난 이후에 성도들이 주목해야 할 중요한 한 가지는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를 체험하는 것이다(롬12:2). 즉 예전에는 땅에 속한 것 자기에게 이로운 것만을 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하늘에 속한 것 즉 예수의 생각을 품는 것이다(골3:3, 빌2:5). 예전에는 자기 고집대로 했지만 지금은 주님의 뜻과 인도를 따라 제 고집을 꺾고 순종하는 것이다(빌2:13, 마26:39). 예전에는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느끼고 행동했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자기도 기뻐하고, 주님이 애통해하시는 것들을 자기도 애통해하는 것이다(마5:4, 롬12:15). 이러한 것은 엡3:17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거처를 정하심과 관련이 깊다. 또한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을 우리 안으로 불러 영접한다.
4) 위트니스 리 주장: <⑦ "또 계3:14절을 보면 '아멘'이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깊은 속에서부터 「아멘! 하고 외칠 때 우리는 오! 주여!」하고 부를 때와 똑같이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은 주님이시오 또한 아멘 이시기 때문이다...우리가 깊은 속에서부터 아멘 하고 외치는 것은 주님을 불러서 그를 만지는 것이다">(22.(정상적인 교회 생활) P. 33, 1-9줄).
<원세호 님의 비판: ⑦ 아멘은 그리스도의 이름이며 '아멘'하거나 '오, 주여, 오, 주여'고 외칠 때에 깊은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만진다는 주장은 성경에 없다. 더욱이 계3:14의 '아멘'이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주장은 성경을 잘못 적용한 것이다. 구약에 25회나 아멘이 사용되었으나 이름으로 호칭된 바 없으며 신약에도 36회나 아멘이 사용되었으나 예수 이름인 경우는 없다. 예수는 성경에서 아멘으로 이름이 불린 일이 없다...아멘은 예수님의 도덕적 성격의 진실성을 나타내며 사역적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 반박: 이것 역시 실행에 대한 이견에 불과하다. 어떻게 하든 우리의 기본신앙과 큰 관련이 없는 일이다. 또한 계시록 3:14 는 <아멘>을 'the Amen' 이라고 함으로 정관사를 붙여 대문자로 표시하고 있다. 또한 이 <아멘>이 <말씀하신다>(saith)고 했다. 이것은 <아멘>이 인격화된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이 <아멘>이시기도 하다는 말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다. 마1:23에서 주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약 어디에도 예수를 임마누엘이라고 실제로 부른 사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저자의 문맥상의 취지는 무엇이 이름이냐 아니냐 에 있지 않다. 주님을 실제로 접촉하는 실행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중심에서 벗어나 이처럼 말꼬리나 잡는 비판은 쌍방 모두에게나 독자들에게 별 도움이 안 된다.
5) 위트니스 리의 주장: <⑧ "매일 깊은 속에서부터 다만 오, 주여, 아멘, 할렐루야하고 외치라">(22.(정상적인 교회 생활) P. 33, 17-18)
<원세호 님의 비판: ⑧ 매일 깊은 속에서부터 다만 네 마디 곧 오, 주여, 아멘, 할렐루야 하고 외치라고 강권한다. 그러나 그 것은 그리스도를 만지는 방법은 아니다. 이런 실행은 보아줄 수 있지만 다른 교리 곧 성경들이 틀리는 한 거짓 행위이다.>
** 반박: 역시 실행의 문제일 뿐이다. 위 말은 주님을 접촉하기 위해 날마다 오직 네 마디만 외치고 다른 것은 절대 하지 말하는 말이 아니다. 믿는 이가 깊은 속에서 참되게 <오, 주여, 아멘, 할렐루야>라고 하는 것이 거짓행위는 아니다. 원세호 님은 진리에 있어서 바로 잡고 도움을 줄 것을 주로 다루고, 지엽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을 배우면 좋을 것 같다.
5. 원세호 님의 (지방)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방법과 그 목적>비판 재반박
이 항목 역시 (지방)교회 실행에 대한 비판이다. 동일한 믿음을 가져도 실행은 다양할 수 있다. 원세호 님은 여러 말을 했지만 1) 예수님을 먹는다 는 말과 2)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을 부인하고 있다. 이것이 원세호 님 자신에게는 생소한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함부로 '어처구니가 없다'느니 '말이 안 된다'느니 하며 속단하지 말기 바란다. 성경에 근거 분명하고 그러한 실행을 통해 도움 받은 성도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인용하고 원세호 님의 비판을 들은 후 재 반박해 보겠다.
1) 위트니스 리 주장: <① "어떻게 그 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 분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로 그 분의 말씀을 읽음으로이다. 다만 이렇게 말하라 '오, 주 예수여 당신은 하나님의 생명의 체현이십니다. 오, 주 예수여 당신은 나의 생명이십니다. '오 주 예수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굶주리면서 먹기를 거절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오, 주 예수여! 라고 부르라 조금이라도 다만 시도해 보라 이와 같이 주님을 먹으면 먹을수록 당신은 더욱 그 분을 먹기 원할 것이다">(30.(신약의 개관) p. 27, 하 2-11줄). <② "주님은 만족시켜주는 음식이시다. 그 분은 생명이시오 생명의 떡이시다. 우리는 날마다 먹는 것으로 인해 산다. 사탄은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는 것에 관해서 그들을 속였다. 이것이 그렇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굶주려 있는 이유이다...">(32.(주의 회복) p. 27, 9-12줄). <④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은 구원받은 사람들로서 우리는 우리가 음식으로 취한 하나님을 표현한다. 우리의 음식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안에서 표현된다. 하나님이 표현되지만 그러나 그 분의 표현은 특징 있는 우리 존재 안에서 이루어진다">(10.(삼일 하나님) p. 12, 6-8줄).
(1) <원세호 님 주장: "오, 주 예수!"를 부르고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며... 더욱이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피조물 인간이 창조주 주님을 먹다니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 반박: 우선 원세호 님은 이 대목을 자신의 참고목록 번호 30번인 <신약의 개관> 책자에서 발췌했다고 했다. 그러나 해당 책자엔 이런 내용이 없다. 오히려 똑같은 내용이 <주의 회복> 책자 27쪽에 실려있다. 원세호 님이 잠시 혼동을 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 단락 전체 내용은 극히 몇 줄을 제외하고는 위트니스 리 <주의 회복>이란 책자 두 쪽(27-28쪽)에서 발췌한 내용을 그 비판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 둔다.
원세호 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시기만 하다고 믿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주님은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신랑>이시다(고후11:2). 창조주가 믿는 이의 신랑이 되실 수 있는가?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분은 또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시기도 하다. 즉 그는 <사람의 아들>이신 면도 있다(마12:8). 만일 이러한 사실을 부인한다면 원세호 님의 기독론은 문제가 있다.
만일 주 예수님이 '창조주'시라는 관점만으로 성경을 본다면 이상하고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너무 많다. 성경은 주님이 주무신다(He was asleep)고 한다(마8:24). 원세호 님은 이런 성경본문에 대해서 '창조주가 무슨 주무시는 일이 있는가 어처구니없다'라고 하겠는가? 또 성경은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Jesus wept)고 말한다(요11:35). 이것을 창조주 하나님이 무슨 사람처럼 눈물을 흘린다고 하느냐고 비난할 것인가? 하나 만 더 보자. 요4:6은 예수님이 수가 성 우물가에 도달하셨을 때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라고 말한다. 원세호 님은 창조주 하나님이 무슨 피곤을 느끼신다고 이런 말을 하느냐고 지금처럼 따질 것인가?
주 예수님은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시며 더 나아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분임을 성경이 말한다. 즉 요한복음 6장에서 주님은 계속 <자기 자신>을 가리켜 각종 떡이라고 하신다. 아마도 원세호 님처럼 고정 관념에 사로 잡혀 이 말을 받지 못할 사람이 있을 것을 염두에 두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주님은 거의 유사한 내용을 자그마치 26개 구절(32-58절)에 걸쳐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즉 그분은 <나는 (I am...)> <참떡>(the true brad)(32절), <하나님의 떡>(the bread of God)(33절), <생명의 떡>(the bread of life)(35, 48절), <하늘로서 내려온 떡>(the bread which came down from heaven)(41, 50절),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the living bread which..)(51절)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끝 부분에 가서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so he that eateth me, even he shall live by me).라고 말하고 있다(요5:57). 이처럼 예수님 자신이 <나를 먹는...>이라고 하신 것을 원세호 님은 성경에 그런 말이 없다느니,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주를 먹느냐느니 하며 부인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적인 겸손과 의리에서 나온 말일지는 모르되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뒤집어 부인했던 베드로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마16:22-23). 원세호 님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에 대해 '어처구니 없다'는 식의 무례한 말을 삼가야 할 것이다.
(2) <원세호 님 주장: ② '주님은 만족시켜 주는 음식이다. 우리는 날마다 먹어야 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을 속여서 영적으로 굶주려 있다' 라고 주장한다...성경에는 예수님이 마26:26에는 몸을 상징하는 만찬 떡을 몸이라 하셨고(막14:22) 성경의 제자들이 먹는 떡과 생명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하며 만찬의 떡은 그 믿음을 기념하고 전하는 순종인 것이다. 믿고 구원받아 영생하는 것을 다른 각도로 표현한 것이며 지방파와 같이 먹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당신은 너무 달콤합니다'라는 이상한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 반박: 요 6장이 말하고 있는, 각종 떡이신 주님을 먹으라는 반복된 권면이 다만 <믿고 구원받아 영생하는 것을 것>을 말한다고 보는가?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 구원, 영생은 과연 무엇인가? 단지 '예 주님 당신은 떡이십니다. 제가 그것을 믿고 인정합니다' 라는 태도가 믿음인가? 그러나 요1:12는 믿음은 다만 인정만이 아니라 <그 이름>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생은 또 무엇인가? 성경은 지옥에 들어간 자들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면서 불로 고통 당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영생은 다만 영원히 사는 것만도 아니다. 영생은 구원받을 때 얻은 한 인격 즉 주 예수님 자신이시다. 물론 이런 분을 생명으로 영접한 사람은 영원히 산다.
요10:10 하반 절은 주님이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러므로 주님이 생명이신 주님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는 그 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우리 밖의 존재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먹는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만찬은 그분의 죽으심을 표명하는 상징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실행을 통해서 그분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생명의 떡으로 오셔서 우리의 영적 양식이 되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새롭게 기억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교계 내에는 외견상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듯한 수 많은 설교가 있다. 그러나 생명의 체험이 있는 수 많은 깨인 성도들은 많은 경우 이런 설교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겐 생활 중에 어쩔 수없이 접하게 되는 죄와 세상의 유혹과 자아의 이기주의와 염려와 근심 등을 실제로 이길 수 있는 참된 능력이 필요하다. 정치나 경제나 윤리 도덕에 대한 설교 심지어 딱딱한 신학 교리를 강론하는 설교는 큰 도움이 못된다. 알기는 다 아는데 행할 힘이 없다. 결심하고 시도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기를 반복할 뿐이다. 왜냐하면 <나를 먹는 그 사람이라야> <나로 인하여 살 수 있는데>(요5:57), 앞의 전제조건이 없거나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의 (영적)음식이시기도 하다> <승리하는 삶-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삶-은 그리스도를 먹음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다>라는 것에 대한 영적 눈이 열릴 필요가 있다(참으로 이 주제에 대해 도움을 원하는 분은 원세호 님이 비판 대상으로 삼은 <주의 회복>(한국복음서원, 1990)을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총 78쪽 분량의 얇은 한 권의 책자가 자신의 믿음 생활의 큰 전환점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3) <원세호 님 주장: ④ 하나님은 음식이 아니다. 믿는 자들이 음식을 먹되 하나님을 먹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주님은 성부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양식이라고 하셨다(요4:34). 영생하는 양식(요6:27),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 하셨다(요6:55). 그러므로 예수님의 양식은 주의 말씀 성경이 영적 진리의 양식이다(요14:6). 진리이시다. 지방파와 같이 잘못 먹어선 안 된다>.